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63)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63화(63/146)
날은 선선하고 저녁 바람은 시원했다.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지는 날이었다. 속마음은 엉망진창일지라도.
바네사는 화려한 나르도 거리를 따라 걷다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 보았다.
이 골목엔 좀 더 작은 상점들이 많았는데 작고 소소한 공예품이나 갓 구운 빵과 잼, 기상천외한 발명품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바네사는 이것저것을 구경하다가 향긋한 빵 냄새에 홀려 보송보송한 빵 몇 개를 집어 들었다.
갈색 종이봉투에 빵과 잼을 담아 들고나온 바네사는 잠시 길을 헤매었다.
이쪽 거리는 반듯한 직선이 아니었고 이리저리 거미줄처럼 굽이진 곳들이 많았다. 가끔 로브를 음침하게 뒤집어쓴 사람들이 지나다니기도 했다.
계속해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바네사가 덩그러니 튀어나온 곳은 어쩐지 익숙한 곳이었다. 밧니르 다리 근처.
밧니르 다리 근처라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었다. 조나 힐의 서점. 그리고 바네사가 처음으로 술을 입에 머금어 본 날. 그리고 기드온과 즐겁게 퓌돔의 거리를 구경한 날이었다.
이곳은 아직도 그 느낌 그대로였다. 인적이 드문 것도 여전했고 정리되지 않은, 돌 사이로 고개를 내민 잡초들도 여전했다.
바네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근처의 주류 상점으로 들어가 괜찮은 가격의 술 두 병을 골랐다.
“도수가 많이 강한가요?”
“뭐, 적당하지. 이것도 인기가 많아. 지나치게 달지 않고 깔끔한 맛이 나거든.”
상점 주인은 끈으로 꼼꼼하게 술을 포장해 주었다. 바네사는 돈을 지불하고 조심스레 끈을 들어 가게를 빠져나왔다.
바네사는 골목을 돌아 조나 힐의 서점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내일은 주말이고 하니 조금 늦게 숙소로 향해도 별일은 없으리라.
골목을 돌자마자 나타난 조나 힐의 서점도 여전했다. 책들은 이리저리 높게 쌓여 있었고 삐딱하게 덧붙여진 공간은 아슬아슬해 보였다.
바네사는 서점 안쪽을 잠시 기웃거렸다. 과거의 그 날처럼 안쪽은 인기척이 없었다.
바네사는 덜컥대는 유리문을 밀고 책들 사이로 난 작은 길을 걸어갔다. 손에 든 병 안에서 술이 찰랑이는 소리가 났다.
바네사는 2층으로 걸쳐진 사다리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조나 힐, 있어요? 저 바네사예요. 바네사 로즈.”
목소리를 높여 봐도 조나 힐은 나타나지 않았다. 바네사는 잠시 코끝을 찡긋거렸다.
조금 기다려 볼까.
결국 한 아름 안고 있던 빵 봉투와 술은 그나마 책들과 먼 곳에 내려놓고 바네사는 작은 공간 사이에 쪼그려 앉았다.
아무거나 꺼내 잡은 책은 역시나 사람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책장 사이사이엔 누군가의 평론이 덧붙여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다시 그를 부정하는 답변이 달려 있기도 했다.
빛바랜 흔적에 바네사는 작게 웃었다. 초록색 잉크 자국을 매만지다가 다른 책을 뽑아냈다.
손에 들린 책은 아주 얇았다.
어린아이들이 읽는 동화였는데 바네사도 고아원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밤 반달루가 자신을 구해 준 친구를 찾기 위해 떠나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것을 경험한 뒤로는 약간 생각이 달라졌다.
혹시 구해 준 친구가 그때 동굴에서 봤던 용인 것 아냐? 바네사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좋은 친구가 참 많네…. 아주 강력한 분들로….”
“그치?”
갑자기 들린 소리에 바네사가 기겁해서 옆을 보자 쪼그려 앉은 바네사 옆으로 갈색 머리의 소년이 주저앉아 있었다.
소년은 바네사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바네사는 눈을 크게 떴다.
“…야. 우리 어디서 본 것 같다?”
“그치?”
“너!”
바네사는 잽싸게 소년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이, 이 자식!
“너! 너!”
“아이참, 누나도. 어린아이를 이렇게 잡아채면 어떡해.”
“너 뭐야!”
한눈에 알아보았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제법 오래전, 바네사를 꼬드겨 모레아의 숲속으로 이끌었던 소년이었다.
이동 마법진을 밟도록 유도하여 기드온과 함께 동굴로 떨어지게 한! 커다란 민폐를 끼치게 한! 바로 그 소년!
“여기에 왜 있어! 아냐, 이럴 때가 아니야. 널 끌고 갈 거야.”
“날 왜? 어디로?”
소년은 갸웃거렸다. 바네사는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 일에 네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하잖아. 이동 마법진도 그래. 넌 작지만 강력한 마법사인 것 같고 완벽한 조사 대상이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민폐를 끼쳤는지 알아?”
“증거 있어? 누나 말고 날 본 사람은 없어.”
소년은 방긋 웃었다. 바네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정말로 그랬다. 기드온조차도 소년을 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소년을 본 사람은 오직 바네사뿐이었다.
“누나가 날 데려가면 아마 누나가 의심받을걸.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미친 것 아니냐고. 난 겉보기에 완전 착한 어린애잖아.”
“…….”
소년의 미소가 몹시 밉살스러웠다. 소년은 활짝 웃더니 바네사가 보고 있던 책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나 이 책 다 못 읽었는데. 읽어 줘. 읽어 줘!”
바네사는 소년의 머리꼭지를 노려보았다. 소년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해맑기만 했다.
“너 이름이 뭐야.”
“반.”
“굉장히 가짜 이름 같다, 그거.”
“아냐, 진짜야. 반이라고 불러도 돼. 우리 형이 붙여 준 이름이거든.”
바네사는 잠깐 책을 내려다보았다. 책을 좀 읽어 주고 꼬드기면서 이야기를 해 볼까.
맹렬한 고민 끝에 바네사는 목소리를 곱게 가다듬었다. 큼, 큼. 헛기침까지 해 가면서.
“‘밤 반달루는 호숫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자 밤하늘의 별들이 호수 위로 내려앉아 반짝였다. 그럼에도 그는 혼자였다.’”
“심심했겠다, 그치.”
“‘하지만 밤 반달루는 외롭지 않았다. 그는 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들은 반짝이며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밤 반달루는 미쳤대? 별이랑 이야기를 하다니. 본 적도 없는 소년을 범인으로 모는 누나랑 똑같다. 그치.”
“…야.”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순진한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네사는 잠시 이를 갈았다. 속박마법. 속박마법을 일단 쓰자.
“누나, 설마 마법 쓰려는 건 아니지? 조건도 모르면서.”
“…….”
얜 진짜 뭐지? 바네사의 눈빛에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자 소년은 빙긋 웃었다.
“난 요정이야. 하지만 아주 선한 요정이지. 계속 읽어 봐!”
바네사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별들은 그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밤 반달루는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별들은 반짝이며 찰랑대는 소리를 냈다. 별들의 웃음소리였다.’”
“여기가 중요하거든. 알지? 교훈은 끝에 나오잖아.”
“‘반짝이는 빛이 속삭였다. 그곳에서 널 구한 것은 너 자신이란다. 스스로를 믿는 마음이 널 구했어.’”
“애들이 읽기에는 나름 괜찮네.”
바네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쪼그리고 앉아 있는 반은 여전히 태평해 보였다.
“너도 애잖아.”
“누나를 말한 거야. 난 요정이라서 나이 같은 건 상관없어.”
반은 바네사의 눈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 반은 항상 푸르른 하늘 같은 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작은 단서를 주기로 했다.
“누나, 이 동화를 잘 기억하도록 해.”
반은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바네사는 화들짝 놀라서 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어디 가?”
“나 바빠. 약속 있어.”
바네사는 자신도 없는 약속이 어린 반에게 있다는 것에 약간 상처를 받았지만, 어쨌든 반과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다.
정말로 이상한 애였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만큼 대단한 마법사라고?
“내가 조건을 모르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너 누구야?”
반은 바네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난 누나를 알아.”
“어떻게?”
“누나, 사람이 묻는다고 다 알려 줘야 하는 것은 아니야. 모든 것은 대가가 필요하잖아.”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 소년을 보며 바네사는 진심으로 열이 받았다. 조나 힐의 서점에 있다는 것도 까먹고 큰소리로 외쳤다.
“야!”
“난 갈게. 하여튼 그 동화책 좀 잘 읽어 보고.”
소년은 마치 신기루처럼 흩어져 이미 서점의 나무 문 앞에 서 있었다. 놀란 바네사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자 큰 소리로 웃더니 작은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다음에 봐!”
“다음에 보면 가만 안 둬!”
“푸하.”
소년은 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급히 달려가서 텅 빈 거리를 내다보던 바네사는 정말로 억울했다.
이걸 또 누구한테 말해. 말해 봤자 진짜 미쳤냐는 소리나 듣게 생겼잖아!
“뭐야, 바네사?”
“아아악!”
조나 힐은 세 걸음이나 물러난 바네사를 보고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박박 밀어 버린 머리와 헐렁한 옷차림은 여전했다.
“여긴 내 서점인데. 주인 보고 그렇게 놀라기 있어?”
“바, 바, 방금. 방금 혹시 남자아이 하나 보셨어요?”
“아니, 못 봤는데. 무슨 일 있었니? 근데 너 오랜만이다?”
바네사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진짜로 내가 미친 것 아니야?
조나 힐은 바네사를 들여다보다가 -얘 왜 이래?- 서점의 문을 닫아 버렸다. 딸랑대는 작은 종이 울렸다.
“하여튼 반갑다. 들어가자.”
⚜ ⚜ ⚜
조나 힐은 바네사가 가져온 술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한 병은 책들 사이에 감춰 두고 한 병은 바로 땄다.
조나 힐은 구색을 맞추려는 듯 대충 닦아 물기가 묻은 잔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역시 배운 애는 달라.”
“무슨 소리세요? 아니, 그걸 왜 그렇게 마셔요!”
조나 힐은 병을 뜯자마자 잔은 무시하고 입에 술을 부어 넣기 시작했으나 바네사는 당장에 병을 뺏어 들었다.
조나 힐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잔소리는. 기드 놈이랑 똑같네.”
바네사는 습격하듯 날아온 기드라는 이름에 움찔댔다. 조나 힐은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유리병에 든 과자를 바네사의 손에 가득 부어 주었다.
바네사는 조심스럽게 하나를 입에 물었다. 짭짤하고 바삭했다.
“걔는 요즘 뭐 하고 살아? 나 퓌돔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거든. 책 사냥을 나갔다가 왔어. 책 사냥이 뭐냐면 말 그대로 가지고 싶은 책들을 찾으러 온갖 곳을 돌아다니는 거야.”
“그… 러셨구나. 제가 딱 좋을 때 왔네요.”
“그렇지. 이번에 구해 온 책 볼래?”
조나 힐은 신이 나서 책 두 권을 꺼내 들었다.
“완전 시골짝 가서 가져온 거야. 장정 상태도 아주 좋고 귀하게 다룬 것이 분명해. 무려 초판본이라고!”
바네사는 두 권의 책 중에 한 권을 보고 진이 빠졌다. 방금까지 소년과 이야기 했던 그 동화책이었으니까.
바네사는 책장을 조심스레 넘겨 보았다.
“이 책은 작가가 누군가요?”
“작자 미상. 다만 밤 반달루와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을까 추측되고 있긴 하지. 동화긴 하지만 아주 은유적인 것들이 많이 담겨 있거든.”
“저기, 조나 힐. 저 정말 제정신이거든요.”
바네사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갑자기 무릎까지 꿇고 말했다. 조나 힐은 비죽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보통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더 미쳐 있긴 하지. 하여튼 왜?”
바네사는 방금 만났던 소년과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조나 힐은 몹시 열정적으로 들어 주었다. 그녀는 손을 모아 잡고 까만 눈을 반짝였다.
“와. 방금까지 그 소년이 이 안에 있었다고?”
“그렇다니까요! 전 진짜 너무 억울한 게, 저 혼자 있을 때만 나타났다가 없어지니까 어디 신고할 수도 없고 제가 미친 것 같다고요. 심지어 걔는 저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것 같단 말이에요.”
“걔가 짚어 준 부분이 이 문장이라는 거지?”
조나 힐은 동화책의 ‘스스로를 믿는 마음’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었다.
“갑자기 이건 왜 말해 주고 떠난 걸까?”
“모르겠는데요?”
“본인은 착한 요정이고 이 부분을 명심하라고 했다며. 뭔가 뜻이 있는 듯한데.”
바네사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대충 모아서 넘겨 버렸다. 그리고 수많은 책들에 기대어 머리를 콩콩 박기 시작했다. 책 향기와 술 냄새가 섞여 혼란스러웠다.
“착한 요정이라기엔 절 동굴에 떨어트렸잖아요.”
“기드온이랑 같이 떨어졌고 별일 없었다면서?”
바네사는 또다시 그녀를 괴롭히는 기드온이라는 이름에 침울해졌다. 조나 힐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기드온한테 물어보는 것은 어때? 걘 너랑 같이 동굴에 떨어졌잖아. 그 소년이 만약 관련이 있다면 기드온이 제일 적임자야.”
바네사가 웅얼거렸다.
“안… 친해서 못 물어 보… 는데.”
“뭐라고?”
조나 힐은 잠시 못 들을 것을 들은 것처럼 스스로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곧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가 서점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