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86)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86화(86/146)
바네사는 항상 3층의 손님방을 사용했으나 지금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전번의 4층이었다.
과거에도 그랬듯, 4층으로 올라서자 움직이는 사람 하나 없이 쥐 죽은 듯 고요한 복도가 그들을 반겼다. 오전의 햇살과 흘러넘치던 기억과 달리 밤의 4층은 무거운 적막감만 흘렀다.
기드온은 오른쪽 문을 열어 바네사를 들여보냈다.
여전히 안은 단정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대부분 짙은 색으로 꾸며져 있어 답답해 보일 만도 했지만 적절하게 놓인 조명들 덕에 품위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아마 저 옆에 달린 문을 지나면 그의 침실이겠지.
바네사는 소파에 앉아 다시 마음을 다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기드온은 별말 없이 겉옷을 벗어 뒤쪽에 걸쳐 두었다.
“대가로 뭘 드린다고 했어요?”
“…….”
“다 들었으니까 어서 말해요.”
“발데르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땅의 일부입니다. 별것 아니-”
“별것이 아니라고요? 정말?”
열이 반쯤 식은 바네사는 우울하게 말했다. 기드온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진실의 일부를 말했다.
“자나바라는 곳인데 남쪽의 휴양지입니다. 정말로 땅이 큰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 평판에 흠이 갈 만한 곳이라면서요. 그런 곳을 제가 겨우 특전대에 들어가는 것이 위험해서 폐하께 드린다고요.”
“겨우가 아닙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그 땅의 가치가 당신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기드온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바네사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뭐랄까, 굉장히 감동적이긴 했지만 바네사는 그의 평판에 흠집을 내면서까지 보호받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보호받을 생각은 애초에 하나도 없었고, 그가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챙기지 않는 것이 정말 싫었다.
나도 그를 지키고 싶었다. 힘들고 지치는 날,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원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바네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건너편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가 움찔 떠는 것을 무시하고 그의 옆에 앉아서 커다란 손을 끌어 제 손 위로 올렸다. 검을 잡아 딱딱한 손이었는데 이리저리 벌어진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소매를 살짝 위로 밀어 올리니 그 안쪽에는 여러 번 덧댄 습포가 보였다. 이런 것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편지.”
기드온의 의아한 시선이 닿자 바네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편지 쓰고 싶다고요. 오래 고민해서 제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데 말로 하려니까 어려워요.”
하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가장 깊게 파인 상처 윗부분을 쓸어 냈다. 어느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발현된 마법에 기드온이 눈을 크게 떴다.
살이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다. 눈에 불을 켜고 마법을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나는 기드온이랑 만나면서 얻은 것이 많아요. 배운 것도 많고요.”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원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미련 없이 접는 편인데 요즘은 한번 해 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기드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에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간청한 것이지 당신이 받아들여진 것이 아닙니다. 난 이미 당신에게 차여 있지 않았습니까.”
기드온이 나직하게 속삭이자 바네사는 코웃음 쳤다. 어쨌든 고백한 것은 제가 아닌가.
“하여튼 저 ‘해 봐도 된다’는 생각이 제게 준 것이 많아요. 기드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
“하지만 기드는 나랑 만난 뒤로 무얼 얻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바네사는 약간 기운 없이 미소 지었다.
“평판에 해가 가는 일이나 하려고 하고, 신경 쓰는 일은 많아져서 몸은 축내고.”
“당신 탓이 아닙니다.”
“내 탓은 아니지만 나를 위해서는 맞죠. 내가 레티마 키나에게서 도망친 날 이후로 누군가 내 숙소 근처를 지키는 걸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기드온은 피곤한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바네사가 알고 있을 줄 몰랐던 탓이다.
“나는 얻은 게 많은데… 기드는 왜 힘들기만 한 것 같죠?”
“내가 당신에게서 배운 것이 더 많을 겁니다.”
“뭔데요.”
바네사가 뚱하게 묻자 기드온은 아무 말 없이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바네사는 그의 상처를 보며 한숨 쉬듯 말했다.
“일방적으로 날 보호해 주려는 건 싫어요. 우리는 지금 어, 연인이라는 관계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기드온을 보호해 주고 싶어요. 난 기드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더욱 그래요.”
기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뒤집어 바네사의 손을 가두었다.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같이 의논도 하면 좋고요. 당신이 위험한데 나만 모르는 것도 싫어요. 다치면 알려 줘요. 걱정이라도 하고 싶으니까.”
방 안은 어두웠고 그의 얼굴은 반쯤 그늘에 잠겨 있었다. 기드온은 간신히 뭐라고 속삭였지만 바네사는 잘 듣지 못했다.
“네?”
“당신이….”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당신이 다칠까 봐 겁이 납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약한 진심을 내보였다. 진심은 바닥을 긁고 나와 힘이 없었다.
바네사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 그가 놀라웠다. 항상 바네사를 지지해 주던 굳건하고 명료한 눈빛이 속눈썹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폐하께서 저를 특전대의 장으로 임명하실 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너는 약점이 없으니 이 자리에 잘 맞을 것이라 하시더군요.”
잔인한 말이었다.
“특전대가 위험한 것은 오직 마물을 상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물이 번성하는 곳을 보면 결국 가장 위험한 것은 사람이라. 따라서 체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견제받거나 공격받을 일이 많습니다.”
바네사는 그의 눈을 보고 싶었지만 그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것이 남지 않아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남은 가족도, 미련이 남을 무엇도 없었으니까.
“이젠 아닌가요?”
기드온은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이 있어 두렵습니다.”
바네사는 난감하게 웃었다.
“그럼 이젠 함께 건강하게 돌아오도록 노력해야겠네요. 이렇게 다치지 말고요.”
바네사가 그렇게 말했으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영 고개를 들 생각이 없어 보이자 결국 바네사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 올렸다. 남자는 순순히 그 힘에 이끌렸다.
그러나 마주친 눈은 여전히 우울해 보였다. 바네사는 그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어 애가 탔다.
그저 자신이 특전대에 들어가는 게 싫어서 이러는 걸까? 위험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그는 지나친 우울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바네사.”
바네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맞춘 채로 가만히 기다렸다.
달싹이던 입술이 마침내 제 불안감을 토해냈다.
“내가 애정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일찍 떠나는 것 같습니다.”
바네사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커다란 손으로 바네사의 손을 떼어 내고 제 얼굴을 쓸어 냈다. 다시 시선이 바닥으로 내리깔렸다.
바네사는 그제야 기드의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그가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발데르 전 공작 부부가 갑작스레 사망한 후, 아직 미성숙했던 기드온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 친척들이 욕심을 부렸다. 그들이 지나친 과욕을 부린다 판단한 기드온은 발데르 가문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부당한 특혜를 모조리 없앴다.
그는 가문의 주인으로서 인정받았으나 커다란 성의 내부는 고요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아끼던 외조부마저도 숨을 거두어 기드온은 완전히 혼자 남게 되었다. 퓌돔 내부에서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모두가 그를 틈 하나 없이 냉정하고 완벽하다고 했다. 심지어 그를 오래 봐 온 왕마저 그렇게 평가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가 품고 있는 불안감을 알지 못하고 서운해만 했다는 게 미안했다.
“그래서 당신을 위험한 곳에 내놓는 것이 싫었습니다. 멋대로 결정하려 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당장 그의 불안함을 잦아들게 할 수 있을까? 아니. 이런 건 분명히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증거를 보여 줘야 했다. 나는 항상 건강히 돌아올 것이란 걸.
하지만 지금 당장 그의 입가에 미소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분위기에 맞지 않게, 씩씩하게 말했다.
“여러 번 담금질해서 그 손의 굳은살처럼 만들어야죠. 당신이 걱정하지 않도록 내가 더 노력할게요. 다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못해요. 그래도 항상 이곳으로 돌아올 거라고요.”
이럴 때 마법이 실패할 수는 없었다.
바네사가 장난스럽게 얍-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반짝이는 물방울로 가득 찼다. 쓸데없는 마법이지만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전 이제 조건을 아는 마법사거든요. 그리고 공간이동 마법도 잘하니 순식간에 돌아올 수 있어요.”
뭐, 아직 부족함이 있기는 한데. 이 말은 몹시 웅얼거렸기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기드온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보석 같은 물방울들을 배경으로 웃고 있는 바네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제법 오래 침묵하다가 속삭였다.
“볼 때마다 새롭군요, 당신은. 내게 나타난 너무 큰 선물이 아닙니까.”
여전히 물방울들은 춤을 추고 사위는 고요하여 어둑했다.
다만 서로를 이해하여 정리된 감정들이 사이에 놓였다. 마침내 기드온은 바네사에게 패배하여 굴종하듯 고개를 숙였다.
바네사는 그의 얼굴을 감싸 고개를 들도록 했다. 그녀는 관대한 승리자였다. 그의 지친 눈가를 쓸어 주고 다정히 뺨을 맞댔다.
“나도 꼭 당신을 지켜 줄게요.”
“그럴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더 좋고요.”
서로의 코끝이 맞닿을 거리, 눈을 마주치며 바네사가 웃자 기드온은 어쩐지 어지러웠다.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닿고 싶어 움직였다. 그러다 간신히 멈추었다.
살짝 비껴 내린 시선은 그녀가 피할 시간을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네사는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침내 닿은 숨결에 바네사는 잠시 떨었다. 창 안으로 떨어지던 밝은 햇빛 없이, 어둑한 곳에서 하는 접촉은 무언가 기분이 달랐다. 하얀 손이 간신히 남자의 팔과 단단한 어깨를 그러쥐었다.
처음은 가볍게 내려앉았으나 점점 깊게 얽혀 어느새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시간의 흐름은 몹시 상대적이라 닿아 있는 순간은 영원 같기도 했으나 찰나 같기도 했다.
마침내 떨어진 입술은 눈가부터 시작해서 뺨, 귓가에 쉼 없이 입을 맞추다가 부드럽게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기드온은 차오른 욕심을 더는 참지 못했다.
물론 바네사도 마찬가지였다. 어둑한 방의 한 가운데에서, 바네사는 떨리는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