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55)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55화(55/146)
그는 그 뒤로 며칠을 더 기다렸다.
편지를 보내지 못할 바쁜 일정이 있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기드온’에게도 보낼 것이라 자만했다.
그러나 여전히 바네사의 답장은 기드온에게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위는 명확했다.
기드온은 바네사가 ‘선생님’에게 보낸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런 감정 소모는 불필요한 짓이다. 저와 연락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가 명확한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이유는 모르지만 알 필요도 없지.
이제 바네사의 후원자로서의 편지만 신경 쓰면 되겠군. 그럼 된다. 그래, 별일 아니다.
기드온은 오만하게도 그리 되뇌었다. 그는 ‘선생님’에게 온 편지는 뜯어 보지도 않은 채로, 일어나서 집무실을 비웠다.
제 행동이 보통 때와 달리 몹시 이상한지도 모르고.
⚜ ⚜ ⚜
톡.
실낱같은 잠의 끝에, 기드온은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가벼운 무언가가 떨어져 부딪치는 소리.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번쩍 눈을 뜬 기드온은 급히 협탁 위의 등불을 켰다. 은은한 주홍빛이 근처의 어둠을 몰아냈다.
마음이 급해 발에 실내화를 대충 끼워 넣고 넓은 보폭으로 탁자 근처에 다가갔다.
탁자 위에는 보통 때와 달리 호니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원래라면 호니르의 방에 놓여 있어야 할 것이었다.
희미한 빛에 고운 광택이 도는 호니르, 그 위에 하얀 고리가 은은히 반짝였다.
그리고 여전히 호니르 입구엔 아무것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기드온은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구부려 앉았다.
“하하….”
스스로가 얼마나 우습고 처량한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저는 분명히 바네사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끝도 없이 편지 떨어지는 꿈을 꾼단 말인가? 오늘 밤에만 이미 세 번째였다.
웃음소리는 곧 잦아들었고 방 안은 이내 고요해졌다. 그는 여전히 거대한 방에 홀로 있었다.
남자는 짜증스레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눈시울이 경련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바네사 로즈는 그냥….
기드온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걷어져 있던 침대의 휘장을 내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밤에 다시 휘장이 걷어지는 일은 없었으나 안쪽에 누워 있는 사람이 깊은 잠을 잤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 ⚜ ⚜
무려 세 달간, 매일같이 잠을 설친 기드온은 모든 것에 무심하고 침착하다는 세간의 평을 완전히 뒤집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대원들의 간단한 사고는 짧은 한숨과 함께 알아서 처리하곤 했으나 언젠가부터 싸늘한 눈빛이 북풍처럼 몰아쳤다.
아무리 성질머리가 난장판인 대원들이라고 해도, 그 눈빛 앞에선 침만 꼴깍 삼키며 제 죄를 줄줄 고하게 되었다.
기드온은 특전대원들이 보고하러 올 때마다-심지어 사고를 치지 않았을 때도-오들오들 떠는 것을 인지하고 나서야 제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공동회의에서조차 그의 말에 끼어드는 자가 없었다. 잘못 말했다가는 칼이 날아올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였다.
왕은 손에 턱을 괴고 그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공작. 미쳤나?”
“….”
왕은 어디 시정잡배처럼 건들대며 물었다.
그런데도 차마 아니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제 일상이 비틀대며 휘청이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또 다른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드온은 요 근래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당연히 효율은 바닥이었고 일은 줄어들지를 않았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마침내 기드온은 꾹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요즘 내가…”
그러나 목소리가 흔들리더니 갑자기 뚝 끊겼다.
보좌관인 로난과 미구엘은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으나,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대뜸 꺼낸 말이.
“내일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예?”
기드온은 그때부터 사납게 펜대를 놀릴 뿐 아무런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잠시 굳었던 로난은 잽싸게 미구엘의 입을 막고 끌어냈다.
반항하며 몸을 뒤틀던 미구엘은 문이 닫히자마자 꿱 소리쳤다.
“아니, 여쭤보기는 해야 한다고!”
“그냥 일정을 비워 드려.”
“내일 당장 동부의 레반치와 만나 계약 논의를 하기로 되어 있잖아! 철로 사업이라고, 철로!”
“요즘 예민하신데 말 얹지 말고….”
그냥 해…. 눈 밑이 핼쑥해진 로난이 중얼거렸다.
기드온이 공작 위를 계승하자마자 함께 일하기 시작했던 그로서도, 저렇게 우울하고 갈피를 못 잡으시는 모습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신지. 한 번도 저러시지 않던 분이 저러시니 당황스러워 죽겠네.”
“뭐, 다들 불어난 감정에는 손쓸 도리가 없으니.”
로난의 중얼거림에 미구엘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
“아니. 하여튼 일정 맞춰 드리는 게 낫겠어.”
미구엘은 소심하게 툴툴거렸으나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고용인을 괴롭혀 본 적이 없는 분이었으니 일부러 저러는 것은 아니실 테다. 아마 무슨 일이 있으신 거겠지. 지금까지의 정확한 일상마저 무너트릴 큰일.
한숨을 쉰 미구엘은 급히 일정을 바꾸러 뛰어갔다. 콧대 높은 레반치가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 ⚜ ⚜
기드온은 순식간에 서고트에 도착했다. 포탈을 사용하지도 않고 거대한 마력을 투자하여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일부러 생각 없이 움직였다. 고민을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페르 교수의 이름을 대고 아카데미로 들어왔다. 다만 그 핑계가 된 아페르 교수는 황당해 보였다.
바쁘기로 유명한 특전대의 대장이, 그것도 공작 위를 겸하고 있는 자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슨 일인가? 내가 모르는 약속이라도 잡혀 있었나?”
“아….”
아페르 교수가 의아하게 바라보았으나 그는 당혹한 감정을 숨기는 것만으로도 제법 힘이 들었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모두 그를 가르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작이 된 기드온을 학생 시절처럼 편히 대했는데 그래서 더더욱 제가 하는 짓의 이상함이 두드러졌다.
십 대 소년일 때에도 한 적이 없는 짓들이었다. 제멋대로 일정을 바꾸고, 생각 없이 몸을 던지고.
“바, 아니. 도서관을 가려고. 아니, 도서관에 후원을 하려고… 잠시 들르려 했습니다. 필요한 장서가 있다 들어서.”
급히 이유를 만들어 횡설수설 덧붙이는 기드온을 보고 아페르 교수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건 교장 선생님께 가야 할 것 같구먼. 그런데 낯빛이 왜 그러나? 요즘 일이 그렇게 많나?”
“…….”
기드온이 음울하게 엉망인 낯을 쓸어내리자 아페르 교수는 혀를 찼다.
“아무리 바빠도 몸은 챙겨야지. 기부가 그리 급한 일도 아닌데 뭐 한다고… 쯧. 일단 이리 오게.”
아페르 교수는 차를 한잔 내주고는 일하던 자리를 정리했다.
기드온은 가만히 앉아 지친 눈을 껌뻑였다. 찻잔 속 물의 표면에 파문이 일었다.
아페르 교수는 기드온을 교장실로 데려다주었다. 밤베르크 아카데미의 교장은 기드온의 말을 듣고는 고마움을 표했다.
“기부야 언제나 환영이지. 하지만 저번에도 이미 많이 한 것 같은데. 논의가 된 문제인 건가? 자네가 정치적으로 공격을 받을까 걱정인데….”
“…괜찮습니다.”
객관적으로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기부자에게 해당 장소를 보여 주는 영광을 누리게 해 주게. 물론 다 알고 있는 곳이겠지만 제법 많이 변했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약속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혼자 좀 둘러본 뒤에 다시 퓌돔으로 떠나려 합니다.”
가만히 기드온의 얼굴을 살피던 교장이 입을 열었다.
“발데르 가문의 이름으로 보낸 호의에 감사하네. 언제든지 환영이니 편히 들르게. 건강은 잘 챙기고. 아, 감사 인사할 것이 하나 더 있었지.”
기드온의 의아한 눈빛에 교장이 빙그레 웃었다.
“아카데미의 학생을 끝까지 훌륭히 보호해 주었다고 들었네. 정말 고맙네.”
바네사와 동굴에 떨어졌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럼 그 학생이 어디 있는지 알려 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밀려 나왔다.
간신히 헛소리를 삼킨 기드온이 애써 미소 지었다.
“당연한 일이었으니 감사 인사는 필요치 않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기드온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교장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기드온은 높이 올라온 목깃을 더듬었다. 목을 죄고 있던 짙은 색의 얇은 타이를 풀어내자 숨이 좀 트였다.
사실 제가 여기에 왜 왔는지는 잘 모른다. 그저 퓌돔에 몸을 처박고 있으면 해결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 한 번이라도 보면 이 어수선한 마음이 정리되리라. 모든 것의 끝이든, 새로운 시작이든. 무언가 확신하게 될 거라고.
적어도 불면의 밤은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정처 없이 걷던 기드온은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네사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주말 이 시간엔 도서관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항상 걷던 길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어느 방향으로 꺾어야 할지, 어느 건물로 들어가야 할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도서관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온몸이 쿵쿵 울려 귀가 아팠고 든 것도 없는 속이 뒤집어졌다.
초조하게 뺨을 쓸어내리고 목깃을 다시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교장실에서 도서관이 있는 건물까지는 멀지 않았다. 과거의 어느 날처럼 그는 도서관 정문이 아니라 높게 솟은 나무들 사이에 있는, 알아채기 어려운 옆문으로 들어갔다.
항상 이 문을 이용했었다…. 눈에 띄는 걸 귀찮아했으니까.
책장들 사이로 연결되는 곳이라 문을 열자마자 어둑했다. 오래 묵은 종이 냄새가 피어올라 그를 반겼으나 울렁대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바빴다.
기드온은 바네사를 당장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덤덤히 인정했다. 약속된 만남이 아니니까.
그러면 깨닫는 것 없이 도망치는 결말도 나쁘진 않겠구나.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책장들 몇 개를 지나쳤을 때, 바네사는 그곳에 있었다. 햇살이 가득한 창가 자리. 그 빛을 오롯이 받으며 바네사가 그곳에 있었다.
어두운 책장 옆을 지나 빛 아래로 나서기 전, 그의 걸음이 천천히 멈추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숨이 가빠졌다. 떨리는 손끝을 숨기려 주먹을 쥐었다.
바네사의 하얀 손이 책장을 넘겼다. 빛을 받아 투명해진 속눈썹이 부드럽게 깜빡였다. 섬세한 이목구비는 깨끗하게 빛나고, 반짝이는 눈은 책 속 활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있는지도 모르고.
책장 아래 그늘 속에는 그만 홀로 서 있었다. 무언가의 시작을 깨닫고.
모두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떠들어 댔다.
‘굉장했지, 누가 귀에다가 종을 치는 것 같았다니까!’
‘나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랫소리가 들리던걸.’
그렇게 떠들어 댔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스스로의 감정을 인지하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 오직 절망감을 느꼈다. 이미 거절된 마음이었으니까.
이유는 모르지만, 바네사는 앞으로도 제 연락에 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 안에서 평안할 것이다. 새로운 것들을 배워 나가며 성장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여러 가지 빛깔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내겠지.
그러나 자신은 새로이 깨달은 감정을 껴안고, 그를 삭이고 깎아 내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관심 없는 자의 애정처럼 역겨운 것이 없으므로.
멍하니 서 있던 기드온은 누군가의 부름에 환히 미소 짓는 바네사를 보았다. 그 미소에 몰래 경탄하는 청년도.
그게 분수에 맞지 않게 질투가 났다. 바네사에게 저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그녀의 편지대로, 우연히 만난 친구일 뿐일 텐데.
저는 바네사의 편지가 끊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심을 잃고 흔들렸으나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바네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간극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불쑥 욕심이 치밀었다.
그럼 혹시, 제가 누군지 밝히면. 제가 후원자라는 사실을 밝히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낭랑한 웃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 한 생각이 제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을 참기 어려웠다….
네가 후원자면,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기드온은 그대로 몸을 돌려 아카데미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바네사에게 기드온의 이름으로 연락하지 않았다.
– 기드온 솔 발데르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