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80)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80화(80/146)
⚜ ⚜ ⚜
바네사는 편지를 마무리하고 봉투를 꼼꼼하게 봉인했다.
그 아래에 놓인 것은 프리바의 지도였다. 싼 것이라 아주 대충 그려져 있어 국경은 모두 대충 그은 직선이었으나 표시하기엔 나쁘지 않았다.
옆에서 조나 힐은 반쯤 드러누워 책장을 넘기며 지도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조나 힐은 바네사가 레타를 만나서 나쁜 일을 당할 뻔했다는 이야기에 흥분하여 함께 그녀의 행적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호니르를 여기까지 가져오다니 무겁지도 않냐. 아, 담배 피우고 싶다. 지도에 재 떨어지면 안 되겠지?”
“안 되죠. 참아요.”
잠시 투덜댄 조나 힐은 종이에 슥슥 선을 그려 알아볼 수 없는 글자를 썼다.
글자들은 허공에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고 그 자리에선 이상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나 힐은 연기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행복하게 킁킁댔다.
“조나 힐의 마법은 볼 때마다 신기해요.”
“글자로 마법을 실현하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근데 좀 귀찮기도 해. 조건이 너무 많다고! 빌어먹을 잉크.”
조나 힐은 손 위에서 펜을 휙휙 돌렸다. 바네사는 부럽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는 것이 어디예요. 예전에는 조건을 아는 것이 그렇게 부럽지는 않았는데 할 수 있는 마법이 다양해진다는 측면에서는 좀 많이 부럽네요.”
“너도 거대한 규모의 마법을 쓴 적이 있다며?”
“네, 그래서 언젠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리인가 봐요. 아주 오래 생각했지만….”
아쉽다는 표정을 애써 숨긴 바네사를 보며 조나 힐은 코를 긁적거렸다.
벌써 세 번이나 했다면 조건이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좋아. 잠시 하던 일은 내려놓고 추론 놀이를 해 보자고. 네가 조건을 충족했던 마법들을 말해 봐!”
이제 조나 힐은 완전히 드러누워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서점 밖에는 차가운 바람이 몰아닥치고 있었지만 안쪽은 몹시 따뜻해서 유리창에는 온도 차로 인한 습기가 달라붙었다. 몹시 평온했다.
그 안온한 공기 속에서 바네사는 곰곰이 생각했다.
“음, 후원자 선생님이 본 것이 제가 인식한 첫 마법이에요. 주변을 밝혀 주는 반딧불이 같은 빛들이요. 언령마법이나 마법진을 사용한 것이 아니니 조건을 만족했던 거겠죠.”
“그때 뭘 했는데?”
“빨래를 널었어요. 어두워진 저녁이었는데 하얀 시트를 널고 있었던 것 같아요.”
“흐음.”
조나 힐은 대충 간추린 종이에 내용을 갈겨 적었다.
“그다음은?”
“어, 친구들과 호숫가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물이 나타나서요. 하늘에서 긴 빛줄기들이 쏟아지면서 그 마물을 죽여 버렸어요.”
“그때 무언가 한 것이 있어?”
“아뇨, 딱히… 전 그냥 놀라서 무언가 생각할 시간도 없었어요. 다만 제 친구를 구해 줄 강렬한 무언가를 원했던 것 같아요.”
바네사는 최대한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며 신중하게 말했다. 조나 힐은 눈썹을 찌푸렸다.
“다음은?”
“어, 특전대 실습을 갔을 때인데 상황은 두 번째랑 비슷해요. 빛줄기도 비슷하고요. 다만 시간대는 달랐어요. 거의 저녁이 다 될 무렵이었거든요.”
펜 끝으로 관자놀이를 긁은 조나 힐은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세 번째만 들어 보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인 것 같지만 첫 번째가 완전히 다르군. 아마 너는 그전에도 마법을 쓴 적이 여러 번 있을 거야.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지.”
바네사와 조나 힐은 머리를 맞대고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바네사는 아무리 봐도 생각나는 것이 전혀 없었다. 조건을 찾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고 평생 알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어쨌든 보이는 걸로만 보면 저는 상황이나 행동 조건이 있는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러게. 시간대도, 장소도 날씨도 다 다르네. 세 번 정도면 공통적인 무언가가 보여야 하는데.”
조나 힐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그냥 상상하면 되는 건 아니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수백 번 해 봤는데 아니었어요. 상상이 조건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네사가 씩 웃자 조나 힐은 투덜대며 기지개를 켰다.
“보통 조건은 여러 개를 만족해야 하니까. 다른 단서는 어디 없나?”
단서, 단서. 입을 모아 중얼거리던 조나 힐은 순간 멈칫했다. 갑자기 바네사가 서점 안에서 만났다는 신비로운 소년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 동화를 잘 기억해 보도록 해.’
그 동화의 내용이 뭐였지. 밤 반달루가 스스로를 믿어 자신의 능력을 깨닫게 되는 내용이 아니었던가?
조나 힐은 놀라서 몸을 들썩였다….
바네사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조나 힐은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입을 헤벌리기를 반복했다.
하하, 설마. 그런 얼토당토않은 조건이 어디 있어? 그건 굳이 따지자면 조건도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나 힐은 바네사를 힐끔거렸다. 여전히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푸른 눈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뭐어,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리고 만약 제 예상이 맞다면 바네사는 절대로 스스로의 조건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조력자가 꼭 필요한 셈이지! 전에 발데르 성에 버리고 간 게 미안하기도 하니까.
조나 힐은 잽싸게 종이 위에 글자를 휘갈겨 적었다. 글자 속에 담긴 마법들은 아직 잉크 속에 숨어 있었다.
조나 힐은 종이를 등 뒤에 숨긴 채로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안 그래도 말해 주려고 했는데 이번에 새로 정립된 언령마법이 있는 거 알아?”
“네? 그런 게 있어요?”
다행히 바네사는 종이를 들여다보며 고민하느라 조나 힐의 이상한 말투를 눈치채지 못했다.
“워낙 별거 아니라서 몰랐을 수도 있어. 허공에 물방울이 춤을 추게 하는 마법이야. 쉬운 언령마법이라 너도 바로 할 수 있을걸.”
조나 힐은 종이 위에 좁은 범위를 의미하는 가장 간단한 수식들을 늘어놓고는 적당히 신비로워 보이는 소리를 냈다.
등 뒤에 숨긴 종이 위의 글자들이 반짝거리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 앞에 허공에서 나타난 물방울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웃으며 그 예쁜 광경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이 마법은 왜 있는 건데요? 그리고 수식들이 왜 이래요? 범위밖에 없어요?”
“그… 아니, 일단 그냥 좀 해 봐! 재미있잖아.”
조나 힐이 여러 번 채근하자 바네사는 수식들을 익히고 소리를 여러 번 따라 하며 물방울들이 움직이는 모양새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조나 힐은 문장을 교정하는 척했다.
“발음이 완벽해.”
바네사가 그 말에 웃으며 문장을 다시금 내뱉은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수도 없이 많은 물방울들이 별처럼 흩뿌려졌다.
조나 힐의 떡 벌어진 입을 배경으로 물방울은 통통 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와.”
바네사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뜬 물방울들을 살짝 튕겼다.
그 손짓에 작게 나누어진 물방울들이 서점 내부의 빛을 반사하며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재미있는 마법이네요. 누가 굳이 이런 마법을 정립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제가 모르는 가치가 있는 걸까요?”
바네사가 웃으며 조나 힐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그녀는 여전히 경악한 표정을 지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조나 힐?”
“…야.”
조나 힐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조건이 있다니. 말도 안 돼. 이건 조건이….
“왜 그래요?”
“…….”
조나 힐은 벌어졌던 입을 다물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조건을 아는 마법사와 조건을 모르는 마법사의 격차는 좁히기 어렵다. 조건을 모르는 경우 상당히 많은 제약 아래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리되지 않은 마법들은 실현할 수 없었고 강력한 마법을 위해서는 반드시 마법진을 그려 내야 했다.
하지만 조건을 안다고 해서 모두 경계의 마법사들처럼 강력해지지는 않는다.
조건을 아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다시 격차가 생긴다. 그 격을 나누는 기준은 타고난 마법력의 크기였다.
조건을 몰랐을 때, 언령마법만으로도 강력한 마법을 이끌어 냈다면 그 타고난 크기는…
“조나 힐!”
조나 힐이 고개를 들었다. 앞에 보이는 푸른 눈이 걱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 눈 속에 비치는 것은 머리를 박박 민 여자였다.
“바네사, 조심해야 해.”
조나 힐은 침착하게 말했다.
과거부터 내려온 이야기들. 얼마나 많은 마법사들이 타락하여 비참한 인생을 보냈던가. 강력한 힘이 주는 것이 꼭 행복은 아니었다.
“절대로 과신해서는 안 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데요?”
알쏭달쏭한 말에 바네사가 눈썹을 찌푸리자 조나 힐은 결국 입을 열었다.
“방금 쓴 마법은 언령마법이 아니야.”
“그럼요?”
바네사의 의심 하나 없는 맹한 표정에 조나 힐은 가슴을 쳤다.
과신은 무슨, 왜 저런 조건을 타고났는지 아주 잘 알겠다!
“네가 조건을 충족한 거지, 이 멍청아!”
“어….”
바네사가 애매한 표정을 짓자 조나 힐은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눈을 맞추었다.
“그전에 만났던 소년이 동화의 이야기를 잘 기억하라고 했다면서. 넌 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어. 방금 그 마법이 언령마법이라고 생각했고 수식이 간단하다고 생각했지?”
바네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한 거야. 내 생각에 네 조건은 이거야. 스스로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것. 다른 조건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중 하나는 이거라고.”
바네사가 여전히 머리 위로 물음표만 띄우고 있자 조나 힐은 바네사의 어깨를 탈탈 털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휘청휘청 흔들렸다.
“야, 네가 다른 날에 썼던 마법들을 봐! 고아원에 살 때에는 아예 마법을 인지하지 못했으니 할 수 없다는 생각도 없었을 거고, 다음부터는 위험하니까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던 거잖아!”
어떤 마법사라도 이 조건을 들으면 뛸 듯이 기뻐해야 할진대 바네사의 표정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암울해지기 시작했다. 제 성격을 알아서 더욱 그랬다.
“조나 힐의 추측이 맞다고 해도 할 수 있다,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 의지에 달린 문제가 아닌걸요. 그냥 저도 모르게 한계를 짓는 건데 그럼 더욱….”
바네사가 점점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조나 힐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러네?
“…아냐, 생각해 보면 넌 한번 해 본 마법은 무조건 할 수 있다는 뜻이잖아. 왜냐면 할 수 있었으니까!”
“이런 것 말이죠?”
이제 이상한 소리 따위는 필요 없었다. 순식간에 서점 안은 춤추는 물방울들로 가득 찼다. 범위가 워낙 넓어 서점 안이 온통 물이었다.
바네사가 자신이 하고도 놀라 움츠렸고 조나 힐은 꽥 소리쳤다.
“책에 한 방울이라도 튀면 가만 안 둬!”
바네사는 단숨에 습기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는 눈만 껌뻑였다.
뭐야, 이거 진짜야?
“그거 말고도 빛이 떨어지는 마법은 할 수 있겠네. 해 봤잖아.”
번뜩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은 서점 밖으로 우당탕 뛰어나가 밧니르 다리로 향했다.
첫 번째 도전은 실패였다.
하지만 그날, 거대한 퓌돔 어딘가의 밤하늘에 유성우가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강력한 마력을 느낀 몇몇 마법사들이 급히 달려왔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어 모두 허탕만 치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