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33)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33화(33/146)
기드온이 침착하게 물었다.
“원래 사람이 없습니까?”
“다, 죽었어. 다….”
남자는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뒤에 서 있던 바네사는 씁쓸한 숨을 삼켰다. 남자의 절망감이 그대로 밀려왔다.
“나도 죽고 싶어…. 그런데 살고 싶어…. 무서워, 너무 무서워….”
“당신 가족을 죽인 놈들의 끝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달루스의 말에 남자는 멍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우리가 그놈을, 혹은 그놈들을 죽이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흐릿한 눈으로 특전대원들을 바라보던 남자는 꼴깍, 침을 삼켰다.
고통만을 부르짖던 입과 절망만을 호소하던 눈에 약간의 빛이 돌아왔다. 이 절망 속에서도 원하는 것이 남았기에.
“그놈 배에… 내 자식이 들어 있을 텐데….”
더러운 베갯잇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찾으면… 묻어라도, 줄 수….”
“그놈들 서식지가 있다면 거기도 엎죠. 찾아내겠습니다.”
안나가 말했다. 특전대원들의 시선은 아주 단단하고 힘이 있었다. 그건 분명히 실력에서 비롯된 자신감이었다.
남자는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외양은 잘, 모르겠, 는데… 아주 깜깜한 밤이었으니까. 그냥 아주 거대했… 눈은 새빨갛게 빛나고 등에선 불이 치솟아 올랐는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 고…”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고요?”
“그것이 느리게 다가오는데 그냥, 움직이기 싫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있는 뿔에 찔린 것 같은데 내가 쓰러지니까 내 배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
남자는 갑자기 침대 아래로 고개를 빼더니 토악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멀건 위액이 나올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히솝은 그의 머리에 손을 댔다. 남자는 토악질을 멈추고, 천천히 밀려오는 졸음을 느꼈다.
“깨끗한 물을 좀 두고 갈게요. 여기 안에 계시고 나오지 마세요.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남자의 눈이 완전히 감기자 특전대원들은 술렁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속박 혹은 최면?”
“어떻게 발현되는 힘인지를 모르겠군. 발현 속도는 어떤지도 모르겠고.”
“무조건 두 명 이상 짝을 지어 움직여라. 속박이나 최면을 다수에게 거는 능력 따위는 없다.”
기드온이 방 안의 대원들과 학생들을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안나 대위와 히솝 소위, 안달루스 소령과 그레인 중위. 마물을 찾되 학생들 보호가 최우선이다.”
“대장님은요?”
“내가 알아서 한다.”
“속박되시면 그 말 후회하실 텐데? 아이고, 내가 우리 부하들 말을 잘 들었어야 하는데-”
기드온이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자 그레인이 찰싹 달라붙어서 종알거렸다.
“아이, 대장님. 같이 갑시다아.”
“떨어져.”
“대장님은 속박이 안 걸리세요?”
달로이즈가 맹하게 묻자 안나가 크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본인은 강하시다 이거지. 하지만 위험할 수 있잖아요. 같이 갑시다, 대장!”
기드온은 깨끗하게 무시했다. 그는 두 무리를 모두 관리해야 했으니 한쪽에 붙을 수는 없었다.
“샅샅이 뒤져라. 위험하면 바로 물러나. 신호탄은 모두 있겠지.”
“예이.”
모두 수색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달로이즈가 튼튼한 도끼를 꺼내자 시선이 집중되었다.
“도끼….”
그레인이 중얼거렸다. 쟤는 특전대 꼭 와야겠는데.
“한 마리도 놓치지 말고 죽여라.”
기드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 쏜살같이 집을 빠져나갔다.
⚜ ⚜ ⚜
안나와 히솝, 바네사와 달로이즈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숲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대위님, 뭐 알고 뛰시는 건가요?”
히솝이 열심히 따라서 뛰다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야아, 직감 모르냐! 경력이 몇 년인데! 어둡고 침침한 곳.”
“직감은 무슨.”
히솝은 입을 비죽이고는 짝, 손뼉을 쳤다. 손끝에 희미한 빛무리가 어리고 회색 눈이 반짝였다.
“뭘 하려고?”
“피 냄새요. 비린 피 냄새.”
히솝의 손가락이 땅에 닿자 황금색 선이 길 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짙은 곳으로 먼저 가죠.”
“나 참, 나는 히솝 소위랑 일하는 게 참 좋다니까. 좋아! 가자, 학생들!”
케인처럼 날씬한 세검이 앞으로 쭉 뻗었다. 네 사람은 우당탕탕 뛰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켜켜이 쌓인 집들이 멀어졌다.
“바네사, 결계 칠 줄 알아요?”
“네. 그런데 언령마법이라 그냥 일회성이고 반응도 좀 많이 느려요.”
“위험해지는 순간엔 나랑 안나 대위님은 무시해요. 무조건 바네사랑 달로이즈의 안위만 생각하세요.”
바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로이즈가 히죽 웃고는 바네사의 옆에 붙어서 뛰었다.
“잘 부탁해애. 대신 누가 가까이 다가오면 도끼로 머리를 날려 줄게.”
“나도 잘 부탁해.”
바네사랑 달로이즈는 씩 웃으며 주먹을 맞부딪혔다.
“귀엽기도 하지. 아, 저기 숲길이 보이는군.”
안나가 더욱 빨리 뛰어 선두로 섰다. 향하는 곳은 마을 근처의 아주 작은 숲이었다.
네 사람은 숲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멈췄다. 나무가 우거진 안쪽은 몹시 어둡고 습했다.
안나는 몸을 낮추고 흙에 남겨진 자국들을 살폈다.
“빛을 띄울까요?”
“그래야겠다.”
바네사가 속삭이며 가볍게 손짓하자 등불이 켜지듯 동그란 빛들이 온기를 품고 나타났다.
빛은 네 사람을 부드럽게 감쌌다. 달로이즈가 간지러운 듯 웃었다.
“제 첫 마법이 이거랑 비슷했어요. 그래서 이건 진짜로 잘해요.”
바네사가 씩 웃자 모두 킬킬댔다.
시야가 넓어지고 몸이 따뜻해지니 어느 정도 두렵던 마음도 잦아들었다. 안나가 가장 먼저 어둠 속에 몸을 들이밀었다.
축축한 냄새. 손으로 검은 흙 위를 더듬자 많은 것들의 발자국이 보였다.
“작은 것, 큰 것. 다양하군.”
“다들 저쪽으로 향하네요. 저 큰 나무 근처….”
달로이즈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도끼를 단단히 쥐었다.
“이제 집중하자고. 아니, 집중할 필요도 없겠군.”
소리가 나거든. 안나는 몸을 완전히 낮추었다.
꾸어억. 꾸억—
그리고 풀을 스치는 소리. 지나친 고요 속에 서 있자 서로의 숨소리마저 귀를 울리는 천둥처럼 느껴졌다.
순식간에 안나가 앞으로 돌진하며 검을 찔렀다.
푹.
꾸어어억. 꾸억.
검에 꿰뚫린 채 우는 것은 긴 다리를 가진, 작은 것이었다. 안나는 침착하게 목을 완전히 뚫어 소리가 나는 것을 막았다.
걱정과 달리 간단한 끝이었다.
“작은 것을 낳았나 보군. 이건 소야, 마물이야?”
“혼재된 느낌이군요. 생식 능력이 있는 키메라의 새끼인 것 같아요. 큰 것이 돌아오면….”
“날뛰겠지.”
바네사와 달로이즈가 나무 근처로 다가갔다. 나무는 아주 거대해서 뿌리 한 줄기가 누군가의 다리 두께와도 같았는데 그 근처에 짐승 발자국이 많이 남아 있었다.
히솝이 다가와 뿌리를 뒤덮은 이끼를 들어 올렸다. 바네사는 눈썹을 찌푸렸다.
“온통 뼛조각이네요.”
안나는 그 말을 듣고 새끼 마물의 배를 갈랐다. 조각난 뼈들이 위장 속에 들어 있었다. 반쯤 소화된 살점도.
“초식동물에게 육식마물 이식이 가능한 건가요?”
바네사가 조심스레 묻자 히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들이 오래 살진 못하겠지만 가능은 합니다. 이걸 보세요.”
새끼 마물 몸통에서 이상하게도 재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나이가’?”
나이가는 재에서 태어나 몸에서 불을 뿜는 마물이었다. 처리는 쉬웠다. 물에 약했으므로.
“맞아요. 하지만 소의 머리를 가졌으니 물이 약점일지는 모르겠어요.”
“일단 여기를 떠야겠어. 만약 큰 것이 온다면 위험할 수도 있어. 새끼 마물의 시체로 꼬여 내 보지.”
달로이즈가 새끼 마물을 번쩍 들어 올렸다. 네 사람은 빠르게 숲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 바네사는 무언가를 ‘느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안나 대위가 말할 틈도 없이 검을 뽑는 순간 바네사는 왼쪽에 결계를 펼쳤다. 최대한 빠르게 실현되는 대신 아주 약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그대로 박살 났다. 바네사는 속이 뒤틀리는 통증을 간신히 참아 냈다.
“젠장, 뭐야!”
안나는 바네사와 거의 동시에 반응했다. 그녀는 검은 그림자 위로 뛰어올라 칼을 내리꽂았다. 그것은 목을 꿰뚫렸으나 오히려 안나를 내동댕이쳤다.
안나는 바닥으로 떨어지면서도 다시 한번 검을 찔러 넣었다.
세검은 마물의 몸통을 완전히 관통했지만 잠깐의 경직만 주었을 뿐이었다. 피가 튀었다.
마물이 달려오는 경로에 있던 달로이즈가 도끼를 휘둘렀으나 머리를 치지 못하고 뿔의 일부만 날아갔다. 마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달로이즈는 큰 동작을 회수할 틈도 없었다.
바네사와 소의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고개 숙여요!”
히솝이 그대로 살상 마법을 날렸다. 뻗어 나간 직선의 검은 줄기가 소의 눈알을 꿰뚫으며 천둥과 같은 소리를 냈다.
꾸-어억-! 음-메에.
고함과도 같은 거대한 울음소리가 그들의 귀를 울렸다. 공들여 구성한 마법은 마물의 눈을 꿰뚫었으나 그곳은 마물의 약점이 아니었다.
마물은 눈에서 검은 물을 흘리며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 놓칠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히솝과 바네사가 동시에 마물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마물이 뒷다리를 털어 냈지만 땅에서 자라난 줄기가 발굽을 묶었고 한쪽 다리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바네사가 실현한 마법은 겨우 몇 초 지속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마물이 거칠게 울음소리를 내는 순간, 벌어진 입을 안나의 세검이 관통했다. 푹. 그리고 부웅 소리를 내며 날아든 달로이즈의 도끼가 마물의 몸에 깊게 박혔다.
마물의 몸에서 작은 불꽃이 치솟았다가 그대로 꺼져 버렸다. 땅이 검은 피로 젖어 들었다.
“젠장.”
콧김을 내뿜은 안나가 검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무슨 사람 세 명 합쳐야 할 크기잖아! 아예 두 동강 내는 것 아니고서야 한 번에 죽일 수는 없겠어.”
“잘 먹고, 잘 컸네요. 후… 바네사, 달로이즈. 아주 잘했어요.”
마물의 몸에서 낑낑대며 도끼를 빼낸 달로이즈가 비틀대며 달려왔다.
“이야, 바네사 고마워!”
달로이즈가 히히 웃자 바네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결계가 강제로 깨진 탓인지 속이 계속 울렁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결계 깨졌죠.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뭐가 오는지는 어떻게 알았어요?”
의아한 히솝의 말에 바네사는 스스로도 몰라 고개를 저었다.
“그냥 느낌이 불안했어요.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거든요.”
“대위님만큼 바네사도 예민하네요.”
히솝의 칭찬에 바네사가 코를 찡긋거렸다.
“근데요. 이상하게 마물에게 속박 능력이나 그런 것은 없네요? 그냥 죽었잖아요.”
달로이즈의 말에 두 특전대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일단 안달루스 소령님과 그레인 중위에게 합류해야겠어. 그러고 보니 물리적 타격이 유효한 것 말고는 딱히 알아낸 게 없네.”
“예. 숲 초입 조금만 더 뒤지고요.”
네 사람은 함께 숲을 꼼꼼하게 뒤졌으나 더 이상의 마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작은 마물의 시체만 들고 마을로 돌아가자 안달루스 소령과 그레인 중위가 또 다른 마물의 시체를 곁에 두고 있었다.
에반과 모슈위는 아예 피를 흠뻑 뒤집어쓴 상태였다.
“야아, 에반! 모슈위!”
“바네사! 달로이즈!”
네 사람은 며칠 만에 본 것처럼 서로가 반가웠다. 어깨를 얼싸안고 반가움을 표현하던 와중, 에반이 바네사가 피곤한 듯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것을 눈치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 결계가 부서져서….”
바네사가 말하는 도중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이 광범위하게 번쩍였다. 모두가 고개를 든 순간 언덕 위쪽으로 한 줄기의 벼락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