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41)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41화(41/146)
잠깐 자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에는 황금색 실선과 에디르네어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경계마법의 일종으로 기드온이 해 둔 것 같았다.
바네사는 소리 없이 일어나서 동굴을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아 초조해졌다.
두 사람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이동한다 해도 이 동굴이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람이 어디론가 통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때 뒤에서 기드온이 몸을 털고 일어나는 소리가 났다. 그 잠깐의 휴식이 도움이 되었는지 그는 피로 하나 없는 멀끔한 얼굴이었다.
바네사는 재빨리 그가 둘러 준 겉옷을 벗어 기드온에게 건넸다. 기드온이 받지 않으려 하자 강제로 손에 떠넘겼다.
“조금 주무신 거죠?”
“네. 이렇게 자도 피로가 좀 풀리는군요. 바네사는?”
“저도 방금 깼어요. 어지럽거나 춥진 않으세요?”
걱정스러운 눈빛에 기드온은 어이없이 웃었다.
“이런 걱정을 다 받아 보는군요. 고맙습니다. 난 괜찮아요.”
“저도 이제 정말 괜찮아요. 몸도 따뜻하고요!”
결국 기드온은 돌려받은 겉옷을 다시 입고 뻣뻣한 팔다리를 푼 뒤에 장검 하나와 단검 두 개를 단단히 몸에 고정했다.
“뒤가 막혀 있다고 하셨으니 일단 앞으로 걸을까요?”
바네사가 성급하게 묻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기드온은 동굴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두껍지는 않아 부술 수는 있겠지만 정말 마지막에나 해야 할 방법이군요. 걸읍시다.”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습기가 정말 가득해 축축한 곳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신비로웠다.
작은 불빛들에 비치는 동굴 안은 누군가의 손길도 닿지 않은 듯 자연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계속해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물이 흐르나 봐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일단 식수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데.”
기드온이 벽의 물기를 훔쳐 손가락을 허공에 두었다.
천천히 습기가 날아가며 손끝의 온도가 낮아졌다. 분명히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뚫린 곳도 있고.”
기드온은 어쩐지 이 상황이 놀랍거나 두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은 거침없었고 표정은 평온했다.
바네사는 얼마간 발걸음을 맞추며 걷다가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갈 수 없으면요?”
그 말에 기드온은 걸음을 멈추었다. 바네사가 시무룩하게 발끝을 세우자 그는 올려다보는 파란 눈을 마주하고는 눈매를 휘었다.
“날 믿어요. 바네사는 다친 곳 하나 없이 아카데미로 돌아갈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도 굳건하게 느껴졌다. 바네사는 가만히 그의 눈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쨌든 기드온이 자신을 믿으라 했으니 바네사는 충실히 그를 따를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보아 온 그는, 분명히 믿을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동굴 바닥은 울퉁불퉁했지만 동시에 습기로 미끄러웠다.
천장에서는 종유석이 뻗어 내려오고 바닥에서는 석순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두 가지가 만나 기둥을 이루기도 했다.
기드온은 걸으면서 제 마력이 온전한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가끔 빛이 나거나, 치직거리며 불꽃이 튀었다. 그래서 한동안 동굴 안은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바네사도 그를 따라서 간단한 마법을 실현해 보았다. 하지만 어쩐지 보통 때보다 실현 속도도 느리고 범위도 좁았다.
바네사는 차가운 손끝을 오므렸다. 그를 눈치챈 기드온이 나직하게 말했다.
“실현이 잘 안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무언가에 막힌 것같이 흐름이 좋지 않습니다.”
바네사는 아무렇게나 화제를 돌렸다. 마법까지 잘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니 스스로가 너무나 큰 짐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다들 걱정하겠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퓌돔에도 이야기가 흘러 들어갔을 수도 있고….”
그 대답에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기드온의 약혼자를 상상했다.
그녀는 아마 퓌돔에 있겠지? 어쩐지 검은 머리칼의 미인일 것 같았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사랑받은 티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사람일 테지. 기드온이 없어졌다는 소식에 몹시 놀랐을 거고….
바네사는 인상을 쓰고는 흘러가는 상상을 급히 끊어 냈다. 자신이 왜 자꾸 그의 약혼자에 대해 신경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드온의 약혼자는 자신이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저야 괜찮지만 대장님은 가족분들이 걱정하실 텐데… 약혼자분도 그렇고요.”
바네사는 부러 약혼자라는 단어를 똑바르게 발음했다. 자꾸 쓸데없는 생각만 난무했다. 자신은 분명히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약혼자?”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기드온의 발걸음이 잠시 흐트러졌다. 그는 크게 당혹하여 물었다.
“내가 약혼자가 있다 합니까? 누가?”
“네? 어, 아니. 그냥 제 추측…”
그레인이 그런 것 같다는 둥의 말을 했다는 것을 알면 기드온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희미한 빛에도 보이는 그의 눈빛이 살벌했다.
“그, 편지도 자주 보시고… 그래서. 혹시.”
“…연락받을 곳이 있어 그렇습니다. 약혼자는 없습니다.”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 기드온은 칼같이 여지를 잘라 냈다. 바네사는 움찔 떨리는 입가를 손등으로 내리눌렀다.
“어, 그, 괜한 오해를 했네요.”
아니었구나. 바네사는 뺨을 슥슥 쓸어 냈다. 아까 올라온 열감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두 사람은 서먹한 침묵 속에 휩싸였다. 얼마간 동굴 바닥을 내딛는 소리만 울려 퍼지자 바네사는 헛기침을 했다.
“큼, 저는 귀족들은 다 일찍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
“약혼자가 있긴 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파혼했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감당이 불가했으니까요.”
기드온의 덤덤한 목소리에 바네사는 화들짝 놀라 숨을 삼켰다.
발데르의 문장은 역사책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해서 알 수밖에 없었지만 그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줄은 몰랐는데 괜한 상처를 건든 것 같았다.
“죄, 죄송해요. 제가 자꾸 말실수를 해서….”
“아닙니다. 꽤 지난 일이니 그리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쩔쩔매는 표정에 기드온은 낮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꿈을 꾸고 있나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워낙 건강하신 분들이셨으니까요.”
바네사는 기드온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는 딱히 표정 변화 없이 차분했다.
“마차 사고였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떤 음모도 없었습니다.”
“아….”
바네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어떻게 말해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하지만 그는 딱히 위로를 바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이야기를 어서 넘기기로 했다.
“음, 그럼 조기 졸업을 하신 이유는….”
“당장 가문을 물려받아야 했는데 탐욕스러운 친척들은 많고. 학생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졸업해야 했군요.”
“예. 4학년 때 교수들의 동의를 받아 시험을 치고 졸업했습니다. 열여섯 살이었던 것 같군요.”
“그거 굉장히…”
대단하신데요. 바네사가 웅얼거리자 기드온이 작게 웃었다.
“그럼 열여섯 살에 바로 공작 위를 물려받으신 건가요?”
“맞습니다.”
“힘드셨겠어요.”
바네사는 더 멀리 빛무리를 퍼뜨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동굴 안쪽이 조금 더 밝아져 그의 섬세한 이목구비가 확실히 드러났다.
기드온은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남는 것은 아주 두려운 일이더군요. 노력해야 했죠.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뜯어 먹혔을 테니까.”
바네사는 그제야 가끔 보이는 기드온의 관조하는 듯한 눈동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힘든데 특전대 대장은 왜….”
어리둥절한 질문에 기드온은 짧게 웃었다.
“나중에 바네사도 뵙게 될 겁니다. 현재 폐하께서는 사람을 아주 효율적으로 써먹는 분이십니다. 내가 오직 발데르 공작으로서 남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와아.”
바네사가 감탄하자 기드온은 말을 삼켰다.
왕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는 편이 낫지…. 그녀는 아직 학생 신분이 아닌가.
왕은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네가 공동회의에서 회의나 한다고? 장난쳐? 겸직해!’
왕이 관료들하고 서류를 날리며 싸우는 걸 보면 왕실에 들어올 생각 따위는 빠르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이건 종이 장난감으로나 써! 이딴 걸 안건이라고 내냐?’
‘아악! 그거 쓰느라 밤을 새웠다고요!’
과거에 보았던 일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럼 너무 바쁘지 않으세요?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할 것 같아요. 저는 물론 잘 알지는 못하지만요.”
“바쁩니다. 집무실에 산더미처럼 서류가 쌓여 있습니다. 발데르 영지에 있는 본성은 가기도 싫고….”
답이 없거든요. 보좌들도 도망갑니다.
기드온이 난감하게 웃자 바네사도 결국 따라 웃어 버렸다.
동굴 안에 둘만 남게 되자, 기드온은 서로 간의 간격을 넘어 사적인 이야기도 편히 꺼냈다. 조심할 눈이 없기 때문일까?
제니언의 집 앞 호수에서 함께 배를 타고, 퓌돔의 거리를 같이 거닐었던 그와 다르지 않았다. 바네사는 다시 만난 그가 반가웠다.
그제야 다 털어 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둔 거리가 서운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속으로 그게 당연한 거라고 되뇌었어도.
하지만 그게 왜 서운했을까? 답 없는 질문만 머릿속에 남았다.
바네사와 기드온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네사는 제가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것을 기드온에게 말해 주었으나 그는 별로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알고 계셨어요?”
“후원자가 있다기에….”
기드온이 말끝을 흐리자 바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은 화재 때 돌아가셨대요. 전 사실 기억은 나지 않아요. 흔적도 없어서….”
“부모님께서 당신을 최선을 다해 보호하셨나 봅니다. 많이 사랑하셨을 테니까요.”
기드온의 부드러운 대답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사랑받는 딸이었을 과거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렇겠죠? 저도 어렸을 때는 부모님과 아주 행복했을 거예요.”
“그럴 겁니다. 고아원은….”
“음, 나쁘지는 않았어요. 절 괴롭히거나 무시하거나 그런 것은 없었거든요. 사실 저는 어렸을 때 제가 나름 예쁘다고 생각했거든요?”
기드온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미인이니 과거에는 천사 같은 아이였을 것 같군요.”
바네사는 삐딱한 눈길로 잘난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의아한 표정이었다.
“…거울이나 보세요. 하여튼, 그래서 저는 제가 빨리 입양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아주 착하게 구는 아이였거든요.”
바네사는 손가락으로 볼을 살짝 긁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양이 잘 안 되는 거예요. 입양할 것처럼 굴던 분들도 금방 철회하셨고요. 다섯 번이나 그랬어요.”
기드온은 침묵했으나 그녀는 그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네사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축축한 것은 발밑만으로도 충분했다.
“나중에는 그냥 괜찮아지더라고요. 고아원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너무 부러운 게 한 가지 있었어요.”
“뭡니까.”
“입양 가는 애들은 선물로 예쁜 옷을 받거든요. 입양자들이 준비한 걸 입고 고아원을 떠나는데 그게 너무 부러웠어요. 아직도 기억나요. 꽃 자수가 놓인 노란 시폰 드레스가요.”
누덕누덕 기워진 이불에 얼굴을 묻고 울었던 날이었다.
“곱슬거리는 금발 여자아이였는데 나도 갈색 머리가 아니었으면 갔을까 해서 머리카락에 노란 물감을 바른 적도 있어요.”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요. 바네사가 씩 웃었지만 기드온은 가만히 말을 삼켰다.
“근데, 어… 어어어!”
다른 말을 꺼내려던 바네사가 갑자기 앞쪽을 격하게 손가락질했다. 오롯이 바네사에게 집중하던 기드온도 앞을 보고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쩐지 점점 길이 넓어지고 발밑에 물기가 많아진다 했더니 앞에는 거대한 물길이 펼쳐져 있었다.
석회 동굴 안, 거대한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