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81)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81화(81/146)
몹시도 이상한 조건을 깨달은 바네사는, 그날 이후로 레티마 키나의 뒤를 쫓는 것을 멈췄다. 오직 마법을 연습하는 데에 온 힘을 다했다.
대부분은 혼자 있는 집 안이나 조나 힐의 서점에서였다. 조나 힐은 가끔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바네사의 조건이 몹시 흥미로웠는지 이것저것 도와주곤 했다.
시간을 투자할수록 마법 실현 조건들은 점점 더 구체화되었다.
바네사는 그저 ‘할 수 있다고 믿을 것’ 말고도 ‘구체적인 상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어둠에 가린 듯 희미한 상상에는 바네사의 의지와 달리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책들을 떠오르게 하려고 했는데 유리창이 깨진다던가.
물론 그 뒤로는 조나 힐의 고함 소리가 고막을 거세게 두들겼다. 바네사는 월급에서 유리창 값을 빼내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범위를 산정하는 데에 필수인 수식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바네사는 아주 오랜만에 손끝에 잉크를 물들여 가며 책상 앞에서 끙끙댔다. 예상하고 계산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되었으므로 시간을 내서 공부해야 했다.
바네사는 조급함에 안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금까지 쌓아 온 노력이 조건을 알게 된 순간 빛을 발했으니까.
몇 주 만에 ‘바네사가 쉽고 간단하다고 생각할 만한 마법들’은 실현 속도라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원하는 대로 순식간에 이루어져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지지부진한 부분도 있었다. 마법의 규모가 조금만 커져도 실현 확률이 훅 줄어들어 실패하는 경우가 잦았다.
‘할 수 있다는 마음’에 의심이 깃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마력이 흩어져 피어나려던 빛이 사그라들었다.
“아….”
바네사는 피곤함을 느끼며 그대로 몸을 뒤로 넘어트렸다.
좁은 방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넘어져도 침대 위였다. 싸게 산 침대는 푹신함이 부족해 약간 아팠지만 몸을 이불로 둘둘 말면 뭐, 나름 만족스러웠다.
바네사는 두툼한 체크무늬 이불로 몸을 꽁꽁 말고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도대체 스스로를 믿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 내 맘대로 조절도 안 되는데.
혹시 안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잖아!
‘마법의 힘이란 참으로 얄궂지. 몸치에게 춤을 추게 하고 음치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한단다.’
갑자기 아페르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 3학년 2학기, 바네사의 아카데미 첫 학기에 들은 말 같았다.
내가 자신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러는 거 아니야. 치사하다, 치사해.
그런데 어디다 대고 욕을 해야 하나. 하늘? 아니면 신? 옛 신의 이름이 뭐였더라. 라마이라라고 했던가.
바네사는 약간 찢어진 벽지의 틈새를 노려보았다.
툭.
그때 호니르 입구를 통해 편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네사는 따뜻한 이불 안을 벗어나기 싫어 못 들은 척하며 누워 있었다. 추운 날씨와 지친 몸에, 두툼한 이불만큼 대단한 유혹은 없었다.
피곤해서 일어나기 싫다. 그런데 누구에게서 온 편지지?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바네사는 빛을 불러냈다. 동그랗게 주변을 밝히는 빛무리가 둥둥 떠다니며 어두워지는 방을 밝혔다.
그러자 희미하게 편지 봉투 위의 검은 글씨가 보였다.
아, 저 글씨체는.
눈을 동그랗게 뜬 바네사는 걷어차듯 이불을 뿌리쳤다. 그리고 다리가 꼬여 넘어질 뻔한 것도 무시하고 책상으로 향했다.
편지는 기드온에게서 온 것이었다. 보통 때와 달리 편지는 밀랍으로 봉인하지 않고 풀로 이어붙인 듯했다. 특전대 일로 파견을 나갔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바네사는 찢어질까 조심하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 ⚜ ⚜
바네사에게.
연락이 뜸해 미안합니다.
이 펜은 촉이 망가져 잘 써지지 않는군요. 특전대원 중 제대로 된 펜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없다는 게 믿어집니까?
당신에 대한 수많은 걱정은 일단 속에 담아 두겠습니다. 시간 내에 이 편지를 완성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재무부 장관에 따르면 재무부의 레티마 키나는 ‘그날’ 이후 행방이 묘연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레티마 키나도 아닙니다.
진짜 레티마 키나는 몇 년 전, 죽은 채로 발견되었으나 가족들이 미처 사망 신고를 하지 못해 해당 지역에 인명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을 가져다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덕분에 내각 인원에 대한 대대적인 인명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법무부에 속한 범죄국이 직접 레티마 키나에 대한 수색을 벌이고 있으나 애초에 가상의 인물이었으니 진행이 더딘 모양입니다.
이 내용은 공유되어도 문제없다 확인받았습니다.
다만 재무부 장관에게 레티마 키나에 대한 조사를 부탁하느라 당신 이야기가 조금 나오고 말았으나, 적당히 아는 사이라고만 말해 두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의 안전이 걱정됩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 여기지는 말아요. 도대체 당신에게 접근하는 자들이 왜 이렇게 많은 겁니까?
개인적으로는 발데르 성에 와서 지내는 것을 추천하지만 불편해할 것을 압니다.
내가 지금 퓌돔이 아니라서 찾아가지 못하고 편지로 전합니다.
날이 추우니 감기 조심해요. 함께 있던 응접실이 간절하군요.
당신이 몹시 보고 싶은,
기드로부터.
⚜ ⚜ ⚜
날짜도 없는 편지는 뒤로 갈수록 글씨가 날아가더니 마지막에는 이름이나 겨우 휘갈긴 듯 보였다.
바네사는 어쩐지 편지를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보통 때의, 삐져 나간 것 하나 없이 완벽한 글자가 아니라서 그런가 싶었다.
도대체 얼마나 바쁜 건지.
편지에 담긴 내용이 많았다. 되새기듯 편지를 여러 번 읽은 바네사는 눈썹을 찌푸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마법에 몰두하느라 잠시 밀쳐 둔 이름이었다. 레티마 키나.
그렇게 당당히 접근하는 걸 보고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가명이었다니. 그것도 죽은 사람의 이름까지 빌리고….
도대체 왜 자신에게 접근했을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마법사가 필요했던 걸까?
자신은 이제 막 내각에 들어온 신입이었고 보호해 줄 가족 하나 없으니 아마 적당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조건을 알려 주겠다며 꼬셔 내면 아주 손쉬우리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마법사를 도대체 뭐에 쓰려고? 그냥 적당한 마법사를 돈 주고 고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 고용 관계보다는 끈끈한 무언가를 원했나?
추측은 항상 이 부분에서 끊기고 말았다.
기드는 무언가 알고 있나 싶다가도 저렇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묻고 싶지도 않았다.
수수께끼들은 항상 그렇지. 흐름을 타고 따라가다 보면 손쉽게 정답에 도달할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꽉 막혀서 머리만 부여잡게 되는 것이다.
서점에 나타나 제게 마법의 조건에 대한 단서를 제공했던 소년도, 자신을 꼬여 내려고 한 레티마 키나도.
바네사는 책상 위로 머리를 콩 박았다.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수수께끼만 내지 말고 누가 정답을 좀 알려 줘….”
허망한 목소리에 아까 불러낸 빛무리들이 위로하듯 주변을 맴돌았다.
숨을 푹푹 내쉰 바네사는 그 온기에 힘입어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펜과 결이 매끄러운 종이를 꺼내 들었다.
지금 바로 답을 보내면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걱정을 좀 덜어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내용을 정리할 틈도 없이, 종이 위로 펜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 ⚜ ⚜
<12월 28일, 에디르네력 1312년>
기드에게.
도대체 레티마 키나에 대한 조사 요구는 언제 하고 간 거예요?
위법성을 발견했다니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만 나 때문에 일이 더해진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무거워요.
내 안전이요? 이 좁디좁은 방에서 위험한 건 오직 하나뿐이에요. 빈틈없이 솜을 짜 넣은 두툼한 이불이죠. 들어가면 도저히 나갈 수가 없다니까요.
오늘 아침엔 일어나기 싫어 앓다가 깜빡 다시 잠들 뻔하기까지!
하지만 나는 마법사니까 이불쯤이야 어떻게든 물리칠 수 있다고요.
오늘 누군가 북쪽 바다가 얼어붙었다는 이야기를 전했어요.
모두들 그 광경이 궁금하다는 말을 하는 와중에 나는 기드 생각을 했어요. 파견을 나갔는데 춥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요.
물론 당신은 아주 튼튼한 몸을 가졌고 동부는 약간 쌀쌀한 정도겠지만, 기드가 나를 걱정하는 만큼 나도 기드를 걱정하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잘되죠? 그러니 내 걱정을 하는 만큼 본인의 몸도 잘 챙겨야 해요.
그리고 응접실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우리 그냥 이야기만 나누었잖아요. 그렇죠?
음, 다시 생각해 보니 당신이 조금 수줍어했던 것 같기도 하네요….
뒤늦게서야 말하지만 제법 보기 좋았어요.
당신 말대로 손의 온기가 간절하긴 해요. 내 손 대신 검을 잘 잡고 있어요. 좀 차갑긴 하겠지만요.
건강하게 돌아와요.
걱정이 몹시 많은,
바네사로부터.
⚜ ⚜ ⚜
바네사는 편지를 곱게 접어 얇은 끈으로 살짝 묶었다. 새하얀 호니르에 들어간 편지는 시간이 흐르자 사라져 버렸다.
잠시 멍하니 호니르를 응시하던 바네사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마법을 좀 더 연습하고 자야겠다.
바네사는 천장으로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기드온의 편지를 본 게 다인데, 어느새 피곤함이 달아났다.
다시 손끝을 타고 마력이 흘렀다.
그 뒤로도 바네사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기절하기 직전까지 마력을 소모하고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어찌저찌 무언가를 해내면 그다음부터는 훨씬 실현이 잘되었다.
물론 아침에 항상 피곤함에 절어있긴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발전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활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건 스스로의 속마음에 숨긴 비밀이지만 기드온이 돌아왔을 때 보여 줄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더욱 의욕이 솟았다.
기드도 내가 조건을 깨달은 것을 알면 훨씬 걱정이 나아질 테니까.
그가 퓌돔으로 돌아오면 조건을 알아냈다고 바로 자랑해야지. 어떻게 알아냈냐고 말하면 비밀이라고 대답하면서 놀려 줘야지.
그러나 바네사의 그 기대와는 달리, 기드온은 제법 오래 퓌돔에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