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opaths are good at investigating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사랑했던 대상을 떠올리게.
“지금이라고 그때 존재했던 세력이 없겠습니까.”
준태가 건넨 사진은 오래되었지만 보관을 잘 해놓아 화질이 선명했다.
칼과 망치 없이 피해자만 있는 모습.
이것이 진짜 현장 사진인 것이다.
“하지만 탁경위 님이라면 끝까지 진실을 파헤쳐 주시리라 믿습니다. 여태껏 그렇게 수사해 오셨으니까요.”
특히 이 봉투 안에 든 것.
이 머리카락은 정말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다.
“물론 저는 최선을 다해 수사할 겁니다.”
“……”
“저는 제 할 일을 할 테니, 석준태 씨는 석준태 씨 할 도리를 하세요.”
“…?”
내가 사진과 봉투를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나중에 꼭 배명호 씨 찾아가서 잘못을 비세요.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
잠시 후, 서울지방경찰청.
나는 준태에게 증거물을 받고 곧장 사무실로 복귀했다.
받은 증거물에 대해 팀원들에게 설명하니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어 내가 치헌에게 명호 인치에 대해 물으니 그가 서류를 보며 답했다.
“종로서에 유치장 한 칸 따로 빼놨어. 야간엔 유치장에 인치하고, 다음 날 낮에 다시 광수대 출석시켜 조사할 거야.”
명호는 아직까지는 엄연히 피고인 신분.
일반 피해자처럼 숙박시설을 제공해줄 수는 없다.
치헌은 그런 사정을 고려해 유치장에 자리를 마련해놓은 것 같았다.
“조사를 이유로 피고인을 유치장에 인치한 때는 원칙적으로 24시간 이내 석방을 해야 해. 물론 이 경우는 예외적으로 피고인이 조사를 원해 자발적으로 나온 상태긴 하지만, 형소법상 원칙은 지켜주는 게 좋아. 뭐 정 안되면 다시 인치를 하든지 우리가 청송에 몇 번 더 가든지 해서…”
“24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내 단호한 대답에 치헌이 잠시 말을 멎었다가.
“… 정말?”
눈을 크게 떴다.
20년도 더 된 사건 해결을 24시간 안에 해결하겠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을 터.
“아 참. 그리고 정태 네가 생각해놓은 방법이라는 게 뭐야? 사실상 당사자가 기억 안 난다고 해버리면 방법이 없잖아. 재심 법정에서 기억난다고 허위진술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타부서 도움을 좀 빌려야 합니다.”
“타부서?”
“지금 배명호 씨 데리고 같이 가시죠.”
그렇게 나와 치헌, 경수는 명호를 데리고 사무실을 나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 ‘과학수사과’ 사무실 앞에 섰다.
똑똑똑-
노크 후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 형님? 우리 사무실엔 어쩐 일이에요?”
남자 직원 하나가 치헌을 아는 체 하며 다가왔다.
치헌의 지인인 모양.
“어 준혁아 마침 근무하고 있었네. 우리가 뭐 좀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할 거요?”
그가 그렇게 물을 때.
“감식 담당자가 누굽니까?”
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준혁이 고개를 뒤로 빼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답했다.
“제가… 감식 담당입니다만.”
“이거.”
내가 곧장 준태에게 받은 증거물들을 내밀었다.
“약 30년 전 사건현장 물건들입니다.”
“예? 30년이요!?”
“배명호 살인사건 관련 증거물이에요.”
“…!”
“최근 도입된 DNA 증폭 복원 기술로 오래된 증거물에서도 DNA 뽑아낼 수 있죠?”
명찰을 보니 이름은 최준혁, 계급은 경사.
그가 대답을 않고 입을 벌린 채 잠시 동안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내가 내민 것이 30년 전 증거물이라는 것, 게다가 이것이 3대 미제사건인 배명호 살인사건 관련 증거물이라는 데 매우 놀란 듯했다.
이에 더해 서울청에 도입한지 몇 달 되지도 않은 DNA 증폭 복원기술에 대해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을 것이다.
“… 아, 예예. 아주 높은 확률로 예전 대상물에서도 DNA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머리카락 DNA 확인해주시고요. 이 사진은 조작여부 있는지 여부 좀 확인해주십시오.”
“지금… 이렇게 갑자기요?”
“네. 광수대장님 지시로 조사 중인 배명호 사건 관련해 협조요청 드리는 겁니다.”
“… 예, 일단 알겠습니다.”
사건 개요 및 증거물에 대한 설명은 치헌이 옆에 붙어서 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송가락 수사관님이 어디 있죠?”
“송가락 수사관님요? 저기 오른쪽 끝에 행동분석 팀 책상 가시면 있습니다.”
나와 경수는 치헌을 두고 명호와 함께 오른쪽으로 걸었다.
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가니.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꺼구정한 남자가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일어나 우리를 맞았다.
명찰의 이름은 송가락. 계급은 경정.
경수만큼 큰 키에 배짝 마른 몸. 나이는 아직 40도 안 되어 보이는데 벌써 허리와 어깨가 앞으로 굽어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이는 그. 다른 사람들이 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서울청 유일의…”
하지만 그는.
“법최면 수사관 송가락 경정님 맞으시죠?”
전국 경찰 중 손에 꼽는 스페셜리스트다.
*
잠시 후, 과학수사과 내 조사실.
“이 뇌파 측정기 쓰시고.”
가락이 명호에게 선이 연결되어 있는 모자를 씌웠다.
명호는 등이 쭉 젖혀지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있다.
“여기 모니터에 그래프와 숫자 보이시죠? 배명호 씨 뇌파를 측정하는 거예요. 최면에 들어가도 이 그래프가 숫자 4와 7 사이를 왔다 갔다 할 겁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진술을 하게 될 거란 말이에요.”
나는 가락에게 명호를 대상으로 최면수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현대의 기술로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명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을 때 바로 떠올린 방법이 바로 이 최면수사였다.
“최면을 마술이나 잡기 정도로 아시는 분들도 많은데, 이건 엄연한 과학입니다. 뇌파를 베타파에서 세타파로 유도해 기억력과 집중력을 높여 과거의 기억을 이끌어내는 거예요.”
“……”
“보통은 목격자를 상대로 많이 하는데, 종종 피해자를 상대로 하는 경우도 있어요. 특히 배명호 씨처럼 과거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캐내려는 경우엔 이런 법최면이 유용하죠. 물론 배명호 씨가 정말 피의자가 아닌 피해자가 맞다는 전제 하에서요.”
“……”
“하지만.”
가락이 손으로 명호의 어깨를 살포시 짚었다.
“이렇게 겁을 먹고 있으면 최면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후… 후…”
“마음을 편안하게 먹어야 뇌파를 명상 단계인 세타파로 유도할 수 있어요. 심호흡 더 크게 해보세요.”
“후… 후…”
명호가 진정을 하지 못하고 손을 벌벌 떨었다.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난 듯 그의 눈이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천장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훑었다.
혼잣말로 ‘잘못했어여… 제가 죄인이에여.’라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조사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배명호 씨.”
그런 명호를 보며 내가 말했다.
“과거 형사에게 어떤 기억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는 그때 그 형사들이 아닙니다.”
“……”
“그때 형사들은 배명호 씨에게 범죄혐의를 씌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반대에요. 우리는 배명호 씨의 무죄입증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
“그러니 두려워하실 필요 없어요. 여기 있는 경찰관들 모두 배명호 씨 편이니까요.”
명호의 손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이어서.
“아까 청송에서 면회할 때 배명호 씨가 그러셨잖아요.”
경수도 입을 열었다.
“배명호 씨를 범인이 아닌 인간으로 대우해준 사람은 탁정태 경위가 처음이라고.”
“……”
“여기 있는 경찰관들은 그걸 넘어 배명호 씨의 무죄를 증명해줄 최초의 경찰관들이 될지도 몰라요.”
“…!”
“저 빼고 여기 두 사람은 전국적으로도 알아주는, 유능한 경찰관들이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경수가 씨익 웃자 거칠었던 명호의 호흡이 점점 잦아들었다.
“수사는 우리 경찰들이 다 알아서 해줄 거예요. 배명호 씨가 지금 해주셔야할 건 딱 하나. 편안히 눈을 감고 최면수사에 성실히 임해주시는 것밖에 없어요. 해주실 수 있겠죠?”
그렇게 경수가 말을 마치자.
“……”
명호가 고른 호흡을 하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계속 편안히 심호흡 하세요. 몸에 힘을 완전히 다 뺀다고 생각하고 축 늘어뜨리세요.”
가락이 최면을 시작했다.
“점점 더 숨을 깊이 들여 마셨다 내쉬어보세요. 호흡이 깊어질수록 몸은 더 편안해집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명호는 호흡뿐만 아니라 표정까지 편안해졌다.
“여긴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제 목소리가 당신의 마음을 점점 차분하게 만들어줍니다.”
이어 명호의 얼굴은 곤히 잠든 아기처럼 새근새근해졌다.
“몸이 점점 가라앉습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몸이 잠겨드는 것을 느낍니다.”
“……”
“점점 아래로 내려가면서 마음이 더 평화로워집니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몸이 날아오를 것처럼 가벼워집니다.”
“……”
“당신은 당신 스스로의 주인입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갈 거예요.”
때론 명호의 미간이 탁 펴지며 얼굴에 환한 빛이 돌기도 했다.
가락은 모니터의 뇌파를 계속 체크하면서.
“지금부터 당신은 1987년 겨울 상광동으로 갈 겁니다.”
멘트를 조금씩 바꿨다.
명호는 점점 깊은 기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제가 말한 곳으로 가고 싶다면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세요.”
명호에게서 저항하는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그저 편안했다.
모니터의 뇌파가 일정하게 움직였다.
“이제 당신의 몸 전체가 다 가라앉았습니다. 몸에 긴장은 완전히 다 풀린 상태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
“지금부터 셋을 센 뒤 우리는 함께 상광동으로 갑니다.”
“……”
“하나, 둘, 셋!”
잠시 정적 후.
“자, 뭐가 보입니까?”
가락이 묻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여…”
명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잠꼬대를 하듯.
하지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게 말했다.
“그럼 앞으로 좀 더 걸어보겠습니다.”
“네.”
“이제 뭐가 보입니까?”
“안 보여여… 사방이 다 캄캄해여…”
“……”
“계속 아, 앞으로 가긴 하는데… 아, 아무 것도 보이진 않아여…”
그 말을 들으며 가락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가락의 눈을 응시하며 아까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최면수사에 들어가기 전, 사건에 관한 서류를 살피고 있는 가락에게 내가 물었다.
“상실된 기억도 찾을 수 있습니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보고 들은 모든 기억은 뇌 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으니까요.”
“의식적으로 기억해내길 거부하면 어떡하죠?”
“… 네?”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이라 본능적으로 기억해내길 거부하면 어떡하냐는 말입니다.”
그때까지도 명호는 ‘안 할래여… 그냥 내가 다 자, 잘못했어여…’같은 말을 하며 최면수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명확한 사실관계 확인은 물론이고 명호의 자발적인 무죄주장도 다 할 수 없게 될 판이었다.
가락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답했다.
“다양한 방향으로 유도를 해봐야죠. 사실 그래서 피해자 최면수사가 어려운 겁니다. 끔찍한 피해를 다시 기억해내는 걸 몸이 거부하거든요.”
“즐거운 기억으로 사건 기억을 유도하면 어떨까요?”
“…?”
“처음부터 사건으로 집어넣으려 하지 말고, 당시 사랑했던, 혹은 좋아했던 대상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을 쓰는 겁니다. 그렇게 점차 사건으로 기억을 유도하는 거죠.”
내 말에 가락이 조금 놀란 눈으로 날 가만히 쳐다봤다.
사실 이때 나도 좀 놀랐다.
내가 ‘사랑했던 대상을 떠올리게 한다.’라는 발상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실… 그게 베스트입니다. 좋은 기억으로부터 사건 기억을 유도해내는 것, 이것이 피해자 최면수사의 정석이라고 볼 수 있죠.”
“그렇다면…”
내가 가락이 보고 있던 서류를 몇 장 넘겨 명호의 진술조서 한 부분을 가리켰다.
“얘를 떠올리게 해야 합니다. 배명호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대상이거든요.”
*
나를 쳐다보던 가락은 고개를 돌려 수사서류로 눈을 돌렸다.
내가 짚어준 부분이었다.
“그대로 계속 걸으세요. 걷다보면 빨간 지붕으로 된 작은 집이 보일 겁니다. 명호 씨가 가장 좋아했던, 일터에 갈 때마다 반겨줬던 그 애가 사는 집이요.”
“…!”
순간 찡그려져 있었던 명호의 미간이 다시 펴졌다.
“이제 뭔가… 보이시나요?”
“보… 보여여!”
심지어 명호는 살짝 웃기까지 했다.
“빨간 지붕 집. 거기서…”
그가 잠시 말을 흐렸다가 다시 이었다.
“누렁이! 누렁이가 달려와여.”
누렁이.
당시 명호가 가장 좋아했던 강아지 이름이다.
명호의 진술서 내에 긍정적인 답변은 오직 누렁이를 얘기할 때밖에 없었다.
“누… 누렁이가 저한테 안겼어여. 그리고… 꼬리를 흐, 흔들면서 어디론가 달려가여.”
“어디로 달려가죠?”
“푸… 풀밭에여. 사… 사람들이 마, 많이 모여있어여.”
그리고 누렁이를 기점으로.
“누… 누가 죽었나봐여.”
의미 있는 진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론의 처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