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47)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47화(47/146)
“…울어?”
“바네사! 왜 그래요?”
체바티도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바네사는 제가 미쳤다고 생각해서 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기에 여전히 침대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빌어먹을, 갑자기 <다이크가의 세 형제들>에서 첫째 딜런 다이크를 욕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 책에서 첫째 다이크는 부모님도 버리고 안나에게 달려가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지. 그리고 바네사 로즈는 갑자기 침대에서 엎어져서 울고 있고.
심지어 자신은 우는 이유도 하찮았다. 갑자기 씻다가 찰랑이는 물을 보니 동굴 안의 호수에서 그와 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바네사는 여전히 침대에 고개를 박은 채로 웅얼거렸다. 훌쩍이는 소리는 덤이었다.
“나… 망했어.”
“아니, 뭐가 대체 망했다는 거야? 내가 참다 참다 묻는다. 요즘 왜 이러는데?”
리나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덕분에 잠옷에 섬세하게 붙어 있는 레이스가 팔랑거렸다.
“나….”
“어! 빨리 좀 말해! 우리 집에서 울다니 이건 치욕이야. 우리 엄마한테 말하면 넌 내일부터 오렐리아의 아름다운 명소들과 우리 집안의 멋진 전통들에 대해 하루에 세 시간씩 듣게 될 거라고.”
리나가 줄줄 쏘아붙이자 바네사는 훌쩍이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체바티는 붉어진 뺨과 그렁그렁한 파란 눈을 보며 걱정스럽게 눈꼬리를 내렸다.
“바네사, 무슨 일 있었어요?”
“내, 내가 첫째 머리가 꽃밭이라고 했잖아.”
“뭐?”
리나는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첫째? 아, 그 문학 과제.
“사실 내, 내 머리가 꽃밭이야. 난 정말 미쳤어.”
바네사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리나와 체바티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당장 달려들어 바네사를 흔들기 시작했다.
커다란 침대는 셋이 올라타서 몸을 흔들어 대도 멀쩡했다.
“누구야!”
“누구예요!”
바네사는 아무 말 없이 젖은 눈가만 비볐다.
궁금증에 숨이 넘어가는 리나와 체바티는 머리를 핑핑 돌렸다. 리나는 일단 단호하게 내뱉었다.
“에반은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당연하죠, 에반인데 왜 울겠어요. 특전대 실습에서 돌아온 뒤로 이러니까 특전대원들 중 하나일 것 같네요.”
체바티가 냉철하게 분석했다. 리나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럼 우린 모르잖아!”
“아니죠. 바네사가 만난 특전대원 중에 아주 유명한 사람이 하나 있었잖아요. 바네사와 함께 사라지기도 했고요.”
리나는 눈을 잠시 위로 굴렸다가 입을 떡 벌렸다.
“설마 그 사람?”
바네사는 모른 척 천장만 바라보았다. 이 저택은 천장의 벽지마저 반짝거리고 손님방에도 저렇게 화려한 샹들리에를 쓰네….
리나는 시선을 피하는 바네사를 보며 애써 입술을 떼었다.
“그-건 굉장히. 뭐랄까.”
“리나는 바네사가 이상한 사람 만날까 봐 매일 걱정했잖아요.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체바티마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바네사는 다리를 모아 끌어안았다. 시무룩한 티가 역력하자 리나는 수십 번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음, 그 사람도 네게 호감이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 그치? 우리는 본 적이 없으니까.”
체바티의 명명에 따르면 ‘바네사가 최고야 병’을 가진 리나마저 저렇게 말하니 바네사는 더욱 자신이 없어졌다.
리나와 체바티마저 놀라는 이유는 분명했다. 너무 잘난 사람이라서.
“나도 안 될 것 알아.”
“그 태도는 옳지 않다고.”
리나는 즉시 반박했지만 바네사는 힘없이 말했다.
“내 처지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거야. 프리바에 유일한 공작 작위를 가진 사람인데 나랑 어울리는 게 말이 되냐고.”
바네사는 다리를 껴안고 있던 팔을 풀고 뒤로 휙 누워 버렸다. 반복적인 자수가 수놓아진 이불은 몹시도 푹신했다. 퉁퉁 부은 눈가는 열감이 느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물기마저 닦아 냈다.
그러다 기드온이 손수건으로 제 눈가를 닦아 주던 모습이 떠올라 눈만 질끈 감았다.
“걱정 마, 이미 포기했으니 곧 좋아질 거야. 난 그렇게 희망 넘치는 사람은 아니거든. 이제 연락도 하지 않을 거고….”
리나와 체바티 모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고민 중인 것이 티가 나서 바네사는 약간 웃었다.
“됐어. 아무 말도 하지 마. 위로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응원을 원하는 것도 아니란 말이야. 다만 내가 이상해 보일 때는 이런 이유인지만 알아 둬.”
리나는 입술만 달싹이다가 바네사의 옆에 누워 버렸다.
“그럴게.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은 말을 타고 강 근처를 달리자. 어때?”
“그거 좋네요. 여기가 릴나우 강이 흐르죠?”
빠르게 바뀐 화제에 바네사는 웃었다.
그래, 이렇게 친구들과 떠들면서 시간이 지나다 보면 감정은 곧 잊힐 거야.
바네사와 체바티는 오렐리아 지방에 델리나 가문이 미치는 영향력을 실감하며 한 주를 흘려보냈다.
리나와 함께 시장을 지나가면 시장 상인들은 웃으며 주스를 따라 주고는 했다. 물론 리나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대가를 지불했다.
셋은 하얗고 까만 조랑말을 빌려 강가를 산책하기도 했다.
그 유명한 릴나우 강은 햇빛을 반사하며 파랗게 반짝거렸고 가끔은 구름을 수면에 반사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바네사는 어쨌든 이제 물이 많다고 해서 울지는 않았다.
“엄청난 발전이네.”
“하긴, 갑자기 물이 많다고 계속 울면 큰일이지.”
바네사가 한숨처럼 말하자 리나는 말없이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애써 행복한 한 주를 보낸 바네사는 방학이 끝나기 전 마지막 주, 리나와 체바티를 남겨 두고 먼저 오렐리아 지방을 떠나 님루드로 향했다.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보인 님루드는 여전했다.
복작복작한 소음과 기름칠이 덜 된 기계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무너질 것같이 높이 솟아오른 집들은 또다시 기울어지고 솟아올랐다.
바네사는 익숙한 길을 따라 님루드 319번지, 제니언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가는 길목에 있던 <카페, 둘체>를 보고는 우뚝 멈췄다. 기드온을 처음 만난 곳이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선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잠시 말을 잃었었다.
‘어떤 케이크가 맛이 좋나요?’
나직한 목소리. 갑자기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유리문을 통해 보이는 케이크 진열대와 우락부락한 주인아저씨는 똑같은데 저만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안 될 마음을 품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일이 없었다. 정말로.
여기에 온 마음 자체가 불순할지도 몰랐다. 제니언은 안중에도 없이, 기드온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닐까?
스스로 연락할 용기는 없으므로 우연히 마주치길 바라서.
그 비겁한 마음에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포기했다 할 땐 언제고, 사실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그가 이 마음을 눈치채 주기를.
바네사는 훌쩍이며 제니언의 집으로 향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걷는 여자를 보고 사람들은 놀라서 휙휙 비켰다.
바네사는 말뚝만 보이는 319번지를 보고는 젖은 뺨을 훔쳐 냈다. 그리고 마당에 숨겨진 마법을 탐구했다.
물론 제니언은 대단한 마법사였으므로 바네사에게 보이는 것은 거의 없었다. 무언가를 숨기는 종류의 마법이나 겨우 파악했다.
바네사는 단숨에 제니언의 결계를 부수던 기드온을 떠올리며 더욱 슬퍼졌다.
실력조차 상대가 안 되잖아.
“제-니언!”
바네사는 화풀이하듯 말뚝을 쾅쾅 내리쳤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제니언 포키스 폴리스 스타게라 할아버지!”
“야!”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솟아오른 집에서 제니언이 창문을 열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누가 할아버지야! 조용히 못 해!”
“할아버지가 더 시끄럽잖아요! 내가 언제 시끄러웠다고!”
바네사가 역으로 버럭 소리치자 제니언은 미쳤냐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제니언은 파탄 난 성격으로 유명한 마법사였으므로 바네사처럼 소리 지르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바네사는 제니언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아니, 왜 오자마자 울고 있는데? 말뚝을 때리더니 손이 아팠냐?”
“빨리 여기 독 뿜는 꽃들이나 진정시켜 달라고요!”
제니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쟤가 미쳤나?- 꽃들을 잠재우자 바네사는 씩씩대며 커다란 짐을 들고 앞뜰을 지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니언.”
바네사가 젖은 눈으로 비장하게 말하자 제니언은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질겁하는 표정으로 커튼 뒤에 몸을 숨겼다. 물론 커다란 몸은 반도 가려지지 않았다.
“저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정말 안됐군. 애정처럼 쓸모없는 감정이 없거든. 특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렇게 우는 것을 보아하니 돌아올 것이 아닌가 본데.”
혀를 찬 제니언이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자 바네사는 충격받았다.
아니, 저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지?
“제니언이 그런 것도 알아요?”
제니언은 코웃음 치고는 들고 있던, 누군가의 머리통만 한 작대기를 휘둘렀다. 손에 들려 있던 바네사의 짐은 허공에 달린 문을 통해 사라져 버렸다.
“알아서 쉬다 가고 난 괴롭히지 말라고.”
“싫어요.”
바네사가 씩씩댔다.
“조언해 주지. 대단한 마법사가 되고 싶다면 애정 따위는 접어 두라고. 시간이 많냐? 아니면 고백하고 차여.”
귀를 후빈 제니언이 단호하게 말하자 바네사는 축 처졌다.
바네사는 기드온과의 추억이 많은 제니언의 집에서 이리저리 널뛰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연습했다.
앞뜰에도, 숲에 숨겨진 호수에도, 님루드 광장의 분수에도 그에 대한 기억이 걸려 있어 연습하기 좋았다.
그 와중에 제니언은 바네사의 마법 하나에 비웃음 둘, 마법 두 개에 비웃음 다섯을 날렸다.
“마력 조절을 아직도 못 하다니. 요즘 애들이란! 멍청하다는 말도 아깝다니까.”
물론 그렇게 말한 다음에는 은근슬쩍 해답이나 방법을 중얼거려 주었다. 그래도 바네사는 제니언을 노려보다가 다음 날 식사에 식초를 섞었다.
님루드를 떠날 무렵에는 바네사는 제 감정을 잘 숨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기드온에게서 온 편지는 여전히 뜯어 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아카데미에 돌아온 뒤에도 그 편지의 봉인은 뜯어지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