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opaths are good at investigating RAW novel - Chapter 71
71화. 가장 어설프고 진실된.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걷는 은빈.
나는 그녀와 눈을 한 번 맞춘 뒤, 앞을 보고 말했다.
“은빈 씨를 만나면서 저는 신기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신기한… 경험이요?”
“마음 한 구석이 간지럽거나 잔잔한 소름이 돋는, 그런 경험이요.”
나는 논리와 이성 따윈 생각하지 않고 마음 속 말을 그대로 술술 뱉어냈다.
“그런 신기한 경험은 제가 이상한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
“은빈 씨와 팔짱을 끼고 싶고, 같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요.”
마음 속 말은 일체의 가공 없이 날 것 그대로 튀어나왔다.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저한텐 이상한 생각입니다. 은빈 씨를 만나기 전엔 한 번도 하지 않은 생각이니까요.”
“……”
“처음엔 제가 그런 감정들을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팔짱을 낄 때 느꼈던, 함께 이야기를 할 때 느꼈던 낯선 즐거움을요.”
말을 하면서 술기운이 더 올랐다.
하지만 발음은 또렷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오늘,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습니다. 아까 은빈 씨가 횟집에서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저는 아직 은빈 씨와 팔짱을 끼지도, 얘기를 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았거든요. 그냥 은빈 씨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저는 즐거워졌습니다. 이런 걸 보면 저는 은빈 씨가 제게 줬던 그 감정들을 좋아했던 게 아니라…”
내가 다시 그녀와 눈을 맞추고 말을 이었다.
“은빈 씨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했나봅니다.”
게슴츠레했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깊고 까만 눈망울.
그녀가 아련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낯선 즐거움을 욕망했던 게 아니라, 은빈 씨를 욕망했나 봅니다.”
“정태 씨…”
나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인식할 수 없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에서 나오는 말들은 내가 만들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 분위기에 취해.
“아, 물론.”
정신이 오락가락하기도 했다.
“제가 은빈 씨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건 아닙니다.”
“…?”
“은빈 씨는 제 딸이 아니니까요.”
“??”
“그래서 이 좋아하는 마음이 단순한 호감인지 아니면 사랑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 마음이 잘 전달되고 있는 걸까?
“사실 앞으로 은빈 씨와 몇 번을 더 만나도 제 마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는 못할 겁니다. 만날 때마다 매번 평생 처음 겪는 감정을 느끼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모기가 겨울을 모르듯.
겪지 못한 건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사랑을 해봐야겠죠.”
겪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은빈 씨.”
은빈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해야 다음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큰 착각이었다.
이성에 관한 나의 마음은 스스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니까.
계획과 충동이 섞여 있는 삶이라야 행복할 수 있다는 금주희 과장의 말.
거기서 충동은 나쁜 뜻이 아니었다.
사랑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충동이었다.
그리고 그 충동은, 저질러 봐야만 아는 것이었다.
이제 내 마음을 모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왔다.
경수가 말한 감정의 사후영장.
‘고백’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막상 말을 하려니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고백을 해본 적도 없고, 고백 하는 장면을 티비에서 본 적도 없다.
경수도 고백을 하라고만 했지 어떻게 하라고는 알려주지 않았다.
“……”
나는 다른 생각을 다 지우고 내 마음에 집중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내 마음을 말하기로 했다.
지금 가슴이 시키는 그 말을 가장 직관적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뒤.
나는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장 어설프고 진실된 그 말을 내뱉었다.
“우리, 사랑할까요?”
…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흘렀다.
내가 주절주절 말을 내뱉을 동안 가만히 그것을 들어주던 은빈.
그녀가 애틋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처음에 그녀의 눈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듣고 있는 것이 실제인지 확인하고 있는 듯.
그리고 흔들리던 눈은 이내 편안히 정착하더니.
입 꼬리와 함께 옆으로 쭉 퍼지며 예쁜 미소를 만들어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사랑스런’ 표정일까.
그녀는 그렇게 세상 가장 예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와.
“좋아요.”
살며시 입을 맞췄다.
#
다음 날, 7시 30분.
나는 지하철에서 내린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어제 과음을 했음에도 머리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정신이 맑고 상쾌했다.
모두 은빈의 덕분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본청에 들어섰다.
정문을 통과함과 동시에 나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오늘 할 일을 생각했다.
근무 시간엔 근무에 집중해야 한다.
출근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온 정신을 집중해 내가 원하는 수사에 힘써야 한다.
1층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가는 동안 출근하는 직원들의 이야기소리가 들려왔다.
“기소는 안 된대. 다시 재지휘 내려올 거야.”
“1면에 기사 안 나왔어? 이상하네. 오늘 나온댔는데.”
어제도 느낀 거지만 본청 직원들은 경찰 일보다 검찰, 언론 등 타기관의 일을 더 많이 논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마치 자신들이 그쪽 기관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라도 있다는 것처럼.
저 말들이 실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경찰서보다는 본청이 타기관과의 교류가 많은 것 같았다.
그들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타고 감찰계 사무실이 있는 층에 내렸다.
그리고 사무실 쪽으로 가려는데.
“요즘에도 실적대로 승진을 한다고 믿는 놈이 있긴 한가보군. 멍청한 자식.”
복도 끝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듣지 못했겠지만, 나에겐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경찰청 차장’
차장의 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경찰조직 2인자라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하고 있다니.
정말 멍청한 사람은 본인이라는 걸 그는 알까.
나는 그쪽을 한 번 흘겨본 뒤 감찰계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철성의 자리로 가니.
“……”
그는 아직 자리에 없었다.
나는 옆자리에 가방을 놓고 앉아 철성의 책상을 둘러보며 그를 기다렸다.
책상 한편엔 서류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지방청에선 경찰서 감찰의 보고를,
본청에선 경찰서와 지방청 감찰 전체의 보고를 받는다더니.
전국 각 지방의 주요 이슈와 인물은 모두 보고가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쌓인 서류를 쭉 훑어보다가 옆에 있는 내선 전화기로 시선을 옮겼다.
전화기 상단엔 즉시 전화연결을 할 수 있는 단축버튼이 있었다.
각 버튼 위엔 ‘경무계장’, ‘경리계장’, ‘청장 부속실’ 등 이름표가 붙어있었는데.
‘…?’
유일하게 맨 첫 번째 버튼만 이름표가 없었다.
게다가 그 버튼은 유독 다른 버튼보다 많이 닳아 있었다.
‘가장 많이 쓰는 버튼인데 이름표가 없다?’
궁금증이 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수화기를 들고 통화목록 버튼을 눌렀다.
[459]
[459]
[02-XXX-XXX]
[459]
[010-OOOO-OOOO]
[459]
[459]
···
‘459?’
그렇게 한창 목록을 확인하고 있는데.
끼익-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탁경위님 일찍 출근하셨군요.”
철성이 들어왔다.
나는 얼른 수화기를 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철성을 바라봤다.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라, 몸이 저절로 그렇게 움직였다.
“안녕하십니까.”
“어제 술을 많이 드시진 않았나보군요. 얼굴이 멀쩡하시네요.”
그가 내 얼굴을 살피며 자리에 가방을 놓았다.
“아뇨, 많이 마셨습니다.”
“아, 그러면 자리가 즐거웠나보군요. 숙취가 전혀 없으신 걸 보니.”
“네, 즐거웠습니다.”
나는 잠깐 동안 다시 어제의 일을 상기했다.
아마 어제는 내 생애 가장 즐겁고 뜻깊은 술자리로 기록될 것이다.
“잘 됐네요. 마침 저도 좋은 소식을 좀 들고 왔는데.”
“좋은 소식이요?”
“저희가 하고 있는 수사 관련해서 진척이 좀 있었거든요.”
“네? 저 퇴근하고 혼자 일을 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저도 정시 퇴근했습니다. 다만 아는 직원들에게 소스를 좀 뿌려놨더니 정보가 많이 들어왔네요.”
“소스요?”
“본청 감찰계장직을 맡고 있으면 곳곳에 정보원들을 많이 두게 되거든요.”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얻어야 할 정보를 전화 몇 통으로 얻은 모양.
역시 본청 감찰의 파워는 꽤나 대단한 것 같았다.
“어떤 정보를 얻었다는 겁니까?”
내가 묻자.
“오늘 오전 조사를 끝내고 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지금 같이 창진서에 좀 갔다 오죠.”
그는 곧장 나갈 채비를 해서 일어났다.
*
우리는 곧바로 창진서로 가 박규만 6팀장과 강상민 경사를 조사했다.
규만에게선 아무런 혐의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민상과도, 경환과도 일체의 접촉이 없었다.
그는 솔직히 말해 자신도 상민이 승진한 게 의아하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반면 상민은 개인책상 내선전화 목록에서 민상과의 접촉 정황이 포착되었다.
이에 대해 그에게 추궁하니.
‘두 달 전 쯤 주민상 과장님이 뜬금없이 제게 전화를 걸어와 방으로 호출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특진 준비는 잘 되어 가냐, 과거 징계 기록 등 특진 제외 사유는 없느냐,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에 답변을 했고 그 이상 특별한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답했다.
이어 상민 자신도 당연히 고경수 경사가 특진할 줄 알았다며, 자기가 돼서 기쁘긴 했지만 정말 많이 놀랐다고 진술했다.
이 이상 규만과 상민에게서 특이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추후 필요하면 컴퓨터 등을 압수하기로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주민상 과장은 자리에 없어 오늘 오후나 내일 영장을 들고 다시 찾아오기로 하고 우리는 창진서를 나와 본청으로 복귀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감찰계 사무실로 들어가니.
“계장님.”
조사팀 직원 하나가 철성에게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말씀하셨던 자료들입니다. 전경환 경감 컴퓨터와 전화 등 디지털포렌식 자료도 있고요.”
“어, 수고했어.”
봉투를 받아 든 철성은 자리에 앉아.
“음.”
서류를 꺼내 한참을 훑어보더니.
“이제 대충 그림이 나오는군요.”
고개를 들고 나를 보며 진지한 투로 말했다.
“일단 먼저 말씀드릴 것은 탁경위님 예상이 맞았다는 겁니다.”
“제 예상이요?”
“창진서 특진 건은 표면적 사건에 불과하다던 그 말이요.”
“…!”
“뒤에 훨씬 큰 사건과 인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
“훨씬 큰 사건과 인물이라면…”
내 말에 철성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책상 서랍을 열어 다른 서류뭉치를 하나 꺼내더니.
촤르르르르-
특정 서류를 찾는 듯 그것을 쭉 넘기며 내게 물었다.
“혹시 말단 직원들의 승진은 고위 간부들의 진급 의사에 좌지우지된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매천파출소 시절, 안득에게 비슷한 얘기를 들은 것이 생각났다.
“네, 있습니다.”
“승진을 위해 온갖 계략과 공작이 일어난다는 얘기는요?”
이건 얼마 전 교철에게 들은 얘기.
“그 얘기도 들은 적 있습니다.”
“그럼 고위 간부가 자신의 승진을 위해 말단 직원의 승진을 누락시키는 계략을 꾸몄다면, 믿으시겠습니까?”
“…?”
슥-
마침내 그가 서류를 찾았는지 프린트 된 사진 한 장을 꺼내 나에게 내보였다.
“바로 이 인간.”
“…!?”
사진 속엔 두 명의 남자가 활짝 웃으며 함께 서 있었다.
오른쪽 남자는 주민상 과장이었다.
그리고 왼쪽 남자.
어깨에 큰 무궁화 두 개를 달고 있는 치안감.
이 사람은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얼굴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철성이 왼쪽 남자를 가리키며.
“경기북부청장 유관우.”
나에게 쏘아붙이듯 물었다.
“이 사람이 고경수 경사의 승진을 누락시켰다면 믿으시겠냐는 말입니다.”
장막을 모조리 다 걷어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