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opaths are good at investigating RAW novel - Chapter 69
69화. 왕.
= “오늘 저녁에요?”
= “그래. 본청 근무는 정시 퇴근이라 저녁엔 시간이 빌 텐데.”
= “안 됩니다. 오늘 조사해야 할 게 많…”
내가 거절하려던 찰나.
“오늘 할 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정시 퇴근하시면 됩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철성이 내 말을 끊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 복귀해서 할 일은 경환의 컴퓨터와 전화기를 포렌식 맡기고 서류를 훑어보는 것. 그게 다였다.
포렌식 결과는 빨라도 내일은 되어야 나올 것이고, 서류는 충분히 오늘 안에 다 볼 수 있는 양이었다.
나는 철성을 한번 쳐다본 뒤 대답했다.
= “됩니다. 시간.”
= “그래, 은빈 씨도 온다는 데 네가 빠지면 되겠냐.”
= “네? 은빈 씨도 온다고요?”
= “뭐야. 연락 못 받았냐?”
그 말을 듣고 나는 곧장 휴대폰을 확인했다.
수신함에 은빈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정태 씨, 일 중이죠?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아요?]
오전엔 본청과 서울청, 창진서를 오가느라 문자가 온 지도 몰랐다.
= “은빈 씨 메시지도 와 있네요.”
= “그래. 왜 내가 저번에 말했던 2대2 술자리 있잖아. 그거 오늘 하면 어떨까 해서.”
역시 경수가 이런 쪽으론 추진력이 상당하다.
= “너도 되면 오늘 4명 다 되는 거니까, 근처 가게 예약해놓을게. 마치고 창진서 앞으로 와. 같이 가자.”
= “…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화가 끊어졌다.
“저녁에 약속이 잡히셨나보죠?”
내가 귀에서 휴대폰을 떼자마자 철성이 나에게 물었다.
“네.”
“여성 분 이름도 들리던데. 여자 친구인가요?”
“… 아닙니다.”
“지인인가 보군요. 어찌됐건 오늘 탁경위님 낮에는 근무지에서 열심히 활약하셨으니.”
그가 핸들을 우측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밤엔 즐거운 술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
퇴근 후, 창진경찰서 앞.
“어, 정태야. 언제 왔냐?”
일을 마친 경수가 잽싸게 뛰어 나왔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잘됐네. 하, 밀린 일 쳐낸다고 좀 늦었어. 너 가고 나니 일이 얼마나 밀리는지. 업무량이 두 배는 는 것 같다니깐?”
“……”
“팀장님이랑 정록이 지환이는 아직 안에서 일 중이야. 나 약속 있다니까 먼저 가보라고 하더라고.”
“그렇군요.”
“안에 들어가서 인사하고 갈래?”
“아뇨, 바로 약속장소로 가시죠.”
“왜. 오랜만에 인사라도 하고 가지.”
“오랜만 아닙니다. 안 본지 3일 밖에 안 됐습니다.”
“아, 그런가?”
그렇게 우리는 돌아서서 약속장소로 향했다.
경수는 창진구 내 한 횟집을 예약해놨다고 했다.
“본청 근무는 어때? 할 만해?”
“형사과 업무랑 비슷합니다.”
“그래도 중압감이 좀 다르지 않냐? 본청 감찰이라고 하면 조사 대상들도 대게 고위 간부라 엄청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조사 대상에 고위 간부가 많은 건 맞지만 부담스러운 건 없습니다. 조사 대상은 조사 대상일 뿐입니다.”
“… 역시 탁정태 답구만.”
그렇게 잠시 걷다가 경수가 다시 물었다.
“은빈 씨랑은 잘 돼 가냐?”
“뭐가 말입니까?”
“뭐긴 뭐야. 연애 말하는 거지.”
“연애 하는 거 아닙니다.”
“그럼 뭐하는데?”
“… 네?”
“연애도 안 하는데 만나서 뭐하냐고 둘이.”
“……”
그때부터 난 몇 주 전 은빈, 정우와 함께 중국집에서 밥을 먹은 뒤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날. 정우를 택시 태워 보낸 뒤.
은빈과 나는 팔짱을 끼고 가로수 길을 걸었다.
팔짱을 끼고 있으니 간지러운 느낌이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찌릿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
팔짱을 낀 뒤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목적지 없이 걷자고 말은 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걸어야할지를 계속 생각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또 목적지를 생각하느라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은빈 또한.
“……”
아무 말이 없었다.
낯선 즐거움을 선물하면 기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갔다.
뭔가 모르게 뻣뻣하고 긴장되어 보였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20분쯤 걸었을까.
치헌에게 서로 들어오라는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은빈에게 가보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냥 그렇게 헤어졌다.
그 말을 다 들은 경수는.
“켁. 케겍!”
목이 메는 듯 헛기침을 해대더니.
벌컥- 벌컥-
가방에서 물을 꺼내 막 들이켰다.
“어휴, 오랜만에 들었더니 더 갑갑하네 네 연애 얘기.”
“……”
“재판 준비할 때보다 더 목 막히는 거 같아. 역시 고구마는 네가 최고다 정태야.”
그가 다시 물병을 집어넣고 말을 이었다.
“그럼 대체 팔짱은 왜 끼자고 한 거야?”
“팔짱 끼면 기분이 좋으니까요.”
“기분 좋다고 맘대로 팔짱 끼냐? 너 그거 강제추행이야!”
“……”
“은빈 씨가 팔짱 끼는 거 허용해줬으면 네가 그 후에라도 고백을 했어야지.”
“고백… 이요?”
내가 되묻자 경수가 하, 하며 한숨을 쉬더니.
“너 사건 현장에서 영장 없이 압수하면, 그 다음에 뭐 하냐?”
강의를 시작했다.
“사후영장 치죠.”
“그걸 왜 치는데?”
“원칙은 영장을 먼저 발부받아야 하지만, 상황이 위급해 압수부터 한 것이니 그 후에라도 영장을 치는 거죠. 그래야 적법한 압수가 되니까요.”
“사람 사이 감정도 그거랑 마찬가지야.”
“…?”
“감정에도 법처럼 무의식중에 합의한 최소한의 경계 같은 게 있다고. 보통은 연애를 하고 나서 팔짱을 끼잖아. 이게 원칙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너처럼 감정이 급해서 팔짱을 먼저 껴버릴 때도 있어. 원칙을 벗어나버리는 거지. 하지만 이 자체로 잘못된 건 아냐. 사후영장을 치듯 감정의 영역에서도 사후에 관계를 정립하는 걸 허용해주니까.”
감정도 법처럼 원칙과 예외가 있다라.
처음 듣는 얘기지만 잘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사후에도 관계를 정립하지 않는다? 그럼 그건 잘못되어버리는 거야. 사후영장으로 적법성을 확보하듯, 남녀 사이에도 어느 정도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고.”
“……”
“팔짱은 꼈는데 아무 말도 안 한다? 그럼 여자 입장에선 기분이 어떻겠어. 헷갈린다고. 내가 좋아서 팔짱을 낀 줄 알았는데, 아닌가? 그럼 지금 이 행동은 뭐지? 하면서 말이야. 정태 넌 너만 좋고 상대는 헷갈리는, 그런 관계를 바라는 거냐?”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은빈 씨한테 확실하게 말해. 헷갈리게 하지 말고.”
“… 알겠습니다.”
이어 그가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말했다.
“사실 이번 2대2 술자리, 나보다 민경이가 더 적극적으로 추진한 거야.”
“…?”
“은빈 씨가 민경이한테 고민을 토로했다고 하더라고. 정태 너랑 사이가 너무 애매하다고. 그런 애매한 사이가 너무 길게 지속되고 있다고.”
“……”
“그 찰나에 내가 우리 다 같이 술 한 잔 하면 어떨까 권했고, 이렇게 자리가 만들어진 거지. 오늘 민경이도 분위기 띄우려고 많이 노력할 거야. 그리고 내가 볼 땐.”
그가 잠시 말을 끊고 다시 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야.”
“…?”
“솔직히 은빈 씨가 여태 너 만나고 있는 것만 해도 보살이라고 봐야 해. 만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고백도 안 하는 남자가 어딨냐?”
“……”
“오늘 꼭 고백하라고. 다들 너 도와주려고 하고 있으니까. 다음은 없어.”
그렇게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여기야. 들어가자.”
가게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이 여러 개 있는 룸식 횟집이었다.
우리는 안내를 받아 한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경수가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민경이랑 은빈 씨도 다 와간다네.”
“……”
내가 아무 말도 않고 멍하니 있자 경수가 물었다.
“왜 그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요.”
“뭘?”
“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은빈 씨한테 확실하게 말하라고. 그런데 저는 아직 제 마음 상태가 어떤지도 잘 모르겠거든요. 무엇을 어떻게 확실하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경수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네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꺼내서 전달해.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대로 전달하라고요?”
“응. 그리고 마음에 있는 말을 꺼내는 데는.”
경수가 옆에 놓인 소주를 들고 말을 이었다.
“이 술이 엄청난 도움을 주지.”
“……”
“진짜야. 너 나중에 이 술한테 고마워할지도 모른다고.”
“……”
“야. 술과 고경수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걱정하지 말고 회나 맛있게 먹어. 내가 다 알아서 사랑이 싹트게 해줄 테니까.”
그때.
드르륵-
문이 열리더니.
“경수 씨! 어머, 정태 씨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경수 씨. 정태 씨 일찍 왔네요?”
“네.”
민경과 은빈이 들어왔다.
무거웠던 내 마음과는 반대로 그녀들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민경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 정태 씨 정장입고 오셨네요?”
“새로운 부서 출근 복장이 정장입니다.”
“헐 대박. 부서 이동 했어요?”
잠깐의 틈도 없이 곧바로 대화가 이어졌다.
몇 주 전 은빈과 나 사이에 흘렀던 어색한 기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마치 질문과 답변을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짠 할까요?”
“짜안-!”
술이 들어갈수록 분위기는 더 좋아졌고.
“와, 회가 혀에서 녹아요.”
“언니 잠시만. 일단 사진부터 찍고.”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땐 감탄사가 쏟아지기도 했다.
은빈과 경수는 나와 둘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웃었다.
“민경이도 그렇고 은빈 씨도 그렇고, 갈수록 더 예뻐지시는 것 같아요.”
“어머, 정말요? 호호호.”
우리는 서로를 칭찬하기도 했고.
“오빠 나이 밝힐 때 저 깜짝 놀랐잖아요. 서른둘이 아니라 서른여덟이었다니.”
“서른여덟이 아니라 마흔입니다.”
“… 네!?”
“또 속으신 거예요.”
진실을 규명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창 대화가 오가던 도중.
“우리…”
민경이 내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게임 할래요?”
“무슨 게임 말입니까?”
“왕게임이요!”
“왕게임이요?”
내가 되묻자 민경이 동그란 통에 나무젓가락 네 개를 넣고는 그것을 들고 답했다.
“이 나무젓가락 아래에 숫자랑 ‘왕’을 써넣고 뽑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왕을 뽑은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걸 다른 사람한테 시키는 거죠. 예를 들면 ‘1번이랑 2번. 술 한 잔씩 해.’ 이렇게요.”
“술을 마시기 싫으면 어떡합니까?”
“그래도 마셔야죠! 왕이 시킨 건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을 하자고 하다니.
“저는 그 게임 안 하겠습니다.”
“네!? 왜요?”
“싫은 행위를 강요하면 강요죄에 해당합니다. 범법행위를 게임으로 미화할 순 없습니다.”
“에이, 게임인데 무슨 범법이에요 갑자기. 그냥 해요. 이거 재밌어요 진짜!”
“차라리 투표로 대통령을 뽑는 걸로 하시죠. 공정하게 대통령을 선출한 뒤 나머지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술을 먹을지 말지…”
내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자, 그럼.”
경수가 내 말을 끊었다.
“다수결로 하자. 다수결로.”
“……”
“왕게임 안 할 사람 손.”
내가 손을 들었다.
“왕게임 할 사람 손.”
나머지 세 명이 손을 들었다.
“자, 그럼 왕게임 하는 걸로. 정태 네가 원하는 공정한 결정 맞지?”
“……”
그렇게 게임이 시작되었다.
민경은 펜으로 젓가락 끝에 번호와 ‘왕’을 쓴 뒤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통 속으로 감췄다.
그리고는 통을 마구 흔들어 젓가락이 섞이도록 했다.
“자, 이제 하나씩 뽑으세요.”
우리는 모두 젓가락을 하나씩 뽑았고.
“자기가 뭘 뽑았는지 확인하시고, 왕 뽑은 사람은 말해주세요.”
젓가락 끝에 무엇이 적혔는지 확인했다.
나는.
‘1’
왕이 아니었다.
그렇게 각자 뽑은 젓가락을 확인한 뒤,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데.
“내가…”
경수가 젓가락을 내밀며 나를 쳐다보더니.
“왕이네?”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있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