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75)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75화(75/146)
그래서 바네사는 폭풍을 막아 내는 마법사, 애버딘 차라에게 신상이 깨끗하게 털렸다.
사실 뭐 대단한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질문만 받는 기분은 제법 별로였다.
“털어 낼 것도 없군요.”
애버딘 차라는 여전히 콧수염을 뾰족하게 되도록 하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법부의 바네사 로즈라는 이야기지요.”
“네. 근데 저 질문이 있는데요.”
바네사는 무례하게도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일어나면 바로 누워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인데 다행히도 애버딘 차라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는 애초에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저는 중앙 성문 근처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왜 여기로 떨어졌을까요?”
“마력 조절을 잘못했겠죠. 흔한 일입니다…. 물론 저는 그래 본 적이 없지만 말이죠.”
애버딘 차라는 바네사가 듣기에 몹시 재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아주 잘난 사람들 천지군. 속으로 투덜거린 바네사는 다시 손을 번쩍 들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들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어느 정도의 마력을 써야 하는지는 어떻게 아나요?”
“대충 감으로 알아야죠.”
“그러다가 잘못되면요?”
“적진 한복판에 떨어지는 거지요.”
그냥 많이 해 보는 것 말고는 답이 없구나.
바네사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애버딘 차라는 손 하나 내밀지 않고 제 반짝이는 반지를 구경했다. 그리고 새침하게 물었다.
“설마 내가 데려다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죠?”
“…괜찮아요. 아! 저기 여쭤볼 게 더 있는데요.”
“질문이 너무 많군요.”
애버딘 차라는 일부러 크게 하품하는 시늉을 했다. 지루하다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바네사는 모른 척했다.
“밤에 제2성으로 들어갈 수도 있나요?”
“아예 퇴근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만 지금 당장 들어가려면 궁내부와 경비병들의 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애버딘 차라는 금박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망토를 우아하게 털어 냈다.
그는 어서 왕에게 들어가서 이 마법사의 신상을 고하고 본인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애버딘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이 질문 많은 마법사에게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바네사는 잠시 고민했다. 궁 내부에 보관된 레타의 신상을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하긴, 어차피 혼자 힘으로 확인해 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관료의 신상을 캐내는 것은 정보국이나 가능한 일이었고 정보국도 증거 없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바네사는 이미 한참 멀어진 애버딘 차라에게 소리쳤다.
“친절한 대답 감사해요!”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씩씩한 발걸음으로 발데르 성 쪽으로 향했다.
인적이 많고 밝은 곳만을 따라서 하얀 길 위를 걷는 발소리가 자그맣게 울려 퍼졌다.
⚜ ⚜ ⚜
왕의 수많은 집무실 중 하나인 이곳은 ‘황금의 방’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정도로 안쪽이 지독하게 화려했다.
벽 전체가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도배되어 있어 눈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재력을 과시하려는 졸부의 방처럼 천박하지 않았다.
작은 그림 하나를 걸 때에도 완벽한 비율을 따져 벽에 걸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다만 그 속의 왕은, 몹시도 수수한 차림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흐.”
왕은 신이 났다.
그녀는 인재라면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드는 경향이 있었는데 심지어 이번 인재는 제가 알아서 하늘에서 떨어졌다. 어찌 기쁘지 아니할쏘냐!
길을 걷다가 딱 적당한 마법사를 발견. 크, 어디 일기에라도 적어 놔야겠구만.
“흐흥, 으흥.”
애버딘 차라는 심드렁한 눈으로 콧노래를 부르는 왕을 바라보았다.
“조건을 정말 모르던데요.”
“몰라도 저 정도면 대단하지. 안 그래도 요즘 특전대 인력이 부족해서 난리였는데 말이야! 마법부의 끄트머리로 써먹기엔 아깝지. 마법부에서도 평판이 좋았군. 내일쯤이면 뒷조사가 끝나겠지.”
왕, 비나 돔 프리바는 신이 나서 서류 위에 서명을 갈겨 쓰기 시작했다.
애버딘은 붉은 쿠션에 금색 등받이를 가진 의자에 몸을 딱 붙이고 앉아 있다가 코를 긁었다.
“조건만 알면 아주 좋은 마법사가 될 텐데… 경계로 주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조건을 알도록 위험한 곳들에 제가 잘 굴려 볼게요. 성의라고는 코빼기도 없어 보이는 애버딘 차라가 말하자 왕은 코웃음 쳤다.
“너한테 보냈던 애들이 다 울면서 돌아왔단다. 꺼지렴.”
“예….”
애버딘 차라는 다시 졸린 표정으로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비나 돔 프리바는 애버딘을 잠시 흘끗대고는 아주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요즘 경계는?”
“뭐 평온합니다…. 동쪽은 괜찮죠. 서부랑 북부가 털리고 있는 것 같던데….”
“그리 시간이 남으면 북부로 가서 일을 좀 돕는 건 어때.”
“그 정도로 평온한 것은 또 아니옵고.”
왕은 혀를 찼다.
경계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저런 태도였다. 태어날 때부터 강력한 힘을 지닌 만큼 무언가에 대한 열정이 크게 부족했다.
저들은 그냥 왕과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경계에서 근무하는 것뿐이지, 그 힘으로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왕이 아는 예외는 그나마 기드온 솔 발데르 정도였다.
왕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입을 열었다.
“들렀다가 왔나?”
“예. 폐하의 어린 동생은 건강하시더군요.”
비나 돔 프리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녀의 눈길은 여전히 서류에 못 박혀 있어 애버딘 차라는 왕의 기분을 알 수 없었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고.
“좋아, 나가 봐. 계약을 새로 갱신했으니 3년간은 올 필요 없겠어. 지금까지처럼 동쪽의 마법사가 훌륭하게 프리바의 경계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겠다.”
애버딘 차라는 소리 없이 일어나서 적당히 예를 표했다. 왕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애버딘 차라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마법사가 나가자마자 왕은 펜을 대충 던져 버리고는 의자에 편안히 몸을 기댔다.
어린 동생이라. 제발 그곳에서 평안히 생을 보내면 좋으련만.
하지만 다른 생각도 잠시, 왕은 ‘바네사 로즈’에 대한 서류를 잡아 줄을 죽죽 긋기 시작했다.
동생이고 뭐고 그녀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착실한 일꾼들이었다.
얼마 뒤, 왕은 가볍게 종을 울렸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시종 셋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왕은 손을 휘젓고는 왕의 친필이 담긴 종이를 넣어 봉투에 넣었다. 곧이어 붉은 밀랍이 프리바의 인장 모양대로 굳어져 그 위를 장식했다.
“특전대의 장에게 보내라. 아, 발데르 성 말고 특전대의 집무실로. 공작도 밤에는 쉬어야 할 것이 아닌가?”
“예.”
늙은 시종 하나가 공손하게 봉투를 받아 들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왕은 그제야 딴생각을 할 수 있었다.
⚜ ⚜ ⚜
이미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성벽에 높게 매달린 마정석 등불이 거리를 적당한 빛깔로 물들였다.
보통 때라면 아름답게만 보였을진대 오늘따라 바람에 스치는 메마른 가지들이 음산하게 느껴졌다.
바네사는 다친 무릎이 약간 아팠지만 혹시 몰라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또 도망칠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 마력을 아껴야지.
프리바의 왕성 바로 근처에 붙어 있는 발데르 성은 앞쪽으로는 넓은 정원, 뒤쪽으로는 작은 숲에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 부지가 넓었다. 덕분에 성문에 도착하고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구조였다.
성문 앞에 서 있는 경비병들은 냉정하게 바네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단정한 미인이기는 했으나 흙먼지로 더러워진 옷소매와 까진 무릎,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여자는 발데르 성에 어떤 용무도 없을 것 같았다.
“약속이라도 잡아 놨소? 지금은 늦은 밤이오.”
“아니, 아닌데요. 일이 있어서요. 페레스 님이나 라모나 님께 마법부의 바네사 로즈라고 전달해 주실 수 있을까요? 몰래라는 말도요!”
경비병들은 관리인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바네사를 한 번 더 훑어보고는 서로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한 명이 느릿느릿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강한 마력을 사용한 대가로 점점 졸려 왔다. 그 뒤로 추운 날씨에 걸어서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눕고 싶다는 마음은 같았다.
“어쩌다 그리 다쳤소?”
“넘어져서요.”
경비병은 혀를 차며 하얀 망토에 묻은 흙을 털어 내라 조언해 주었다. 아무래도 발데르 공작에게 무언가 청탁하러 온 사람처럼 보인 것이 틀림없었다.
바네사는 약간 민망해져서 적당한 마법을 사용했다.
겨울의 칼바람이 불어와 바네사에게서 먼지를 날려 버렸다. 다만 바네사의 몸은 더욱 꽁꽁 얼었다.
“마법사구만? 좀 따뜻한 바람을 불러오지 그랬소.”
“그-러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성 안쪽에서 여러 명이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작은 등불을 든 사람들이 문밖으로 몰려나왔고 페레스는 허둥지둥 다리를 재게 놀렸다.
그는 저 멀리에서부터 바네사를 통과시키라는 허우적대는 손짓을 했다.
경비병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바네사에게 덕담을 건넸다.
“발데르 공작님께서는 냉정하시지만 공정하신 분이니 좋은 결과를 얻길 바라겠소.”
“감사합니다.”
바네사는 웃고는 열심히 걸어갔다.
곧 페레스가 헐떡이며 바네사의 곁에 섰다. 그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서 현재 왕성에서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일이 바쁘셔서 요즘 성을 비우는 일이 잦으십니다.”
“괜찮아요. 제가 연락도 없이 찾아왔으니까요. 죄송해요.”
“절대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바네사 아가씨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제가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페레스는 바네사의 엉망이 된 무릎을 보고는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아니, 어찌 된 일이십니까!”
그가 너무 놀라서 오히려 바네사가 머쓱해졌다. 마치 뛰어다니다가 넘어진 꼬마 애처럼 보일 것 같았다.
“넘어져서요. 별건 아니에요. 제가 치료하면 돼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성 내부에 상주하는 의사가 있으니 그에게 맡기십시오. 뺨도 하얗게 질리셨는데.”
페레스는 곧이어 달려 나온 사용인들에게 의사를 준비시키고 방을 따뜻하게 데우라고 말했다. 바네사는 괜찮다고 그를 말렸으나 페레스는 단호했다.
“공작님의 손님을 부족하게 대접할 수는 없지요. 그냥 손님도 아니지 않습니까.”
민망해진 바네사가 헛기침하자 페레스는 껄껄 웃었다.
바네사는 두 번째 방문이라 어쩐지 익숙해진 손님방으로 안내받았다.
창밖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던 손님방은 여전히 고상했다. 안쪽은 몹시도 따뜻한 온기가 감돌아서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바네사는 황송하게도 색이 다양한 소금까지 넣은 목욕물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그 후 의사가 와서는 무릎을 꼼꼼하게 소독해 주고 살핀 뒤에 아주 얕게 까진 것이니 치료마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었다.
“아무래도 자체 치유력을 조금 낮출 수 있다 보니 이 정도 상처에는 권유하지 않습니다. 심한 통증이 있으십니까?”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감사합니다.”
연고를 듬뿍 발라 준 의사가 나가자 바네사는 커다란 공간에 혼자 남았다. 침대가 있는 방 쪽으로 잠시 눈길을 주다가 고개를 저었다.
감사히도 누군가가 챙겨 둔 편한 가운을 걸친 바네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빈 종이 몇 장을 가져와 탁자에 두고 소파 위에 앉았다.
레타가 자신을 노린 이유를 알고 싶었다.
바네사는 얼마간 펜으로 종이 위에 이것저것 적어 보았다.
레티마 키나, 재무부, 마법사, 재능?
하지만 졸린 머리는 그다지 잘 돌아가지 않았고 캐낸 정보가 거의 없으니 쓸 것도 많이 없었다.
바네사는 눈을 깜빡이다가 소파 위로 얼굴을 기댔다. 다시 한번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피로에 펜 끝이 서서히 느려지고,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다.
그 뒤로는 암전이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얼굴을 파묻고 자던 바네사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