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31)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31화(31/146)
기드온은 바네사가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다행히도 말은 착하고 순해서 바네사가 올라타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
바네사는 온몸에 힘을 준 채로 고삐를 꽉 쥐었다.
“감사합니다….”
바네사가 웅얼거렸다.
“길이 험하니 조심하세요. 너무 빨리 가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드온은 그 말만 남기고는 뒤쪽에 준비된 말에 올랐다. 그 즉시 선두에 있던 말이 땅을 박찼다.
바네사는 최대한 속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아이보로스 산줄기는 고도가 엄청 높지는 않아서 급한 경사로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산길은 고르지 않았고 가끔 돌이나 나무줄기가 뜬금없이 튀어나와 있었다. 바네사가 조심스럽게 속도를 줄이면 말은 가끔 투레질을 했다.
말이 너무 느려져서 일행과 멀어질까 봐 겁이 날 때면 어느새 기드온이 옆에서 달려 주었다. 그러면 바네사의 말도 그의 말과 자연스럽게 속도를 맞추어 달렸다.
바네사가 완전히 경직되어 온몸에 힘을 주고 고삐를 잡고 있자 그는 팔을 뻗어 바네사의 굳어 버린 손목과 어깨를 풀어 주고 자세를 다시 잡아 주었다.
이 모든 것이 달리고 있는 말 위에서 이루어졌으니 그의 숙련도를 알 만했다.
생각해 보니 당연하지. 그는 공작가의 유일한 주인 아닌가.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말만 해도 굉장한 명마들로 수십 마리였을 텐데.
바네사는 배신감에 속으로 이를 갈았다.
특전대에서 근무한다더니 대장이잖아! 그냥 대장도 엄청나게 대단한데 공작 위까지 가지고 있잖아! 완전 사기 아니야?
제니언의 집에서 만난 것도 마물 관련 일하러 왔다가 그런 거겠지. 망할.
기드온은 뚱한 바네사의 얼굴을 보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의 입매가 슬쩍 늘어났다.
하지만 바네사는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 기드온은 속도를 맞춰 주고는 다시 뒤로 빠졌다.
⚜ ⚜ ⚜
선두를 달리던 안나 대위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아이보로스 산줄기를 반나절도 되지 않아 통과한 이후였다.
앞쪽으로는 제법 큰 마을이 하나 보였다.
“잠시 쉬고 가면 되겠는데요?”
“으, 배고파.”
기드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느려졌던 선두는 신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는 마물도 없었고 깨끗해서 모두의 마음이 평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어른거리던 마을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모두 잠시 쉴 생각에 신이 나 말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그들이 마을 입구를 통과하려 하자 누군가가 급히 앞에 뛰어들었다.
“아, 아이고. 안녕하십니까요…. 특전대분들이십니까?”
밀짚모자를 가슴에 꼭 안고 있는, 머리가 새하얗게 세어 버린 남자였다.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허리도 곧고 키도 제법 컸다.
별말이 없는 기드온 대신 안달루스 소령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앞섶에 묻은 지푸라기를 급히 털어 냈다.
“안 그래도 서부에 특전대가 파견된다는 소문이 번져 혹시 몰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그렁그렁한 눈을 떨리는 손으로 닦아 냈다. 그리고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제발 제 딸 가족을 살려 주십시오!”
엉엉. 제발 부탁드립니, 끄허엉, 다….
마을 입구, 흙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하는 남자를 보고는 모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난 그냥 따뜻한 스튜 한 그릇 먹고 싶었을 뿐인데.’
그레인 중위가 속닥거렸다. 안달루스 소령이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큰 소리가 나자 몰려든 마을 사람들은 특전대의 제복을 보고는 앞다투어 자신의 집에 초대하려 했다. 특전대의 발소리만 나도 마물이 뒷걸음질 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탓이었다.
하지만 특전대는 그들을 처음 붙잡은 남자의 집에 가기로 했다.
남자는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최대한 테이블 위를 꾸려 특전대를 맞이했다. 물론 특전대는 그를 갈취할 생각 따위는 없었으므로 따뜻한 물 한 잔만 마셨을 뿐이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그레인이 옆에서 끙끙 앓았지만 모두 무시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마침내 기드온이 입을 떼자 손을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던 남자가 무릎 위에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굴 위로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결혼한 딸이 있습니다. 아주 착한 애입니다. 제가 혼자 남을 것을 걱정해서 남편을 오히려 여기로 데려와서 살겠다는 것을 제가 말렸지요. 이제 막 결혼한 아이를 어찌 늙은 아비나 모시고 살라 하겠습니까.”
남자는 더듬대는 손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매주 편지를 보내던 아이입니다. 매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늙은 몸이 아프지는 않은지 살뜰히도 챙기는 착한 아이입니다.”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연락이 왔습니다요.”
특전대 모두의 눈빛이 달리 변했다. 누군가는 흥분을 담았고 누군가는 오히려 냉정해졌다. 기드온이 긴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죽어서 발견되었다는 그런 얘기였지요. 모두 놀랐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그다음 주 편지에는 두 명이 더 죽었다, 그 다다음 주 편지에는 이번에는 어느 아이가 실종되었다….”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제가 당장 우리 마을로 오너라, 그리 말했습죠. 입에 풀칠을 하더라도 이제 가을이고 하니 밀을 베어 내면 빵이라도 만들어 먹지 않겠냐, 그리 말했습니다.”
남자는 목소리를 내려다가 입만 벙긋거렸다. 늙은 남자가 눈물만 쏟아 내니 모두 침묵을 지켰다.
“큼, 그런데요?”
계속되는 침묵에 안나가 조심스럽게 채근하자 남자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인은 마물이었다는 말과 함께 병사들이 파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다행이다, 그리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최악의 소식이 되었습니다.”
늙은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물을 찾아내지 못하자 그들은 마을을 그냥 봉쇄해 버렸습니다!”
바네사는 놀란 숨을 삼켰다. 정확히는 몰랐지만 저게 최악의 조치라는 것쯤은 알았다.
힘없는 마을 사람들을 마물과 가두다니.
“장난치나. 마을을 마물의 사냥터로 만들었다는 거야, 지금!”
그레인이 버럭 소리치자 남자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다, 다른 마을로 가면 안 된다며, 사람을 홀리는 마물일지도 모르니 아무, 아무도 나가면 안 된다고… 전 제 아이 소식도 모르고, 저는… 저는.”
“상황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드온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허겁지겁 기드온의 손을 잡아챘다.
“살려 주실 거지요, 그러실 거지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집 가지셔도 좋고 올해 수확할 것을 다 드려도 좋으니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기드온은 몸을 숙여 그를 일으켰다.
“특전대가 해야 할 일을 하는데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방향이 어딥니까.”
⚜ ⚜ ⚜
늙은 남자는 딸이 산다는 마을의 위치를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그냥 밀밭마을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밀밭에 둘러싸여 있어서요. 저 멀리 보이는 숲을 등지고 있는 마을인데 규모가 꽤 커서 멀리서도 보이실 것입니다… 병사들이 나무로 마을 입구를 온통 막아 뒀습니다….’
“학생들은 이 마을에 두고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레인이 대뜸 던진 말에 에반이 콧김을 뿜었다. 하지만 사안이 위급함을 알아 입을 꾹 다물었다.
“벌써 희생자가 두 자리 수를 넘긴 것 같은데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학생들을 지키면서 싸울 수 있을지 장담 못 합니다. 수색할 때는 모두 흩어질 거고.”
“이런 것 보라고 실습을 온 거지요. 특전대를 선망해서 들어왔다가 도망친 사람들이 한 해에 몇 명이더라.”
안달루스가 웃으면서 던진 말에 괜히 학생들이 움찔댔다. 기드온은 한숨을 쉬었다.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특전대원 하나와 이곳에 남는 것이 나을 것 같-”
“데려가 주세요! 저희 정말 조용히 있겠습니다. 따라다니면서 이상한 것만 찾고 입도 벙끗하지 않을게요!”
에반이 먼저 말하자 달로이즈도 가세했다.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특전대원을 하나 두고 가시면 어떡합니까! 저희 정말 착하게 있을게요.”
“위험하지 않도록 뒤에 물러나 있겠습니다. 저희도 무언가 돕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바네사까지 말을 꺼내자 기드온이 눈을 찌푸렸다.
황금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학생들 머리 위를 맴돌았다. 모슈위는 말을 하지 않은 대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손을 모았다.
“아, 그냥 다 갑시다! 또 학생들하고 저 두고 가려고 그러시죠. 말도 안 됩니다! 아, 저도 칼질 좀 하고 싶다고요!”
안나가 버럭 소리치자 기드온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서부가 워낙 난장판이라 그가 직접 특전대원들과 함께 내려왔으나 기드온은 혼자 일하는 걸 선호했다.
그 이유란 썩 대단한 건 아니었다. 특전대원들은 모두 제멋대로라 관리하는 것이 더 귀찮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학생들까지 합쳐져 그의 정신적 피로도는 더욱 높아졌다.
학생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때 그의 시선이 동그랗게 뜨인 파란 눈과 마주쳤다. 투명한 파란 눈에는 함께 가고 싶다는 열망과 간절함이 고여 있었다.
치열한 고민 끝에 그의 입이 열렸다.
“…대신 명령하는 것을 하나라도 어기면 그대로 아카데미에 돌려 보내겠-”
“알겠습니다!”
모슈위가 우렁차게 소리치고 준비하러 뛰어나갔다. 특전대의 대장은 우울하게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 ⚜
결국 모두 쉬지도 못하고 즉시 말을 타고 떠났다. 밀밭마을은 그리 멀지 않았고 말을 타면 겨우 몇십 분 내로 도착이 가능한 거리였다.
남자가 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밀을 거둬들일 계절에 걸맞은 황금색 물결이었다. 그리고 멀리서도 보이는 나무 벽 앞에는 병사가 한가하게 앉아 있었다.
안나가 기가 막힌 소리를 내다가 혀를 씹었다.
거의 눈앞까지 다가온 마을 입구에도 기드온 솔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병사가 놀라 입을 벌렸다.
“이보시오, 멈추-”
기드온은 그대로 검을 뽑아 내리쳤다. 마력을 품은 검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서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쾅!
거친 소리와 함께 나무 벽이 박살 났다. 먼지가 흩날리고 그 앞에 기드온이 말을 멈췄다. 거친 정지에 말이 앞발을 들었다 내려놓으며 잠시 땅이 울렸다.
“당신 뭔데 이 벽을-”
“특전대 대장 기드온 솔 발데르다.”
“예…?”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냉정한 시선에 병사는 그의 외양을 살폈다.
단단한 몸을 감싼, 온통 새까만 제복 위로 가슴팍에 그려진 황금색 문양. 교차된 검. 그리고 특전대 대장을 상징하는 견장 위의 네 개의 검날.
병사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고는 급히 경례했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저, 저는 서부 사단-”
“됐다. 대대가 파견된 건가?”
“대대의 일부가 파견되었습, 습니다.”
“너희 지휘관은 어디 있나.”
병사는 입만 뻐끔댔다. 기드온은 다시금 검을 들어 이미 부서진 나무 벽에 대고 휘둘렀다.
쾅! 후두둑.
뚝뚝 부러져 있던 나무 벽은 이제 아예 뚫려 안쪽이 들여다보였다.
“지휘관, 어디 있나.”
“저, 저쪽 일바라 성 안쪽에….”
계십니다. 병사가 우물쭈물 내뱉은 소리에 기드온의 목에 핏대가 섰다. 일바라 성은 이곳에서 한참 지나야 있는 곳이었다.
“병사.”
나직한 목소리였다.
“예, 예!”
“당장 너희 지휘관을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전대가 왔고 대장이 직접 내려왔다고 전해라. 깨끗하게 씻고 오라고 해.”
머리가 날아갈 것 같으니까. 마지막은 깨끗하게 가야지.
싸늘하게 떨어진 말에 병사는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넙죽 고개를 숙인 뒤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기드온이 내려서 말을 입구에 묶었다.
“가자.”
모두 침묵 속에서 어둑한 마을 입구로 몸을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