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44)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44화(44/146)
검의 궤적이 허공에 펼쳐진 문양을 찢어 내자 그 사이에서 튀어나온 새 모양의 마력이 대신 꼬리와 부딪혀 폭발했다. 기드온이 바네사의 허리를 급히 끌어당겼다.
그는 그녀를 보느라 오른쪽에는 시선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때 용이 반동을 이용하여 기드온의 오른쪽으로 꼬리를 움직였다. 바네사는 정면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바네사는 몸을 타고 흐르는 마력을 끌어내려 했다.
부족한 힘이나마 그를 보호할 무언가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 돼.
“기드!”
“!”
기드온은 재빨리 바네사를 끌어안고 바닥에 넘어졌다. 아슬아슬하게 돌기가 돋은 꼬리가 그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도 단단한 팔이 바네사를 감싸 품에 안았기 때문에 그녀는 긁힌 상처 하나 없었다.
용은 콧김을 씩씩댔다. 제 일격이 실패한 것이 아쉬운 듯했다. 기드온은 속으로 욕을 했다.
다행히도 용은 잠시 제 상태를 다듬는 듯했다. 기드온은 바네사를 급히 뒤쪽으로 물러나게 했다.
“괜찮으니까 더 멀리 물러나요.”
“마법이….”
쉽게 하던 결계마저 펼쳐지지 않았다. 기드온의 것처럼 거대한 규모는 아니었으나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기에 충분했던 것마저도 되지 않았다.
바네사의 입술이 새하얗게 질렸다.
“놀라면 그럴 수도, 젠장!”
대뜸 용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기드온은 속으로 밤 반달루의 성실성을 욕했다. 그냥 용도 아니고 불 뿜는 용이라니.
그의 손짓 한 번에 물이 방패처럼 그들의 앞을 막았으나 거센 불길에 점점 증발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수증기가 자욱하게 퍼져 서로의 모습을 가렸다.
용은 불을 뿜으며 계속해서 거리를 좁혔다. 기드온은 그 뒤에서 두 가지의 마법을 동시에 준비했고 바네사는 눈을 질끈 감았으나 손끝에서 뻗어 나오는 마법은 여전히, 없었다.
물이 모두 사라지니 용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기드온이 쩍 벌린 입에 폭발하고 찢어지는 마력을 터트리려는 순간 갑자기 용이 한 발 물러서더니 입을 다물었다.
“…?”
멀뚱멀뚱. 용은 노란 눈을 좁혀 머리를 기우뚱했다.
기드온이 바네사를 밀어 완전히 뒤로 보냈다.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이 걸렸으나 지금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아니, 있나?
용은 여전히 멀뚱멀뚱 그들을 구경했다.
방금 전 치고받고 싸운 것은 기억도 못 하는 듯한 태도에 기드온이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검을 쥔 팔은 여전히 힘줄이 단단하게 서 있었다.
“끼익.”
갑자기 용은 머리를 떨구고 바닥에 몸을 딱 붙였다. 그 상태에서 꼬리 끝만 살랑살랑 흔들었다. 기드온의 짙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케엑. 켁.”
용은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고, 용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 꼬리로 다시 돌벽을 후려쳤다.
그 행동을 보아하니 ‘너네 귀 먹었니?’ 그쯤 될 것 같았다.
용은 공격 의사가 없다는 걸 보여 주는 것처럼 동굴 안을 뒹굴며 자신의 약점인 배를 보여 주었다. 배에는 비늘이 거의 없어 부드러워 보였다.
그리고 용은 몸을 바닥에 딱 붙인 채로 몸을 끌며 그들에게 기어 왔다.
기드온의 큰 몸 뒤에 바네사가 완전히 가려 있자, 용은 쭈욱 머리를 들어 눈만 껌뻑였다.
킁.
거대한 생물은 노란 눈을 껌뻑이며 바네사의 냄새를 맡았다.
용은 기드온이 바네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 귀찮다는 듯 콧등으로 기드온을 밀어내려 했으나 그는 밀리지 않고 오히려 용과 대치했다.
키익.
용은 짜증스레 이를 드러냈으나 기드온은 다시 검을 강하게 잡았을 뿐이었다. 용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저기.”
바네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용의 콧잔등이 씰룩대더니 입이 환히 벌어졌다. 그리고 애처롭게 기드온에게 입은 상처를 내보이며 낑낑댔다.
“끙, 끙.”
불쌍한 척하며 갈라진 틈을 핥는 용을 보니 기드온은 머리가 아팠다.
“도대체….”
기드온이 고민하다가 바네사를 흘끗 돌아보았다. 바네사는 여전히 창백했지만 어리둥절해 보였다.
“당신을 원하는 것 같은데….”
잠시 머뭇거린 바네사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용이 대뜸 콧등을 들이밀었다. 우둘투둘한 비늘이 손등에 닿자 바네사는 손을 세워 사이사이를 열심히 긁어 주었다.
용은 그 손길을 기꺼워하며 입을 길게 찢었다. 하지만 기드온은 용과 썩 좋지 못한 눈길을 나누었다.
그가 영 호의적이지 않았으므로 결국 바네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여기 사니?”
용은 머리를 열심히 흔들었다. 거대한 머리가 쿵쿵 흔들리자 몹시 위협적이었으나 계속 긁어 달라고 콧등을 들이미는 것을 보아하니 위협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았다.
“나 알아?”
용은 또다시 머리를 열심히 흔들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용과 교우 관계가 전혀 없었으므로 이 용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전 처음 보는 용인데요…?”
“보통 용은 처음 보지요….”
애매한 미소의 기드온이 답하자 바네사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렇지.
“말을 못 알아듣나 봐요.”
그 즉시 용은 꼬리로 바닥을 쿵 쳤다. 동공을 휙 좁힌 것으로 볼 때 ‘너희가 내 지적 능력을 무시하냐’쯤 될 것 같았다. 바네사는 억울했다.
“난 널 모른단 말이야.”
용은 답답한 듯 콧김을 뿜었으나 바네사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용을 만났기에 더욱 억울해졌다.
왜 아는 척이야? 아니, 아는 척해 줘서 고맙긴 한데.
바네사와 용이 실랑이하는 동안, 기드온은 아주 높이 있는 출구를 올려 보았다. 빛이 까마득했다.
부양 마법을 쓸 수는 있겠지만 동굴의 천장은 지나치게 높았다. 마법으로 올라가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았다. 하늘을 걷는 마법은 수직선상으로는 움직이기 힘들었다.
기드온은 용의 접힌 날개를 흘끗 보았다. 굉장히 좋은 것이 있군.
“바네사.”
기드온이 씩 웃고는 바네사에게 몸을 기울였다. 바네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법 친해 보이는데….”
바네사가 억울한 표정을 했지만 기드온은 웃음을 돌려주고는 속삭였다.
“그냥 친하다고 하고 태워 달라고 합시다.”
“…네?”
바네사는 멍하니 허공에 뚫린 구멍을 바라보았다. 천장이 너무 높았기에 구멍은 작아 보였지만 사실 굉장히 클 것이다.
어차피 용도 가끔은 먹이를 잡으러 나갈 테니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타자고? 쟤를?
“다시 화나서 꼬리를 휘두르는 건 아닐까요?”
“친구 하자고 해요.”
“이미 아는 사이라는데요?”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자고 합시다.”
기드온이 씩 웃자 휘어지는 눈의 각도에 바네사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돌린 바네사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건 채로 다시 용에게 말을 걸었다.
“배 안 고프니?”
용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고 일어났으니 식사를 해야 할 때였다.
“같, 같이 동굴 밖으로 나갈래…? 친구끼리 햇살을 쪼이며 푸른 잔디 위를 걸어 보는 것은 어떨까?”
용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오랜만에 불을 뿜어 본 용은 약간 관대해졌다. 그래서 꼬리로 바네사를 툭 가리키고는 제 등 위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태워 준다는 거야?”
바네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용은 콧김을 뿜고는 꼬리 끝만 까딱였다. 아주 오만한 태도였다.
“넌 정말 착한 용이구나. 어쩐지 비늘도 반지르르한 광택이 돌고 돌기도 근사하고. 이런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는 용답게 부족함이 없네! 멋있다. 훌륭해!”
바네사는 고아원의 아이들을 조련할 때 쓰던 높고 낭랑한 목소리로 열심히 칭찬했다. 용은 뽐내듯이 날개를 반쯤 펴고 여린 햇살을 받았다.
기드온은 흥미롭게 한 사람과 한 마리의 용을 구경했다.
“멋지고, 예쁘고, 착하고. 그래서 밤 반달루 님이 여기를 너에게 맡겼나 봐!”
용은 격하게 커다란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틈을 타서 바네사가 발꿈치를 한껏 들자 기드온이 슬쩍 몸을 낮춰 주었다.
‘정말 용을 여기에 둔 것이 밤 반달루가 맞나봐요.’
‘은근히 정보도 캐내고. 훌륭한데요.’
기드온은 속삭이고는 용을 탈 준비를 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아주 여린 햇살을 받으며 용은 천천히 날개를 펼쳤다. 거대한 날개가 겨우 반쯤 펼쳐졌는데도 동굴을 한껏 채웠다.
바네사가 먼저 용의 목에 올라타고 그 뒤로는 기드온이 탔다.
용은 바네사를 보아 기드온을 태워 준다는 태도였다. 용은 기드온을 흘끗대며 자꾸 콧김을 뿜었고 동공을 좁혔다 넓혔다를 반복했다.
물론 기드온은 용의 기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용이 두 사람을 불에 구우려던 것이 방금 전의 일이었다.
바네사는 멀게만 느껴지는 출구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만약 용이 태워 주지 않았다면….”
“부양 마법을 써야 했겠죠. 힘들었을 겁니다. 바네사 덕에 용을 다 타 보네요.”
특전대 대장쯤 되면 모든 것이 쉬운 걸까?
바네사는 어쩐지 시무룩해졌다. 그때 기드온이 뒤에서 한쪽 손으로 바네사를 단단히 끌어당겨 안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머리로 깨닫기 전에 나무 같은 향기가 제 몸을 감쌌다.
바네사는 등에 닿는 남자의 단단한 몸에 딸꾹질을 했다. 그의 숨결이 귓가에 닿는 것 같았다….
기드온의 반대쪽 손에는 별처럼 빛나는 은색 끈이 흘러내렸는데, 그 끈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용의 목 근처 돌기에 휘감겨 두 사람을 고정했다.
용은 꼬리를 흔들며 균형을 잡았다. 드디어 거대한 날개가 완전히 펼쳐졌다.
“잠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은 옆에 있던 동공으로 몸을 던졌다.
간신히 비명을 삼킨 바네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숨을 쉬기 어려웠다.
얼굴에 달라붙는 습기와 시원한 바람, 그리고 허리를 단단히 감은 팔.
그때 나직한 감탄사가 귓가를 울렸다.
“바네사, 눈 떠 봐요.”
내가 절대 놓치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기드온이 속삭였다.
바네사는 그의 속삭임에 힘을 얻어 간신히 눈을 떴다.
“아.”
용은 부드럽게 허공을 돌며 위로,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낸 빛무리가 용의 꼬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작은 빛들은 거대한 어둠을 밝히는 은하수 같기도 했고 혹은 소용돌이치는 물결 같기도 했다.
석회 동굴 안의 우윳빛 석주들이 빛에 부딪혔다가 다시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바네사는 제가 살아온 평생,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아름답네요.”
남자의 짧은 감상에 바네사도 희미하게 웃었다. 용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였다.
햇빛에 휩싸이기 직전, 바네사는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와 함께라서 다행이었다고.
남자가 낮게 웃는 것 같았다.
위로 치솟았던 용은 부드럽게 활강하여 호숫가 근처에 내려앉았다. 용은 몸을 땅에 붙이고 날개를 쭉 뻗어 두 사람이 편히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바네사는 조심히 내려서 용의 머리 근처로 다가갔다. 울퉁불퉁한 비늘과 돌기를 부드럽게 쓸어 주자 용은 눈을 반쯤 감으며 그르렁거렸다.
“고마워. 넌 정말 착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용이야.”
용의 노란 눈이 바네사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비늘이 빼곡한 긴 꼬리가 휘어지더니 기드온의 허리께를 툭 쳤다.
“차별이 너무 심한데.”
기드온은 짧게 웃고는 용의 상처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용이 가지고 있는 마력 자체가 엄청나니 알아서 곧 아물겠지만 회복 속도가 빨라질 수 있도록.
“넌 다시 들어갈 거니?”
삐이이.
“저기 안을 지켜 줘서 고마워.”
용은 입을 쭉 찢었다. 무시무시한 이빨이 드러났지만 전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용은 다시 날개를 펼쳤다. 하지만 동굴 속이 아니라 호수로 뛰어들었다. 어쩐지 신이 나서 첨벙거리는 것이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 같았다.
너른 호수 근처에는 아무도 없어 용은 신나게 헤엄쳤다.
기드온은 손끝에 흐르는 마력을 점검했다. 동굴 안에서는 계속 무언가 방해받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오니 그런 느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용을 구경하던 바네사는 기드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그도 용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을 벗어난 햇빛 아래에서, 그제야 그의 손등이 심하게 긁힌 것을 알아챘다. 아까 바네사를 보호하면서 바닥에 구를 때 생긴 상처임이 틀림없었다.
분명히 보이지 않는 곳에도 상처가 있으리라.
바네사는 그가 약속을 지켰다는 걸 깨달았다.
‘날 믿어요. 바네사는 다친 곳 하나 없이 아카데미로 돌아갈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쳤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 손등에.”
기드온은 손등을 내려다보고는 태평하게 대답했다.
“금방 나을 겁니다. 괜찮아요.”
바네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성큼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