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90)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90화(90/146)
“바네사.”
기드온이 힘없이 앉아 있는 바네사의 허리를 감아 단숨에 일으켰다.
바네사는 한숨을 쉬었다.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언제쯤 저렇게 되려나.
그는 바네사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는 흙이 묻어 더럽기만 하지 다친 곳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서늘했던 눈을 풀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제니언이 토하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고생하네요. 제니언이라면 좋은 선택입니다.”
“네가 뭔데 선택을 잘했다 아니다를 논해?”
제니언이 짜증스럽게 말하자 기드온은 짧게 웃었다.
“실력이 좋은 마법사이시지 않습니까. 애초에 공격을 ‘적당히’ 하는 것이 더 어려우니까요.”
“어린 것들은 이래서 문제야. 놀랍고 대단하며 위대한 선임 마법사들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거든. 더 찬양하지 못 해?”
물론 실제로 잘나긴 했지만 저런 말을 제 입으로 하다니.
바네사는 떨떠름한 표정을 했으나 제니언과 기드온 사이의 기류는 점점 싸늘해졌다.
“검을 아주 꼬옥 잡으라고. 어렸을 때 했던 것처럼 굴려 주지.”
“한 십 년 전 이야기입니까? 이젠 안 될 것 같은데. 연구 쪽으로 빠지신 지 오래이지 않습니까.”
기드온이 느긋하게 말하는 순간 발 밑에서 마치 뱀 같은 물줄기가 치솟아 그를 휘감으려 했다.
하지만 기드온의 손짓에 물줄기는 오히려 궤적을 틀어 제니언에게 향했다. 제니언은 놀라지도 않고 깔끔하게 물을 얼려 작대기로 박살 냈다.
두 사람의 마법은 쉴 틈이 없었다. 오로지 마법으로 상대하는 제니언과 달리 기드온은 가끔 마법을 쓰기도 하고 검을 쓰기도 했다.
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바네사는 집중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떤 식으로 두 마법사가 마력을 사용하는지를 꼼꼼히 눈에 담았다.
꼭 모든 것을 결계로 막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드온은 가끔 마법에 마법을 부딪쳐 반발하도록 하여 소멸시켰다.
제니언은 마법의 실현 자체를 기드온 근처로 지정하여 실현 속도가 느린 마법도 빠른 것처럼 사용했다. 실현 위치가 마법사에게 멀어질수록 수식이 까다롭고 복잡해졌지만 제니언은 그런 것 따위는 문제가 없어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바네사는 점점 두 사람의 간격이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제니언은 간격을 벌리려 했으나 기드온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작지만 실현이 빨라 성가신 마법들이 서너개씩 터져 나와 제니언의 발목을 잡았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제니언도 지나치게 폭발성이 강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런 미친!”
성질이 난 제니언은 마침내 장난인 것도 잊고 거대한 마법을 불러냈다.
갑자기 허공에 새까만 동공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작기만 했던 구멍은 스산한 바람 소리와 함께 점점 커지며 무언가를 삼키려는 듯 기묘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전에 끝이 났다. 이미 완전히 간격을 좁힌 기드온의 검이 제니언에게 닿아 있었으므로. 칠흑 같은 검신은 바짝 날이 서 있었다.
마법사가 죽으면 마법도 끝이니 의미가 없었다. 제니언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물푸레 나무 작대기를 휘저었다. 거대한 동공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무슨 마법입니까?”
기드온이 흥미롭게 하늘을 쳐다보았으나 제가 졌다는 것에 충격받은 제니언은 대답도 없이 씩씩대며 집으로 향했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기드온은 낮게 웃더니 동그랗게 눈을 뜬 바네사의 곁으로 돌아와 주저앉았다. 퓌돔보다 좀 더 온도가 낮은 님루드의 칼바람이 매서웠다.
그는 제 겉옷을 벗어 바네사를 둘둘 말다가 맨발인 것을 보고는 어이없이 웃었다.
“얼마 동안 한 겁니까? 얼굴이 너무 창백한데.”
바네사는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퍼뜩 깨달은 것을 중얼거렸다.
“검을 쓰는 사람을 상대로는 실현이 늦은 마법을 쓰면 안 되겠네요. 간격을 좁힐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되니까….”
기드온은 바네사를 끌어당겨 완전히 품에 넣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바네사는 그의 너른 상체에 편히 기댔다.
“맞습니다. 마법사는 전지전능하여 누구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만 검을 쓰는 사람들이나 수를 앞세운 일반인에게 지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 이유는 간단합니다. 간격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간격. 간격.”
바네사가 머리에 새기듯 여러 번 따라 했다.
“제니언을 오직 마법으로만 상대했다면 쉽게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부분이 다른 특전대원들보다 강력하지 못한 바네사에게 예를 들어 주기 위해 일부러 두 사람의 공방을 보여 준 것 같았다.
날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몰라도 정말 걱정이 많은 사람이야.
바네사가 그의 품 안에서 그를 빤히 올려다보자 기드온은 대뜸 고개를 숙여 도톰한 입술에 입 맞췄다. 나붓이 눈을 내리깐 바네사가 나른하게 그의 숨을 삼켰다.
“흙바닥에서 저게 뭔 지랄이야. 빨리 들어오지 못해? 떨어져!”
집 안쪽에서 그를 본 제니언이 창문을 열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기드온이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씩 웃었다. 바네사도 민망하게 웃었다.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바네사는 모든 약점을 지적받으며 혼쭐이 났다. 그딴 어리벙벙한 태도로는 나가자마자 뒤통수를 맞고 엎어질 것이라는, 저주인지 걱정인지 모를 소리도 들으면서.
“언령마법은 안전한 곳에서나 느긋하게 쓰는 거지, 위험한 곳에서 쓰면 안 된다고! 당장 칼 날아오는데 새소리 내고 있을래?”
“그렇기는 한데 마법이 잘 안 되니까….”
바네사가 시무룩하게 밍밍한 수프 그릇 속에 담긴 스푼을 휘저었다.
제니언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열 받아서 흰머리가 늘어날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대체 왜 못 하는데?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게 안 된다니까요. 마음속에 자꾸 ‘안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든다고요!”
바네사가 울상을 짓자 제니언은 혀를 찼다. 바네사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기드온은 고개를 기울였다.
“조건이 하면 된다?”
“그-게 아니라… 할 수 있다는 믿음…? 이거랑 구체적인 상상… 인 것 같은데…. 아직 완전히 확실한 것은 아녜요. 당연히 수식들도 필요하고… 근데 오늘 해 보니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기드온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라면 기뻐 날뛸 만한 조건이었다. ‘햇살이 뜨거운 날씨’, ‘물에 젖은 바짓단’과 같은 상황 조건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에게 달린 내부 조건뿐이라니.
애초에 대다수의 마법사들은 일반인들과 비교되는 삶을 살아와 하늘을 찌르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가 못 한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없어 오히려 문제였다.
아주 작은 힘을 타고날지언정 아무 힘도 없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그 얼마나 대단한 힘인가.
그 단적인 예가 바로 님루드였다. 거리를 거닐면 한 걸음마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마법사들이 기계를 폭발시키고 집을 쌓아 올리다가 무너트렸다. 그러니 할 수 있다는 오만함은 아주 쉬운 조건이었다.
다만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바네사에게는 꽤 큰 장벽일 것 같았다. 노력의 힘을 믿는 바네사는 철저했고 어느 정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겨야 움직였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 없이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는 편은 아니었다.
“제니언, 예전에 마법의 조건에 대해서도 연구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별 거지 같은 조건이 많아서 때려쳤지만.”
기드온은 잠시 침묵하다 얼굴을 쓸어내렸다. 바네사를 바라보는 그는 어쩐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당신의 조건은 시간과 연륜이 쌓일수록 강력한 마법을 자아내겠군요. 어떠한 의심도 사라지는 순간 못 할 것이 없을 테니.”
“내가 저런 조건을 타고 났으면 춤을 췄지. 감사한 줄도 모르고 ‘못 하면 어떡해요?’라니. 뭘 어떡해!”
제니언이 걸걸한 목소리로 호통치자 바네사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기드온은 부드럽게 말했다.
“바네사, 저렇게 잘난 척하는 제니언도 예전에는 본인의 조건을 착각해 혼란을 겪은 적이 있으니 기죽지 말아요.”
제니언이 입에서 불을 뿜을 기세로 일어났으나 기드온은 이미 입을 연 뒤였다.
“그는 본인의 조건이 ‘하리하라’라고 외치는 것인 줄 알았지 뭡니까.”
바네사는 갑자기 선생님이 보내 주셨던 편지가 떠올랐다. 3학년 2학기 방학, 제니언의 집을 찾아갔는데 열어 주지 않으면 ‘하리하라’라고 외치라고 하셨던 그 편지.
“아하.”
바네사가 제니언을 실실대며 쳐다보았다. 제 인생 최악의 부끄러운 장면이 떠오른 제니언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하리하라를 외치며 마법을 썼던 그 순간들. 알고 보니 물푸레 나무로 만든 장신구가 제 목에 걸려 있는지도 모르고.
“누가 말하래!”
“우리 바넷을 하도 구박하시기에. 예쁜 파란 눈에 물기가 맺히지 않았습니까.”
바네사의 눈은 피곤해서 건조하기만 했다.
“이게 미쳤나, 내가 쟤를 구박하든 말든!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왔으니 이쯤이야 견뎌야 하는 것 아니야!”
제니언이 왁왁 대며 고함을 쳤으나 기드온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끄러움 사이에서 천천히 웃음을 지운 바네사는 다른 생각을 했다.
저런 비밀을 제니언이 많은 사람에게 알렸을까? 아니, 그럴 리가.
바네사는 가만히 기드온을 바라보았다.
선생님과 기드온이 아는 사이인 것은 아닐까?
전에 들던 의심이 다시 피어났다. 바네사는 잠시 눈가를 문질렀다.
아냐, 그렇다면 분명히 말해 줬을 거야. 내가 얼마나 선생님을 뵙고 싶어 하는지 아니까. 알려 줄 수는 없어도 아는 사이라고 말해 줬겠지.
늦은 점심 식사 후, 기드온은 바네사의 상대해 달라는 요청을 딱 잘라 거절했다.
“난 절대 당신을 상대로 마법을 쓰지 않을 겁니다.”
“마법이 아니라 검이면 더 좋은데요? 간격 유지하는 방법도 연습하고.”
그는 대답도 없이 다시 퓌돔으로 떠났다. 제니언의 곁이라면 바네사가 위험할 일은 없었으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덕분에 바네사는 다음 날까지 혼자 남아 제니언의 마법에 구르고 넘어지고 엎어지길 반복했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이제 무엇이 날아와도 막을 자신은 있었으니까.
반드시 결계를 구형으로만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단면의 형태로 만들어 내기도 했고 제 주변이 아니라 저 멀리에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언령마법으로 실현하는 결계와 달리 조건을 깨달아 실현하는 결계는 아주 강력했다. 동시에 실현이 아주 빨라 제니언조차도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니언은 마법으로 결계를 몇 번 두들겨 본 뒤에 드디어 고개를 까딱 흔들었다. 바네사는 팔을 들어 환호성을 질렀다.
“와, 이제 결계는 정말 칠 줄 안다고요! 한번 해 봤으니까 자신 있어요. ‘할 수 있다’고요!”
“더 거대한 것 치라 하면 또 ‘못 할 것 같은데?’ 하겠지.”
냉정한 대답이 돌아오자 바네사는 잠시 투덜거렸지만 벌떡 일어났다.
“빨리 더 해요. 더더더!”
제 부족함을 알아 노력하는 것은, 분명히 조건에 맞지는 않지만 바네사의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