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62)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62화(62/146)
바네사는 눈가를 문질렀다. 리나가 부드럽게 바네사의 등을 밀었다.
“어서 가자. 아까 놀린 거 미안해지게 정말.”
“됐어. 매일 놀렸잖아.”
“그거야 이제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지. 그런데 하필 저 조합으로 마주치다니.”
체바티도 작게 한숨 쉬었다.
“퓌돔이 이렇게 작았나 싶어요. 물론 왕성 근처가 제일 활발한 곳이니 당연하긴 하지만.”
하지만 우연은 바네사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유제니아는 바네사를 몹시도 아껴서 꾸준히 연락을 보내 주는 좋은 선배였다. 뒷모습쯤이야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바네사?”
상냥하고 달콤한 목소리에 바네사는 결국 쓴웃음을 지었다.
몸을 돌리자 눈을 동그랗게 뜬 유제니아와 약간 멀찍이 떨어져 있는 기드온이 보였다. 그도 제법 놀란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세상에, 이게 어쩐 일이야. 퓌돔에 왔으면서 보자는 이야기도 안 하고! 나 정말 서운해.”
“연락드리려고 했어요. 제가 요즘 조금 정신이 없어서….”
바네사가 애써 미소 지었다. 리나는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삐딱하게 말했다.
“저랑 체바티는 혹시 안 보이세요?”
“어머, 체바티. 여전히 귀엽구나. 엄청 유명한 설계자 아래에 들어갔다던데. 축하해!”
유제니아는 리나를 무시하며 상냥하게 말했다. 체바티도 조용한 목소리로 감사함을 전했다.
바네사는 혹시나 유제니아가 기드온을 소개할까 걱정되어 빠르게 말을 끊었다.
“제가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안 그래도 감사한 것들이 많아서 꼭 뵙고 싶었어요. 오늘은 어, 약속이 있으신 듯하니까 저희는 먼저 가 볼게요.”
바네사는 제 미소가 온전했기를 바랐다. 다행히도 괜찮았는지 유제니아는 생긋 웃고는 그들에게 인사했다.
“기다릴게. 리나도 반가웠어.”
“영광이네요, 아주.”
뒤에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던 기드온을 철저히 무시한 채로, 바네사는 몸을 돌려 친구들과 함께 걸어갔다. 체바티의 작은 손이 바네사의 허리를 토닥였다.
“괜찮다니까.”
“웃기고 있네. 거울 보여 줄까?”
“아니….”
바네사는 또다시 붉어질 것 같은 눈가를 바람에 식혔다.
“마법사라 다행이다. 이렇게 바람을 불러 올 수도 있잖아.”
“그것참 대단하다.”
“왜 하필 저런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좀 평범하고 나랑 비슷한 사람을 좋아했다면 돌아올 무언가를 기대하며 즐거울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리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래도 아마 기대 안 했을걸. 넌 항상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잖아. 언제 고칠래? 넌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란 말이야.”
단호한 목소리에 바네사가 시무룩해지자 체바티는 바네사의 팔을 끌어안고 제 저택을 향하는 길 쪽으로 당겼다.
“오늘은 우리 집 가서 자요. 바네사 혼자 두면 내가 오늘 잠을 못 잘 것 같아요.”
“그래. 오늘은 체바티 집으로 가. 그리고 다음 주 주말쯤에 다시 모이자. 우리 집에서!”
바네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울어도 좋은 집에서 우는 것이 더 낫겠지.
바네사는 밀로 도티 저택의 화려한 손님방에서 조금 울었다. 다만 많이 발전해서 겨우 눈물 한두 방울을 흘리고 끝냈다.
⚜ ⚜ ⚜
스스로가 느꼈던 벽을 잠시 허물었던 바네사는 다시 더욱 견고하고 높은 벽을 세웠다.
유제니아와 서 있는 기드온을 본 순간 느낀 마음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마법부의 일을 정리하고 특전대의 건물로 오면 바네사는 잔뜩 웅크린 채로 모든 것을 경계했다. 그의 시선은 쳐내고 최대한 필요한 말만 했다.
“바네사.”
“네.”
기드온은 눈도 마주치지 않는 바네사를 보며 낮게 한숨 쉬었다. 바네사는 잠시 움찔거렸지만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서류 위를 짚었다.
“현재 나타난 것만 볼 때는 달로룸 거리와 자사로 시장 쪽이 의심스러운데 계속 나타나는 양상이 유사합니까?”
“네, 맞습니다. 달로룸 쪽에서 잡혀 추방된 마법사가 총 세 명인데 많은 품목 중에 꼭 한두 개씩은 키메라를 위한 것들이라 짐작되는 구석이 있습니다. 품목이 너무 많아 스치듯 넘어간 것 같아요.”
기드온은 바네사가 따로 모아 둔 서류 몇 장을 들어 올렸다. 정리는 완벽했고 추론할 수 있는 구석은 확실했다.
그는 깨끗하고 단정한 글씨를 보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었다.
“수고했습니다. 더한 일은 필요치 않을 겁니다.”
나머지는 아마 특전대가 알아서 할 것이다. 바네사도 더 이상 끼어드는 것은 사양이었다. 저녁 시간은 소중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붙어 있는 것도 오늘 저녁이 마지막일 것이다. 이제 마법부에만 처박혀 있을 테니까 마주칠 일은 많지 않으리라.
마주쳐도 간단한 인사와 미소를 주고받으면 된다. 오늘은 조금 표정 관리가 어려워서 그렇지 다음에는 꼭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바네사는 마무리를 하고 일어났다.
기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밤거리를 함께 걸었던 것이 꿈같았다.
“가 보겠습니다.”
바네사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표정은 보지도 않은 채로 몸을 돌렸다.
“드디어 자유다.”
특전대의 건물을 빠져나와서 그렇게 중얼거려 봐도 이상하게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좁은 숙소에 돌아온 바네사는 가만히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 ⚜ ⚜
드디어 왕실 내각 안에서 특전대가 드디어 인원 충원을 위한 공고를 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저기도 엄청 까다롭다니까.”
“‘그’ 공작이잖아.”
“까다로울 만하긴 해. 한번 파견 다녀오자마자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다더라고. 워낙 위험하잖아.”
마법부 사람들이 떠드는 특전대 충원 소식을 흘려들으며, 바네사는 얼마 전에 받은 짧은 편지를 떠올렸다.
에반에게는 어쩐지 미안해서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편지를 보냈다.
「‘친구’ 바네사 로즈에게.
바네사. 잘 지내?
마법부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들었어. 리나 델리나가 날 아주 동정하면서 너의 근황을 전해 주었거든. 눈치는 왜 저렇게 빠른 거야?
하지만 너의 깨끗한 거절로 상처 입은 나의 마음은 이제 아주 잘 아물었어. 우린 다시 좋은 친구가 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특전대에 지원 서류를 넣었다가 아직 받는 시기가 아니라며 거절당했지 뭐야. 내가 생각 없다는 느낌을 줬을까?
심지어 달로이즈도 그랬다고 하니까 더더욱 자신이 없어지네.
알고 보니 내가 달로이즈와 영혼의 단짝이었나 봐. 하는 짓이 똑같거든…. 너도 봐서 알겠지만.
하여튼 할 것이 없는 나는 아주 편하게 놀고 있어. 곧 특전대 충원 공고가 나오리라 믿고 있거든.
다음에 리나와 체바티랑 함께 보자. 그 둘만 저녁을 사 주었다는 것이 사실이야?
나도 얻어먹자고!
에반으로부터.」
에반의 편지는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는 힘이 있었다.
바네사는 이번 주말에 모두 함께 보자는 답장을 보냈다. 에반은 날아가는 듯한 글씨로 좋다는 빠른 답변을 보내 주었다.
“바네사!”
“아, 네.”
요즘 이상하게 멍할 때가 잦았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바네사는 더벅머리의 대니 말런을 마주했다. 그의 눈은 흥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바네사는 특수 전투 부대에 관심 없어요? 내각에 들어오는 마법사들은 한 번쯤 생각해 보던데.”
“뭔 소리야!”
마법부의 귀하디귀한, 일 잘하는 신입이 사라질까 걱정이 된 무니아 트랜이 꿱 소리쳤다. 다른 마법부 사람들도 아우성쳤다.
“그런 얘기를 굳이 왜 해!”
누군가가 대니 말런에게 종이를 뭉쳐 던졌다. 오가는 종이 뭉치들 사이에서, 바네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전 딱히 관심이 없어서….”
“이것 봐요. 내가 다 알고 질문한 거라니까. 바네사는 마법부가 맘에 들죠? 우리가 엄청 잘해 주잖아요. 그렇죠?”
“본인 입으로 저런 말을 하다니.”
추하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대니 말런은 하나도 기죽지 않은 태도로 어깨를 폈다.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다고요. 그쵸, 바네사?”
바네사는 대답 없이 슬쩍 웃기만 했다. 그리고 다른 말을 꺼냈다.
“그건 그렇고, 특전대에서 사람을 뽑는 일이 큰 화제인가 봐요.”
“아무래도 그래요. 마법사라는 조건 자체도 까다로운데 실현 속도부터 조건 유무까지 엄격하게 보니까. 기준이 높아요. 하지만 사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무니아 트랜이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바네사는 의아한 눈을 깜빡이며 함께 몸을 기울였다.
“특전대의 대장이 중요하지. 기드온 솔 발데르!”
바네사는 잠깐 손끝을 움찔 떨었다.
“프리바에서 가장 유명한 미혼 남성. 발데르 가문의 유일한 주인인 데다가 진짜 굉장한 미남! 그런데 염문설 하나 없잖아.”
대니 말런이 끼어들어 뒷말을 이었다.
“내각에서도 맡은 일이 많기로 손꼽히거든요! 연애할 시간도 없을걸. 텔리오스 장관님도 저번에 혀를 내둘렀다니까? 어쨌든 그래서 마주칠 기회도 거의 없는데 말이죠.”
“인원 충원 공고를 만남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있겠네요.”
바네사가 덤덤히 말하자 무니아와 대니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지!”
“다른 목적이 있는 사람들을 걸러 내느라 바쁠 지경이래요. 저번엔 미자격자 수백 명이 지원했다니까요!”
“만나기만 하면 꼬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무니아가 히죽 웃었다. 바네사는 가만히 쓴웃음을 삼켰다.
누가 보아도 괜찮은 사람이지.
외적으로만 따져 봐도 차고 넘치는데, 내적으로도 모자람이 없었다.
무슨 일에도 흔들림 하나 없이 굳건했고, 다정하고 상냥했다. 겨우 몇 번 만난 자신에게도 그의 눈길은 항상 따스했다.
그런 사람에게 반한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다만 저의 부족함이 창피할 뿐이었다.
“잘생긴 거 인정은 하는데, 그 정도인가?”
누군가 질투를 섞어 투덜거리자 곧장 야유가 쏟아졌다. 점심 식사 후 졸린 시간에, 흥미로운 주제가 나오자 이야기는 끊임이 없었다.
“난 복도 지나가다가 한번 마주쳤는데 꿈을 꾸는 줄 알았어. 눈썹 아래에 그 눈 색깔이. 와….”
“난 저번에 멍하니 쳐다보다가 넘어졌어. 날 이상하게 바라보시더라.”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 속에서 바네사만 묵묵히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대체 누굴 만나려나.”
“똑같이 대단한 사람 만나겠지. 대지주나 굉장한 사업체의 딸? 아니면 굉장한 미인이라든가.”
“하긴. 그렇지 않으면 옆에 설 수나 있겠어? 뒷말 나올까 두렵다.”
“저번에 어느 백작가의 차녀를 거절했다던데. 그 정도로도 안 되나 봐.”
멈춰있는 펜촉 끝에서 잉크가 새어 나와 종이를 검게 물들였다.
많은 사람의 말마따나, 그 사람은 부족함 하나 없이 굉장했다.
그러므로 그 옆에 서는 사람도 모자람이 없어야 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고아 바네사 로즈는 당연히 안 될 말이었다. 반짝이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걸작으로 손꼽히는 조각과 기워진 헝겊 인형을 같이 세워 둔 꼴일까.
“어, 바네사! 손에 잉크 묻었어요!”
대니 말런이 놀라 외치자 바네사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게요. 검게 묻었네요.”
“이걸로 닦아요.”
호들갑 떠는 대니 말런을 보며 바네사는 멋쩍게 웃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특전대와의 일이 끝나자 바네사에게도 저녁 시간이라는 것이 주어졌다.
마법부 사람들은 고생한 신입을 위해서 일을 덜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신입이 사라지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바네사,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내일 주말이잖아.”
“네? 이것만 마무리하고요. 어차피 장관님께 올라가는 것이라서.”
“내가 장관님께 전달 드릴게. 어차피 나도 보고드릴 것이 있거든. 너 고생한 건 장관님도 다 아시니까 내가 전달 드린다고 해서 오해하진 않으실 거야.”
무니아 트랜은 대충 졸라 묶어 이리저리 튀어나온 머리로 상냥하게 웃었다.
바네사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노을 지는 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마법부를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다만 어쩐지 일찍 퇴근한 것이 그리 기쁘지 않았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미친 걸까?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그 공간은 너무나 고요하고 좁아서 외로웠다.
바네사는 집에 들르지도 않고 앞으로 쭉 뻗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