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35)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35화(35/146)
⚜ ⚜ ⚜
<늦가을의 어느 날, 에디르네력 1310년>
선생님께.
편지를 기다렸던 마음과 달리 답이 조금 늦게 되었어요.
선생님의 답장이 짧아서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명시해 둘게요.
사실 그건 뭐, 쪽지라고 부를 길이 같았지만요, 아주아주 착한 바네사 로즈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답니다.
들어 있는 마음이 중요한 거잖아요. 그렇죠?
꾹꾹 눌러쓴 글씨와 ‘다치지 말고 안전하게 돌아가라’는 문장의 조합이라니. 도저히 그 말을 어길 수가 없네요!
걱정 마세요, 전 아주 건강히 아카데미로 돌아갈 테니까요.
하여튼, 요 며칠간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선생님은 제가 특전대로 실습 가는 것을 아주 걱정하셨잖아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어느 마을에 엄청난 수의 마물이 나타나 특전대가 그곳으로 향했거든요.
그 마을에서 마주한 건 몹시 끔찍했어요.
마물 자체도 무서웠지만 마물이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을 보는 것이 더욱 무서웠어요.
그것들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망치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칼을 들게 만들었어요. 사람들의 눈에는 절망만 남게 되었고요.
하지만 직접 보고 느낀 걸 후회하지 않아요. 직접 느끼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제가 아카데미에서 몇 년간 마물에 대해 배운 것보다 이번 일주일이 더 와닿았다면 믿으시겠어요?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저 같은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 기절할 만큼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왜냐하면 제가 진짜로 기절했거든요….
‘아주 조금 위험한’ 상황에 제가 아주 거대한 마법을 실현했대요.
전 사실 제가 어떻게 마법을 썼는지 잘 몰라요.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다음 날이더라고요.
모슈위는 엉엉 울고 있고 달로이즈는 옆에서 겅중겅중 뛰고, 에반은 씩씩대고. 정신이 없었죠.
대장님께서는 ‘완전히 몸이 나아질 때까지 침대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럴 수가 있나요? 마물이 사라진 밀밭마을은 아주 아름다울 텐데요!
나가 보니 특전대원들이 마을을 가두고 있던 나무 벽을 완전히 부숴 버렸지 뭐예요. 마을 사람들은 망가진 지붕을 고치고 있었고요.
마물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깃든 것들이 너무나 보기 좋았어요.
맨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올 때 보이는 것은 오직 절망과 어둠뿐이었는데 다시 희망이 돌아온 거예요. 그것이 앞으로 살아갈 힘이 되겠지요.
제가 한 일은 많지 않지만 너무너무너무 뿌듯해요.
하여튼 절 담당했던 소위님은 제가 기절한 뒤로 크게 혼이 나셨어요.
만약 제가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면 크게 다쳤을 거고 특전대로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요.
하지만 여태 만난 마물과 다르게 그 마물만 갑자기 특이 능력을 쓸지 소위님이 어떻게 알았겠어요?
제 옹호에도 불구하고 중위님, 대위님, 소령님, 대장님께 순서대로 혼이 난 소위님은 결국 절 담당하지 못하게 되셨어요.
그래서 전 대장님께서 직접 담당하시게 되었답니다.
영광스러워해야 옳은 것이겠죠? 하지만 너무 걱정된다고요!
생각해 보니 선생님은 제가 기드, 아니 기드온에 대한 이야기를 편지에 썼을 때 이미 알고 계셨나요? 흔한 이름은 아니잖아요.
기드가 특전대의 대장이라니까요!
그럼 이미 아는 사이가 아니냐고 하시겠지만 특전대 대장인 기드온과 님루드에서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던 기드는 다른 사람 같아요. 거리감이 느껴져요.
서운하냐고 하면 또 그건 잘 모르겠어요….
기드는 사실 제게 굉장히 잘해 주고 있어요. 제가 기절했다가 눈을 뜬 뒤로 매일같이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열이 나지는 않는지 꼼꼼히 확인하거든요.
물론 이건 자신이 담당하게 된 학생이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아마 저 혼자만 느끼는 서운함일 거예요.
그냥, 저는 우리가 제법 친한 줄 알았거든요.
하여튼 이 마을에 너무 과한 수의, 인공적인 마물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은 특전대는 다른 목적지를 찾았어요.
깨어난 뒤로는 몸이 더 가뿐해요. 전 다시 씩씩하게 뛰어다니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배운 것이 많은,
바네사 로즈 올림.
p.s 사실 희망만이 남지는 않았어요.
마물의 배 속과 서식지를 조사하니 수많은 뼛조각들과 반쯤 썩어 버린 살점들이 발견되었대요.
누군지 알기라도 하면 그 가족들의 마음을 달래 줄 수 있었을 텐데 이리저리 섞인 뼈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어요.
그 병사들이 단 한 번만이라도 마물을 해치우려는 시도를 했더라면. 혹은 특전대에게 바로 연락을 취했더라면.
그러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pp.s 도대체 제 마법의 조건은 뭘까요? 대장님이 절 앉혀 두고 아주 오랜 시간 확인해 보았지만 다시 제 손에서는 귀여운 마법들만이 펼쳐졌답니다.
⚜ ⚜ ⚜
마을 사람들은 특전대를 위해 커다란 집 하나를 내주었다.
덕분에 특전대원들은 아무 데나 누워 이리저리 뒹굴대고 있었다. 먼지 낀 소파라도 그들은 누울 수만 있다면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레인의 말로는 푹 쉬어야 다음 전투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조금 핑계 같기는 했지만.
“그러니까, 확실히 이 마을에 나타난 마물들의 수가 이상하다는 말씀이시죠.”
“너무나 이상하지. 이런 작은 마을에 나타날 만한 개체들은 아니었다.”
“맞아, 이런 곳에 굳이 키메라를 보낸다고?”
안나가 목 뒤를 주무르며 말했다.
“먼저 보낸 특전대원들도 서부의 바다를 따라 과한 수의 마물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안달루스 소령이 조용히 덧붙였다.
“수색할 가치는 충분하다.”
“하지만 범위를 좁혀야 할 것 같은데요? 서부 경계를 다 뒤지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레인 중위가 소스에 졸인 콩을 씹으며 말했다. 그는 정말 열심히 퍼먹었다. 곧 떠날 곳이므로 배를 그득하게 채워 놔야 했다.
학생들은 그의 옆에 앉아서 특전대원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기드온이 잠시 지끈대는 머리를 짚었다. 그는 생각만으로도 피로해졌다.
“마물의 씨앗을 사용한 것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든다.”
“예에에에에?”
그레인 중위가 눈을 치뜨며 소리를 쳤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마물의 씨앗이 뭐더라?”
히솝 소위가 그를 잠시 노려보고 -학생들 앞에서 부끄럽게!- 설명해 주었다.
“마물이 태어나는 곳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물도 아무렇게나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히솝은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듣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생식 능력이 있어 새끼를 까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마물의 시체, 죽어 있는 것들, 생명이 되지 못한 찌꺼기, 흐르다 고인 마력들이 뭉쳐져 마물의 씨앗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태어나는 마물들도 있어요.”
“그렇지. 마물의 씨앗이 발견된 지역은 지나치게 마물의 수가 늘어나지. 하지만 씨앗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아주 드물기에 보통 마물의 수는 적당히 유지된다.”
“인위적으로 누가 마물의 씨앗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위적으로 씨앗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조작질까지 한 것 같군.”
기드온은 에반이 종이 위에 조악하게 그려 둔 마물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황소의 머리에 나이가의 몸, 벨롯의 눈알.
“마물의 씨앗을 조작질했다는 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달루스 소령이 걱정스레 물었다. 기드온은 느릿하게 말했다.
“모두 추측일 뿐이나… 마물의 씨앗은 절대로 흔하지 않다. 아직 그에 대한 연구도 부족하고.”
“예, 저도 사실 들은 바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발견되는 마물들의 몸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섞여 있다. 사람이 직접 일일이 만들어 냈다고 하기엔 너무 많아.”
히솝이 눈을 찡그렸다.
“혹시 마물의 씨앗이 처음부터… 키메라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까?”
히솝이 더듬더듬 말하자 기드온은 말없이 큰 손으로 뺨을 쓸어 냈다.
9명이나 모여 있는데도 침묵만 흘렀다. 그만큼 사안이 중대했다.
“그렇다면 일단 마물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중심지로 향해야겠군요. 그곳에 씨앗이 있을 테니까.”
“그럼 서부의 모레아네! 거기 요즘 마물 밭이라며.”
안나가 탁자 위에 올려진 지도를 탕탕 치며 소리쳤다. 그녀는 아주 신나 보였다.
“하, 오랜만에 좀 쫄리네! 마물의 씨앗이라니.”
“출발할 준비는 되었나?”
“아,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벌써-”
그레인 중위가 손을 들며 크게 말하는 순간 누군가가 두꺼운 나무 문을 쿵쿵 두드렸다.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문에 모였다.
안나 대위가 단검을 쥔 채로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벌컥 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짧은 머리의 각진 턱의 남자가 웃으며 경례했다.
그의 견장에는 나뭇잎이 2개 수놓아져 있었다. 옆에는 기드온이 마을 앞에서 쫓아냈던 병사가 질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하. 서부 방위 대대의 지휘관, 중령 로드니입니다. 특전대 대장님을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듣던 대로이십니다.”
중령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나이가 서른 중반은 넘어 보였고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기드온은 앉은 채로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특전대 대장, 기드온 솔 발데르다. 듣던 대로라?”
“아, 나쁜 뜻은 아니었습니다. ‘프리바 최고의 조각’이라는 평이 널리 퍼져서 말입니다. 하하!”
‘저 새끼, 곧 죽겠는데?’
기드온의 얼굴을 훔쳐보고 잽싸게 고개를 숙인 그레인 중위가 속삭였다. 히솝 소위가 난감하게 웃었다.
“특전대분들이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기드온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중령은 멋지게 기른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들의 노고에 감사한다는 말을 보탰다. 그리고 허락도 없이 기드온 앞의 의자에 앉았다.
학생들은 구석에 모여 앉아 찍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제라도 잘되어 다행입니다. 피해가 더 클 뻔했는데 말입니다. 하하! 마을 주민들이 편안해지겠습니다.”
“….”
“아, 폐하께선 건강하신지요? 이쪽에 내려온 지가 꽤 되어 퓌돔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지 뭡니까. 이제 퓌돔으로 올라가야겠습니다. 일도 없으니.”
입꼬리를 올린 채로 그 말을 듣고 있던 기드온이 느리게 일어났다.
어리둥절한 군인을 내려다본 그는 옆에 있던 의자를 걷어찼다. 의자의 박살 난 조각이 튀자 중령이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짓…!”
“장난치나. 주민들을 보호하라고 파견된 것들이 오히려 가장 안전한 성 안쪽으로 가 있어?”
서늘한 시선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중령은 더듬더듬 반박했다.
“마, 마물을 저희가 어떻게 상대합니까! 최대한의 노력을 했는데-”
“물리적 타격이 유효한 개체였는데 시도도 안 해 봤군. 그 쓸모없는 칼들은 왜 차고 있나? 예쁘라고?”
“불꽃을 뿜으며 달려오는데 그럼 병사들을 내보내란 말입니까? 포격은 맞힐 수도 없습니다!”
그 순간 기드온의 힘에 유리창이 부서질 듯 덜컥거렸다. 침묵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깔렸다.
“끌려가기 싫으면 개기지 마라.”
그제야 입을 닥친 군인을 보며 안나가 킬킬대는 소리를 냈다. 히솝이 급하게 안나의 입을 막았다.
“저, 저는 중령이고-”
“그래, 계급 참 높기도 하군. 중령까지 올라갔는데 뭐? 병사들을 내보내? 마물을 상대 못 해?”
안달루스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대장님, 그쯤 하십시오. 저번에도 치안대 대장이랑 대판 하지 않았습니까.”
그레인이 학생들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그것도 폐하 앞에서 대판 싸웠잖아.’
‘진짜요?’
‘응, 근데 싸웠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그쪽을 후드려 팼지.’
“마무리는 똑바로 해라. 마물은 이쪽에서 해치웠으니 피해 복구는 똑바로 도왔으면 좋겠군. 나가. 이 일은 반드시 보고하겠다.”
권유하는 말투였으나 눈빛이 몹시 싸늘했다. 중령이라는 남자는 어물거리다 허술한 경례만 남기고 내뺐다.
기드온이 살벌한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안달루스가 벌떡 일어나서 학생 넷을 올려보냈다.
“짐 가지고 내려오세요.”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였으나 이 상황에서 빼내려는 의지가 역력해 보였다. 네 학생들은 떠밀리듯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