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45)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45화(45/146)
기드온이 말리기도 전에 부드러운 소리가 흘러나와 치유력을 높여 주었다. 살갗 위에 갈라졌던 흔적이 조금 옅어졌다.
그러나 상처는 여전히 깊었다. 조건을 모르는 마법, 언령마법의 한계였다.
바네사가 한숨 쉬었으나 기드온은 만족스레 제 손등을 두들겼다.
“치료 고맙습니다. 아, 내가 약속 지킨 것도 칭찬해 주면 좋겠는데.”
“…약속 지켜 줘서 고마워요.”
기드온이 장난스레 씩 웃었다. 바네사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동굴 안에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져 보고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얼굴을 붉히고.
너무 뻔한 답이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가느다란 생각의 끝을 잡아채기 직전, 기드온은 대뜸 바네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가 바네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네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그의 커다란 손 위에 양손을 올렸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그의 손바닥 위에 곱게 놓였다.
“하.”
기드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바네사는 입을 비죽였다.
“뭔데요….”
“이동마법을 써야 하니까 접촉해야죠.”
기드온이 웃음을 참는 기색이자 민망해진 바네사가 씩씩댔다. 짙은 눈썹이 삐죽 치켜 올라갔다.
“말을 해야 알죠!”
“미안합니다.”
바네사가 한 손을 내려놓으려 했으나 이미 기드온이 손을 말아쥔 후였다. 커다란 손은 바네사의 양손을 모아쥐기에도 충분했다.
바네사는 또다시 붉어진 얼굴이 티가 날까 고개를 푹 숙였다.
제니언 포키스 폴리스 스타게라가 에디르네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언어로써 실현하는 마법’을 집대성하여 정리한 <언령마법>에 공간이동 마법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오직 수식과 언어에 대한 이해, 마력만을 필요로 하는 일반적인 언령마법과는 달리 공간이동 마법은 추가적인 조건을 필요로 했다.
그 조건은 ‘가 본 곳일 것’, ‘둘 이상이 이동한다면 접촉할 것’, ‘마력의 양이 불충분한 자들은 사용하지 말 것’으로 총 세 가지였다. 제니언은 책에 이런 구절도 적어 두었다.
「조건도 모르는 몇몇 멍청이들이 공간이동 마법을 실행했다가 반토막이 나서 발견되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력이 되지도 않는 자들은 돈을 내고 포탈을 써야 한다.」
기드온은 아주 조심스럽게 바네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동할 대상자들의 접촉점이 많을수록 좋았다.
바네사의 이마가 그의 목선쯤에 닿았다.
얼굴이 안 보여서 다행이야. 꼴사나운 얼굴을 보일 뻔했잖아. 여기저기 붉으면 웃기니까….
“…갈까요.”
바네사는 대답도 없이 그의 어깨에 이마를 콩 박았다.
기드온은 한 손으로는 바네사를 결박하듯 단단하게 끌어안고, 나머지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새의 날갯짓 소리 혹은 산을 타고 흐르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이 기드온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발밑으로 새파란 빛이 대지를 타고 원형을 그리다가 직선으로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 ⚜ ⚜
분명히 마른 흙 위였는데 어느새 축축한 이끼 위에 발이 닿아 있었다. 모레아 숲의 초입에는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으….”
바네사가 다시 겪는 끔찍한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이마를 덮었다. 바네사는 정신없이 그 손에 기대 헐떡거렸다.
“원래 이동마법에 익숙하지 않으면 대부분 그렇습니다. 조금만 참아요. 잠깐 나 좀 볼래요?”
기드온은 바네사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눈을 맞추었다. 고통에 붉어진 눈이 그의 눈동자를 흐릿하게 응시했다.
“대장님!”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고함쳤다. 기드온의 시선이 그녀를 스쳐 지나가고 그녀의 턱을 감쌌던 따뜻한 손이 비껴 나갔다.
바네사는 멍하니 떨어지는 그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안달루스.”
기드온은 마침내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바네사는 이제 안전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그에 비해 작고 가냘프기만 한 바네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과 비교하면 어느 누가 작지 않고 가냘프지 않겠느냐만 그에게는 그녀가 몹시도 그러했다.
“바네사.”
바네사는 멍청하게 그를 올려 보았다.
비가 촉촉하게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적셨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의 단정한 이마를 덮었다. 온기를 담은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에게 다정한 시선을 보냈다.
“고생했어요.”
남자의 눈은 강인해 보였고, 제게 닿은 손은 크고 따뜻했다.
훌륭한 외양으로도 모자라서 그는 특수 전투 부대의 대장이고, 공작가의 유일한 주인이었으며 공동회의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저는 겨우 학생으로, 형편없는 젖은 몰골로 서 있었다.
이런 순간에, 이렇게 인정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나.
“이제 아카데미로 돌아가야지.”
남자는 웃었다. 바네사는 천천히 그의 품 안에서 물러났다.
멀리서 특전대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 ⚜ ⚜
마법을 통해 모레아의 숲 근처로 귀환하자마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기드온은 대원들이 바네사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고는 그들이 가져온 담요를 빼앗았다.
모레아는 몹시 더워서 담요 같은 건 딱히 필요치 않았지만, 바네사는 담요를 뒤집어쓴 채 멍하니 쭈그려 앉았다. 기드온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 뒤로 그와는 인사할 새도 없었다.
누군가 사무적인 태도로 ‘보상은 차후에 논의할 테니 학생은 어서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바네사는 포탈로 향하는 마차에 앉아 있었다.
“고생했어. 오늘 내로 아카데미에 도착할 테니 걱정하지 말렴.”
아카데미에서 나왔다는 조교수, 넬이 토닥이는 목소리로 안심시켜 주었다. 바네사는 열없이 뺨을 슥슥 비비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괜찮아요. 죄송하지만 눈을 조금 붙여도 될까요?”
“당연하지. 피곤해 보이는데 푹 쉬렴. 도착하면 깨워 줄게.”
바네사는 뚫려 있는 창문 옆으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웃음과 함께 휘어지는 눈, 슬쩍 올린 입꼬리. 다정한 목소리와 따뜻한 손. 제 앞을 가로막던 커다란 등.
‘바네사.’
‘날 믿어요.’
인정하니 쉬웠다. 애매 모호했던 것들이 확실한 이름표를 달고 물밀듯 밀려왔다. 처음 겪어 본다 해도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기쁘지 않았다.
나와 그 사람. 우리는 너무나 다른 처지니까.
⚜ ⚜ ⚜
선생님, 혹시 기억나시나요?
아주 예전에 말이죠, 선생님이 그런 편지를 보내 주신 적이 있어요. 선생님의 가족분이 써 주셨다는 구절을 필사해 주신 것이었죠.
「사랑으로 인해 내 모든 것이 바뀌는 경험은 아주 진귀하고 드문 일이니 이 편지를 기억했다가 나중에 꼭 다시 말해 주면 좋겠군요.」
아주 진귀하고 드문 것이 맞을지도 몰라요. 처음이니까. 처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인가 봐요.
그런데… <다이크가의 세 형제들>의 주인공, 안나는 첫째를 만났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에 대해 묘사하고 있었어요.
그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을 때 세상은 봄이었다고요. 하지만 전 그렇지 않았어요.
전 너무 절망적이었어요. 앞이 캄캄하고, 심장은 불안정하게 뛰고, 숨이 막혔어요.
왜냐하면 제 감정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 것일지를 알았기 때문이에요. 의미도 없는데 가치도 없어요.
그 사람과 저는 너무나 다르거든요. 이루어질 리가 없어요….
피어나자마자 깨달은 게 이런 거라니. 우습죠?
감정이 피어나는 것은 이성과는 별개였기에 제가 다스릴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접는 건 제 맘대로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너무 고통스럽고 우울해요. 저는 왜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일까요?
바네사 로즈 올림.
⚜ ⚜ ⚜
바네사는 포탈을 타기 전, 선생님께 보낼 편지를 썼지만 그냥 찢어 버렸다.
여과 없이 쓴 편지는 흉했다. 또한 선생님께 보낼 내용은 아니었다.
아니, 보낸다 해도 마음을 접고 보내기로 했다. 그땐 웃으면서 쓸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발데르 공작이라니.
조교수 넬의 말대로,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치스럽게도 다섯 번 연속으로 포탈을 탄 덕분이었다.
그 결과 서부의 끝자락에서 북부 쪽에 가까운 아카데미까지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카데미 측에서 네가 최대한 빨리 복귀하기를 원했거든. 너도 피곤해 보이는데 다행이야.”
넬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바네사는 사실 이 조교수를 처음 만나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수학을 가르치는 봄발로우 교수의 아래에서 일한다고 했다.
“아니에요. 그리 피곤하지 않아요…. 저 때문에 모레아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뭘, 사실 좀 좋았어. 아, 이렇게 말하면 실례인가?”
넬이 눈치를 보며 머리를 긁적이자 바네사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마법진 수식에 관심이 아주 많거든. 네가 밟은 공간이동 마법진을 보는데 정말 대단해서 말야. 모레아에 있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니까.”
넬이 변명하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땠는데요?”
“이미 용도를 다했기에 많이 흐릿해졌지만 그 완성도가 굉장했지. 수식이나 에디르네어 문장 하나하나가 아름다웠달까? 정말 대단했어!”
수식에 관심이 많다는 말처럼 넬의 눈은 심히 번쩍이고 있었다.
바네사는 또다시 ‘그 소년’을 떠올렸다.
공간이동 마법진을 그려 낸 것으로도 모자라서 완성도까지 놀라웠다니.
그 소년은 도대체 누굴까?
그 뒤로는 별 대화 없이 잘 정돈된 돌담길을 걸어갔다. 피곤함에 눈을 비빌 무렵,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나무들 사이로 아카데미의 높은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감정과 피로에 지친 몸이 안도감에 축 늘어졌다.
바네사는 추운 바람에 붉어진 코끝을 훌쩍거렸다.
집에 돌아왔다.
⚜ ⚜ ⚜
기드온은 멀리서 바네사가 아카데미의 조교수와 함께 포탈로 향하는 마차에 타는 걸 확인했다.
보호자도 있고 하니 바네사는 금방 아카데미에 도착할 것이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동굴 안에서야 제가 직접 지키고 함께 있었지만….
“대장님.”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기드온은 몸을 돌려 모레아의 숲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무려 대장의 실종에 휴가를 받았던 대원들까지 모두 달려와 숲 안은 북적북적했다. 그것도 대령급들이 몰려와 시끄럽기까지 했다.
“대장님이… 실종. 풉.”
“이건 길이 남을 놀림감인데요.”
킬킬대는 대원들을 귀찮다는 듯 떨쳐 내며 기드온은 바네사가 움직였던 궤적을 따라 걸어갔다.
“이미 조사를 마쳤지만 나온 게 없습니다. 이동 마법진은 흐려져 버려서….”
“알아낸 것도 없이, 뭐 하려고 이렇게 많이 몰려와 있나.”
쌀쌀맞은 목소리에 대원들이 아우성을 쳤다.
“대장님이 걱정되어서 달려온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맞습니다! 전 휴가였단 말입니다!”
놀리려 달려온 것이 분명했으나 그들은 제 희생을 몰라준다며 분개했다. 물론 기드온은 손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동굴 안은요? 그 학생이 봤다는 소년에 대한 단서는 없었습니까?”
기드온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이 분주히 뻗어 나갔다.
“…먼저 폐하께 보고드린 뒤에 내용을 공유하겠다.”
왕을 언급하는 목소리에 대원들은 즉시 수긍했다.
기드온은 이동 마법진의 작은 흔적만 남아 있는 흙 위를 더듬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마물의 사체를 정리하는 대원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마물의 씨앗을 만든 자들이, 밤 반달루의 마법진이 모레아 숲에 있다고 생각했다면.
마물의 범람을 통해 밤 반달루의 마법진을 망치고 프리바를 위험케 하려 했다면.
밤 반달루의 마법진을 망치려는 자들은 누구인가.
밤 반달루의 마법진을 지키려는 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