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53)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53화(53/146)
우표? 호니르가 생긴 뒤로는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그가 의아하게 편지를 집어 들자 뒤이어 따라온 보좌, 미구엘이 조잘거렸다.
“아, 이번에 새롭게 후원하시는 피후원자가 보낸 것입니다. 주소는 다른 곳으로 지정해 놓았는데 공작님께서 직접 고른 사람이라고 들어 여기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불쾌하시면 치울까요?”
기드온은 편지를 뒤집었다.
「선생님께, 바네사 로즈 올림.」
각이 없어 부드러운 글씨체였다.
“…아니. 서류 확인 끝났으면 퇴근해. 이… 바네사 로즈라는 사람에게는 호니르를 보내 주고. 매달 연락할 때마다 우표를 붙이긴 어려울 것 아닌가.”
“예, 알겠습니다.”
미구엘이 나가고 혼자 남은 기드온은 무심하게 봉투를 뜯어냈다.
봉투가 두껍긴 했지만 별 내용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대부분의 피후원자들이 보내는 편지는 단조로웠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고.
얼굴도 모르는 후원자에게 무슨 말을 하겠나? 제 성적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리고 필요한 것에 대해 서술할 뿐이지.
그래서 종이에 빼곡한 글씨를 보고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아카데미는 학기가 시작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는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나갔다.
‘바네사 로즈’는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알고 있는 말 중 가장 누군가를 높이는 말이 그것인 듯했다.
편지 위에는 고아원을 떠나는 자신의 모습과 감정에 대해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혼자 남은 듯한 외로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편지는 여관의 낡은 책상 위에서 편지를 쓰는 모습이 보이는 듯 생생했다.
편지를 모두 읽고 책상 위에 내려놓은 기드온은 스스로의 입가에 걸린 웃음을 알아차리고 약간 당황했다.
희미한 웃음을 그리던 입매가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애정을 담은, 격식 없는 편지를 읽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 오른 이후로 그럴 친분을 두지 않았다.
그를 이용해 가문의 부를 축내려는 자들이 너무 많았고 그는 그런 것들을 좌시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한 끝에, 그는 미구엘에게 보내라고 했던 호니르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제가 스스로 상품을 골라 주문했다.
새하얀 도자기같이 매끈한 호니르는 안에 박힌 마정석의 세공과 마법진의 섬세함이 극에 달해 가격이 굉장했다.
다만 공들인 편지에 대한 대가로는 나쁘지 않았다.
⚜ ⚜ ⚜
기드온은 첫 번째 편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 처음이라 이렇게 긴 편지를 보냈겠지.
다음은 다른 학생들과 같이 필요한 것들이 쓰인 평범한 연락이 올 테고 적당한 것들을 보내 주면 끝이었다.
프리바의 유일한 공작 위를 계승했으며, 특전대의 장을 맡고 있는 기드온은 일이 지나치게 많았다. 덕분에 주기적으로 연락받을 곳의 목록은 작은 글씨로 써도 사람 키만큼 길어졌다.
따라서 그는 용도별로 분리된 수십 개의 호니르를 가지고 있어 아예 호니르를 보관하는 방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미구엘이 피후원자들에게서 온 편지 중 바네사 로즈에게서 온 것을 분리해 가져왔을 때 기드온은 약간 당황했다. 그냥 두라는 말도 못 하고 받아 들 만큼.
우표가 하나뿐이라 짧게 보냈다더니. 호니르로 보낸 두 번째 편지는 길이가 첫 편지의 두 배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아, 그냥 따로 처리할까요? 저번에 별말씀이 없으셔서 이번에도 분리해서 가지고 왔는데요. 마법사의 싹이 보이는 피후원자라니, 드물지 않습니까!”
해맑은 미구엘의 말에 기드온은 약간 멈칫했다.
“그래, 두고 가. 다음부터는 가지고 올 필요 없다.”
“예, 알겠습니다.”
미구엘은 별 반박 없이 편지를 공손히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사라졌다.
편지를 뜯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로, 다른 서류들을 먼저 처리했다. 마물들이 번성한다는 보고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특전대가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닌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일부러 누군가가 조작질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다만 의심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프리바는 지나치게 거대한 나라였고 숨어 있을 곳도 많았다.
기드온은 휘갈기듯 몇 가지 서류에 서명한 뒤 직인을 찍었다. 자꾸 눈이 가려는 편지를 애써 무시한 채로.
그렇게 몇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그는 잉크가 닳은 펜촉이 종이에 긁히는 것을 보고서야 손을 멈췄다.
창밖을 보니 이미 어둠이 번지고 마정석 등불이 켜지고 있었다. 일에 시달리다 보니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혹은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었거나.
남자는 그제야 펜을 내려놓고 계속 제 신경을 갉아 먹던 편지로 손을 뻗었다. 그는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편지를 뜯어냈다.
두 번째 편지는 피후원자, 바네사 로즈가 아카데미에 도착한 이후에 작성된 것이었다.
새로운 피후원자는 모든 것에 경탄했다.
처음으로 가지게 된 호니르를 기뻐했고 제가 아카데미에 오게 된 것을 놀라워했으며, 기숙사의 작은 방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햇빛 냄새가 나는 하얀 이불이라. 그 구절에서는 멍청하게도 잠시 제 침대를 떠올렸다. 햇빛 냄새가 나던가?
기드온은 풍부한 감정이 담긴 편지를 보며 제가 굳어 버린 돌 같다고 생각했다. 건조하고 메말랐다. 하루는 그저 흘러갔고 어느 것도 특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네사 로즈의 편지를 읽으면, 꼭 과거로 돌아가 제가 아카데미에 있는 것 같았다.
아직 굳지 않았던 시절. 모두 건강하고 무탈하며, 저는 후계자로서 공부하고 있는 것처럼.
기드온은 쓴웃음을 삼키고 편지를 접었다.
⚜ ⚜ ⚜
바네사 로즈의 계속되는 편지에 그는 결국 펜을 들었다.
스스로도 이게 무슨 변덕인가, 생각했으나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바네사 로즈는 ‘선생님’이 보낸 답장에 몹시 기뻐했으므로.
훌륭한 학생에게 이 정도의 보상은 어려울 것도 없었다.
보상이라고 하는 건 사실 비겁한 이야기였다. 언젠가부터는 그도 바네사 로즈의 편지를 기다리게 되었으니까.
한 번 답장을 보내니 두 번도 어렵지 않았다. 그는 가끔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을 때 깨끗한 종이를 꺼내 들어 그 위에 단정한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기드온은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걸 깨달았다. 그 덕에 편지를 써 내려가는 펜 끝은 막힐 일이 없었다.
「바네사 로즈 양에게.」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다정하신 선생님께.」
바네사의 편지는 항상 그렇듯 다양한 색채로 눈이 부셨다.
그는 <다이크가의 세 형제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읽을 땐 진실로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고, 바네사가 훌륭한 성적을 냈을 때는 아마 바네사보다 더 뿌듯해했을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바네사 로즈가 모욕적인 소문에 휩싸였다는 소리엔 벌컥 분노가 치밀었다.
사사로이 사용한 적 없던 힘을 인식했다. 아무리 아카데미라고 한들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할까?
이미 굳은 채로 숨만 붙이고 있는 줄 알았다. 오랜 겨울이 지나 살아남는 생명체도 있겠지만 얼어붙어 죽어 버리는 것들도 있으니까.
그러나 편지에 봄의 꽃향기라도 실려 있었을까? 아니면 여름의 더위라도 숨어 있었을까.
마침내, 그는 정말로 바네사 로즈가 궁금해졌다.
편지 위의 내용으로 조각내 붙인 바네사 로즈가 아니라, 씩씩하게 돌아다니고 새로운 것들을 배워 나가며 가끔은 우울해지기도 하는 진짜 바네사 로즈가.
기드온은 특전대의 장이 된 이후 처음으로 사심을 담아 파견지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뒤로 며칠간 이어지는 휴가를 신청했다.
기드온 솔 발데르가 휴가를 냈다는 소식에 왕까지 놀라 그를 붙잡고 질문을 퍼부었다.
물론 기드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었을 뿐이었다.
“아니, 어디 가는데!”
“보고해야 할 사항입니까?”
“당연하지. 재미있을 것 같으니 말이야.”
“…….”
휴가가 승인 나자마자 기드온은 서고트로 떠났다.
그는 아카데미 근처를 꼼꼼하게 확인하며 마물 서식지를 살폈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러니 아카데미로 기어들어 왔던 마물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행임은 분명했다.
다만 선이 몹시도 불분명했다. 관련된 자를 하나 잡았으나 그는 이미 시체였다.
어차피 제니언의 집으로 갈 것이니 그에게 키메라에 대한 추가 연구를 부탁하면 되겠군.
전반적인 토벌과 조사를 끝낸 기드온은 님루드로 향했다. 님루드의 중심지에서 제니언의 집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그는 복잡한 길을 걸으며 첫 만남에 무얼 건네야 할지를 고민했다.
단것을 보내 줬을 때 좋아했지. 레몬사탕도 좋아한다고 했고. 케이크를 사 가면 좋아할 것 같은데.
기드온은 우연찮게 들른 가게에서 눈에 익은 파란 구두를 보았다. 구두의 주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드온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케이크 진열대로, 바네사에게로 걸어갔다.
님루드에서 보낸 휴가는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흘러가 버렸다. 시간의 흐름이 가끔 상대적이라고 느끼긴 했으나 이렇게까지 짧다 느낀 적이 없었다.
바네사 로즈는 그녀 스스로의 평가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가 편지 위에서 읽어 낸 것보다 더.
모든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고 열심히 노력했다. 제가 가지게 된 것에 감사했고 받은 걸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어 했다. 새로운 걸 경험할 때 반짝이는 그 파란 눈은 누가 봐도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다.
기드온은 함께 비를 피했던 나무 아래에서 ‘그렇게만’ 생각했다.
⚜ ⚜ ⚜
편지만으로도 관계는 쌓이고 있었는데 직접 만나기까지 했으니 인연은 더욱 확고해졌다. 편지 위엔 로즈 양 대신 바네사 양이라 적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기드온은 진심으로 바네사 로즈를 아끼게 되었다.
단 한 번도 친동기를 가져 본 적은 없었으나 실제로 가졌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기드온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후원자로서는 실격이었다. 바네사 로즈가 훌륭하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를 바랐다.
그래서 성 바란도 탄신일에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힘든 학업 속에서, 이날만은 오롯이 완벽하기를.
그는 처음에 단 한 상점에만 연락하여 상품 목록을 요구했다. 발데르 성을 관리하는 페레스가 지나가듯 제품의 질을 칭찬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좋은 질과 달리, 입은 제법 가벼웠던 모양이다.
발데르 가문의 유일한 주인이 해당 상점의 상품 카탈로그를 원했다는 소식을 어찌 들었는지, 퓌돔의 모든 상점에서 목록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만 주문을 받는 몇몇 마법사들의 유명한 가게에서도 은밀한 연락이 왔다.
「발데르 가문의 주인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더 좋은 상품을 제공해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연락 주십시오.」
덕분에 상품 카탈로그는 소설 양장본만큼 두꺼워졌으나 기드온은 그 모든 걸 꼼꼼히 살폈다.
무얼 가장 좋아할까.
해야 할 일들이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을 때면 우울한 표정으로 목록을 들었다. 선물을 고르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곤 했다.
기드온은 제 취향과 바네사의 취향이 몹시 달라 혹시 실망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도 되었으나 이 일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바네사는 모두 ‘선생님’이 고른 선물로 알 테니 제가 직접 하고 싶었다.
그렇게 열다섯 가지의 선물을 골랐다. 그제야 마음에 찼다.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은 자수로 마법을 실현하는 마법사가 만든 스카프였다. 아름다운 광택이 도는 흰 공단과 그 끝의 작은 자수.
동동 뜨는 끝이 마치 구름 같았다. 바네사의 푸른 눈과 잘 어울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얼핏 미소가 번졌다. 기드온은 길고 긴 주문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