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57)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57화(57/146)
그리고 그 안에 굉장한 난장판이 벌어진 걸 보고 다시 걸음을 물렸다.
이거, 들어가도 되는 거야?
서류가 사람의 키 높이로 이곳저곳에 쌓여 있었고 안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눈을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맹렬하게 손에 잡은 펜만을 움직였다.
“저기, 안녕하세요.”
그나마 가장 입구 쪽에 있던 남자에게 꾸벅 인사하자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목깃의 핀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바네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펴보며 생각했다.
우리와 달리 아주 깨끗하군. 그렇다면!
“신입?”
“네, 바네사 로즈입니-”
“신입이 왔다!”
남자가 벌떡 일어나 소리치자 안쪽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머리를 쏙쏙 내밀었다.
그중에는 바네사가 예전에 유제니아의 소개로 만났던 무니아 트랜도 있었다.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는 바네사를 보고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내가! 내가 꼬신 마법사야!”
“뭐라고! 너, 넌 이번에 상여금 받을 줄 알아.”
모두 달려와서 마치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는 것처럼 바네사를 둘러싸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면접에서 아주 좋은 점수를 받았던데. 장관님이 엄청 까칠하시죠?”
“아니, 밤베르크 아카데미에서 우등상을 받았다면서요? 근데 왜 여기를 왔습니까?”
“야! 그런 말을 왜 해? 잘 왔어요. 일단, 일단 저기에 앉아요.”
“다른 분의 자리 같은데요?”
자리를 살펴본 바네사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여자는 책상 위의 서류를 깨끗하게 밀어 버렸다. 우당탕, 책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휴직했어요.”
어쩐지 방금 휴직이 결정된 태도였으나 바네사는 결국 그 자리에 앉았다.
바네사가 책상 위를 이것저것 치우기 시작하자 마법부 사람들은 풋풋한 신입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깨끗한 향기가 감도는 것 같아…. 뭐랄까, 아직 때 묻지 않은 그런 거.”
“실제로 깨끗해서 그런 것 아냐? 너 씻은 지 얼마나 됐어?”
여자의 말에 남자는 정색했지만 제 기름진 머리를 보고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을 들은 여자는 경악하며 그의 머리에 물을 뿌렸다.
그날 하루는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무니아 트랜은 그녀의 선임을 자처하며 간단히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마 바네사의 전임자가 하던 일을 물려받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마법사들의 출입국을 담당하고 불법 체류 마법사들을 국경 밖으로 추방하는 일이었다.
“다른 부서랑 협업이 많은 일이에요. 보통 경력자를 배치하는 일인데 장관님께서 로즈 양이 잘할 것 같다고 해서요.”
면접 때 만났던 마법부 장관, 텔리오스는 아주 잠깐만 볼 수 있었다.
텔리오스는 바네사를 보러 내려와서 피곤한 표정으로 ‘꼭 오래오래, 건강히 일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전임자는 아주 급하게 휴직이 결정된 듯 인수인계를 하지도 못하고 사라졌기에 바네사는 혼자 찾아봐야 할 것이 많았다.
덕분에 첫날부터 퇴근하지 못하고 야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혼자 할 수 있는 일인가? 불법 체류자들은 많아도 불법 체류 마법사들은 별로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서류의 양이 상당하지 않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적혀 있는 건 달랑 이 서류 한 장인가?
바네사는 멍하니 고민했다.
“…음.”
“바네사, 적당히 하고 퇴근해요. 어차피 바로 익숙해질 수 없어요. 직접 나가 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고요.”
무니아 트랜과 함께 바네사를 가장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남자, 대니 말런이 조심스럽게 말해 주었다.
그는 신입이 도망칠까 봐 겁이 났다. 저 직무는 일이 많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더더욱 걱정스러웠다. 장관님이 무슨 생각으로 저 어린 친구에게 저 일을 맡겼을까?
대니 말런의 조심스러운 권유에 바네사는 결국 먼저 일어났다. 목이 뻣뻣했다.
“내일… 내일 와서 다시 봐야겠어요….”
“꼭… 와야 해요….”
대니가 간절한 표정으로 말하자 바네사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세… 월세 내야 해서 와야 해요….
걸어 나오니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사람들은 많이 줄어서 간혹 눈에 띄는 정도였다.
다만 보이는 사람들의 눈 밑은 아주 새까맣기 그지없었고 대부분 하품을 하며 걷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되는 거 아니야? 어쩐지 아침에 체자르가 한 말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피곤하다….”
바네사는 1층으로 내려와 바로 성문을 나서려다 옆의 잘 가꾸어진 정원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풀 내음이 좋았다. 지금 사는 곳은 근처에 녹지라고는 없었으므로 쉴 곳도 없었다. 바네사는 잠시 앉아서 쉬다 가기로 했다.
들어간 정원에는 아무도 없어 조용했다.
바네사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마련된 하얀색 돌 벤치에 앉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첫날엔 원래 다 이런 거겠지? 정신없고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거겠지? 다행히 사람들은 다정하고 신입을 아끼는 분위기니까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야.
바네사는 애써 긍정적인 부분만 보기로 했다.
저녁이 되니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타고 풀 내음이 더욱 짙게 피어오르니, 바네사는 밤베르크 아카데미가 몹시 그리워졌다.
멍하니 앉아 잘 가꾸어진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니 정원 뒤쪽으로 난 길을 통해 먼 곳에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제 작은 행복을 깨는 소음에 흘끗 시선을 돌렸다가 바로 고개를 무릎 위로 처박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불가합니다.”
“아니, 공께서 먼저 말씀해 주신다면….”
“폐하께서 이미 결정한 사안을 번복하는 일은 없습니다.”
“공, 사안이 다급함은 알겠습니다. 다만 제대로 된 정회의를 거치지도 않았는데-”
“출석을 똑바로 하셨으면 될 일입니다. 공동회의에서 이미 여러 번 다루었습니다.”
남자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바네사는 남자의 저런 날카로운 목소리를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전 오늘 특전대의 장으로서 성에 온 것이지 발데르 공작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이쯤 하십시오.”
결국 잘 차려입은 남자가 발을 쿵쾅대며 몸을 돌렸다.
기드온은 옆에 있던 남자의 분노를 깨끗하게 무시하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저자의 감정이 그를 침범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정원에 놓인 의자 위에 누군가 거의 반으로 접혀서 앉아 있었다.
흘러내린 여자의 머리카락은 흐릿한 빛에도 고운 갈색이었고 일부러 꾸민 듯 구불거렸다.
기드온은 낮게 한숨 쉬었다. 마법부에 신입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이렇게 빠르게 만날지는 몰랐던 탓이었다.
그는 이 만남이 기뻤으나 그녀는 딱히 기뻐하지 않는 듯해서 더욱 속이 쓰렸다.
“바네사.”
여자의 몸이 움찔댔다. 천천히 손이 얼굴에서 떨어졌지만 여자는 여전히 경직된 태도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기드온이 빠르게 다가가자 바네사는 튕겨 오르듯 일어나 그를 마주했다. 키 차이 때문에 고개가 한껏 젖혀졌다.
“안녕! 하세요!”
“…….”
“여여여여여기는 어쩐 일로.”
“마법부입니까?”
기드온은 바네사의 목깃에 꽂힌 핀을 보며 말했다. 바네사는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제복을 입은 그는 한층 더 빛이 났다. 아무래도 정복보다 붙는 편이라 훌륭하고 잘 다듬어진 몸 선이 드러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그그그그렇습니다.”
“말은 왜 이렇게 더듬거립니까.”
차가운 기드온의 말투에 바네사는 주눅이 들었다. 마지막에 본 것과 달리 그의 태도가 상당히 삐딱했기 때문이다.
남자의 미간은 사납게 주름 잡혀 있고 입매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 저렇게 화를 내지. 바네사는 시무룩해졌다. 기분은 안 좋아졌는데 심장은 여전히 발끝까지 울렸다.
“첫날이라 긴장해서요…. 별것 아니에요. 그,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저, 전 이만 가 볼게요, 대장님.”
바네사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재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순식간에 정원에 홀로 남은 기드온은 바네사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스스로가 유치했다. 그리고 지독히도 피곤했다.
⚜ ⚜ ⚜
바네사는 터덜터덜 하얀 돌길 위를 걸었다.
풀 내음 좀 맡으려고 정원에 있었던 것이 기억나지도 않았다. 하필 거기에서 기드온을 만날 줄이야.
그냥 고백해서 차이고 끝낼까.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그게 낫겠다. 어차피 지금도 대화 한마디도 잘 못 하는데 차이고 친구로 남는 거랑 뭐가 달라?
4층까지 올라가는 것이 오늘따라 고되게 느껴졌다. 다리가 끔찍이 무거웠다.
복도를 지나 낡은 초록색 문 앞에 섰다. 오래된 잠금장치는 잘 열리지 않아 열쇠를 여러 번 돌려야 했다.
철컥대는 소리가 몇 번 울린 뒤에야 문이 열렸다. 바네사는 비틀대며 문 바로 옆에 있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씻어야 하는데. 기드온을 만나면 항상 온몸이 저려서 피로가 극심했다.
멍하니 누워 있던 바네사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 호니르 입구에 아주 눈에 익은 편지 봉투만 보이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밀색의 봉투 위에 교차하여 묶인 얇은 끈.
그리고 살짝 기울어진 ‘바네사 로즈 양에게.’
바네사는 넘어질 뻔했다. 급하게 호니르 입구에서 편지를 잡아챘다.
⚜ ⚜ ⚜
바네사 로즈 양에게.
가끔 편지를 보낸다더니 아무 연락이 없군요. 바네사 양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녁엔 쌀쌀하니 옷을 잘 챙기세요.
선생님으로부터.
⚜ ⚜ ⚜
갑자기 편지 위의 검은 글씨가 번져 보였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가 편지 위로 뚝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으로 선생님께 먼저 편지드리지 않았을까. 고집 세고 멍청한 바네사 로즈.
바네사는 번진 글씨가 아쉬워서 급히 물기를 닦아 냈다.
지금 쓰면 내용이 부족할 것 같으니까 내일 바로 편지를 보내야지.
요즘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선생님은 어떻게 제가 힘들 때마다 이렇게 힘을 주시는지, 지금 얼마나 자신이 감동받았는지까지 모두 보내야지.
바네사는 열심히 눈가를 비볐다. 부어오른 눈가쯤은 별것 아니었다.
기드온 때문에 떨렸던 기분이 금세 안정을 찾아 평온해졌다. 바네사는 씩 웃고는 욕실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