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67)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67화(67/146)
바네사는 나무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바닥에 눌어붙은 용기까지 닥닥 긁어모아 입을 열었다.
“기드온.”
기드온의 시선이 가까스로 바네사의 것과 맞닿았다. 그는 어쩐지 경직되어 보였다.
바네사는 지금 제 모습이 부족함 없이 훌륭해 보이기만을 바랐다. 전진하겠다고 결심한 자들 특유의 자신감이 보이기를.
씩씩한 목소리를 냈다.
“할 말이 있는데 들어 주었으면 해요. 그리고 솔직한 대답을 돌려줘요. 어느 쪽이든 괜찮으니까요.”
바네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입술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이 끔찍하게 길게 느껴졌다.
“좋아해요.”
말을 내뱉는 것으로 모든 용기가 끝났다.
바네사는 구두코 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얼굴이 붉게 익어 뺨이 후끈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역시 내 착각이었나 봐. 슬프지만 그래도 말하니 홀가분하네. 이제 정말로 마음을 접고 나아갈 수 있을 거야.
바네사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괜찮아요. 그냥 내 감정을 이야기한 거고, 별로 상처 안 받았-”
그가 눈앞에 있었다. 놀란 바네사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기드온은 바네사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온기가 제 몸을 틈 하나 없이 감쌌다. 강한 힘에 결박당하는 듯한 포옹이었다.
그러나 머리는 하얗게 비어 눈만 껌뻑였다.
이해 못 한 바네사를 눈치라도 챈 듯, 기드온은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품에 안겨 있을 때는 키가 맞지 않아 알 수 없었던 표정이 보였다.
도저히 흘러넘치는 감정을 숨길 수 없는 듯했다. 그는 환히 웃고 있었다.
“바네사.”
제 이름을 불렀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다른 대답은 필요 없었다. 목소리에 어린 환희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모든 긍정적인 감정을 담은 남자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근사했다. 바네사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남자는 유순히 그 손에 기대고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속삭였다.
“고마워요.”
홀린 듯 그의 눈가에 걸린 기쁨을 바라보던 바네사가 따라 속삭였다.
“뭐가요?”
“먼저 말해 줘서요.”
당신이 먼저 용기를 내준 만큼, 내가 더 잘하겠습니다. 다디단 목소리가 들려왔다.
꽃의 향기에 취한 건지, 더위에 취한 건지. 바네사는 어지러웠다.
그래서 멍청한 질문을 했다.
“이거 꿈이죠?”
“어제부터 왜 자꾸 꿈이라고 하는 겁니까?”
즉시 웃음을 지우고 눈썹을 찌푸리는 그를 보면서도 여전히 얼떨떨했다.
용기를 낸 대가가 이렇게 크고 빛난다는 게 믿기지 않아 가슴이 술렁였다.
이러다 꿈인 줄 알고 내일 또다시 모르는 척을 하는 게 아닐지 걱정이 된 기드온은, 제 얼굴을 감싸고 있던 바네사의 손을 잡았다.
직인을 찍듯 손끝 하나하나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좋아합니다, 바네사.”
바네사는 얼굴만 붉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영 안심이 되지 않았다. 꿈이면 어떡하지.
결국 바네사는 제 뺨 대신 그의 뺨을 꼬집기로 했다. 그는 뺨을 내주면서도 행복해 보여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바네사는 결국 다시 제 볼을 꼬집었다. 따끔했다.
⚜ ⚜ ⚜
두 사람은 나무의 그늘에서 벗어나 다시 성으로 가는 길을 되짚었다.
아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굳게 얽혀 있는 손과 바짝 붙은 몸, 연신 깜빡이며 마주하는 시선일 것이다.
걷는 내내,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못하고 계속 만지작댔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 펜을 오래 잡아 박힌 굳은살까지.
기드온은 바네사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을 휘어 웃었다. 기쁨으로 충만하여 그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바네사를 부끄럽게 했지만, 동시에 용기를 주었다.
바네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드가 날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사실 지금도 꿈인 것 같아요.”
“다시 뺨을 내주어야겠군요.”
그 말에 바네사는 자신이 꼬집었던 곳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기드온이 웃었다.
“당신이 민망해할 것 같지만, 싫어하는 곳을 찾기가 어려운데. 나는 오히려 바네사가 날 좋아하는지 몰랐습니다.”
“왜요?”
“동굴에 함께 떨어진 날 이후로 항상 연락을 피해서요. 그때 이후로 내가 싫어졌나 해서.”
그의 다정한 눈빛은 여전했지만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얼 잘못했나 하고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그냥… 좋아하면 안 될 사람인 것 같아서 포기하고 싶었거든요. 연락하면 미련이 생길까 봐.”
기드온은 바네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네사는 은근슬쩍 하늘 어딘가로 시선을 틀었다.
그러자 기드온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싫어하는 부분 하나 찾았습니다.”
“뭔데요. 고백하자마자 싫은 부분이 생겼어요?”
바네사가 눈을 흘기자 기드온은 낮게 웃고는 손으로 바네사의 눈가를 살짝 쓸어 주었다. 간신히 식혔던 볼이 다시 뜨거워졌다.
“스스로를 낮추면서 나로부터 도망가는 것.”
그게 굉장히 싫네요. 그가 속삭였다.
“술을 마시니까 아주… 과감하게 굴던데. 기억이나 납니까?”
“…내가 어제 뭘 했어요?”
“바네사가 내게.”
기드온은 약 올리듯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바네사는 눈에 불을 켜고 그를 흔들었다.
“말해요! 내가 뭐 했어요!”
기드온은 짧게 웃고는 발을 멈췄다. 어리둥절하게 올려다보는 바네사를 마주한 그는 대뜸 고개를 비틀었다.
살짝 콧대가 비낀 상태로 서로의 속눈썹 하나하나가 보일 정도로 다가온 남자는 그대로 멈추었다. 바네사가 헛숨을 들이켰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남자는 가볍게 서로의 뺨을 맞대고 떨어졌다.
“뭐 이런 것.”
바네사의 입이 딱 벌어졌다.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정말로 미쳤었구나.
기드온은 즐거이 바네사의 표정을 구경하며 그녀를 성 안쪽으로 이끌었다. 성안은 몹시 번잡스럽고 시끄러운 소음이 분분했다. 모두 바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페레스의 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새벽 내내 주방이 굉장히 분주했습니다. 식사를 함께 해 주면 굉장히 고마울 것 같습니다.”
“아, 아니… 제가 더 감사한걸요. 밤에 그렇게 찾아왔는데 환대를 해 주셔서요.”
기드온은 부드럽게 그녀를 이끌어 식당 쪽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느꼈던 난감함과 놀람, 긴장감이 잦아들자 이제 편하게 발데르 성안 쪽을 구경할 수 있었다.
바네사는 잠깐씩 기드온의 발걸음을 늦추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리 그가 번잡스러운 걸 싫어한다고 해도 고성은 고성이었다. 볼거리가 많았다.
기드온도 딱히 말리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곳으로 이끌고는 했다. 식당은 첫 번째 층에 있었는데 바네사와 기드온은 어쩐지 세 번째 층을 헤매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페레스가 데리러 오고서야 식당에 들어섰다.
“분명히 이십 분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말입니다.”
페레스는 바네사와 얽힌 기드온의 손을 흘끗대며 웃고는 안쪽으로 사라졌다.
들어선 공간에는 바네사의 생각과는 달리 엄청나게 거대한 식탁이 놓여있지는 않았다.
그저 네다섯 명이 앉을 만한 소박한 테이블이 자리했다. 그 위에 놓인 레이스는 짜임새가 좋았고 화병에는 작은 꽃들이 푸른 잎사귀와 함께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햇빛이 잘 들었고 창밖 풍경은 화사했다. 이 지나치지 않은 분위기가 우아하여 격을 드높이는 듯했다.
곧 식탁 위로 음식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주방이 새벽 내내 분주했다더니 그 증거가 확실했다.
두 사람만이 식사하기에 음식은 딱히 예의를 차리지 않고 차가운 것부터 따뜻한 것까지 순서대로 나온 뒤에 섬세한 디저트까지 함께 올라왔다.
“웃기는군.”
기드온이 짧게 웃었다. 바네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대답은 페레스에게서 나왔다.
“어차피 관심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차별이 심해서. 바네사, 자주 와야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한 바네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드온이 직접 덜어 준 음식을 맛보았다. 그리고 크게 감탄했다.
“와. 맛있어요.”
짧은 감탄이었지만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감격한 바네사의 표정을 본 기드온도 결국 웃어 버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 페레스가 말했다.
“아침 시간이 이렇게 활발한 것은 오랜만입니다. 많이 드십시오.”
남자는 어쩐지 정말 감격한 표정이었다. 바네사는 어쩐지 ‘활발’이라는 단어에서 민망함을 느꼈다.
아마 저 남자분은 제가 기드온에게 들려 오는 것을 보았겠지?
생각해 보니 결과가 좋았으니 망정이지 진짜 굉장한 소문이 날 뻔했다. 기드온, 그러니까 발데르 공작은 프리바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예비남편감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발데르 성에 침입해서 공작에게 울며 고백했대. 뭐라고?
“그, 저기. 어제 새벽부터 제가 큰 실수를 해서….”
페레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저 상냥한 아가씨는 모르겠지만 발데르 가문의 주인과 얽히는 실수라면 이 성의 누구라도 환영할 일이었다. 평상시에 이 성이 얼마나 고요한지를 아셔야 할 텐데.
“절대 아닙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공작님께서 워낙 간소하게 드시는 편이라 아가씨를 위한 디저트 종류를 많이 준비하지를 못해서 아쉽습니다. 급히 준비해서요…. 오랜만에 파이 반죽을 한다고 주방장이 어찌나 신이 났던지!”
바네사는 식탁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오전의 식탁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것 같았다.
바네사가 좋아하는 파이 종류도 있었는데 위에는 과일과 크림이 듬뿍 올라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워낙 손님 초대도 하지 않으시고 일만 하시니까요.”
“페레스.”
“하하.”
페레스는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기드온의 눈빛을 무시했다.
“오랜만에 기드온 님의 미소를 다 보고…. 이 늙은이가 어찌나 걱정을 했는지….”
기드온은 코웃음 쳤다.
“매일 밤을 일로만 지새우시고… 비뚤어지지 않아 다행인 줄 알았는데 이런 거라면 차라리 비뚤어지시는 것이….”
건조하기만 한 눈가를 일부러 문지르니 붉어진 것이나 제법 효과가 있었다. 바네사가 똑같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기드온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기드온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으나 맞는 말도 있었기에 그냥 듣고 있었다. 그는 바네사의 애정이든 동정이든 감사히 받기로 했다.
“발데르 공작가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을 고르자면 우리 공작님이 아니실까 항상 생각했고-”
하지만 페레스의 말이 끝도 없이 줄줄 이어지자 기드온은 더 해 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페레스는 그쯤하고 벙긋 웃었다. 그는 선을 몹시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하여튼 자주 오십시오. 아가씨라면 이 성의 모두가 언제든 환영할 것입니다.”
기드온은 성안 사람들이 바네사가 와서 몹시도 신났다는 것을 알아 우스웠으나 바네사는 그를 모르고 모든 것을 신기해했다.
식사를 끝낸 뒤 정오의 햇살을 즐기며 이번엔 숲 안쪽 연못 주변을 거닐었다. 바네사는 아침에는 긴장하여 느끼지 못했던 꽃향기를 만끽했다.
제법 오래 대화하며 산책했다. 별것 아닌 말에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이 마주치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덕분에 걷는 속도는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도착한 길도 나지 않은 숲속, 커다란 나무 아래에는 대충 다듬은 나무 의자가 놓여있었다. 두 사람은 그 위에 앉았다.
바람에 기드온이 편하게 내린 앞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바네사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에 붙은 꽃잎 하나를 떼어 냈다. 기드온이 환히 웃었다.
바네사는 기드온에게 느꼈던 벽에 대해서 술술 털어놓았다. 기드온은 약간 억울해 보였지만 어쨌든 바네사의 말에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렇다면 다 그의 잘못이 맞았다.
“원래 조나 힐을 가만두지 않으려 했는데. 제게 무슨 쪽지를 써 줬는지 알아요?”
바네사가 쪽지 내용을 고자질하자 기드온이 낮게 웃었다.
“저는 선물이라도 보내야겠습니다. 제 인생에 오랜만에 도움이 되는군요.”
“그러고 보니 어떻게 만난 사이예요?”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는데 책장 가장 위에 있는 책을 읽겠다며 사다리를 본인이 모조리 가져간 뒤에 넘어졌습니다. 다리가 부러졌어요.”
바네사는 속이 간지러워서 뾰족한 걸로 긁어내고 싶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거나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낄 때면 손끝이 간지럽고 목 뒤의 솜털이 보스스 일어났다. 제게 주어지는 이런 종류의 애정이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네사는 그래도 익숙해져 보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애정을 주려면 많이 받아 봐야 하니까.
바네사도 그에게 담뿍 돌려주고 싶었다.
“혹시 내일은 약속이 있습니까?”
“어, 네.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요….”
바네사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대답에 기드온이 아쉬워하는 것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그는 제 손 위에 올려 둔 바네사의 손끝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그렇군요. 혹시 내일 시간이 되면 같이 산책할까 했습니다. 조금 먼 곳도 괜찮고. 이동마법이 싫으면 말을 타도 되니까요.”
“그러고 보니 말 탄 지도 꽤 되었네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에요.”
“비밀이지만, 특전대 실습에서 당신이 말을 타고 달릴 때면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릅니다.”
뒤늦은 고백에 바네사는 씩 웃었다.
“전혀 몰랐지 뭐예요. 그때 매일 봐준 덕분에 실력이 엄청 늘었어요.”
“말을 타고 싶다면 지금도 탈 수 있습니다. 뒤쪽에 달릴 만한 길이 있어서.”
바네사는 그와 자연스럽게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다.
분명히 어제만 해도 술을 마시면서 울고 바닥을 때렸던 것 같은데.
바네사는 속으로 생각하기조차 멀게 느껴지는 단어를 간신히 떠올렸다. 연인.
어쨌든 연인이 된 첫날부터 이런 말을 하긴 싫지만 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