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ely, Vanessa RAW novel - Chapter (99)
선생님께, 바네사로부터 99화(99/146)
“…숲에서 키우던 동물들이 없어졌다는 게 이런 거로군.”
“숲을 태울 생각은 없으십니까?”
“고민을 좀 해 봐야겠다. 불은 지르는 것보다 끄는 것이 더 어려우니 말이야.”
바네사는 문득 지축이 쿵쿵대는 진동을 느꼈다. 달로이즈의 걸음에 땅이 울리고 있었다.
“달로이즈, 여기로 오지 말-”
“어라.”
바네사가 고개를 돌렸다. 달로이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발끝에 걸린 잔뿌리를 보려 고개를 내렸다. 동시에 위에서 나뭇가지들이 쏟아지듯 내려왔다. 그 끝이 날카롭게 빛났다.
“달로이즈!”
바네사가 그대로 마력을 응축하여 터트렸다.
함께 압축되었던 공기가 폭발해 나뭇가지들은 힘없이 눈 위로 떨어졌다. 떨어지고 나서도 나뭇가지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다 거멓게 변했다.
“뭐야?”
달로이즈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기이한 소리가 났다. 나무 구멍을 타고 바람이 되돌아 나오는 소리처럼 울림이 큰 소리였다.
달로이즈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일단 발목을 묶는 뿌리를 잘라 내기로 했다. 뒤에 매고 온 도끼를 들고 그대로 내리쳤다. 줄기들 사이로 피가 터져 나왔다.
“뭔 줄기에서 피가 나와!”
달로이즈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대원들.”
리에트 대령이 진지하게 말했다.
“튀어라.”
바닥에 얽혔던 뿌리들이 슬금 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달루스는 즉시 근처에 있는 리에트 대령을 잡아 공간이동 마법을 실행했다.
바네사는 달려가 달로이즈를 잡았다.
“난 자신 없으니까 꽉 붙어.”
“불안하게 왜 이래?”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모습이 흩어졌다. 줄기가 바네사와 달로이즈가 사라진 곳을 움켜쥐었다가 빈 허공만 휘저었다.
줄기들이 꿈틀댔다. 하나의 나무가 꿀렁거리자 그 진동에 움직임이 퍼지기 시작했다.
⚜ ⚜ ⚜
달로이즈가 공간이동의 후유증으로 바닥에 웩웩대고 있을 때 바네사는 식은땀을 훔쳐 냈다.
좀 더 멀리 이동했던 안달루스가 달려왔다. 그는 달로이즈를 잠시 살피고 멀쩡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숲을 태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감당할 수 없는 범위까지 번질 수도 있어. 저 뒤 전체가 산줄기야…. 조그마한 화재라면 상관없지만 거대한 산불은 경계의 마법사들까지 불러야 할 거다.”
“줄기는 확실히 움직이는 것 같고. 뿌리가 흙 위로 얕아 보이던데 움직일 수 있는 걸까요?”
바네사가 묻자 안달루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는 모릅니다. 저도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라… 제가 기억하는 것은 저 마물들이 낮에는 잠든다는 것뿐입니다.”
“어쩌실 겁니까?”
리에트는 마구잡이로 얼굴을 비비고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자던 놈들을 깨운 것 같군. 저것들이 마을로 몰려가게 둘 수는 없지. 슬리만에게 당장 튀어 오라고 해.”
안달루스는 인상을 한껏 찌푸린 바네사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몸을 돌려 하늘에 빛줄기를 날렸다. 쏘아진 빛줄기는 무언가의 형상이 되어 날아갔다.
“우웩.”
“달로이즈, 괜찮아?”
바네사는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달로이즈를 토닥여주었다. 달로이즈는 엉금엉금 기어 바네사의 팔에 매달렸다. 입술이 창백했다.
“뭐 이, 이런 마법이 다 있어…. 공격 마법 아니야?”
“나도 처음엔 그랬어. 머리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동굴 안으로 떨어질 때 처음 겪었고 빠져나올 때가 두 번째 경험이었다.
심한 두통에 기드온이 이마를 쓸어 주고, 마음을 인정하고. 그 뒤에 혼자 짝사랑을 앓다가 1년 넘게 기드의 연락을 무시했지. 그도 서운해서 연락을 하지 않고….
바네사는 스쳐 지나가는 민망한 역사를 뇌리에서 털어 냈다. 추운 바람 속에서 마물들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오늘따라 기드가 몹시 보고 싶었다.
내가 떠날 때만 해도 아주 많이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잘 지내고 있겠지.
그리고 새하얗게 빛나는 달을 배경으로,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새들이 밤에 저리 이동할 리는 없으니 가지들이 흔들린 탓일 것이다.
“도트람의 가지, 움직일 줄 아는 것 같은데요.”
바네사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쩐지 뿌리가 아주 얕아 보이더라니…. 지대가 높았다면 산사태도 일으켰겠군요.”
안달루스도 음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리에트는 팔을 붕붕 휘둘렀다.
“슬리만이 오면 쓸모가 있겠군. 그땐 불을 질러 버리자고. 그놈은 불을 끄는 데에 더 쓸모 있는 놈이니까.”
“오기는 합니까? 와서는 또 일하기 싫다고 툴툴대기나 할 테죠.”
항상 침착한 안달루스가 비난 어조를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라 바네사는 진심으로 슬리만 대위가 궁금해졌다. 도대체 누구길래 저런담.
“달로이즈는 도끼를 쓰잖아요. 나무에는 자신이 있을걸요.”
바네사가 힐끔 달로이즈를 보며 웃자 달로이즈는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활기가 도는 표정이었다.
“내가 오늘 이날만을 기다렸을지도 몰라. 미친 나무들을 위해 도끼를 들었다!”
진지한 목소리에 바네사는 코웃음 쳤다. 안달루스는 평온하게 물었다.
“그래서 밤 반달루의 마법진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피를 줄줄 먹인 곳이 노아라는 아이의 집이니 그 근처를 뒤져 보는 편이 낫겠지.”
리에트는 잠시 턱 끝을 매만졌다. 그리고 바네사를 응시했다. 까만 눈이 흐릿한 빛을 배경으로 섬뜩하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바네사 소위는 외부 조건이 있나?”
“아… 없습니다.”
“없다고?”
바네사의 조건에 대해 몰랐던 달로이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에트는 휙, 휘파람을 불며 웃었다.
“좋아. 저 나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뿌리나 줄기를 이용하여 먹잇감을 잡아챈다는 점이지. 육체적 능력이 월등한 달로이즈 소위는 안달루스 소령과 함께 가지. 소령은 상황 조건이 있거든.”
그리고 말을 이었다.
“바네사 로즈 소위는 혼자 갈 수 있겠나? 안 되겠다면 나와 가고.”
바네사는 잠시 고민했으나 숲에서 마을로 뻗어 나오는 길목이 세 개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혼자 가 보겠습니다.”
“좋아.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신호하는 걸로 하지.”
바네사는 심호흡을 했다. 옆에서 달로이즈가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괜찮겠어?”
그 말에 바네사는 제니언에게 마법으로 얻어맞던 뒷마당을 떠올렸다. 앞으로 구르고 뒤로 구르던 추억.
저 나무들이 제니언보다 강할 것인가?
“응, 괜찮아.”
바네사가 단호하게 답했다.
강하든 약하든 제니언보다는 덜 독할 것이 분명했다. 그 어떤 마물도 제니언보다 악독하게 바네사를 때려눕히진 않으리라. 그렇다면야 뭐, 할 수 있었다.
“저 나무 형태의 마물들은 밤에만 움직인다고 하니 오늘 밤만 잘 보내면 되겠어. 낮에 복수해 줄 거니 말이야.”
리에트가 손으로 가지를 부러트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안달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숲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는 공교롭게도 딱 세 개이니 갈라지면 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안달루스는 영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로즈 소위,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이번이 첫 파견인데.”
“네, 괜찮아요. 위험하면 바로 신호할게요.”
씩씩한 대답에 안달루스는 애매한 목소리로 응원해 주었다.
“너무 위험해지면 뒷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불을 지르세요. 대장님이… 알아서 뭔가 해 주실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바네사는 약간 웃었다. 기드온에게 그런 부담을 지울 수는 없지.
바네사는 달로이즈와 주먹을 부딪쳤다.
대령과 소령, 두 소위는 세 길목으로 갈라졌다.
⚜ ⚜ ⚜
숲에서 벨로즈로 향하는 북쪽 길목. 입에서 뻗어 나오는 숨을 따라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바네사는 잠시 근사한 겨울밤의 풍경을 즐겼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무언가에 의해 눈과 흙이 파헤쳐지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을 진정시킬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바네사는 멀리 있는, 특히 움직이고 있는 목표에 마법을 적중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좀 더 섬세한 수식도.
그래서 기드온이 넌지시 알려 준 방법이 뭐였냐면.
‘주변에 피해 볼 누군가가 없다면 그냥 대규모로 마법을 실현하는 편이 쉽습니다.’
‘…그게 조언이에요?’
‘당신의 마법력이 충분한 것 같으니 조언이죠.’
어쩐지 밉살스럽게 올라갔던 입꼬리마저도 그리워졌다. 돌아가면 몰래 발데르 성에 숨어 들어가서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
바네사는 흙을 헤치고 스물스물 다가오는 가느다란 뿌리들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뿌리를 맞출 수 없다면 본체를 맞추면 그만이지.
바네사는 일단 빛을 불러내 제 몸을 감쌌다. 따스한 온기가 퍼져 얼어붙은 손끝을 녹여 주었다.
뒤이어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였다.
바네사는 씩 웃었다. 동시에 휘몰아치던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바네사의 의지에 따라 공기의 흐름은 넓고 얇게 퍼져 마침내 칼처럼 변했다.
얇은 채찍 소리와 둔탁한 소리가 함께 울려 퍼지며 바로 근처에 있는 나무들의 밑동이 반쯤 날아갔다.
먹잇감을 찾아 전진하던 나무뿌리들이 주춤댔다. 그러나 그것들은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았다.
“으음.”
나무가 생각보다 단단하잖아? 바네사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그렇다면….”
바네사는 마력 조절을 그만두기로 했다. ‘도트람의 가지’가 아닌, 아름다운 나무가 피해 입는 건 아쉬웠지만 시야가 제한된 상태에서 두 가지를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바네사의 의지대로 가벼운 바람이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다만 나무들에겐 전혀 가볍지 않았다.
쿵!
굉음과 함께 바네사 앞쪽에 있던 수십 그루의 나무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지나치게 넓은 범위를 초토화시킨 바네사는 이마를 짚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조절하려고 하면 마음에 차지 않았고, 조절을 포기하면 지나치게 강한 마법이 터져 나왔다.
이래서 중도의 길이 어려운 거구나. 바네사는 추위에 코를 훌쩍였다.
비틀대던 수많은 나무가 땅 위로 넘어지며 발밑이 강하게 진동했다. 나무들 사이로 붉은 물이 터져 나와 땅 위에 쌓인 하얀 눈을 물들였다. 아마 지금까지 사냥했던 먹잇감의 피인 것 같았다.
다가오던 뿌리들이 멈추고 날아들던 줄기도 잠시 물러났다. 넘어진 나무들은 일부가 바싹 마른 것처럼 오그라들었다.
“진짜 부러트리기만 하면 되나 보네.”
우습게도 제 동족들, ‘도트람의 가지’들이 죽으며 뱉어 낸 핏물들이 다른 도트람의 가지들을 끌어들였다. 숲이 움직이는 나무들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걸린 조각달은 여전히 높게 떠 있었다.
새벽이 길겠네.
빛무리들은 여전히 바네사를 보호하듯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바네사는 다가오는 은밀한 움직임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