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opaths are good at investigating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그 어둠, 네가 걷어준 거야.
홱-
내가 부르자 은빈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안색은 좋았다.
마취 수건 때문에 잠깐 기절했다 일어난 것뿐이니 몸에 별 이상은 없을 것이다.
이어 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무언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감추려고 애썼다.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표정.
그녀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나는 반대로 내면의 모든 것을 표출하려 했다.
은빈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감정이 억눌려 있었으니까.
“……”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리움과 걱정, 보고 싶음과 애틋함의 감정은 뭔가 모를 어색함에 눌려 발현되지 못했다.
나는 서먹한 연인을 만나는 ‘보통의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나는 말을 하는 대신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깊은 눈망울은 여전히 영롱했다.
눈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같은 코, 도톰한 입술.
은빈의 아름다움은 무엇 하나 훼손된 것 없이 온전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
그 표정은 경포대와 무술 훈련의 중간쯤이었다.
경포대에서 처음 사랑을 나눌 때만큼 좋은 것도 아니고,
무술 훈련 후 헤어짐을 고했을 때만큼 나쁜 것도 아니었다.
표정을 감추고 있어 명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 중간 어디쯤인 것 같았다.
표정을 훑은 후에 든 생각은.
‘다행이다.’
다행스러웠다.
우리를 이어주는 끈이 아직 그대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서.
이어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생각했다.
다행이란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 말고.
내가 은빈을 다시 만나면 꼭 하고 싶던 말.
이 수사가 끝나면 찾아가 꼭 고해야 했던 말.
“미안합니다.”
나는 첫마디로 그 말을 내뱉었다.
“이기적으로 행동해서 미안합니다.”
은빈이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은빈 씨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해버렸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수사를 해오는 동안 은빈 씨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헤아려볼 생각은 못했습니다. 도대체 왜 저렇게 생각할까 의아해할 뿐이었죠.”
“……”
“은빈 씨가 납치되었을 때, 저는 분노했습니다. 납치는 은빈 씨가 당했지만, 화는 제가 냈죠.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하니 감정이 요동을 치더군요.”
“……”
“제가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은빈 씨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습니다. 앞으로는 제 안전에 훨씬 더 많은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요.”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아련해졌다.
“물론.”
내가 단호한 어투로 계속 말했다.
“앞으로 위험한 수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
“오히려 위험할수록 더 나서서 수사를 해야죠. 그것이 경찰의 의무이자 제 즐거움이니까요.”
다시금 시무룩해지는 그녀의 표정.
“하지만.”
나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훨씬 더 신경을 쓸 겁니다.”
“……”
“제가 얼마나 안전에 유의하고 있는지, 수사는 얼마의 기간 동안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설명하며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켜줄 겁니다. 그들의 걱정을 위로하고 보듬어줄 겁니다.”
다시금 아련해진 눈빛.
“사람들은 말합니다.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고.”
나는 그녀의 표정변화에 별 반응 없이 계속 내 할 말을 했다.
“하지만 사실 뱉은 말도 주워 담을 수 있습니다.”
“…?”
“말을 시각화해서 뇌에 다시 집어넣으면 되거든요.”
“……”
“그래서 말인데요, 은빈 씨.”
내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그만 만나자고 했던 그 말, 취소하고 다시 집어넣어주시면 안 됩니까?”
놀란 듯 다시 커진 눈.
“저는 은빈 씨와 헤어지기 싫습니다.”
“……”
“앞으로 은빈 씨의 마음을 헤아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멋대로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이어 그녀의 코가 조금씩 벌름거리고.
“은빈 씨의 마음을 시각화해서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겠습니다.”
입술이 떨리더니.
“이제는 걱정이 아닌 행복의 감정을 은빈 씨에게 전해드리겠…”
다다다-
와락-
‘…!’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에게 안겼다.
그리고는.
흐흑-
작게 흐느꼈다.
“미안해요 정태 씨.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야…”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음성.
“이기적인 것도, 제 멋대로 행동한 것도 전부 나야. 정태 씨는 그대론데, 내가 변했어. 내 마음이 못됐게 삐뚤어진 거야…”
우습게도 그녀의 울음소리가 노래처럼 들렸다.
그녀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음색과 멜로디.
마음이 간지러웠다.
“나 그때 정태 씨 집에서 나와서 엄청 후회했어요. 근데 발걸음을 못 돌렸어. 그 후로 연락도 못했고. 너무너무 연락하고 싶었는데, 마음은 정태 씨한테 있는데, 자존심이, 이 바보 같은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정태 씨는…”
그녀의 말에 울음이 더 섞여들었다.
“총알을 피해가면서 날 구하러 와줬어요. 내가 가장 걱정했던 일을 나 때문에 하게 만들었어… 미안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정태 씨…”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그런 정태 씨한테 내가 헤어지자고 했어… 미쳤었나 봐요 나.”
그 얼굴조차 예뻐 보였다.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에 감정이 다 담겨 있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녀의 감정들이 너무나 깊숙이 와 닿았다.
“못 만나는 동안 매일 보고 싶었어요.”
“……”
“매일 이렇게 안고 싶었어요.”
그녀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니.
기분이 좋았다.
나 역시 수사생각 할 때를 제외한 모든 시간에 그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염치없지만… 나도 정태 씨 다시 만나고 싶어요.”
“…!”
“그런데 나 어떡해요? 난 시각화 그런 거 할 줄 몰라. 내가 내뱉은 말 평생 기억에 남을 거 같아요… 정태 씨한테 미안한 이 마음 평생 갈 것 같아…”
“그럼 시각화는 제가 하겠습니다.”
스윽-
내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제 귀에서 그 말을 빼내 없애버리겠습니다.”
“정태 씨…”
“그러니 그만 우세요.”
그만 울라고 했는데 그녀가 더 눈물을 쏟았다.
“이렇게 울고 슬퍼하라고 은빈 씨 구한 거 아닙니다.”
“흑…”
“앞으로 더 즐겁고, 행복하라고 구한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은빈은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어서.
그녀의 음성을 다시 듣고, 그녀의 품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또 앞으로…
“저랑 더 많은 시간 사랑하라고 구한 겁니다.”
그녀와 계속 함께할 수 있어서.
“그만 슬퍼하고.”
나는 마음에 솟구치는 말을 뱉어냈다.
“이제 우리 사랑합시다.”
뱉어내고 나니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금 더 내 마음을 담아.
“아니.”
다시 말했다.
“사랑합니다. 은빈 씨.”
“…!”
놀란 듯 입을 벌리는 은빈.
그녀에게 사랑 하자고는 해봤지만,
사랑 한다고는 처음 말했다.
비슷한 문장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내가 그 차이를 구분해 다시 말을 내뱉은 게 더 신기했다.
그녀의 눈이 점차 다시 작아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슬픔과 미안함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녀의 눈은 더 아득해졌고, 내 입술은 나도 모르는 새에 그녀에게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그려지는 바로 그 순간.
드륵-
“야, 탁정태!”
북극곰이 병실에 찾아왔다.
“아, 제수씨랑 있었구나…”
그는 잠시 누그러졌다가.
“야! 너 지금 3일 째 잠 한 숨도 안 잤잖아.”
다시 내게 소리쳤다.
“이제 좀 쉬어야…”
그리고 그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털썩-
“어어? 정태야!”
“정태 씨!”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
눈을 떠보니.
꼬르륵-
나는 사람이 아닌 피라미였다.
물속인데도 숨이 잘 쉬어졌다.
‘… 왜 이렇게 어둡지?’
사방이 캄캄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분명 어둠을 잘 헤치고 나왔는데.
왜 아직 빛이 보이지 않을까.
의아해하고 있던 그때.
출렁-
갑자기 거센 물살이 일더니.
출렁-
어둠이 점점 걷혔다.
위를 올려다보니.
출렁-
부웅-
거대한 고래가 저만치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가 나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어두웠던 건 빛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고래에 가렸던 것일 뿐.
솨아아아-
고래가 가고 나니 찬란한 바다의 풍경이 보였다.
아름다운 산호초와 형형색색의 물고기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숫자의 생물들이 저마다의 빛을 띠며 헤엄치고 있었다.
더 이상 바다는 어둡지 않았다.
눈부신 햇살은 바다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물이 일렁이며 빛은 다른 각도로 반사되었고.
빛의 각이 바뀔 때마다 생물들은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저 멀리서 가장 큰 물고기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나에게 가까이 와 몸을 스치며 친근함을 표했다.
어둠 속에선 그들이 적인 줄만 알았는데, 그들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친구 물고기였다.
‘경이’
자연과 생물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며 나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몇 달 전만해도 그렇게 잔혹해보이던 바다가,
지금은 이렇게나 아름답다.
빛만 들면 이렇게 눈부신 곳이었는데,
어둠이 이 찬란함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어둠, 네가 걷어준 거야.”
옆에 북극곰이 와서 붙었다.
어둠을 내가 걷었다고?
“그래. 증태 네가 바다를 바까뿟다 아이가.”
왼쪽엔 바다거북까지 왔다.
그들은 내 마음을 읽고 있는 듯했다.
“처음이었어요. 탁주임님 같은 분은.”
위엔 꺽다리 오징어.
그도 기분이 좋은 듯 먹물로 예쁜 그림을 뿜어댔다.
“저도 사실 그대로를 전할 수 있어서 뿌듯합니다.”
이어 소식을 전하는 물고기와.
“바… 바다뿐만 아니라 물고기의 마… 마음까지 바꿔줬어여…”
다친 물고기까지 따라붙었다.
그리고 내 바로 옆으로.
“사랑을 키워주기도 했죠.”
가장 예쁜 피라미까지 붙었다.
나는 나가 아닌 우리가 해낸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입을 뗄 새도 없이.
솨솨솨솨솨솨솨-
솨솨솨솨솨솨솨-
솨솨솨솨솨솨솨-
바다 속 모든 물고기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살랑- 살랑-
쉬쉬쉭-
쉬쉬쉭-
그들은 모두 내 주위를 돌며 흥겨운 춤을 춰댔다.
360도를 회전하는 물고기들.
박자에 맞춰 좌우로 움직이며 리듬 타는 물고기들.
내 몸을 스치며 애정을 표하는 물고기들.
저 멀리선 고래와 상어도 거대한 몸짓으로 춤사위를 더했다.
그들의 몸짓이 햇살에 반사되며 나를 비췄다.
그들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나는 더욱 밝게 빛났다.
‘하아…’
신기하게도 빛이 더해질수록 몸이 달아올랐다.
이어 가슴이 간질간질하더니.
‘하…’
쾌락이 뿜어져 나왔다.
이건 뇌에서 쏟아지는 도파민이 아니었다.
처음 느껴보는 쾌감.
분명 이건.
‘마음’
마음에서 전해져오는 쾌락이었다.
나 스스로 만들 수 없는.
타인의 웃음과 격려, 존경과 애정으로서만 만들 수 있는 쾌락.
그 어떤 쾌락보다 특별한 느낌의 쾌락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동안 그 감각을 느꼈다.
.
.
.
그러다 문득.
‘….?’
이상함을 느꼈다.
한 물고기가 빠졌다.
가장 잘 생긴 물고기.
어쩌면 나에게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물고기가.
내가 이리저리 헤엄을 치며 그를 찾고 있는데.
“야, 정태야. 이제 정신 좀 드냐?”
바다 밖 어딘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