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51)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51화(51/146)
바로 앞에 그가 있으니 아예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를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외면했던 감정을 다시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까 봐 두려웠다.
왕은 체바티에게 먼저 상을 걸어 준 뒤에 우등상 메달에 새겨진 이름을 읽으며 바네사에게 상을 걸어 주었다.
“바네사 ‘로즈’라. 후에 만개할 미래를 기대하겠어.”
“가, 감사합니다.”
바네사는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제발 빨리 내려갈 수 있기만을 빌었다.
수여식이 끝나자마자 머뭇대는 학생들과 달리 바네사는 도망치듯 단상을 떠났다. 왕은 갸웃거렸다.
“내가 그렇게 무서웠나? 왜 저리 달달 떨지. 귀여운 학생이로고.”
“머리카락 좀 정리하십시오.”
옆에 있던 시종이 안타깝게 속삭였으나 왕, 비나 돔 프리바는 신경도 쓰지 않고 볼을 긁었다.
“오랜만에 학생들을 보니까 신선하고 좋네. 늙은이들하고만 회의하니까 좀 지겨웠거든…. 하는 말이라고는 매일 안 됩니다, 폐하. 이건 제 땅입니다, 이건 제 꺼, 이건 니 꺼,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당장 옆에 계신 공작께서 겨우 이십 대입니다, 폐하.”
알반 백작이 떨떠름하게 말했으나 왕은 코웃음 쳤다.
“외모야 그렇다 쳐도 이미 속은 다 늙어서 나보다 더 무심하잖아. 저 풋풋한 학생들을 보며 그따위 표정이라니.”
기드온은 그제야 바네사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시선을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했다. 기드온은 약 1년간, 누가 봐도 반쯤은 죽어 있는 것처럼 우울해 보였기 때문이다.
“제 표정이 좋지 않았다면….”
“아, 뭐. 설마 사죄라도 하려고? 그럼 웃어 봐!”
기드온은 바로 시선을 돌리고 무시했다. 왕은 혀를 찼다.
“나라에 유일한 공작이라는 게 어디 하자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나 듣고.”
알반 백작이 급하게 헛기침했으나 왕은 멈추지 않았다.
“장난치냐? 도대체 언제 결혼할 건데? 네 나이가 이제 스물 중반이다! 지금도 널 특전대의 장으로 넣어 이렇게 되었다는 소리가 귀에서 울려. 안 그래도 일 중독인 공작을 폐하께서 어쩌고저쩌고!”
“감히 그런 소리를 올린 자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무료한 말투로 대답하는 공작을 보며 왕은 머리를 짚었다. 물론 그 와중에 머리카락은 더 헝클어져 이제 완전히 곱슬로 보였다.
“멍청하긴.”
“감사합니다.”
비나 돔 프리바는 가슴을 쳤다. 전대 발데르 공작의 비석이라도 찾아가 말해야 이 답답함이 풀리리라.
그대는 제법 능구렁이 같았는데 자식은 왜 저렇게 키웠나, 대체!
⚜ ⚜ ⚜
왕과 그 휘하의 귀족들이 다른 곳으로 안내되어 사라지고 학생들은 이리저리 모여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진기는 제법 비싼 물건이었으나 좋은 집안의 귀한 자식들이 많아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 펑펑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네사, 리나! 여기요!”
체바티가 리나와 바네사를 끌고 자신의 부모님께 다가갔다.
오랜만에 보는 체바티의 부모님은 여전히 다정한 모습으로 바네사와 리나를 반겨 주었다. 곧 리나의 부모님도 다가와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 명씩 독사진을 찍기도 하고 여럿이 몰려 찍기도 했다. 리나와 체바티의 가족들은 바네사를 위한 꽃도 따로 준비해서 바네사의 품에는 수많은 꽃들이 안겨 있었다. 에반은 잠시 다가와서 커다란 노란색 꽃 한 송이를 안겨 주고 사라졌다.
누구 하나 그녀를 배제하지 않았지만 바네사는 어쩐지 가족들만의 시간을 보내도록 빠져 줘야 할 것 같았다. 사진에 바네사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난 저기, 가 볼 데가 있어서.”
“뭐? 무슨 소리야?”
리나가 어이없게 외쳤지만 바네사는 그냥 웃어 버렸다. 리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되고 체바티와 수업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것은 너무나 큰 행운이었다.
“바네사, 신경 쓰지 말아요. 곧 체자르도 와요. 같이 식사해요!”
“알았어, 고마워. 좀 이따 다시 내려올게. 짐 덜 챙긴 것이 있어서 그래. 금방 올게.”
리나와 체바티 둘 다 바네사를 재차 잡았지만 바네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품에 가득 들린 꽃들은 참 향기로웠다.
바네사는 기숙사로 돌아가 안쪽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이미 짐들은 완벽하게 챙겨져 있었고 더 챙길 것은 없었다.
일단 무거우니 꽃들을 내려놓기로 했다.
리나와 체바티의 가족들이 마음을 담아 준비한 꽃다발들은 정말 커다랬다.
선생님이 보내 주신 꽃은 제가 적당한 크기로 만들었지만 다른 가족들은 경쟁하듯 더 큰 것들로 가져왔기에 과장 조금 섞으면 그녀의 몸만큼 커다란 크기였다.
리나의 가족들은 짙은 분홍빛 꽃들로 다발을 만들었고 체바티의 가족들은 하얀색 작은 꽃들과 파란색의 들꽃을 섞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었다. 혼자 있을 자신을 계속 챙긴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도 아니니까.
바네사는 기숙사의 침대 위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달리아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조심해서 꽃잎을 매만졌다. 당장 힘을 주면 찢어질 듯 부드러웠지만 동시에 심지가 단단했다.
곧 달리아 꽃잎 위로 동그란 물방울들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톡톡 떨어져 일부는 튕기듯 흘러내리고, 일부는 꽃잎 위를 아슬아슬하게 장식했다.
⚜ ⚜ ⚜
바네사는 꽃다발들을 기숙사에 내려놓고 다시 리나와 체바티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그 전에 젖은 눈매나 달아오른 뺨을 식힐 필요가 있었다.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바네사는 모든 곳을 눈에 새기고 떠나고 싶었다.
이곳을 떠나면 그립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매일같이 공부하던 도서관의 창가 옆 책상, 친구들과 떠들던 호숫가의 나무 그늘 아래, 모두 함께 달렸던 거대한 둘레길, 향기가 피어오르는 숲속.
다만 바네사가 가장 사랑한 장소는 시계탑 꼭대기의 텅 빈 공간이었다.
바네사가 처음으로 아카데미에 혼자만의 공간이라며 찾아낸 곳이었고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를 가장 많이 작성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카데미의 성벽 위로 노을이 내려앉는 모습을 보면 누구든지 아카데미 그 자체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바네사는 나선형의 계단을 타고 아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밖에서 학생들의 신나는 고함이 울려 퍼졌으나 어쩐지 멀게만 느껴졌다.
드디어 마지막 계단에 발을 올린 순간, 시계탑 꼭대기에 뚫려 있는 네모난 창 앞엔 이미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주 커다란 사람이었다. 오직 뒷모습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는 아카데미의 정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나타난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바네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손가락만 꼭 접었다. 그리고 급히 시선을 내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그에게도 들릴까 걱정이었다. 그 정도로 격하게 튀는 박동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바네사도 기드온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네사는 시선을 내리고 있으니 그가 어떤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를 몰랐다.
아마 무례하고 염치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바네사를 지키려 직접 함께 동굴에 떨어졌던 그의 편지를 모두 무시하고 연락조차 없었으니까.
그래서 등을 돌려 도망치고 싶었다.
남자가 걸어왔다. 바네사는 이제 겨우 한 걸음 간격밖에 되지 않는데도 고집스럽게 눈을 들지 않았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이나 겨우 볼 수 있을 뿐, 그 사이에 숨겨진 파란 눈은 볼 수 없었다.
기절할 것 같은 침묵이 흐른 뒤, 남자는 느릿느릿한 손길로 무언가를 머리에 꽂아 주었다.
바네사는 숨도 쉬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졸업 축하합니다.”
낮고, 어쩐지 지친 목소리였다.
“바네사.”
바네사는 숨을 몰아쉬느라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바네사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닿을 듯 말 듯한 손길을 천천히 떨어트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바네사를 보던 그는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점점 멀어지는 소리에 바네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더듬대는 발걸음이 그의 뒤를 쫓아 계단을 급히 내려가다가 천천히 멈췄다.
쫓아가서 어쩌려고?
그냥 고맙다는 말이라도, 그 한마디라도 하고 싶었다. 마주치니 알았다. 감정은 작은 새싹 정도가 아니라 이미 뿌리까지 거대한 나무였다.
물 한 방울 주지 않았음에도 이미 그리 자란 것을 어찌하겠어. 그러니 목마른 나무에게 물 한 모금쯤은 주기로 했다.
키가 큰 남자는 걸음도 빨랐고 보폭도 넓었으나 바네사는 더 열심히 뛰어갔다.
발걸음 소리가 바닥을 울렸음에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바네사는 그의 팔을 급하게 잡아채 멈추게 했다. 남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고마워요, 기드온.”
황금색 눈동자가 물기 어린 푸른 눈을 빤히 응시했다.
아, 맞아. 항상 저런 눈이었다. 무언가 피어나는 것처럼 색채가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은.
“바네사.”
남자는 들릴 듯 말 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뒷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누군가가 옆의 복도에서 튀어나왔다.
“발데르 공, 폐하께서….”
알반 백작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바네사와 기드온, 두 사람의 조합이 의아했기 때문이다.
바네사는 급히 기드온의 팔을 잡았던 손을 떼어 냈다.
세 사람 사이에 침묵만 흐르자 당황했던 알반 백작은 표정을 갈무리하고 넉살 좋게 입을 열었다.
“나 참, 공. 어느새 인재를 또 골라내셨습니까! 우리 딸이 보았다면 발을 굴렀을 것입니다.”
알반 백작의 말에도 기드온은 오로지 바네사를 내려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미 백작에게 돌아가 있었다.
“자네가 바네사 로즈였지. 아까 단상에서 보았어.”
인상이 좋아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이상한 침묵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내 딸이 자네에 대해서 몇 번 이야기했거든. 굉장히 좋게 말하더라고. 혹시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알반 성으로 찾아오게. 인재에게는 언제든지 열려 있는 곳이거든.”
“감사합니다….”
바네사는 공작과 백작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또다시 멀어진 간격에 기드온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공.”
“가겠습니다.”
알반 백작이 먼저 몸을 돌리고 기드온은 짧은 순간에 손으로 바네사의 젖은 속눈썹을 훔쳐 주었다.
울지 말라는 작은 속삭임을 남기고 기드온은 멀어졌다.
선생님은 없고 그는 이렇게 다정한데 어떻게 안 울지.
바네사는 그가 사라져 버린 옆쪽의 복도를 원망스럽게 응시했다.
이제 나무는 베어 내지도 못할 것이다. 잠시 준 물을 욕심껏 들이켠 나무는 튼튼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바네사는 손을 들어 제 머리에 꽂힌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가 머리카락을 넘겨 꽂아 준 것은 머리 장식이었다. 졸업식 때 안겨 주는 꽃 대신인 것처럼 끝부분이 작은 꽃 모양이었다.
선생님, 저는 정말 망했어요. 어떡하죠?
하지만 이제 선생님과도 헤어질 시간이네요.
⚜ ⚜ ⚜
선생님께.
졸업식이 잘 끝났습니다. 제 마지막 성적표와 사진을 동봉합니다.
꽃은 잘 받았습니다. 달리아 꽃다발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제가 다시 되돌려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어 아쉬워요.
선생님께 받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선생님.
바네사 로즈 올림.
⚜ ⚜ ⚜
바네사 로즈 양에게.
바네사 로즈 양은 내가 처음으로 ‘직접’ 선택한 피후원자입니다. 내게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후원은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끝이 나는 조건이었으나 훌륭한 성과를 냈으니 바네사 양이 자리 잡는 것을 돕고 싶습니다.
크진 않지만 적당한 크기의 집을 지원하려 준비 중입니다. 퓌돔 근처는 집을 빌리기가 힘이 드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으로부터.
⚜ ⚜ ⚜
선생님께.
마지막까지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첫 시작은 모두에게 힘이 드니까요.
현재 퓌돔에 있고 괜찮은 숙소를 빌려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왕실 마법부에 면접 예정입니다. 월급이 높진 않아도 첫 월세쯤은 감당할 수 있을 거예요. 은행에서 빌릴 수도 있고요.
선생님은 이미 제게 충분히 후원해 주셨어요. 부족한 것은 정말로 하나도 없었어요.
이제 저 대신 다른 피후원자가 선생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성함을 밝히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후에 보내 주신 학비를 갚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많은 곳에 선생님에 대한 감사함을 충분히 표하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더 좋겠어요. 뭐든 할 수 있으니까요.
요즘 날이 참 좋아요. 그래도 밤에는 조금 쌀쌀하니 건강 잘 챙기세요.
선생님이 몹시 그리울 거예요.
바네사 로즈 드림.
⚜ ⚜ ⚜
바네사 로즈 양에게.
바네사 양, 퓌돔의 월세는 정말로 비쌉니다. 그나마 조금 싼 외곽으로 빠지면 위험한 곳도 제법 있습니다.
집은 내가 지원해 주고 싶습니다. 보호자가 없는 여성이라면 가장 좋은, 안전한 곳에 거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으로부터.
⚜ ⚜ ⚜
후원자 선생님께.
선생님. 이미 너무 과한 것들을 받았어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정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항상 받기만 했어요. 제가 얼마나 감사한지 겨우 이 종이 한 장으로 전달하기엔 부족해요.
선생님은 아무것도 없는 고아가 스스로의 생을 일굴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 제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으셨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저와의 거리를 유지하길 원하시잖아요.
그렇다면 이만하셔도 돼요. 제가 더 선생님께 의지하도록 하지 마세요. 저는 이제 혼자만의 삶을 꾸려 나가야 하잖아요.
감사합니다.
가끔 편지하는 정도는 받아 주세요.
바네사 로즈 올림.
⚜ ⚜ ⚜
그 뒤로는 어떤 답장도 오지 않았다. 호니르는 외로이 빈 입구만을 내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