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37)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37화(37/146)
1층에는 기드온이 앉아 있었다.
색이 밝은 눈동자가 탁자 위의 서류를 보다가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다시 올라갈까.
하지만 이미 기드온과 눈이 마주쳤는데 도로 올라가는 것은 어쩐지 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네사는 그의 눈을 피한 채로 걸어가서 그의 앞이 아닌 대각선쯤에 앉았다. 그리고 짙은 분홍색 편지 봉투를 뜯었다.
리나의 편지는 시작부터 화가 났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편지를 읽는 바네사의 귓가에 분노한 리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 ⚜
<10월 28일, 에디르네력 1310년>
바네사 로오-즈에게.
바네사,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슬슬 찬 바람이 불어서 걱정되네. 네 편지만 보면 아주 멀쩡한 것 같지만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몹시 잘하잖아.
내 편지가 뜸하다고 해서 서운해하지 마.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나면 온몸이 뻣뻣해서 집에 가자마자 쓰러지고 말거든.
여긴 정말 최악이야.
사업체라고 하면 뭐가 생각나니? 어쩐지 저쪽 거래처와 협상하고 논의하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아?
생각만 해도 멋진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것 말이야.
하지만 그건 나 같은 말단 실습생이 할 일은 아니지. 내가 하는 것은 서류를 정리하고 양식에 맞는지 검토하는 거야.
도대체 그놈의 양식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서류를 묶는 방식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중요한 건 서류의 내용 그 자체 아니야?
오늘은 이렇게 하래서 이렇게 하면 내일은 다른 사람이 와서 왜 이렇게 했냐고 화를 낸단다. 이게 말이나 되니?
내가 정말 궁금해서 전혀 쓸모없는 몇몇 규칙은 없어져도 되지 않냐고 물으니까 날 째려보면서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온 규칙이니 그냥 따르라는 거야.
물론 그렇겠지. 처음 생길 때는 다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서 아무도 그 이유조차 모르잖아! 그러면 누군가는 질문을 던져 봐야 하는 것 아니니?
설마 델리나 가문의 사업체에도 이런 쓸데없는 규칙들이 있는 건 아니겠지?
있다 해도 말이야. 내가 델리나 집안의 사업을 모두 물려받게 되면 이런 비효율적인 규칙들은 모두 없애 버릴 거야.
모두 걷어차 버릴 거라고!
혹시 나중에 내가 ‘어느 직원이 감히 나에게 이렇게 엉망진창인 서류를 올렸다’고 말하면 이 편지를 보여 주도록 해. 실습생이었던 리나 델리나를 떠올리도록 말이야!
먹을 것이라도 좀 보내고 싶은데 괜히 짐이 될까 봐 걱정되어서 보낼 수가 없네.
너는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은근 식사를 거르는 면이 있어. 알고 있니?
알 리가 있나, 너에 대해 제일 모르는 사람이 바로 너야!
항상 따뜻한 물 위주로 마셔. 감기 조심해!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편지하고.
타나미르 지방에도 델리나 집안의 사업체가 몇 개 있으니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아니, 무슨 일이 없어도 편지해. 알았어?
너의 사랑,
리나 델리나로부터.
⚜ ⚜ ⚜
바네사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리나가 잡일을 하다니. 그 리나 델리나가!
바네사는 리나의 말대로 이 편지는 꼭 보관하기로 했다. 수십 년이 지나서도 앞에서 낭독해 줘야지.
다음 편지는 체바티로부터 온 것이었는데 아주 짧았다. 체바티는 아주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듯했다.
⚜ ⚜ ⚜
<10월 29일, 에디르네력 1310년>
바네사에게.
바네사, 잘 지내고 있어요?
저번 편지는 어쩐지 약간 기운이 빠진 느낌이던데 이번 답장에서는 기분이 좋아져 있기를 바라요.
리나랑 에반은 전혀 걱정되지 않는데 이상하게 바네사는 걱정이 많이 돼요. 제 친오빠보다 더욱 친동기 같은걸요.
선생님께는 편지를 다시 보냈죠? 가기 전에 몹시 걱정했잖아요. 너무 쌀쌀맞게 편지한 것 같다고요. 바네사의 선생님은 바네사를 몹시 아끼시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전 정말 잘 지내요! 정말 배우는 것이 많아요.
아카데미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적용하려 하니까 어려워요.
절 가르쳐 주시는 분은 이 분야에서 아주 유명한 분이신데 엄하지는 않으세요.
그렇지만 다정하게 여러 번 지적해 줄 분은 아니시죠. 아주 공을 들여 실수가 없도록 노력해야 해요.
제 진로야 언제나 명확했지만 이곳을 오니 마법공학 쪽으로 아예 도장을 찍은 느낌이에요.
바네사도 실습이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위험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요. 위험한 일이 있으면 꼭 에반을 보내고요!
바네사를 몹시 애정하는,
체바티 밀로 도티가.
⚜ ⚜ ⚜
바네사는 바스락 소리가 나는 편지를 다시 깨끗하게 접었다. 그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편지가 많군요.”
“네?”
바네사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드온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곧게 내려왔다.
“친구들인가요?”
바네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기드’가 묻는 건지, ‘특전대의 장’이 묻는 건지 헷갈렸다. 바네사에게 그 둘은 상당히 다르게 느껴졌다.
“네, 친구들이에요.”
“리나 양과 체바티 양입니까?”
그 말에 바네사는 어쩐지 화가 났다. 이 질문은 특전대의 장이 아니라 ‘기드’가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매일 숨기기만 하고.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실의 일부를 가리는 것이 서운했다. 자신이 그의 배경을 알면 무언가 이득을 취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자신은 그냥 그와 함께 지냈던 님루드의 방학과 퓌돔의 거리가 모두 즐거웠을 뿐인데.
“대장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약간 차갑게 튀어나온 제 목소리에 바네사도 움찔 놀랐다.
기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바네사를 바라보다가 다시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테이블 위에는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란 사람들을 상당히 불편하게 하는 힘이 있어 바네사는 약간 그에게 미안해졌다.
기드온은 공과 사를 잘 구분하고 있는 것뿐인데. 참을 걸 그랬나? 하지만 참기 싫었는걸.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게 무슨 어린애 투정인지.
입술을 앙다문 바네사는 편지를 갈무리했다. 침묵에 지쳐 어서 위층의 방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때 기드온이 옆쪽에 있는 종이 한 장을 들어 끄트머리를 찢어 냈다.
바네사는 그가 무얼 하는지 몰라서 잠시 지켜보았다.
오른손에 펜을 잡은 그는 여전히 완벽한, 튀어나온 곳 하나 없는 글씨를 썼다. 그리고 바네사에게 그 쪽지를 건넸다.
「미안합니다. 친해진 뒤로는 알면 불편해할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습니다.」
바네사는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가 위층이 조용한지를 살폈다.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그래서 바로 아래에 글씨를 휘갈겼다.
「내가 뭘 부탁할까 봐 그런 것은 아니고요? 발데르 공작님.」
다시 쪽지를 받아 든 기드온은 눈썹을 휙 들어 올린 바네사를 흘끔 바라본 뒤에 웃었다.
낮고 따뜻한 웃음이라 바네사는 약간 뺨이 달아오른다고 느꼈다. 정말이지 잘난 얼굴이었다.
「뭘 부탁하기는 합니까? 그러면 약속할게요. 무슨 소원이든 하나 꼭 들어주겠습니다.
어쨌든 정말 미안합니다. 몇 번 더 마주친 후에 천천히 말해야지 했는데 이렇게 만날 줄 몰랐습니다. 보자마자 정말 당황했습니다.」
바네사는 뚱한 표정으로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당황은 무슨, 표정 하나 안 변하던데.
그래도 그가 먼저 사과의 손길을 내밀었고 앞에서 그녀의 용서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는 길에 많은 것을 겪은 바네사는 이미 어느 정도 화가 풀어져 있었다. 기드온은 충분히 저를 많이 신경 써 주었고 제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네사는 용서 대신 감사 인사를 건네기로 했다.
바네사가 길게 쪽지를 쓰고 있자 기드온은 옆의 종이를 더 찢어서 건넸다.
「용서는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약간 서운했거든요.
어쨌든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이제야 기억났어요. 저번 성 바란도 탄신일에 선물 준 것 고마워요. 봄에 잘 썼어요.
나도 뭔가를 주려고 했는데 공작님이니까 안 줄래요.」
기드온은 살짝 눈을 접어 웃었다.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을 뻔한 바네사는 간신히 입꼬리를 붙잡고 편지들을 챙겨 일어났다.
기드온은 아직 할 일이 많은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종이 조각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내용이 있는 것이었다.
바네사는 그걸 받아 들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하지만 기드온은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따름이라 바네사는 애매한 고갯짓을 하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소원 들어준다는 쪽지는 나중에 꼭 써먹어야지. 괴롭히는 데에 쓸 거야. 제니언한테 주면 엄청 좋아하겠는걸.
바네사는 굳은 다짐을 안고 쪽지를 잘 넣어 두었다.
그리고 이미 완전히 잠에 빠진 달로이즈 옆에 담요 몇 장을 깔고 몸을 웅크려 누웠다.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난 특전대원들과 학생들은 정오가 되어서야 다시 길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뒤에서 그들을 배웅해 주며 작은 간식거리들을 품에 넣어 주었다.
하지만 기분 좋게 떠난 것도 잠시, 그들은 큰 비를 만나 결국 마차를 불렀다.
⚜ ⚜ ⚜
퓌돔은 겨울에 접어들었을 것이나 서부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모레아로 다가갈수록 더워졌고 현재 우기에 접어들어 오히려 맑은 날이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커다란 마차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졸고 있었지만 바네사는 흥미롭게 마차의 바닥과 윗면에 새겨진 마법진을 탐구했다.
와, 힘을 저렇게 분산시켜서 전체에 마력이 흐르도록 하는구나.
기드온은 바닥에 깔린 천을 들치며 마법진을 분석하는 바네사를 보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마법진에 관심이 많은 것 같군요.”
“네?”
갑자기 기드온이 말을 걸자 바네사가 움찔 놀랐다.
서로 쪽지를 주고받은 이후로 그에 대한 서운함은 씻은 듯 사라져 바네사는 기드온에게 전처럼 거리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기드온과 친밀한 대화를 주고받는 건 경계했다. 누군가 아는 사이가 아니냐 추궁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가 직접 바네사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대화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았다.
바네사는 잠에 곯아떨어져서 늘어져 있는 친구들을 흘끗 바라보고 속닥거렸다.
“그냥 마법이랑 관련된 것은 다 재미있어요. 평생 저랑은 관련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요.”
“마법진에 대한 내용은 지루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훌륭하네요.”
부드럽게 떨어진 말에 바네사는 귓가를 붉히며 웅얼거렸다.
“사실 아직 기초 수업밖에 듣지 않았어요. 저도 좀만 더 있으면 지루해할지도 몰라요.”
솔직한 대답에 짧게 웃은 기드온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아마 아카데미에서는 정석적인 방법만을 배웠을 테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이 ‘바르’를 사용합니다.”
바네사는 건네받은 바르의 이쪽저쪽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새하얀 펜처럼 생겼는데 끝에는 작은 돌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끝을 통해 요정 가루가 섞인 잉크가 흘러나오는데 보통 마법진을 그리는 잉크보다 점도가 높습니다. 바닥에도 손쉽게 그릴 수 있어서 어디서나 사용하기 쉽습니다.”
기드온은 다시 바르를 건네받아 바네사의 손등에 작은 문자를 써 주었다. 에디르네어로 ‘훌륭한’이라는 뜻의 문자가 황금색으로 번쩍였다.
바네사는 씩 웃었다.
“현재 특전대원 중에는 안달루스 소령과 히솝 소위가 가지고 다닙니다.”
나머지는 마법진에 관해서는 엉망진창이니까… 기드온은 중얼거렸다. 옆에서 안나가 희번덕 눈을 떴지만 기드온은 깨끗하게 무시했다.
“보통 어떤 때에 마법진을 사용하세요?”
“아무래도 결계를 칠 때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대규모 결계는 발현 속도가 느리니까 마법진을 쓰는 것이 낫습니다.”
“와.”
바네사가 조용히 감탄하자 기드온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바네사는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당연한 것이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