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opaths are good at investigating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꼭꼭 숨겨두고 있었습니다.
“방안이 있다고?”
“네.”
“무슨 방안?
내가 설명을 하려던 그때.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치헌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아 몇 차례 응답하더니.
“어, 말해.”
스피커폰을 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아, 미제수사팀 사무실이랑 본청에서 배명호 사건 자료 다 얻었습니다.”
기섭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증거자료는 다 폐기되고 없었습니다.”
“……”
“증거자료 보존에 관한 특별규칙이 만들어지기 전에 보존기한이 만료되었거든요.”
경찰청 범죄수사규칙에 따르면 미제사건 증거자료 보존기한은 25년이다.
올해 초 과거사 및 미제사건의 수사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보존기한을 50년으로 늘리자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증거자료도 찾아봐달라고 부탁을 했었는데, 이미 다 폐기가 된 모양.
어찌됐건 증거가 없으면 혐의를 밝혀내기는 불리해진다.
“하, 다른 분들 청송까지 가서 고생하시는데. 수사서류만 덜렁 들고 이대로 그냥 사무실에 돌아갈 순 없겠더라고요.”
“…?”
“그래서 수사에 도움이 될 수 있을만한 것들을 좀 더 알아봤습니다.”
분명 기섭은 오전에만 해도 과거사 수사는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었는데.
조사를 위해 청송까지 가는 우리를 보고 갑자기 의욕이 생긴 건가.
“그렇게 알아보던 중 배명호 사건 최초 담당형사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
“그분이 말씀하시길…”
그가 잠시 말을 흐렸다가 다시 이었다.
“탁경위님을 꼭 만나 뵙고 할 말이 있답니다. 다른 사람 말고 꼭 탁경위님이어야 한다네요.”
*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장 배명호 사건 최초 담당형사를 만나러 갔다.
약속장소에 가니.
“안녕… 하세요.”
6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날 알아보고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석준태 선배님입니까?”
내가 기섭에게 들었던 이름을 얘기하자.
“맞습니다…”
그가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서울청 광수대에 근무하는 탁정태 경위입니다.”
나는 준태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의 외형을 빠르게 훑었다.
잔뜩 움츠린 어깨, 자신감 없는 표정.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불안하게 움직이는 눈동자와 바싹 마른 입술.
전체적으로 그는 ‘불안’해보였다.
어쩌면 아까 끅끅 눈물을 흘리던 배명호보다 더.
권력을 휘둘렀던 형사출신 전직 경찰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면서요.”
“… 네.”
“뭡니까?”
“후…”
내가 묻자 준태가 심호흡을 한 차례 길게 하고는.
“고백을 하고자 합니다.”
“고백이요?”
“탁경위님께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순간 나는 고백의 사전적 정의를 떠올렸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하는 것.
또는 고해 성사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으려고 고해 신부에게 지은 죄를 솔직히 말하는 일.
준태는 내게 무엇을 고백하려 하는 걸까.
“1987년 겨울이었습니다.”
그가 무거운 입을 뗐다.
“상광동의 한 공사현장 옆 풀밭에 사람이 죽어있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습니다. 여자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죽어있더군요. 당시엔 우리 형사들한테 과학수사 이런 개념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장비도 착용하지 않고 현장에 들어가고, 심지어 시체를 뒤집거나 돌려보기도 했죠.”
그의 말대로 저땐 과학수사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
현장보존을 한다 해도 제대로 감식할 과학수사 장비나 인력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저는 살인사건인 만큼 최대한 현장보존에 힘썼습니다. 당시 우리 팀원들을 제외한 기자나 일반 시민들이 현장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현장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증거를 찾아봤습니다. 범인이 두고 가거나 흘리고 간 게 없는지 확인했죠. 그리고 곧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카락을 찾았습니다.”
“…!”
“피해자 사체 주변에 있던 짧은 머리카락 두 가닥. 피해자는 긴 생머리였으니 이 머리카락은 범인의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어서 제 3자의 머리카락 떨어질 일도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머리카락을 봉투에 담아 수거해 사무실로 와서는 최초 현장상황에 대한 수사보고를 쳐서 결재를 올렸습니다.”
그가 잠시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시 형사과장이 제 서류를 반려시키는 겁니다.”
“…?”
“반려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저 ‘잠시 서류 작성하지 말고 기다려보라.’는 것이 과장님의 지시였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 뒤, 갑자기 형기대 직원들이 와서 사건을 가져가겠다고 하더군요. 너무 빨리 가져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뭐 살인사건이니 그러려니 하며 현장에서 작성한 메모와 수사서류를 넘겨주었습니다. 형기대 직원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후다닥 서류를 챙겨 나가더군요.”
형기대는 형사기동대. 지금 광수대의 전신이다.
“그 뒤엔 형사과장이 노원서 형사들을 싹 다 불러모아놓고 당부했습니다. 오늘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한 모든 서류와 메모, 머릿속 기억까지 다 폐기하라고. 현시간부로 광수대에서 알아서 처리하니 노원서는 일체 간섭하지 말라고.”
“……”
“그때 우리 형사들은 직감했습니다. ‘위’에서 개입한 사건이구나 하는 걸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오전에 윤치률 광수대장이 말한 ‘위’와 준태가 말한 ‘위’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부터는 사건에 대해 사적으로도 입도 뻥긋 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기자들도 서에 몇 번 찾아왔지만 전부 다 모르쇠로 일관했죠. 입을 여는 순간 죽은 목숨이란 걸 아니까요.”
“……”
“하지만 며칠 뒤, 제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
“형사동차에서 당시 현장에서 수거한 짧은 머리카락이 담긴 봉투를 발견했거든요.”
“…!”
“실수로 형기대에는 빈 봉투를 인계한 거예요. 위에서 개입한 이 중대한 사건에 가장 중요한 증거물을 제가 누락시킨 겁니다.”
당시 기억이 생생한지 준태가 손을 벌벌 떨었다.
“저는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습니다. 증거물을 누락했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알리고 머리카락을 인계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계속 침묵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했죠. 한창 뉴스에서 그 사건에 대해 떠들고 있던 터라 증거물 누락 사실을 알리는 순간 노원서가 집중을 받을 거고, 그럼 저와 우리 팀이 ‘위’사람들의 표적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요.”
“……”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티비에서 이상한 뉴스가 나왔습니다.”
“이상한 뉴스요?”
“형기대에서 발표한 수사브리핑이었습니다. 어떠어떠한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이었는데, 거기에 ‘현장에서 발견한 남성의 머리카락’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겁니다.”
“…!?”
“제가 머리카락을 수거할 당시 아주 샅샅이 뒤져봐서 압니다. 현장엔 제가 수거한 두 가닥 머리카락 외에는 남자의 머리카락이 없었습니다. 땅에도, 사체에도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인계하지도 않은 그 머리카락에 대해 벌써 감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발표하는 거예요.”
내가 그리고 있던 장면들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감정에 들어간 머리카락의 사진을 보여주는데, 제가 수거한 머리카락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훨씬 짧고 굵었어요. 개수도 7개나 됐고요. 나중에 그 머리카락은 배명호의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머리카락은 배명호의 머리카락이지 범인의 머리카락이 아니었어요.”
배명호 사건 판결 당시 체모는 혈액과 함께 중요 증거로 채택이 되었었다.
DNA를 검사할 장비가 없어 체모에서도 혈액형만 판명을 했는데 배명호와 같은 O형으로 나왔으며, 모양과 굵기 등도 일치해 배명호의 것으로 확정지었다.
“게다가 또 하나.”
준태가 계속 말했다.
“형기대에서 15일 뒤에 공개한 현장사진. 그건 조작된 겁니다.”
“조작이요!?”
“최초 현장엔 망치나 칼 따위는 없었어요.”
“!!”
“사건 후에 놓고 새로 찍은 거예요. 완벽한 조작입니다 그 사진은.”
현장에 범행도구를 놓고 갔다는 게 의심스럽긴 했지만.
설마 했었는데 조작이었다니.
“하… 이런 비밀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게…”
그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물론 그때 증거가 조작된 걸 알고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선뜻 나설 수 없었습니다. 나서는 순간 제 신변에 위해가 가해질 것이 뻔했고, 그럼 제 처자식까지 다 굶어 죽여야 하는 상황이 왔을 테니까요.”
“……”
“게다가 제가 체모를 뒤늦게 제출했었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작은 증거들은 그대로 찍어 눌러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렸을 테니까요. 그 윗사람들이 말입니다.”
억울하다는 듯 말하는 그를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 압니다. 다 변명이라는 걸.”
다시금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떨궜다.
“허나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아온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을만한 경찰이 나오면, 그땐 이 비밀을 꼭 알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탁경위님을 찾아온…”
“진실을 파헤치려고 절 찾아온 게 아니라 본인 마음의 죄책감을 덜어내려 절 찾아온 거겠죠.”
“……”
“사건의 실체적 진실 따윈 안중에도 없으시잖아요.”
내 차가운 대답에 준태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아, 아닙니다… 꼭 사건의 진실을 밝혀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그때 일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다는 얘기는 배명호 씨한테 개인적으로 하시고요.”
“……”
“지금 잘못했다고 말한다고 해서 석준태 씨의 지난 과오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과오는 명확히 세상에 남아 한 사람을 억울한 희생자로 만들었죠.”
준태는 입을 닫고 고개를 더 숙였고.
그의 눈에선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증거물 누락에 대한 형사처벌이나 징계를 해야 마땅하지만 할 수가 없습니다. 공소시효가 다 지났고 직장에서는 퇴직을 하셨으니까요.”
“……”
“그러니 석준태 씨가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이라도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해 힘써주는 것입니다.”
“……”
“단순히 고백만 하기 위해 저를 직접 만나자고 한 건 아니실 테죠.”
“…!”
내가 준태의 품안에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말하는 내내 그가 품에 꼭 쥐고 있던 가방.
“가방 안에 든 것. 주시죠.”
내 말에 준태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 언젠가 탁경위님처럼 청렴하고 유능한 경찰이 나오면 드리려고 여태 폐기하지 않고 몰래 꼭꼭 숨겨두고 있었습니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바로…”
그것은.
“87년 배명호 살인사건 당시 현장에서 발견한 체모와 현장 사진입니다.”
오래된 봉투와 빛바랜 사진이었다.
사랑했던 대상을 떠올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