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87)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87화(87/146)
⚜ ⚜ ⚜
기드온은 나른한 감각 속에서 눈을 떴다.
항상 그렇듯 침실 안은 고요했고 침대 휘장 안은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그러나 오늘만은 분명히 다른 온기가 품에 있었다. 그 안온함에 그는 낮게 신음했다.
차라리 몰랐다면, 생각만으로도 불쾌하지만 어쨌든 놓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 따스함을 한번 맛본 이후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욕심이 들쩍지근하게 달라붙었다. 제 혼자만의 생각에도 바네사가 저를 떠난 것처럼 숨이 흐트러졌다. 있지도 않은 상대에게는 적대감이 일었고.
그래, 이쯤 되면 미친 것이 맞다. 기드온은 깨끗하게 인정했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품에 안긴 여자의 머리 위에 입술을 묻었다. 바네사는 딱딱한 몸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잘도 안겨 있었다.
그럼에도 약간이나마 떨어진 틈이 아쉬웠다. 기드온은 바네사의 허리를 감아 바짝 끌어당겼다. 그제야 완전히 맞닿은 몸이 만족스러웠다.
그 움직임에 바네사는 잠결에 뭐라 칭얼거렸다.
“더 자요.”
자장가를 불러 주듯 나직한 목소리로 도닥였다.
바네사는 순순히 다시 고른 숨을 내쉬며 그의 품에 뺨을 기댔다. 기드온은 곧 새벽의 빛이 밝아 올 것을 알았으나 모른 척 다시 눈을 감았다.
무엇도 이 평화로운 시간을 괴롭히지 못하길 바라면서.
⚜ ⚜ ⚜
바네사는 간신히 눈을 떴다. 온몸이 뻐근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앞에 보이는 벽은 눈에 썩 익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뒤를 단단히 감싸 안은 온기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낯설었다.
아니, 익숙하긴 하지만 아침에 이러고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거지.
바네사는 애써 어제 새벽에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의 저편이므로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발끝을 움찔거리자 다리를 타고 허벅지에 격통이 밀려왔다.
몸의 크기가… 안 맞아. 바네사는 이를 악물고 신음 소리를 참았다.
다행히도 마지막 기억과는 달리 몸은 산뜻했고 얇고 하늘하늘한 가운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바네사는 당연히 제 허리를 감싼 팔의 주인을 알고 있어 뒤를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도저히, 도저히 그 밤을 보내고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바네사는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는 좀 더 잠을 자게 두고 나는…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 도망쳐야겠다.
하지만 온몸이 삐걱대니 동작 하나하나가 부자연스럽고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당연히 기드온은 이미 깨어 있었다.
그는 제 품 안에서 움찔대는 바네사의 머리꼭지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바네사는 눈치채지도 못하고 최대한 조용히 옆으로 빠져나가려 노력했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바네사가 겨우 한 뼘 전진했을 무렵, 기드온은 바네사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당겨 그녀를 다시 품 안에 넣었다.
목덜미에 닿는 부드러운 입술에 바네사는 완전히 얼어 미동도 하지 못했다.
“잘 잤습니까?”
새벽이라 그런지 약간 갈라진 목소리가 오히려 귓가를 감미롭게 울렸다. 바네사는 목소리 하나에 갑자기 어제의 기억이 와르르 몰려와 눈만 질끈 감았다.
“피곤해요?”
“아니, 괘, 괜찮…”
“아픈 곳은…”
그가 말끝을 흐렸다. 말하자면 길지만 또 말하기는 민망한 곳들이라 바네사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어쩐지 허벅지 안쪽이랑 허리가 엄청 아픈데 왠지 알고 있어요?
물론 안다는 대답도, 모른다는 대답도 울분이 치솟을 게 틀림없었다.
기드온이 감았던 팔을 풀고 바네사의 몸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하려 한 것이었지만 바네사는 급히 자신의 이마를 그의 목덜미에 박았다. 기드온이 어이없어 웃었지만 바네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왜 그래요.”
“민망하니까요! 빨리 나가요.”
“여긴 내 침실인데.”
“아, 그렇지. 그럼 내가 나갈게요!”
바네사가 팔을 허우적대며 일어나려고 했으나 기드온은 간단히 그 버둥거림을 제압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늘어진 바네사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라모나가 아마 당신이 자주 쓰는 방을 정리해 두긴 했을 겁니다. 그래도 차가울지도 모르니 여기에 있어요.”
바네사는 다른 사용인들을 마주칠 생각을 하자 창백해졌다. 모두들 자신이 그의 침실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
세상에,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도 잘 살고 있을까! 자신은 누가 이런 관계를 안다는 생각만 하면 소름이 끼쳤다. 이건 아주, 아주 개인적인 일인데!
여전히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충격에 빠진 바네사를 내려다보던 기드온이 놀리듯 말을 이었다.
“왜 그래요. 밤엔 괜찮았잖아요. 아, 거기 당신이 깨문.”
“아악! 말하지 말라고!”
바네사가 급히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리자 시선을 마주친 기드온은 눈을 휘어 웃었다. 색채가 화려한 눈동자에 바네사는 힘이 쭉 빠졌다.
기드온은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먼저 몸을 일으켜 가운의 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커다란 몸을 감싸고 있던 얇은 가운은 그 사이로 단단한 몸 선을 비추었다.
멍하니 그를 구경하던 바네사는 머릿속으로 지나간 잔상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침대 위를 굴러 도망치려 했지만 기드온은 놓치지 않고 덥석 안아 올렸다.
“알아서 걸을게요….”
민망해서 이제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어졌다. 바네사가 얼굴을 가린 채로 웅얼대자 기드온은 짧게 웃었다.
“다리 아파 하는 것 같아서요. 잠시만 있어요.”
기드온은 연결된 욕실로 가서 여전히 바네사를 품에 안은 채로 따뜻한 물을 받았다. 물이 욕조에 찰랑대고 나서야 바네사를 대리석 욕조의 끝에 앉혔다.
그는 꼼꼼히 물의 온도를 확인하고 바네사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파하는 곳을 만져 주려 했으나 바네사는 기겁하며 피했다. 바네사는 씩씩대며 말했다.
“밤에나 이렇게 다정하게 굴지 그랬어요?”
“미안합니다.”
기드온은 고분고분하게 사과했다. 집요하게 군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바네사는 앓는 소리를 내며 끙끙댔다. 순순한 인정에 할 말을 잃고 몸이 늘어졌다. 그러나 씻는 것을 도우려 다가오는 손을 보고는 몸을 다시 벌떡 일으켰다.
“혼자 할 수 있다고요! 나가기나 해요!”
“아프지 않습니까. 그렇게 몸을 말고 있으면서….”
바네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밤은 밤이고 아침은 아침이었다. 이렇게 햇살이 밝고 창이 커다란 곳에서 나신으로 그를 마주할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기드온은 결국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쫓겨났고 바네사는 물소리만 울리는 욕실에 혼자 남았다.
화려한 장식 없이 채광 그 자체로 보석 같은 느낌을 내는 성답게, 욕실에도 커다란 창이 있었다. 욕조를 마주하고 있는 그 유리창은 뒤쪽 숲과 연결되어 높게 솟은 나무들이 훤히 보였다.
여름에 여기에 있으면 나무들의 녹색 물결에 천국도 부럽지 않겠는걸.
그 밝은 햇살 아래에서 바네사는 물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이 몸을 감싸자 경직되었던 몸이 나른하게 풀리며 긴 숨이 내뱉어졌다. 고개가 힘없이 뒤로 늘어졌다.
흰 살결에 드문드문 남은 붉은 자국에 바네사는 물을 끼얹었다. 물론 옅어질 기미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자꾸만 스치듯 지나가는 잔상에 바네사는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하지만 그의 어깨와 등을 할퀸 것이 생각나자 결국 물에 머리를 박았다.
꽤 오랜 시간을 따뜻한 물속에서 몸을 데웠다. 그럼에도 혹사당하다가 늦게 잠든 몸은 피로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제 나갈 시간이었다. 갈 곳이 있으니까.
깨끗하게 씻고 가운을 걸친 바네사는 준비된 옷을 들어 올렸다.
바네사의 갈색 머리카락에 몹시 잘 어울리는 짙은 초록색 벨벳 원피스였다. 아주 고풍스럽고 단순한 모양이라 혼자 입기에 문제가 없었다.
바네사는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마법으로 말리고는 만족스레 웃었다.
“하, 이쯤이야 이제 쉽지.”
머리끝이 과도한 수분을 뺏겨 엉킨 것은 모른척했다.
바네사가 다시 응접실로 나가자 기드온은 이미 깨끗한 차림이었다. 주름 장식 하나 없이 품이 큰 하얀 옷은 그와 몹시 잘 어울려서 바네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제는 황량하게 비어 있었던 탁자 위에는 간단한 음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신선한 과일들과 갓 구운 빵의 향기가 솔솔 퍼졌다. 따뜻한 수프도 있어 먹음직스러웠다.
“좀 부담스러울까 봐 가벼운 것들 위주로 부탁했는데 괜찮습니까?”
“그럼요. 전 원래 아침 식사는 챙기지도 못하는걸요.”
기드온이 그 말에 삐뚜름하게 웃자 바네사는 잘못 말한 것을 깨닫고 그냥 앉기나 했다.
젠장, 혼자서도 잘한다는 것을 알려 줘야 하는데 말하는 것마다 왜 이렇게 허점이 많아.
따뜻한 것이 목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만족스러워 몸이 떨렸다. 수프는 적당히 따끈해서 떠먹기에 완벽했다. 진하고 고소한 맛이 혀끝에서 뭉개졌다.
“이 성의 요리사분들은 정말이지 완벽해요. 어떻게 수프가 이런 맛이 나는 거죠?”
바네사의 진지한 목소리에 기드온은 낮게 웃었다.
“당신이 있으면 더 열심히 준비해서 그렇습니다. 나는 원하는 것을 잘 이야기하지 않아 요리사들이 싫어하는 고용인이죠.”
“그런 것치곤 성안 사람들이 당신을 아주 좋아하는걸요.”
기드온은 제 입으로 무언가를 넣기보다는 바네사가 잘 식사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챙기기에 바빴다. 바네사가 적어도 다섯 번은 넘게 삼키는 동안 그는 제 앞의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바네사는 그런 기드온 쪽으로 잠시 눈길을 줬다가 움찔댔다. 그의 편히 열려 있는 목깃 사이로 제가 남긴 붉은 흔적이 훤히 보였다.
바네사는 급히 그의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그고, 풀려 있던 실크 타이까지 이상하게 꽉 묶어 버렸다.
기드온이 흥미롭게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새긴 모양이 마음에 안 듭니까?”
그 말에 바네사가 노려보자 기드온은 과일을 잘라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