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43)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43화(43/146)
“마물의 씨앗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면 굳이 저나 기드온을 여기로 이동시켰을 리 없겠죠. 그냥 밤 반달루의 마법진을 파괴했을 거예요.”
기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바네사의 말을 귀담아듣는 게 분명했다. 살짝 고개가 기울어져 있었다.
“굳이 누군가를 이 동굴로 초대하고 싶었다면 그자는 오히려 마법진을 지키고 싶은 사람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 여기로 꼬여 낸 건 분명히 어린 소년이었는데….”
바네사는 멍하니 생각했다.
분명히 교수님들께서 얼굴을 변형시키는 마법 같은 건 실현할 수 없다고 했는데. 많은 자들이 도전하였으나 참담한 실패만 했다고.
머리를 혼란케 하여 환상을 보게 하는 정도는 가능했지만 바네사는 그때 맑은 아침 공기 안에서 몹시 또렷한 상태였다.
“그 소년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 같지 않았어요. 행동이 아주 명확해 보였거든요. 제가 취할 행동을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요.”
바네사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기드온은 흘끗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바네사가 이동 마법진을 밟았을 때, 기드온의 눈에는 바네사가 말한 그 소년이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봐도 소년은 없었다….
그렇다면 바네사를 노린 마법이 틀림없는데 도대체 왜 그녀를 노렸을까?
기드온은 혀끝을 맴도는 의심을 숨겼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굉장한 마법사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런 놀라운 실력을 가진 거잖아요. 이동 마법진을 그리다니….”
바네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 나이를 숨길 수 있는 엄청난 마법사이기라도 한 걸까요?”
바네사는 그의 생각보다 요점을 더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바네사.”
“네?”
기드온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바네사는 그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다.
“혹시 저 마법진에 대해서 말씀하시려는 거면….”
“맞습니다. 비밀을 지켜 줄 수 있을까요?”
“네, 당연하죠.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갑자기 기드온이 발을 멈추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바네사는 잠깐 긴장했다.
“비밀을 아는 것은 항상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속해요.”
“네, 약속할게요. 조심할게요.”
무려 프리바를 수호하는 밤 반달루의 마법진이다. 그곳의 위치를 아는 것이 안전할 리가 없었다. 특히 누군가가 그 마법진들을 노리고 있다면.
바네사도 그 부분을 알아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다만 머릿속으로 소년의 정체를 계속해서 고심했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다시 꽤 오래 걸었다. 신비한 동굴이 흥미로웠던 것도 잠시, 끝이 없는 어둠에 점점 나쁜 생각이 들었다.
출구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물론 기드온을 믿지만, 두 사람 모두 다치지 않고 나갈 수 있을까?
기드온은 기민하게 바네사의 상태를 눈치채고 발을 멈췄다.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알긴 어려워도 벌써 몇 시간은 걸은 것 같으니 쉴 때가 되긴 한 것 같았다.
“바네사, 다시 쉬었다 갈까요.”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아니, 내가 피곤합니다.”
기드온은 딱 잘라 말하고 대충 벽에 기대앉았다. 그가 고개를 젖혀 왜 앉지 않냐는 눈빛을 보내며 채근했다. 바네사도 결국 옆에 주저앉았다.
서로의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동굴 안은 몹시 추웠기에 서로의 작은 온기가 도움이 되었다.
“따뜻한 것이 마시고 싶네요. 마리안의 차도 괜찮을 것 같고.”
기드온이 느긋하게 말했다.
“바네사는 단것?”
“음, 녹인 초콜릿이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바닐라크림티도 좋고요.”
“그러고 보니 님루드에서 카페 둘체의 진열대에 얼굴을 붙이고 있는 것이 첫 만남이었죠.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거기 레몬머랭타르트는 최고란 말이에요! 어쩔 수 없었어요.”
“적당히 달고 적당히 시고. 맛이 좋았죠. 제니언도 아주 좋아하던데.”
제니언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나왔다. 엉망진창으로 눌린 머리에 이쪽은 하얗고 저쪽은 물감이 묻어 파랗고.
‘이 멍청아! 모든 마법은 자신감을 가지고 해야 하는 거라고!’
제니언의 집 뒤쪽의 호수에서 기드온과 배를 탔던 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따뜻한 웃음소리.
그때는 기드온이 누군지도 몰랐다. 설마 발데르 공작일 줄이야.
“그러고 보니 님루드는 왜 오셨던 거예요?”
“음,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제니언에게 물을 것도 있어서였죠.”
“보고 싶은 사람이 설마 제니언인가요? 가족 같은 사이신 거죠?”
사뭇 진지한 바네사의 얼굴에 기드온은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그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제니언과 가족 같은 사이라.
“뭐, 친한 사이이긴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나름 돌봐 주기도 했고….”
“제니언은 아주 유명한 마법사잖아요. 혹시 제니언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잘 아세요?”
어둠 속에서도 바네사의 물빛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기드온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닥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가 굉장히 은둔 생활을 즐기는 편이기도 하고.”
“제 후원자 선생님은 제니언과 아는 사이이신 거잖아요! 혹시 작은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요.”
“후원자 선생님이 누구이신지 궁금합니까?”
기드온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두 사람의 몸이 맞닿은 지 오래였다. 바네사의 어깨가 기드온의 팔 부분과 닿아 서로의 몸을 타고 온기가 퍼지는 것이 어쩐지 자연스러웠다.
바네사는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자신의 마음이 잘 전달되었으면 했다.
“사실 선생님이 누구이신지 그 정체를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에요. 그냥….”
기드온의 시선이 바네사의 눈 근처로 내려앉았다. 그의 긴 속눈썹이 나붓이 내리깔렸다.
“선생님이 다정한 분이고 제게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은 편지로도 알 수 있는걸요. 하지만 가끔 선생님이 정말 실존하시는 분인지가 궁금해요. 제 편지를 보고 계시는 것도 알고 다 아는데….”
바네사는 눈을 찡그렸다. 왜 이리 어리광이 심한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고아였던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선생님께도,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제 칭얼거림을 모두 들어 주고 있는 기드온에게도.
“가끔 혼자 남은 기분이 들 때 선생님에 대한 조각 하나라도 알면 나아질 것 같아서요.”
기드온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잠시 머뭇대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별것 없습니다. 다만 제니언과 친분이 있다면 그 사람도 마법사일 것입니다. 제니언은 일반인들과 대화를 해 본 적도 없으니까요. 이것뿐입니다. 미안해요.”
“그럼 제가 계속 마법사의 길을 걸으면 언젠가는 선생님과 스쳐 지나갈 일도 있을까요?”
그 말에 기드온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니에요. 마법을 배우는 것이 재미있어요. 실력은 부족하지만요. 하지만 만약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바네사의 새파란 눈이 기드온을 바라보았다. 길고 빽빽한 속눈썹에 감싸인 눈은 지나치게 맑고 아름다웠다.
그는 어쩐지 힘이 쭉 빠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럴 수 있을 겁니다.”
바네사는 씩 웃고는 다리를 쭉 폈다. 달라붙는 바지에 감싸진, 길고 늘씬한 다리를 통통 두들기고 벌떡 일어났다.
기드온이 피곤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걱정해서 쉬는 것이 분명했고 이제 많이 나아졌으니 다시 전진할 때였다.
“저 이제 괜찮아요. 가요.”
“나가면 카페 둘체에서 만든 디저트들을 보내 주겠습니다. 기숙사가 어딥니까?”
그 와중에 기드온이 잊지 않고 꺼낸 말이 저것이라 바네사는 웃음을 참았다.
“달의 성벽에 네 번째 층이요. 레몬머랭타르트로 보내 주세요.”
그는 몇 번이고 ‘달의 성벽’을 반복하고는 미소 지었다. 그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바네사는 어쩐지 심장이 조여 왔다.
진짜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바네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넘기려고 노력했다. 쿵, 쿵.
두 사람은 다시 출발했다. 길은 굴곡진 곳도 있었고 평탄한 곳도 있었다.
다만 점점 길이 넓어지고 천장이 몹시 높아지는 것이 신경 쓰였으나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열심히 걸을 수밖에.
“천장이 점점 높아지는군요.”
기드온도 그를 신경 쓰고 있었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다음에는 지리학이라도 공부할까 봐요. 언제 이런 곳에 또 떨어질지 모르니까.”
“바네사는 이미 수업을 아주 많이 듣고 있다고 했잖아요. 문학은 여전합니까?”
“아, 진짜!”
바네사가 씩씩대자 기드온은 낮게 웃었다. 웃는 그와 눈이 마주쳐 바네사는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덕분에 기드온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하는 과정을 그대로 마주했다. 다정했던 황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서늘한 기운을 품었다.
바네사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돌렸다가 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입을 막았다.
분명히 새어 나오는 빛이 있긴 했다. 출구는 있었다.
다만 출구는 수십 미터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온몸이 두껍고 빛나는 비늘로 뒤덮인 ‘그것’은 거대한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기드온은 느릿하게 손을 뻗어 바네사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바네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가 무언가 돕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능력이 충분한지를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방해일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손만 꼭 쥐었다.
잠시 뒤를 돌아본 기드온의 눈동자가 깜빡이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바네사를 안심시키려는 미소였다.
인기척을 느낀 거대한 것이 천천히 노란 눈을 떠 기드온을 바라보았다. 세로로 긴 동공이 좁아졌다가 넓어졌다가를 반복했다.
그것은 곧 거대한 꼬리를 움직여 돌벽을 툭 쳤다.
쿵. 가벼운 움직임에도 동굴 벽이 거칠게 진동했다.
기드온은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기드온도 바네사도 용을 본 적은 없으나 저걸 용이라 하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 같았다.
밤 반달루가 용의 친구였다는 내용의 동화가 진짜인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거대한 마법을 썼다가 동굴이 무너지면 안 되니 이것 또한 신경 써야 했다. 기드온은 잠시 천장의 높이와 용 뒤에 공간을 살폈다.
용의 입이 쩍 벌어져 뾰족한 이빨이 드러났다. 그 사이를 긴 혀가 훑고 지나갔다.
기드온은 차분히 기다렸다. 저것이 먼저 다가오기를.
그리고 순식간에 용이 말았던 몸을 펴고 튀어나왔다. 동시에 기드온은 용의 머리에 대고 검을 휘둘렀다.
검이 움직인 궤적대로 허공을 찢는 굉음이 퍼졌다.
강력한 마력을 담은 것이었으나 용의 두꺼운 가죽을 완전히 찢어 내기엔 충분치 않아 길게 갈라진 상처를 냈을 뿐이었다.
용은 피가 흐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입을 벌려 이 침입자를 씹어먹으려 했다.
하지만 연한 살이 드러난 입속을 찢어 버릴 의도로, 힘을 실은 검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쩌억-!
용은 급히 이빨로 검을 씹었다. 양손으로 검을 잡고 있는 기드온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잠시 동안의 대치 이후 갑자기 기드온이 힘에서 훅 밀렸다.
“기드온!”
바네사가 비명을 질렀으나 그가 밀린 이유는 검에서 한 손을 떼었기 때문이었다. 오른손이 뻗어 나가 그 손끝에서 마법이 실현되었다.
동굴 속에 숨어 있던 어둠이 검은 줄기를 뻗어 그대로 용의 몸을 꿰뚫었다. 마법의 실현이 지나치게 빨라 용은 방어할 새도 없었다.
키에에에에에엑!
용이 물고 있던 검을 놓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고 기드온은 검으로 용을 후려쳤다.
용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노란 눈이 흥분하여 동공이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기드온은 다시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어쩐지 용이 그를 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를 눈치챈 기드온이 바네사에게 몸을 트는 순간 이미 용의 꼬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기드온은 물리적인 결계로 바네사를 보호했으나 꼬리는 단번에 결계를 부수고 바네사에게 향했다.
“바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