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opaths are good at investigating RAW novel - Chapter 114
114화. 최후의 장막일지도.
그렇게 자리를 마무리한 후.
치헌과 수연은 카라반 안을, 경수와 민경은 테이블과 그릴을 치우기로 했다.
그리고 은빈과 나는 설거지를 맡았다.
“따뜻한 물이 나와서 다행이에요.”
공용 싱크대에선 온수가 나왔다.
은빈이 고무장갑을 끼며 내게 말했다.
“설거지하는데 옷가방은 왜 들고 온 거예요?”
“여기.”
내가 가방에서 노트와 만년필을 꺼냈다.
“에? 이게 뭐예요?”
“선물입니다.”
“엥?”
“은빈 씨가 그랬잖아요. 선물은 갑자기 받아야 한다고.”
“우와.”
주희에게 삼겹살을, 치헌과 경수에게 캠핑을 선물했지만,
사실 내가 가장 선물을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은빈이었다.
취미로 글을 쓰는 그녀를 위해 노트와 만년필을 샀다.
“오늘 무슨 특별한 날이에요?”
“아무 날도 아닙니다.”
“그런데 웬 선물?”
“사주고 싶어서 샀습니다.”
그녀가 선물을 받아들고 발그레 웃는다.
“설거지하려다 말고 선물이라니… 진짜 예상도 못했어요.”
“장소가… 별로입니까?”
“아뇨. 너무 좋아요!”
역시 즐거움은 예측하지 못한데서 온다.
“고마워요 정태 씨.”
그녀가 고무장갑 낀 손을 뒤로 젖히며 내게 입 맞췄다.
그리고는 예쁜 눈으로 한참 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에서 갖가지 좋은 감정들이 다 느껴졌다.
술을 꽤 많이 마신 탓인지 그녀는 눈을 느릿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정태 씨.”
그녀가 조금 달라진 목소리 톤으로 말했다.
“나랑 약속 하나만 해줘요.”
“약속이요?”
“갑자기 사라지지 않겠다는 약속.”
“…?”
“정태 씨가 그랬잖아요. 소중한 사람이 사라지면 더 이상 아무 것도 같이 못한다고. 나 정태 씨랑 앞으로 오래오래 더 같이 있고 싶으니까 사라지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런 약속은 할 수 없습니다.”
“… 네?”
“은빈 씨가 말하는 사라짐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함부로 사라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단 말입니까?”
“… 그냥 말이라도 그렇게 해달라는 거죠.”
“약속은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지키는 겁니다. 제 의지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할 수 없습니다.”
“……”
이내 울상이 돼서 입술을 삐죽 내미는 은빈.
“제가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녀를 보며 내가 말했다.
“지금 제 마음 상태입니다. 은빈 씨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는 지금 마음 상태요.”
“……”
“은빈 씨 곁에서 절대 사라지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은빈 씨를 향한 제 마음은 명확한 상태지만 미래 일은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그녀가 서서히 입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옅게 웃었다.
“허황된 얘기를 하는 것보다 명확한 얘기를 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그래서 내가 정태 씨 좋아하는 거니까.”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니 몸 여기저기가 찌릿하며 미묘한 쾌감이 일었다.
“하지만 가끔은 허황된 얘기도 부탁해요. 그런 걸 듣고 싶은 날도 있거든요.”
그렇게 은빈의 당부를 끝으로.
“설거지 얼른 하고 가요.”
막 설거지를 시작하려는데.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 번호를 확인해보니.
‘031?’
031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나는 어디서 걸려온 전화인지 직감하고 잠시 설거지장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유관우입니다.”
= “!?”
처음이었다.
환태가 아닌 관우가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은.
그가 진중한 어투로 물었다.
= “백양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
다음 날. 경기북부지방청장실.
어제 전화로 관우가 한 번 만나자고 하여 또 이곳에 왔다.
나는 휴일이고 관우는 근무일이니까.
“갑자기 팩스를 보내셔서 좀 놀랐습니다. 확인해 보니 최면수사 관련 서류가 빠졌던데.”
어제 병원에서 나와 캠핑장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다시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
그리고는 무작정 상광동 살인사건 관련 서류를 경기북부청 정보과로 팩스 보낸 뒤, 환태에게 팩스를 확인하라는 문자를 남겼다.
그 서류들을 관우가 손에 들고 계속 말했다.
“혹시 ‘백양’은 최면수사 중에 언급된 겁니까?”
“맞습니다. 최면수사 관련 서류는 타부서 서류라 팩스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배명호 씨가 백양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수사하면서 알게 된 내용들을 설명했다.
최초 백양을 인지한 것은 이형준 형사 사망 건 수사 때였고, 그의 수첩 메모에서 백양이란 단어를 처음 발견했으며,
최면수사에 따르면 87년 당시 명호는 사장과 함께 백양에 술 배달을 갔고, 그곳은 주점이나 식당이 아닌 목욕탕이었다고.
그 목욕탕은 1과 3, 나뭇가지가 그려진 곳이었으며 이상하게도 남녀가 같이 나체로 탕 안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내 얘기를 듣고 관우가 턱을 슥슥 매만졌다.
“배명호 씨는 그 사우나 안까지 어떻게 들어갔답니까?”
“입구를 지키고 있던 남자가 술 박스를 구석에 놓으라고 한 것을 배명호 씨가 잘못 알아듣고 사우나 탈의실까지 쭉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그 사우나 안 광경을 목격함과 동시에 남자가 뛰어 들어와 배명호 씨를 끌어냈답니다. 화를 내면서요.”
계속 턱을 매만지며 서류를 살펴보고 있는 관우.
“청장님이 백양을 인지하자마자 저를 만나자고 한 걸 보면.”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백양이 꽤나 중요한 장소인가 보군요.”
“……”
“청장님 또한 백양에 대한 정보를 갖고 계시고요.”
백양을 모르고 저렇게 백양에 대해 심각하게 물어봤을 리 없다.
그도 백양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추가로 어제 배명호 씨가 새롭게 진술한 내용이 있습니다.”
“…?”
“최면 속 그 목욕탕 내에서 경찰무전기를 든 남자를 봤다고 하더군요.”
“!!”
“나체였던 그 남자는 명호 씨를 보고 깜짝 놀라 다시 옷장에 무전기를 숨겼다고 합니다.”
“……”
“당시 명호 씨는 티비 화면에 나오는 경찰 무전기를 보면서 진술했기에 다른 것을 무전기로 착각했을 확률은 적습니다. 목욕탕 탈의실에서 무전기를 드는, 또 그 무전기를 황급히 다시 집어넣는 특이한 장면을 잘못보거나 왜곡해 진술할 리도 없고요. 그 남자는 실제 경찰이 맞았을 겁니다.”
조금 놀란 듯 턱 만지는 것을 멈춘 관우에게 내가 계속 말했다.
“그곳에 경찰이 있을 경우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남녀가 섞인 탕 안 불상의 무리에 섞여 있는 비리경찰이거나, 아니면 그 불상의 무리를 조사하기 위해 나온 경찰이거나.”
“……”
“제 결론은 둘 다라는 겁니다.”
“…?”
“비리경찰을 가장한 조사. 함정수사라는 거죠.”
그냥 비리경찰이었다면 그렇게 몰래 나와 무전기를 꺼낼 이유도, 명호를 보고 깜짝 놀라 황급히 무전기를 다시 집어넣을 이유도 없다.
그 경찰관은 조사를 위해 그곳에 있었으며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던 것이다.
관우가 다시금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내부망과 수사서류 전체를 다 뒤져봐도 백양 관련 서류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수사는 했는데 서류는 감춰져있단 거죠. 서울청 광수대에서도 찾을 수 없게 감춰진 수사. 그런 수사를 할 수 있는 곳은…”
내가 잠시 말을 흐렸다가 다시 이었다.
“본청 중대범죄수사과밖에 없죠.”
“……”
“제가 아는 것들을 알려드렸으니 청장님도 말씀해주세요. 백양에 대해 알고계신 것들, 그리고 목욕탕 안 그 경찰관의 정체를요.”
나는 어제 명호의 얘기를 듣고 중대범죄수사과가 백양 사건을 조사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작정 경기북부청으로 팩스를 보낸 본 것이다.
관우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먼저 말씀드릴 것은.”
자기 책상구석에서 큰 화이트보드와 서류파일들 몇 개를 가져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양은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모임 이름이에요.”
“!”
“그리고 바로 그 모임이.”
관우가 화이트보드를 뒤집어 앞을 내보이자.
“우리가 들춰내야 할 버팔로 사건 최후의 장막일지도 모릅니다.”
“!!”
선으로 쭉 연결된 조직도가 나왔다.
조직도의 각 칸에는 인물사진과 함께 그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백양은 이익을 위해 모인 각계 고위층 인사들의 비밀모임 이름입니다. 양지뿐만 아니라 음지의 대부들도 포함되어 있죠. 중대범죄수사과는 과거 특수수사과시절부터 백양을 수사해왔습니다.”
특수수사과는 중대범죄수사과의 전신이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수사를 해왔다니.
화이트보드에 그려진 조직도의 사람 수로만 따지면 스무 명이 훨씬 넘었다.
백양 멤버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하며 놀라고 있는데.
“물론 이 멤버들이 현재 다 살아있는 건 아닙니다.”
관우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계속 설명했다.
“백양은 총 세 기수로, 현재 멤버들은 3기에 해당하죠.”
그러고 보니 조직도가 세 줄로 쭉 늘어져 있었다.
“이 맨 위에 있는 놈이 백양 1기 수장 이응삼. 속칭 80년대 마약왕으로 불렸던 인물이죠.”
마약왕 이응삼.
그의 사진을 보니 대학 시절 책에서 봤던 그의 범행들이 하나 둘 머리에 떠올랐다.
“1980년대 군사정부 시절, 이응삼이 마약 밀수출을 위해 윗선에 로비를 하면서 시작된 것이 이 백양입니다. 그래서 최초 멤버들은 대부분 군장성들이죠.”
조직도 맨 윗줄은 대부분 군인들의 사진이었다.
“이응삼은 이 군장성들에게 소위 말하는 ‘환각파티’를 제공합니다. 마약과 술, 여자를 한 번에 제공하는 거죠. 물론 현금다발이 뇌물로 들어가는 건 당연하고요. 약과 술, 여자와 돈. 인간을 미치게 만드는 네 가지 요소를 한 번에 제공을 하니 군장성들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그 덕에 한동안 마약 밀수출이 어마어마하게 이루어집니다. 환각파티를 즐기고 마약 수입 커미션을 나눠 갖는, 그 멤버들을 백양이라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환각파티가 이때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니.
“하지만 80년대 후반,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면서 장성들도 더 이상 이응삼의 뒤를 봐주기가 힘들어집니다. 밀수출입 단속이 심해지고 곧 이응삼은 경찰에 검거될 위기에 처하죠. 경찰이 이응삼의 집에 쳐들어가 그를 체포하기 직전, 그는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 자살합니다. 그가 죽으면서 백양 1기는 해체됩니다.”
“……”
“당시 밀수출에 관련된 세관공무원들은 싹 다 처벌을 받았는데, 그것을 허가하도록 돕고 뇌물을 받고 마약까지 한 군 장성들은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부는 그 사실을 감추기 바빴죠. 경찰이 밝혀낸 것은 오직 이응삼의 집에서 나온 금품제공 장부, 군 장성들과 사석에서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그의 일기장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증거가 부족하니 장성들이 모르쇠로 죄를 부인해버리면 답이 없었죠. 당시 과학수사 기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때 분위기로는 이런 증거조차 뉴스에 함부로 낼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 당시 수사 탄압과 형편없는 과학수사 기술력을 생각하면, 지금보다 죄를 감추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이후 한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2000년대 중반부터 이런 세력들의 움직임이 다시금 일기 시작합니다.”
관우가 두 번째 줄 인물들을 가리켰다.
“백양 1기 멤버 중 한 명이었던 김희달 장군과 현 야당원내대표인 이호중 국회의원, 현 법무부차관인 서인혁 등이 이때 멤버였던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이들은 동남아 쪽 마약 밀수입 사업과 더불어 정부기관 정보를 미리 선점해 경기도 일대 대규모 땅투기를 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중대범죄수사과는 이들을 백양 2기로 명명하고 곧장 수사에 들어갑니다.”
이호중, 서인혁은 뉴스에서 간간이 이름을 들어본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서도 결국 혐의를 찾지 못했습니다. 당시 경찰이 파악한 건 ‘불법 영역에서의 조직적 움직임’에 불과해 정보가 매우 부족했고, 조사 대상들도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들이라 수사 진행이 어려웠죠. 수사 낌새를 눈치 챈 뒤 백양 2기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 사실상 해체수준으로 보고 이에 대한 수사도 매듭지어지지 못한 채 막을 내립니다.”
그가 간단히 추려서 얘기했지만, 사실 그 수사기간 동안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다.
내가 박지석 사건에, 이형준 형사 사건이나 상광동 살인사건에 들였던 노력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더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년인 2014년.”
그가 마침내 세 번째 줄을 가리켰다.
“백양이라고 부를 만한 세력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