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 stacking hunter RAW - volume 7 (2)
7-2장.
“잠깐만, 천 씨.”
“……?”
천마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보이자 이수현이 제지했다.
“이런 객실 말고, 좀 그럴듯한 곳 없어?”
“좋다. 지하 연무장이 있으니 날 따라와라.”
천마는 그의 요구를 호쾌하게 수락했다.
고수들끼리 시원하게 한판 붙을 만한 대련장이 이곳 지하에 있다.
그는 씩 웃으며 이수현과 류이창을 지나쳐 객실을 나갔다. 그러곤 앞장섰다.
“류이창, 네놈은 이 선택을 죽어서도 후회하게 될 거다.”
천마는 지나가면서 류이창에게 으름장을 놨다.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이수현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거기, 너. 지금 달기에게 가서 전해라. 그 남자가 죽으러 왔다고. 그리 전하면 알아먹을 거다.”
“네, 넵!”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원향루의 기녀가 보인다.
이곳의 주인에게 그녀는 공손하게 머릴 조아렸다. 그런데 대뜸 자길 심부름꾼으로 지목한 게 아닌가.
그녀는 덜덜 떨며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러 달렸다.
‘달기에게 똑똑히 보여 주겠다. 누가 세상의 주인인지. 그녀를 품을 자는 오직 나, 천마뿐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천마는 김칫국부터 마셔 댔다.
정작 이수현은 달기가 뭐 하는 여자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관심 없었다.
“어이, 류 씨. 뭐 벌써 얼어붙고 그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얼른 가자고.”
“예, 예!”
이수현은 겁에 질려 움츠러든 류이창의 어깨를 툭 쳤다.
제 딴엔 긴장 좀 풀어 주려던 거지만, 류이창은 여전히 이가 딱딱 부딪혔다.
천마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았으니 머리가 아찔할 수밖에.
그나마 그가 2급 헌터 출신이었기에 버틴 거다.
‘천마를 상대로 저토록 당당하다니. 무식한 건지 용감한 건지 모르겠군.’
류이창은 침을 꼴깍 삼키며 기도했다.
제발 이수현이 이기게 해 달라고.
안 그러면 자신은 오늘 소리 소문도 없이 죽는다.
* * *
“다, 달기 님! 큰일 났어요!”
“소소, 무슨 일이니?”
달기는 시중을 들어 주는 여자들 틈에 둘러싸여 관리를 받던 중이었다.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잘 빚은 조각상 같았다.
그 아름다움은 같은 여인들이 봐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다.
“아, 그게…….”
이국적인 이목구비와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도 과하지 않고, 중국의 전통 복식과 잘 어우러졌다.
천마의 말을 대신 전하러 온 소소까지 그녀에게 반해 잠시 멍을 때렸다.
그러곤 허겁지겁 얘기했다.
“처, 천마님께서 달기 님을 찾으셨어요.”
“황제님께서?”
“예, 그 남자가 죽으러 왔다고. 그렇게 전하면 달기 님도 알아들으실 거라 말씀하셨어요.”
“…그 남자?”
달기는 죽으러 온 남자라는 대목에서 멈칫했다.
‘설마 이수현이 벌써 여길 찾아왔다고?’
달기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너무 이르다.
아직 대법을 준비하지도 못했는데.
류이창에게 사흘에서 나흘 정도 시간을 끌어 보라 명령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천마는 그의 육체로 갈아타길 원할 거야.’
이수현의 몸에서 영혼을 뽑아내고, 빈 껍데기에 천마의 영혼을 주입한다.
말은 간단해도 실제로는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었다.
‘뭐, 괜찮아. 어차피 천마가 이길 테니까.’
죽은 자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려면 며칠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되면 사체에 빙의하는 꼴이라 생전의 몸보다 훨씬 약해질 수밖에 없다.
“황제께선 어디로 가셨지?”
“지하 연무장으로 가신 듯해요.”
“그래?”
달기의 얼굴에 즐거움이 꽃피었다.
그녀가 미소 한 번 짓는 것만으로도 무겁던 방 안의 분위기가 사르르 녹는다.
시중을 들던 여인들이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지하 연무장에 데려갈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라는 건데. 오래간만에 구경하는 재미가 있겠어.’
달기는 단장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강한 남자를 아주 좋아한다.
그런 남자를 홀린 뒤, 자기 뜻대로 휘두르는 게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류이창, 당신도 왔었네?”
“다, 달기 님…….”
달기가 지하 연무장에 내려왔다. 관중석에 류이창이 보인다.
그녀는 반갑게 인사했지만, 그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곧 있으면 자신의 목숨이 결정될 사투가 펼쳐지는데.
맨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우리가 내린 명령을 거역하고 멋대로 행동하다니. 너, 천마가 아니라 이수현한테 붙은 거지?”
“…….”
“아니야?”
달기는 류이창의 속내를 간파했다.
지금 류이창의 지지율은 흔들리다 못해 붕괴하기 직전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천마에게 버림받고 토사구팽 당할 터.
살고 싶어서 발악하는 거겠지. 혼자 힘으로는 천마에게 안 되니, 외부인인 이수현을 끌어들였고.
“…맞습니다.”
“후후, 근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네?”
“어차피 둘 중 누가 이겨도 넌 죽어.”
“그, 그게 무슨…….”
달기는 요망하게 웃으며 류이창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맞아. 너무 급하게 일을 꾸미느라 그녀의 존재를 잠시 잊고 말았다.
“설령 이수현이 극적으로 천마를 이겼다고 쳐도, 내가 부탁 한마디만 하면 널 죽일 텐데?”
“아, 아……!”
류이창은 그녀의 말투에서 직감했다.
이 여자는 자신을 살려 줄 생각이 없구나.
이수현이 천마를 잡더라도, 그녀가 그를 홀려 버리면 끝장이었다.
그 악마 같은 천마도 그녀의 부탁이면 사족을 못 썼는데.
남자란 생물은 다 비슷비슷했다. 이수현이라고 뭐 다를까.
‘젠장, 젠장… 망했다!’
적어도 달기와 이수현이 접촉 못 하게 먼저 조치를 해야 했는데.
달기에게 쉽게 마음을 주지 말라 귀띔이라도 해 줄걸.
그는 한 시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졌다.
“황제님, 힘내세요! 그리고 귀여운 동생, 열심히 싸우렴!”
“헉!”
류이창은 그녀의 행동에 숨이 턱 막혔다.
달기는 속살이 은근하게 비치는 옷을 입은 채, 관중석에서 손을 흔들었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자연히 눈길을 보낼 만큼 고혹적인 자태였다.
그녀의 응원에 천마는 물론이고 이수현도 고갤 돌려 관중석을 쳐다봤다.
“쟤가 달기냐?”
“…네놈, 누굴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냐! 그녀는 내 여자다. 눈을 뽑아 버리기 전에 고갤 내려라.”
“어이, 천 씨. 좀 쳐다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왜 과몰입이야?”
“이놈이…….”
이수현은 달기를 접하고도 태연했다. 그의 태도에 천마는 분노했고.
천마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줄줄 흘러나왔다.
살얼음 같은 천마의 내력에 류이창은 두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달기는 놀란 얼굴로 웃었다.
‘어머. 저 동생, 정신력이 제법이네?’
어지간한 무인들도 그녀의 응원을 들으면 입꼬리가 올라갔는데.
증상이 심한 자는 천마와의 생사결에서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수현은 그런 기미가 안 보인다. 그의 정신력이 무인들보다 단단하단 의미.
‘조금은 기대해 봐도 좋으려나?’
천마가 자세를 잡고 손을 까딱했다.
그에게 선공을 양보한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이수현이 마검을 꺼내고서 자세를 잡았다.
“자세가 독특하군. 서양의 검술인가?”
“뭐, 서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이수현은 마검에 갇힌 이계의 망자들에게 검술을 배웠다.
당대 최고의 기사들은 기꺼이 그의 스승이 되어 주었다.
“어디 솜씨를 보여 봐라. 조금은 날 즐겁게 해 주길 바라마.”
천마는 관중석에 앉은 달기를 떠올렸다. 그녀에게 다시금 알려 주리라.
누가 최고이며 최강인지를.
타앗!
이수현은 가볍게 발을 놀려 천마에게 돌진했다.
그러자 천마는 신묘한 보법을 밟으며 검격을 피했다.
“대단한 육체로다. 가히 천무지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골방의 늙은이 치곤 제법 빠른데?”
샤악! 샥!
이수현은 봐주는 것 없이 살초를 날렸다.
천마는 그의 참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고. 천마가 여유롭게 말했다.
“난 네가 싸우는 영상을 몇 번이나 보면서 분석했다. 그때마다 똑같은 결론을 내렸지.”
“뭔데?”
“네놈의 신체 능력은 경이롭지만, 그걸 절반조차 쓰지 못하고 있다. 기술이 부족해.”
퍼억!
천마는 손바닥을 날려 이수현의 가슴을 밀쳤다.
쿠우웅-!
아니, 밀쳤다는 설명은 부족했다. 내공이 실린 장법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쿠구구궁!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이수현의 몸을 지나, 뒤편의 벽을 두들겼다.
“이, 이런!”
류이창은 안절부절못했다. 이수현이 천마의 혈마장에 맞고 말았다.
이수현은 뒤로 쭉 밀렸다.
보폭으로 치면 거의 열 걸음 수준에 달한다. 그의 입가에 선명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혈왕이 사용했던 혈마수라공의 혈마장이다. 평범한 능력자였으면 얼굴의 칠공에서 피가 분출됐을 터인데… 맷집이 상당하구나.”
“…혈왕? 너 천마라면서. 별호가 두 개야?”
“그래. 나는 천마임과 동시에 혈왕이다. 혈왕은 이 몸의 이전 주인이지.”
“몸의 이전 주인?”
이수현은 눈을 끔뻑이며 입술을 핥았다. 자신의 가슴에 시뻘건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좀 이상했다. 군주급 공격도 아닌데 피를 토하다니.
‘위력은 그리 대단치 않아도, 무공은 좀 다른 모양이야.’
혈마수라공인지 뭔지 하는 무공의 특성이었다.
작은 충격으로도 전신에서 피를 흘리게 만드는 끔찍한 마공.
천마는 혈왕의 몸을 빼앗고, 그의 내력과 무공까지 전부 흡수했다.
“다시 말해, 흑마법으로 남의 몸으로 장난질을 했다 이거야?”
“혈왕도 구천에서 기뻐할 거다. 본좌와 하나가 된 셈이니까.”
“방금 생각하고 말했나요?”
“……!”
탓!
이수현은 혈마장에 당했음에도 속도가 줄지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거릴 좁혀 천마를 베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천마는 간단히 피했다.
“아까도 말했듯, 네놈은 무골만 타고났고 싸움에 재능이 없다.”
퍼억-!
이번엔 발차기였다. 이수현의 얼굴을 정확히 가격했다.
천마의 공격에 이수현은 비틀대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네 움직임을 모조리 분석하고 꿰뚫어 봤지만, 네놈은 그러지 못할 터.”
“…거참 되게 깝죽거리시네. 답안지 미리 보고 온 주제에!”
팅-!
이번엔 이수현의 검이 닿았다. 천마가 일부러 맞아 준 것이다.
하지만 마검의 날은 천마의 몸을 베지 못했다.
마치 단단한 금속을 두들긴 것처럼 청량한 소리가 퍼졌다.
천마는 씩 웃으며 이수현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다른 손에는 검붉은 내력이 회오리처럼 회전했다. 아까보다 더 강력한 공력이 실린 혈마장이다.
“내가 흡수한 건 혈왕의 신체와 무공뿐만이 아니다. 내게 도전했던 자들은 전부 내 밑거름이 됐지.”
콰아아앙-!
이수현의 복부에 혈마장이 꽂혔다.
이번엔 한 줄기가 아니라 피를 왈칵 토했다.
하지만 이수현의 두 다리는 꼿꼿했다.
‘놀랍군. 그걸 정통으로 맞고도 버틴다니. 이 얼마나 튼튼한 몸인가!’
천마가 바라던 이상적인 신체였다.
저 육체라면 최소 수백 년간 젊음을 유지할 터. 탐이 났다.
“네놈의 몸뚱이는 내가 잘 써먹어 주마.”
“…아, 되게 짜증 나네.”
이수현은 입안에 남은 피를 퉤 뱉고서 얼굴을 찌푸렸다.
천마는 순간 의아했다.
저건 치명상을 입은 사람이 지을 표정이 아니었다.
굳이 따진다면 자꾸 모기가 물어 대서 성가신 쪽에 가까웠다.
“내가 무공은 못 써도 초능력은 쓸 수 있거든? 참고로 천 씨가 먼저 치사한 기술 날린 거야.”
“뭐?”
“10억 볼트.”
콰아아아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수현의 전신에서 푸른 벼락이 쏘아졌다.
완전히 방심했던 천마는 거기에 휩쓸렸다. 보법을 펼칠 틈도 없었다.
‘이, 인간이 자연지기인 벼락을 다룬다고?’
쿠당탕!
천마는 바닥을 꼴사납게 굴렀다.
벼락에 맞고 날아간 시간은 불과 몇 초에 불과했지만, 천마는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했다.
‘서, 설마 뇌제가 남긴 천뢰신공의 후계자인가? 아니야, 내가 흡수한 뇌제의 내력으로도 이런 위력은 낼 수 없어!’
천마가 상대했던 무인들 중에서 가장 강한 이를 꼽으라면 단연 뇌제였다.
그런 뇌제 역시 천마에게 패해 쓰러졌다.
그가 품은 뇌기를 모조리 흡수했을 때 천마는 얼마나 전율했던가.
강대한 자연지기를 흡수했으니 적수가 없을 거라 여겼다.
“대, 대체 어떻게 그런 힘을…….”
천마가 비틀대며 일어났다. 움직일 때마다 몸에서 미처 못 빠져나간 전류가 사방으로 튄다.
이수현은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새삼스러운 거 없다는 듯, 당연한 말투로.
“벌써 놀라면 안 되지. 짠.”
쿵.
이수현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자 연무장 바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광경이 스케이트장을 방불케 했다.
천마는 그걸 보고 동공이 흔들렸다.
“이, 이건… 북해빙궁의…….”
내공도 익히지 않은 애송이가 어찌 자연지기를 다룬단 말인가.
천마는 경악했다.
이수현은 목을 돌리며 한마디 툭 뱉었다.
“그리고 이제 네 공격 패턴이랑 움직임 다 외웠거든?”
“뭐?”
“어이, 천 씨. 이제 닥치고 처맞기나 해.”
콰르릉!
이수현은 몸에 벼락을 두르고 달려들었다.
콰르릉!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달기가 화들짝 놀랐다. 인간이 벼락을 다룬 것이다.
전기 능력을 지닌 각성자는 종종 봤었지만, 저렇게 강력한 경우는 처음 본다.
“…크아악!”
천마가 비명을 질렀다. 하늘의 악마가 고통을 느낀 것이다.
이미 금강불괴의 영역에 도달한 천마는 검에 베여도 피를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수현이 내뿜는 벼락엔 금강불괴도 속수무책이었다.
“이, 이 놈이……!”
천마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놈을 확실하게 끝장내고자 혈마수라공의 내력을 극성까지 끌어올렸다.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이 붉어졌다. 천마도 인정했던 혈왕의 자태였다.
“어이, 천 씨. 그러다 고혈압 걸리겠어.”
“……!”
샥-!
그의 혈마장은 허무하게 빗나갔다. 이수현이 공격을 깔끔하게 피한 것이다.
아까는 반응도 못 하던 주제에.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터엉-! 파지직!
이수현은 천마가 경악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는 가차없이 검을 휘둘렀다.
천마가 보법을 밟고 피하면 이미 그 자리에 마검이 당도했다.
이수현이 상대의 움직임을 완벽히 예측한 것이다.
천마가 헉 소릴 내며 팔로 칼날을 막았다.
파지지직!
하지만 고압 전류가 그의 척추를 타고 전신에 쫙 퍼졌다.
“…크아아아악!”
괴로웠다. 뇌제와 혈투를 치를 때도 이런 비명은 질러 본 적 없었는데.
이게 무슨 개망신인가.
푹!
천마는 땅을 굴러 이수현의 검을 겨우 피했다. 충분히 거릴 벌린 뒤에서야 그가 멈췄다.
천마는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저, 저 망할 벼락의 기운만 없다면…….’
천마는 땅을 짚으며 일어나려 했다.
지잉-!
그런데 머릿속이 크게 울렸다. 순간 현기증이 몰려왔다.
천마는 하마터면 뒤로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자기 몸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단 걸 알았다.
‘뭐, 뭐지? 벼락을 맞아서 그런 건가?’
아니다. 벼락의 위력이 강대하긴 해도, 자기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그는 아직 건재했다. 그런데도 손발이 덜덜 떨렸다.
다른 무언가가 그의 몸을 어지럽혔다.
“…우웁! 우웨엑!”
심지어 심한 구토감이 몰려왔다.
천마는 뱃속의 내용물을 게워 냈다. 이수현이 여유롭게 말했다.
“머리랑 달팽이관이 막 울리지?”
“…그렇군, 음공 종류의 기술이로구나. 이딴 잡기로 날 어찌해 보겠다고?”
천마는 바로 간파했다. 이수현의 검이 미세하게 진동한다는 것을.
저 떨리는 칼날에 몸이 닿으면 내기가 어지럽혀진다. 그래서 구토감과 어지럼증을 느낀 거다.
“내 몸에 상처 하나 내지 못하는 주제에… 이기려고 발악을 하는구나!”
“그래, 몸 튼튼한 건 인정. 천 씨, 맷집만큼은 바위 군주랑 동급이네.”
“바위 군주?”
천마는 처음 듣는 용어였지만 놈이 누굴 말하는지 알았다.
S급 게이트의 보스이리라. 천마는 입을 손등으로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고작 그딴 돌덩이랑 날 비교하다니. 이제부턴 제대로 상대해 주마.”
“어디서 센 척이야. 감전당해서 아프다고 비명이나 지른 주제에.”
“닥쳐라!”
꾸물.
천마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들은 천마의 머리 위로 뭉쳐져 큼직한 구체를 이뤘다.
이수현은 그 불길한 기운을 보며 자세를 잡았다.
‘마력탄의 일종인가?’
“애송아, 영광으로 생각해라. 이 내가 전력을 다하도록 만들었으니!”
“응?”
콰아앙!
천마는 붉은 마력탄을 한 손으로 조종했다. 그런데 구체는 이수현이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지하 연무장의 천장이었다. 구체는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상승했다.
쿠구궁!
혈마탄은 지하의 천장은 물론이고 원향루의 지붕까지 관통했다.
“뭐해? 지금 어딜 노리는…….”
이수현은 그의 행동이 이해가 안 돼서 구멍 뚫린 천장을 바라봤다.
무너진 공간 사이로 하늘 위의 달이 보인다.
늦은 새벽이라 그런지 달빛이 더 아름다웠다.
‘달?’
이수현은 설마 싶은 눈으로 천마를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천마는 양팔을 벌린 채 달빛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점차 커진다.
세월의 풍파로 희끄무레했던 머리카락이 점차 진해졌다.
천마는 달빛 아래에서 젊어졌다.
이수현의 태양의 기사와 비슷한 능력이었다.
“뭐야, 회춘했네?”
“널 내 호적수로 인정하마. 이제부턴 천마(天魔)로서 상대하지.”
쿵!
그가 발을 크게 굴리자 지하 연무장이 뒤흔들렸다.
이수현은 그의 기운이 확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아까까진 혈왕의 내력만으로 싸웠다면, 이젠 본래 지녔던 천마의 힘까지 꺼낸 것이다.
“그래. 힘순찐 놀이하며 지내느라 재밌었지?”
“정말 놀랍군. 무공도 익히지 않은 놈이 나의 내력을 견딜 줄은.”
천마의 움직임도 확 달라졌다.
보법, 내력, 사용하는 무공까지 싹 다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이수현은 상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일격을 허용했다.
“본좌의 천마신공도 어디 한번 간파해 보아라!”
“쉽지.”
이수현은 그렇게 말했지만 답답했다.
아까의 무공보다 훨씬 움직임이 복잡하고 난해하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동작들이 물 흐르듯 연계됐다.
이걸 분석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파악! 퍽!
이수현은 순식간에 몇 대나 맞고서 뒤로 밀려났다.
‘혈마장도 그렇고, 맞은 부위에 놈의 마력이 들러붙잖아. 귀찮게…….’
이게 참 거슬렸다. 천마의 내력은 그의 뼛속으로 침투해 이수현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몸놀림이 조금 굼떠지자, 천마가 회심의 공격을 날렸다.
우우웅-!
그의 손바닥에 시커먼 구체가 생겨났다. 그 구체는 정지된 것이 아닌 그의 손안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죽어라!”
콰드드득!
회전하는 기탄이 이수현의 급소를 찔렀다. 그러자 이수현은 나선으로 빙빙 돌며 벽에 처박혔다.
천마는 승부가 났다고 생각했다.
‘설령 목숨줄이 붙어 있더라도 방금 건 치명상일 터.’
천마는 관중석에 앉은 달기를 쳐다봤다. 똑똑히 봤느냐. 누가 최강의 남자인지를.
투둑.
무너진 잔해 속에서 이수현이 일어섰다. 그것도 아주 멀쩡한 상태로.
그의 모습을 본 천마가 움찔했다.
“…사술?”
이수현의 몸에서 암석 파편들이 떨어졌다. 무너진 벽의 잔해가 아니었다.
그의 육체 일부가 암석처럼 변한 것이다. 천마는 저 바위를 어디서 본 듯했다.
‘그 바위 거인을 죽이고, 놈의 능력을 흡수했나?’
천마는 머리가 싸해졌다.
상대의 능력을 빼앗는 기술이라니. 마치 달기의 흡성신공과 비슷하지 않은가.
「괜찮으세요?」
“어, 사실 그냥 맞았어도 크게 위험하진 않았는데. 도와줘서 고마워, 다인.”
다인슬레이프가 흡수한 바위 군주의 권능. 그 힘으로 이수현은 천마가 날린 회심의 공격을 분산시켰다.
이수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마는 강하다. 정상급 헌터들보다 월등히.
“어이, 천 씨.”
“…또 뭐냐?”
“한국에도 천마가 있다는 거 알고 있어?”
“뭐, 뭣이?”
“진짜야. 난 이런 거로 거짓말 안 해.”
이수현의 뜬금없는 발언에 천마가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도 천마가 있다니.
놀람 다음에 찾아온 건 분노였다.
천마는 이를 갈며 일갈했다.
“이놈, 그게 무슨 개소리냐! 천하를 다 뒤져 봐도 천마라는 별호를 지닌 건 나뿐이다.”
한국에 자길 사칭한 인물이 있었단 말인가. 고얀 놈 같으니라고.
“그게 누군지 네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다. 어떤 쓰레기가 본좌를 사칭했느냐?”
“궁금해? 그럼 보여 줄까?”
“…보여 준다고?”
“나한텐 소환 능력이 있거든. 한국의 천마를 소환해 줄게.”
천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실히 놈은 잡다한 사술을 여럿 지니고 있다.
사람을 소환하는 능력은 아까 보여 준 능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천마는 투기를 발산하며 얼른 놈을 불러내라 말했다.
이수현은 웃으며 손을 뻗었다.
“천마(天馬) 소환.”
쿠웅.
묵직한 울림이 지하 연무장에 퍼졌다.
정말로 소환된 것이다. 한국의 천마가.
“…이게 뭐냐?”
“한국의 천마.”
중국의 천마는 당황했다. 상상도 못 한 정체가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국의 천마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였다.
이수현은 어느새 한국의 천마에 탑승한 상태였다.
“정식 명칭은 K-31 천마. 줄여서 부르면 K-천마 정도 되겠지.”
“그딴 걸 물어본 게 아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능력자 앞에 현대 병기를 꺼내 들다니. 천마는 내공을 제외하더라도 정상급 헌터와 견줄 만한 마력을 지녔다.
그러니 저런 건 고철 덩어리와 다를 바 없다.
‘그걸 녀석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천마는 그게 의문이었다. 헌터에게 현대 병기가 안 통한다는 것쯤 상식인데.
구태여 저걸 꺼냈다는 건 뭔가 노림수가 있다고 밖에…….
“자, 한입 먹어 봐. 맛이 죽여 줄 거야.”
이수현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보여 주기로 했다.
슈웅-!
미사일을 최대 8발까지 탑재 가능한 국산 천마가 불을 뿜었다.
목표물은 내공과 마력을 몸에 두르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딴 건 내게 안 통한…….”
콰아아아앙-!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었다.
쿠당탕!
천마는 불구덩이 속에서 튕겨 나갔다. 그의 전신은 피투성이가 됐다.
그걸 본 달기는 물론이고 류이창까지 경악했다.
“처, 천마가…….”
“현대 병기에 당했어?”
류이창은 그제야 생각났다.
이수현을 조사해 온 부하 직원이 보고했었다.
그에게는 차량 강화 능력이 있다고.
별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해서 한 귀로 듣고 흘렸는데.
‘설마 전차도 차량에 해당하는 건가?’
류이창은 전율이 일었다. 아무리 강력한 현대 무기도 헌터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 불문율을 이수현이 깨트렸다.
꼭 무공이 강하고 마력이 높아야만 이기는 게 아니다.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이기면 장땡이다.
이겨서 살아남는 자가 더 강한 거다.
“하하하! 그 천하의 천마가 미사일 한 방에 격침되다니. 천마도 별것 없군!”
류이창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마를 불사신이라 여겼다.
무슨 짓을 해도 피 한 방울 안 흘리는 무적의 초인.
그런데 저 꼴을 보라.
한국에서 온 기계 천마 앞에 꼼짝을 못 하지 않는가.
“이게 사이버 펑크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슈웅-!
이수현은 그렇게 중얼대며 미사일을 한 발 더 쐈다.
비척대며 겨우 일어난 중국산 천마가 기겁하며 미사일로부터 거릴 벌렸다.
샥!
피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K-천마의 미사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미안한데 그거 유도탄이거든.”
“…뭐, 뭣!”
콰아아앙-!
천마는 등짝에 두 번째 미사일을 맞았다. 그는 피를 왈칵 토하며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달빛으로 강화된 천마의 신체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는 빈사 상태에 빠져 이따금 꿈틀댔다.
“…커흑! 쿨럭!”
천마는 자신이 패했다는 걸 믿지 못했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저딴 고철 덩어리에 내가 당했다니.
그는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쿵! 쿠웅!
지하 연무장의 뚫린 천장에서 몇몇 사람이 내려왔다. 총 다섯 명이었다.
‘천마의 부하들인가?’
이수현은 쓰러진 천마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들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마치 시체처럼 피부가 창백했다.
이마에는 붉은 부적이 한 장씩 붙어 있었고.
그들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기계처럼 이수현 쪽을 바라봤다.
‘이마에 부적? 강시인가?’
이수현의 의문은 류이창의 설명이 깔끔하게 해소해 줬다.
“혀, 혈강시입니다! 천마에게 도전했다 패한 당대의 고수들이죠. 세상에, 빙마제, 혈왕, 뇌제에 검왕과 무림맹주까지…….”
하긴. 무협지에서나 나오던 천마도 버젓이 있는데, 강시라고 없으리란 법은 없지.
저들 전부가 중원을 호령했던 자들이다. 천마에게 패해 움직이는 인형으로 변했지만.
“해, 해치워! 저 고철 안에 든 인간을 죽여라!”
천마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혈강시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강시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아직 6발 남았다.”
이수현은 그렇게 말하며 유도 미사일을 전탄 발사했다.
그 잘난 혈강시도 미사일 한 방에 격추당했다.
“말도 안 돼…….”
천마는 비통한 얼굴로 고갤 떨궜다.
실낱같던 숨이 끊어졌다. 이수현은 K-천마에서 내렸다.
짝짝!
관중석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천마를 잡을 줄이야. 너 마음에 쏙 들었어.”
“그쪽도 슬슬 정체를 밝히시지? 너 몬스터잖아.”
“어머, 언제부터 알았니?”
이수현의 말에 달기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도 흔들림이 없다니. 이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이수현을 갖고 싶어졌다.
달기는 자신의 옷자락을 슬쩍 내리며 그를 유혹했다.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홀릴 자신이.
“어때, 누나랑 영생을 누려 볼 생각 없니? 영원한 젊음, 내가 이뤄 줄 수 있어.”
“야, 창 피해.”
“어머, 창피하다고? 의외로 쑥맥 같은 면이 있네. 그런 점도 귀여워.”
이수현은 아공간에서 화염 군주의 창을 소환했다.
쌔앵-!
그러곤 힘껏 던지며 말했다.
“아니, 창 피하라고.”
남자에게 살의가 담긴 공격을 받다니… 처음이었다.
터엉-!
달기의 얼굴로 날아든 창이 뭔가에 가로막혔다. 그녀의 등 뒤로 뭔가가 꼬물거렸다.
아홉 개의 꼬리. 그건 황금색 털을 지닌 여우 꼬리였다.
“다짜고짜 죽이려 들다니. 성질이 너무 급하네. 아직 어려서 혈기 왕성하구나?”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천마가 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대륙에 존재했던 요물, 구미호.
류이창은 벌벌 떨며 주저앉았다.
‘저, 정말로 요물이었어!’
몇백 년은 기본이고 천 년 넘게 살아온 짐승. 그런 존재를 영물이라 부른다.
영물이 사람을 해치면 요물이 되고.
그런 짐승들은 중국뿐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세상 곳곳에 존재해 왔다. 강대한 존재는 신화로 기록되어 전해지기도 했고.
그러한 관점에서 구미호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유명한 영물이자 요물이었다.
“사람 정기를 먹어 치우고, 수백 년 넘게 살았으면 이제 좀 죽어야지. 안 그래?”
이수현의 말에 달기가 히죽 웃었다.
그녀가 수백 년이나 젊음을 유지한 채 살아올 수 있던 비결.
그건 그녀가 사람들의 정기를 뽑아 먹었기 때문이다.
천마는 그걸 중국 전설에서나 나오는 흡성신공이라 여겼지만,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갖고 태어난 능력일 뿐.
이계에서도 흑마법으로 사람의 생명력을 갈취해 수명을 연장하는 놈들이 판을 친다.
“류이창이 네 비밀을 말해 줬거든. 일정 주기마다 젊은 여자들을 제물로 받는다면서?”
“어머머. 제물이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난 내 시중을 들어줄 아이들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오지?”
이수현은 마검을 쥐고서 그녀에게 겨눴다.
매달 수십 명이나 차출해 시녀로 들였다면, 이 원향루는 진즉에 미어터졌을 거다.
그런데 이 건물에 여성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즉, 모종의 이유로 제거됐다고 봐야 한다.
“지금까지 사람을 얼마나 죽였어?”
“너는 지금껏 식사를 몇 번이나 했는지 일일이 다 기억하니?”
그녀의 대답에 이수현은 눈을 찌푸렸다.
달기에게 사람 목숨은 그저 먹을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을 우습게 보는 영물이라니. 몬스터보다 더한 존재다.
“중국에선 저런 괴물을 여신으로 떠받들었단 말이지? 류이창, 정신 나갔냐?”
“…며, 면목이 없습니다.”
류이창은 이수현의 질책에 고갤 떨궜다. 그도 어렴풋이 알았다.
저 여자가 인간이 아님을.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천마와 중국을 쥐고 흔든 여자인데.
“예쁘면 다 용서된다. 뭐 그딴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난 너랑 싸우기 싫은데. 난 강한 남자를 좋아하거든.”
달기는 여전히 호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수현이 정말로 마음에 든 모양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네가 천마를 죽일 줄 몰랐었어. 싸움이 시작되고선 반반이었지. 누가 이길지 전혀 모르겠더라고?”
달기는 거기서 미사일이 튀어나올 줄 상상도 못 했다.
그 위력은 가히 신공에 비견될 만했다.
끔찍한 살상력으로 중원에서 사용이 금지된 벽력탄도 그것에 비하면 장난감 수준이었다.
“그리고 너, 천마랑 싸울 때도 최선을 다 안 했지? 뭔가 여력을 남겨 두려던 것 같은데. 설마 나랑 싸우려고 그런 거야?”
“짐승치곤 눈치가 제법이네.”
그녀의 지적에 류이창이 더 놀랐다.
천마와 이수현의 전투는 누가 보더라도 막상막하, 치열한 혈투였다.
이수현은 천마의 혈마수라공에 몇 번이나 피를 토했었다.
그런데 그 싸움이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니.
“그리고 토끼 하나 잡는데 굳이 전력을 다할 필요가 있어?”
“정말 멋진 대답이야. 너 점점 더 마음에 들어.”
타앗.
달기는 관중석에서 사뿐히 뛰어내렸다. 수십 미터 높이였지만 그 정도는 구미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다.
툭.
그녀는 꼬리로 붙잡은 창을 던져서 돌려줬다.
“천마가 죽었으니 세상에는 새로운 황제가 필요해. 나와 손을 잡지 않을래?”
이수현은 대답 대신 거릴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는 높이 도약해 공중제비를 돌았다.
샥! 샤악!
이수현이 뒤쫓아 가며 검을 휘둘렀지만, 그녀는 사뿐사뿐 스텝을 밟으며 뒤로 피한다.
‘이 움직임은…….’
천마가 미사일로 처맞기 직전에 사용했던 보법이다.
그걸 달기가 능숙하게 사용한 것이다. 그녀의 몸놀림에 류이창이 깜짝 놀랐다.
미인계로 천마를 홀린 요녀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수현의 공격을 전부 피하다니.
“그 젊음이 언제까지 유지될 것 같아? 끽해 봤자 오십 년이야.”
“늙어 죽는 게 뭐 이상하다고. 다들 그러잖아.”
“천마도 처음에는 너처럼 부정적이었지. 하지만 늙어 가는 네 모습을 보면서도 당당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몰라. 그래도 다른 사람 고혈 빨아먹으며 더 오래 살고 싶진 않아.”
터엉.
천마를 때렸을 때와 같은 소리가 울렸다. 달기는 당연하단 듯이 금강불괴의 경지를 선보였다.
그녀에게 도검이 안 먹힌다.
류이창이 침을 꼴깍 삼켰다. 천마를 죽였으니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한 괴물이 튀어나왔다.
그가 보기엔 천마보다 그녀의 무공이 한 수 위였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저 여자는 천마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살아온 요괴인데.
그녀도 오랜 세월 동안 놀고먹기만 한 게 아니었다.
‘이수현 헌터 혼자서 괜찮을까?’
그는 충분한 휴식도 없이 천마와 연이은 격전을 벌였다.
류이창도 헌터 출신이기에 느껴졌다. 이수현은 지금 상당히 지쳐 있다.
아까 전 싸움에서 마력을 상당히 소모했고, 천마의 마공에 내상을 입었으니까.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내상을 추스르지 못해 거동이 불편할 거다.
‘상황이 너무 불리해.’
휙! 휘릭!
그녀는 사뿐사뿐 보법을 밟았다.
그러면서 이수현과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마치 그와 춤을 추길 원하는 사람처럼.
서걱! 사락.
달기의 옷자락이 조금씩 잘렸다. 이수현이 그녀를 몰아세운 게 아니다.
그녀는 일부러 옷이 찢어지게 놔뒀다.
‘이제 못 참겠지? 인간의 정신력에도 한계가 있어.’
구미호는 사람을 매혹해 정기를 취하는 요물.
그녀의 살결이 점차 드러나자 내기가 그윽하게 발산된다. 남자라면 참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수백 살 차이 나는 사람한테 껄떡대면 요즘 세상에선 범죄야, 이 아줌마야.”
하지만 이수현에겐 효과가 없었다.
온갖 저주를 막아 주는 용석 덕분이었다.
그녀는 매혹 능력이 안 먹히자 입을 꾹 다물었다. 자존심이 팍 상했으리라.
지금껏 그녀에게 넘어오지 않은 남자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어쩔 수 없지. 완전히 이지를 제압한 다음 나만 바라보도록 만들어 줄게. 저 인형처럼.”
휘릭.
달기는 높이 도약해 거릴 쭉 벌렸다.
그녀가 천마의 시체 옆에 안착하자 이수현은 의아하게 바라봤다.
푹!
달기는 시체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가벼운 터치가 아니라 살점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거기서 천마의 심장이 뽑혀 나왔다.
우적.
그녀는 그걸 한입에 삼켜 씹었다.
입술은 물론이고 주변에 피가 잔뜩 묻었지만, 그 모습마저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다만 괴물이나 할 법한 행동이기에 류이창은 평소와 달리 기겁했다.
‘시, 심장을 뽑아 먹었어?’
이수현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분석 능력에 새로운 정보가 표시됐다.
천마의 심장을 먹은 구미호가 마력이 증진됐다고. 저런 능력도 있을 줄이야.
‘그럼 다른 강시들도…….’
이수현은 상대가 강해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타입은 아니다.
아깐 저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지만, 알게 된 이상 가만히 놔둘 순 없다.
그는 미사일 폭격에 당한 강시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러자 달기가 입술을 싹 핥으며 말했다.
“걔들은 심장이 없어.”
“뭐?”
“강시를 만들 때 주요 장기는 미리 끄집어내거든. 어차피 시체라 필요 없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개처럼 꼬릴 살랑거렸다.
이수현은 그 말에 안심했다.
강시에게 심장이 없다면 저기서 더 강해질 일도 없다는 뜻이니까.
달기는 그의 표정을 읽고 귀엽단 말투로 얘기했다.
“쟤들 심장은 내가 예전에 다 먹어 치웠어. 맛있더라.”
“…뭐?”
파지직. 쩌적.
그녀의 몸에서 갖가지 내력이 흘러나왔다. 천마조차도 다른 속성의 내력들을 동시에 다루지 못했는데.
달기는 상극의 기운도 동시다발적으로 다뤘다. 이수현처럼 아주 능수능란했다.
“난 무인의 심장을 먹으면 그들이 쌓아 온 내력을 고스란히 다룰 수 있어. 이렇게.”
달기는 혈마수라공의 비기, 혈마옥을 허공에 생성했다. 그것도 무려 수십 개나. 그야말로 기공술의 극치였다.
콰앙! 콰아앙!
핏빛의 구체들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이수현은 그것들을 피하면서 거릴 좁혔다. 그러자 달기가 이죽대듯 말했다.
“가까이 접근한다고 뭐 달라질 것 같니?”
쩌저적!
이번엔 냉기가 휘몰아쳤다. 그녀는 북해빙궁의 주인, 빙마제의 내력으로 한빙장을 펼쳤다.
“너만 에어컨 있냐? 나도 있어, 새끼야!”
이수현도 똑같은 냉기의 힘으로 되받아쳤다. 그 힘은 거의 호각이었다.
달기의 눈에 잠깐 이채가 서렸다.
‘빙공만 백 년 가까이 단련해 온 빙마제의 내력과 견줄 정도라니…….’
그녀는 순간 욕망이 일었다.
저 남자의 심장을 먹어 치운다면 자신은 여기서 얼마나 더 강해질까.
그에겐 어째선지 유혹술도 안 먹히고, 이지를 상실시켜 꼭두각시로 만든들 생전보다 훨씬 약해진다.
‘차라리 그럴 바엔…….’
그의 심장을 취하자.
그래. 그의 힘만 내 것으로 만든다면, 날 지켜 줄 황제도 더는 필요 없어지겠지.
내가 이 세상을 지배할 새로운 황제가 되겠다.
그녀는 그렇게 마음먹고, 모든 종류의 내기를 끌어올렸다.
각양각색의 내력들이 무지개처럼 그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필살기인가?’
이수현은 그녀가 기공술로 기탄을 날리려 한다는 걸 알았다.
저건 좀 위험하다. 맞으면 싸움의 판도가 뒤집힐 정도로.
그는 손을 뻗으며 그녀에게 명령했다.
“앉아.”
“…어?”
털썩.
달기는 개처럼 쭈그리고 앉았다.
그 탓에 집중력이 흐트러져, 기껏 모았던 기탄도 허공에 흩날렸다.
그녀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당황했다.
‘타인의 행동을 강제하는 주술이라고? 말도 안 돼!’
달기의 유혹술로도 이런 위력은 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걸 저 인간이 해냈다고? 고작 말 한마디로?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녀는 자신의 몸을 옥죄던 기운을 떨쳐냈다.
“이까짓 거……!”
“착하지. 얌전히 있어!”
이수현의 명령에 또 그녀의 몸이 잠깐이지만 멈췄다.
그 짧은 빈틈도 고수들의 싸움에선 승패를 결정짓기 마련이다.
뻐엉!
이수현은 일어나려던 그녀의 얼굴에 드롭킥을 날렸다.
그녀가 천마보다 더한 금강불괴라 도검이 아예 안 먹힌다면.
‘타격기로 패 주마.’
그녀의 고유 주파수에 맞춰 진동의 힘을 실었다. 그러자 달기는 처음으로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리 피부가 단단해도 내부를 뒤흔들면 쉽게 무너진다. 그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꺄아아악!”
쿠당탕!
그녀는 축구공처럼 수십 미터를 구르다 벽에 처박혔다.
벌떡 일어났지만, 이미 이수현이 그녀에게 접근한 상태였다.
퍼버버버벅!
이수현은 천하의 절세 미녀에게 자비 없이 연타를 날렸다. 주먹질 하나하나에 진동을 실어서.
‘이, 이 권법은 천마의……!’
달기는 얻어맞으면서 경악했다.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그의 주먹질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이건 틀림없는 천마신권이었다.
이수현은 천마와의 전투 한 번으로 상대의 무공을 익힌 것이다.
비록 그는 내공은 없지만, 강대한 마력과 강체술로 그걸 충당했다.
‘격투 게임에서도 그랬어. 맞으면서 배워야 실력도 빨리 늘어난다고.’
천마신권이 끝이 아니었다.
이수현은 천마가 다뤘던 고수들의 모든 동작과 무공술을 흉내 냈다. 아니, 완벽히 구현했다.
이수현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마력에 당대 고수들이 보완해 온 무술이 합쳐졌다.
그러자 흉악한 마공으로 재탄생했다.
콰직! 퍼억! 퍽! 빠악-!
달기가 벗어나려고 하면 정의의 철권이 날아든다. 그녀는 속수무책이었다.
“…케흑! 켕!”
여우는 벽에 처박혀서 피떡이 될 때까지 맞았다.
벽이 충격을 더 견디지 못하고 박살 나자 그의 연타가 잠시 끊겼다.
달기는 의식이 몽롱해진 와중에 살고 싶어서 끌어모은 내력을 폭발시켰다.
이수현이 문워크를 하듯 뒤로 거릴 벌렸다.
“주, 죽여 버릴 거야… 죽일 거야!”
“화가 단단히 났네.”
그녀의 얼굴이 심하게 멍들고 부르텄다. 거기에 표정까지 분노로 일그러지자 보기 흉했다.
“아우우우우!”
그녀는 여우의 울음소리를 내며 본모습을 드러냈다.
구미호는 미녀의 형상을 버리고 몸이 점차 비대해졌다.
꼬리 아홉 달린 황금의 여우. 그 괴물이 핏발 선 눈으로 이수현을 노려봤다.
[죽여 주마!]“어허,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앉아.”
[…켕? 어, 어떻게!]이수현의 말 한마디에 구미호의 뒷다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착.
그녀는 마치 개처럼 얌전히 앉았다. 이수현은 주먹을 매만지며 그녀에게 말했다.
“사람 해치고 다니니까 즐거웠지? 어디 너도 한번 죽어 봐.”
달기는 당황했다. 본모습으로 현신했는데도 상대가 안 됐으니까.
아니. 그녀는 이수현과 제대로 싸운 것도 아니었다.
“엎드려.”
[켕!]그의 말 한마디에 그녀는 배를 깔고 바짝 엎드렸다.
‘이, 이게 대체……!’
둔갑술을 풀었으니 자신의 마력도 폭발적으로 늘었을 터.
그런데 속박하는 힘이 아까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이수현의 능력이 뭔지 몰랐다.
단순하게 상대의 행동을 억제하는 마법이나 사술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게 그녀의 패착이었다.
‘여우도 개과 동물이지.’
천 년 묵은 구미호도 결국엔 여우다.
이수현은 체셔를 길들였던 반려동물 자격증으로 그녀를 압박했다.
그는 체셔와 복덩이에게 꾸준히 훈련을 시키며 스킬 숙련도를 쌓아 뒀다.
잘 익혀 두면 야수형 몬스터한테 효과적일 것 같아서였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구미호가 그의 명령에 꼼짝도 못 했다.
‘마력만 놓고 본다면 이 녀석도 군주랑 비슷한 정도인데. 쉽네.’
아까는 그녀가 인간의 모습이라서 효력이 반감됐지만, 구미호로 변한 지금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손.”
착.
앞발을 휘둘러 공격하려던 달기가 명령을 듣고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뭔가 뿌듯한 마음이 들어서 웃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수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퍼억!
그가 구미호의 턱을 힘껏 걷어찼다.
[케엥!]쿠웅!
구미호는 커다란 몸집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쓰러졌다.
달기는 피를 캑캑대며 머릴 세차게 흔들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래. 놈이 사술을 쓴다면 나도 쓰면 그만이지.
지잉!
그녀의 눈동자가 사이한 보랏빛으로 변했다.
[나, 날 봐라!]그녀는 숨겨 둔 비기를 사용했다.
구미호의 특기는 사람을 홀리는 것.
이런 괴물 모습으로는 미인계도 쓸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써야만 했다.
환술. 달기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주술이었다.
“아…….”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던 류이창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눈동자가 풀렸다.
이수현은 바로 코앞에서 그녀의 눈을 바라봤을 터.
‘인간의 정신력으론 버티지 못할걸!’
자신만만하게 미소 짓던 달기의 얼굴에 이수현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빠악!
코를 힘껏 때리자 구미호는 깨갱 소릴 내며 엎어졌다.
[어, 어떻게……!]아예 안 먹힌다니.
자길 퇴치하러 찾아왔던 고수들도 꼼짝없이 걸렸던 기술인데. 이런 경우는 천 년을 살면서 처음이었다.
“빵.”
이수현은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구미호는 배를 까고 발라당 누웠다. 급소가 훤히 드러났다.
콰직!
이수현은 구미호의 가슴을 마검으로 정확히 찔렀다.
[캬아아악!]구미호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꼬리를 늘리기 위해 수행 대신 사람을 잡아먹고, 끝내 요물로 변한 달기.
그녀는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우웅!
구미호의 영혼이 마검으로 빨려 들어왔다. 이수현의 눈동자가 순간 보랏빛으로 변했다가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아까 구미호가 썼던 권능을 흡수했군요.」
“눈동자 보라색으로 변한 거?”
이수현은 저주 면역이라 그녀의 환술에 당하지 않았지만, 류이창은 아니었다.
그는 멍하니 선 채로 침을 질질 흘려댔다.
“야, 류이창.”
“…….”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2급 헌터 출신이 이리 쉽게 제압되다니.
용석이 없었으면 위험할 뻔했어. 이수현은 류이창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짜악! 짝!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길래 뺨도 몇 대 갈겼다.
“…어, 어? 이, 이수현 헌터?”
“이제 정신이 들어?”
“헉!”
정신을 차리니 구미호는 이미 죽어 있다. 류이창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중얼댔다.
“…꿈은 아니겠죠?”
수백 년 넘게 중국의 황제로 군림해 온 천마.
그런 그를 뒤에서 조종한 천 년 묵은 요괴까지 이수현 혼자 처리했다.
류이창은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졌다. 전부 그가 바라던 대로 됐다.
‘이제 내 세상이다!’
물론 형식적으로나마 이수현한테 허릴 굽혀야겠지만.
그에겐 다음 계획도 있었다.
이수현과 말을 맞춰 자신의 위상을 드높인다.
당장 다른 사람으로 협회장을 바꿔야 한다는 중국 내 여론도 이수현이 한마디만 해 주면 뒤집힐 거다.
류이창은 자기 목숨을 걸고, 중국의 적폐 세력을 몰아내는 데 일조했다.
이수현은 그의 의협심에 감탄해 대의를 함께해 주었다.
진실과 내막은 세상 사람들에게 중요치 않다. 결과와 포장만 예쁘면 그만이다.
‘그러면 난 협회장직에서 안 내려와도 돼. 늙어 죽을 때까지 보장되겠지.’
류이창은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서 이수현한테 말했다.
“저, 이수현 헌터. 중국을 저 요물로부터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됐어. 그보다 넌 어쩔 거야. 협회장 자리에서 은퇴할 거냐?”
“아뇨. 그럴 순 없죠. 중국 협회가 이수현 헌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려면 제가 남아야만 합니다.”
“그게 되겠어? 너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졌잖아.”
이수현이 그렇게 말하자 류이창은 표정 관리를 했다.
따지고 보면 전부 이수현의 갑질로 벌어진 일 아닌가?
그가 자길 업신여기지만 않았어도 여론이 등 돌릴 일은 없었다.
공개적으로 망신살을 뻗친 것도 모자라 중국 협회를 대표해 정중히 사과한다니.
당으로부터 암살을 당해도 이상치 않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이수현 헌터가 절 조금 도와주시면…….”
“어떻게?”
이수현은 정말 궁금했는지 여기서 말해 보라고 했다.
류이창은 자기가 짜둔 계획을 술술 뱉었다. 이수현은 잠자코 듣다가 한마디했다.
“그러니까, 혼자 살고 싶어서 발버둥 친 걸 나라와 국민을 독재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이 한목숨 다 바쳐 투쟁했다. 그런 식으로 사기를 치겠다는 거네?”
“크흠. 뭐, 그런 셈이죠. 어차피 오늘 사건의 진실은 저와 이수현 헌터만 알지 않습니까? 저희끼리 말을 맞추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이수현은 고갤 끄덕였다.
류이창의 대국민 사기극이 통한다면 적어도 실각은 당하지 않을 터.
어쩌면 이수현처럼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의 위치는 견고해질 거고, 중국 협회도 이수현한테 협조적으로 나오겠지.
“비능력자들이야 어차피 저희가 먹여 살리는 가축입니다. 아니, 개돼지만도 못하죠.”
류이창은 이수현이 당연히 자기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 부하 직원들한테 습관적으로 내뱉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 말에 이수현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럼 내 부모님도 개돼지냐? 너 돌았어?”
“아,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용을 낳은 분들이 어찌 개돼지겠습니까? 제 말은 능력자와 어떤 연관도 없는 사람들이…….”
“변명은 됐어. 추하다.”
류이창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급히 정정했다. 사람 습관이란 게 참으로 무서웠다.
‘후, 입이 방정이지. 일이 너무 잘 풀려서 나도 모르게 실수했군.’
이수현은 영 마음에 안 든단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류이창은 가슴이 뜨끔했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너도 날 쉽게 내치진 못할걸?’
그가 죽인 강시들은 중국의 역사서에도 기록된 위인들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본다면 이수현은 천하의 몹쓸 놈으로 보일 터.
이수현이 굳이 중국 전체를 적으로 돌릴 이유가 없다. 그런다고 해서 뭘 얻는 것도 아니고.
류이창의 추론은 지극히 계산적이고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상대가 이수현이었다는 점이다.
“어디 보자. 후원금이 얼마나 들어왔으려나…….”
“……?”
이수현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후원금이라는 말에 류이창은 고갤 갸웃거렸다.
‘후원금이라고? 무슨 후원을 말하는 거지?’
“이야, 확실히 대륙이 크긴 해. 시청자가 벌써 백만이 넘었네?”
“…시청자?”
시청자라는 말에 류이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이수현의 스마트폰을 쳐다봤다.
인터넷 방송 화면과 빠르게 올라오는 채팅들.
‘…너튜브?’
이수현은 인터넷 방송을 켠 상태였다. 류이창은 식은땀을 흘렸다.
대체 언제부터? 설마 그와 나눴던 대화까지 전부 송출된 건가?
불길한 예감은 항상 빗나가지 않았다.
류이창은 빠르게 올라오는 채팅창에 중국어로 적힌 욕설을 보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무슨 짓이냐니?”
“어, 언제부터 방송하셨습니까?”
“천마랑 싸울 때부터 켰는데. 왜?”
‘스마트 워치! 저걸로 방송을 켰구나!’
이수현의 스마트 워치가 반짝거렸다.
언제 방송을 켰나 했더니, 저게 있었구나. 버튼 한 번만 눌러도 중계되도록 세팅을 해 뒀으니까.
정신이 없어서 미처 회수를 못 했는데, 그게 류이창의 발목을 잡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러면 자신은 끝장이다.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공개된 셈이니까.
중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사기를 치려던 것까지 제 입으로 털어놨다.
‘이 자식, 처음부터 날 버릴 속셈이었구나!’
류이창의 살기 어린 표정에 이수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뭐가 문제냐고 했다.
“난 정의를 실현한 것뿐이야. 천마와 달기. 그 괴물들은 영생을 누리고자, 죄 없는 중국인들을 죽이고 생명력을 갈취했지. 너도 거기에 일조했고. 안 그래?”
“이, 이이……!”
맞는 말이라서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딱 하나 틀린 게 있다면…….
이수현은 정의를 위해 나선 게 아니었다.
그는 류이창과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손을 잡은 것일 뿐. 순수한 마음으로 중국을 돕고자 한 게 아니었다.
류이창은 발악하듯 그 점을 물어뜯었다.
“사기 치지 마라! 네놈도 내 제안에 혹했잖아! 나와 중국 협회의 원조를 바랐기에 싸웠겠지. 뻔뻔한 놈!”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제발 살려 달라고 빌 땐 언제고, 갑자기 날 쓰레기로 몰아가네?”
“바, 발뺌하지 마라!”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류이창이 악당이었다.
실수였다고는 해도 류이창은 자신의 계획을 만천하에 떠벌렸다.
반면에 이수현은 자기 속내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이수현은 중국을 좀먹던 쓰레기를 치운 영웅이 됐다. 류이창은 그런 영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던 빌런일 뿐.
빌런의 최후는 당연하게도 몰락이었다.
* * *
이수현의 생방송 한 번으로 류이창은 감옥에 끌려갔다.
그가 지닌 권력도 국민의 분노 앞에선 아무 의미 없었다.
뒤를 봐주던 천마마저 죽었으니 류이창은 평생 그곳에 갇혀 살겠지.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영웅이시여.”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지 스님.”
“이수현 헌터님께선 사악한 수괴로부터 중국을 구해 주셨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리 모실 수 있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7팀은 중국 허난성에 위치한 소림사를 방문했다.
이수현은 소림의 헌터들에게 과분할 정도로 환영받았다.
이들 역시 천마와 달기의 존재를 알았지만, 멸문이 두려웠기에 꾹 참고 살았었다.
실제로 소림사는 백여 년 전, 천마에게 정면으로 대항했었다.
마력을 각성한 무술가들이 늘어났고, 천마는 누가 보더라도 악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천마마저 헌터로 각성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소림은 멸문 직전까지 내몰렸고, 끝내 항복했다.
“천마에 이어 그 달기마저 퇴치하시다니… 정녕 저희와 같은 사람인지 의심될 정도입니다. 허허.”
“부처님께서 보살펴 준 덕분이죠.”
이수현은 겸양을 떨었다.
소림의 훈련장에선 승려들이 아침 훈련을 하던 중이었다.
이수현이 지나가자 그들은 존경 어린 시선을 보냈다.
천마와 달기를 홀로 죽인 이수현은 그들에게 있어 무신 그 자체였다.
“그런데 저희 소림사의 교육 훈련을 받고 싶다 하셨습니까?”
“네. 저는 무술 코스랑 금강불괴, 한 명은 봉술을 배우려고요.”
“허허, 관광객들을 위해 마련한 교육 코스인데, 그리도 배우고 싶어 하시다니. 제가 다 뿌듯하군요.”
주지 스님의 질문에 이수현이 서민아를 바라보며 답했다.
돌원숭이가 휘두르던 바위 군주의 신물. 이수현은 그걸 서민아에게 선물로 줬다.
그걸 그녀에게 준 이유는 단순했다.
그 무거운 봉을 다룰 만한 사람이 그녀 말고는 없었으니까.
“이수현 헌터님, 무술을 익히는 건 꽤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지 스님은 조금 걱정이 됐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가르친들 얼마나 가르치겠는가.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오늘 안에 속성으로 끝내죠. 연습이야 한국에서 해도 되는 거니까.”
“예?”
“교육 코스 통과하면 소림에서 자격증 주는 거 맞죠?”
“예, 소림의 사찰마다 시험을 통과하면 이수 증명서와 무술증을 발급해 줍니다. 다만 하루 만에 소림의 무술을 다 배울 만큼 녹록지 않을 겁니다.”
“괜찮아요. 제가 배우는 게 좀 빠르거든요.”
* * *
류이창이 끌려가고 중국 협회장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그 빈 자리를 누가 맡을 것인가. 협회 내에서 며칠 내내 의견이 오갔다.
그리하여 최종 후보는 둘로 좁혀졌다. 그 중 큰 지지를 얻은 건 리천이었다.
리천은 임시 협회장 직을 수락하고서 바로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이수현 일행이 머무르는 소림사였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주지 스님.”
“허허, 연락받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오시다뇨. 어지간히도 서두르셨군요.”
“그 사악한 악마를 토벌해 준 이 대협을 직접 만나 뵙고 싶어서 한걸음에 달려왔죠.”
“협회장직에 오르신 걸 축하드립니다, 리 소협.”
“아직은 임시 협회장입니다.”
리천은 마중 나온 소림사의 주지 스님에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그 절도 있는 동작과 일정한 리듬의 발걸음은 일반인이 아닌 옛 무림의 고수를 연상시켰다.
실제로 리천은 무림맹주의 후손이었다. 천마와 그의 하수인 류이창에게 반목했던 세력의 중심인물.
그랬기에 새로운 협회장 후보 1순위로 거론됐다.
새로 뽑은 협회장이 류이창 같은 사람이면 또 아픈 역사가 반복될지 모르니까.
“이 대협께선?”
“사찰에서 명상 중입니다.”
리천은 작게 감탄했다. 이른 아침부터 명상이라니. 자기 관리가 철저하시군.
리천이 이수현을 직접 만나러 온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천마로부터 중국을 구해 준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
‘그분의 무(武)를 몸소 느껴보고 싶다.’
다른 하나는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대련해 보고 싶었다.
천마를 마무리 지은 건 현대의 미사일이었지만, 리천은 그 이전의 싸움에서 느꼈다.
이수현의 움직임은 무술과 거리가 먼 초짜였음에도 천마와 호각을 이뤘다.
“이 대협께서 무술을 익히러 소림에 왔다 들었습니다.”
“그렇죠. 배우는 게 빨라 정말 놀랍더군요. 사람이 아닌 듯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어느 정도길래 주지 스님이 저토록 놀랐을까. 리천은 궁금해서 자세히 물어봤다.
그러자 주지 스님이 허허 웃으며 이수현의 성과를 보고했다.
“소림 72예는 물론이고 온갖 무기술까지 다 섭렵했습니다. 단 하루 만에.”
“…예?”
“지금은 금강불괴를 익히고자 정신 수양을 하고 계십니다.”
리천은 순간 주지 스님이 장난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하긴. 소림의 방장이 소림사의 유구한 전통을 두고서 장난칠 리 없다.
‘그럼 정말로 72개의 전통 무술을 다 익혔다고? 그것도 하루 만에?’
그게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인가?
리천은 순간 의심했다.
혹시 소림에선 영웅 이수현의 체면을 세워 주고자 기초만 설렁설렁 가르친 게 아닐까.
“저흰 모든 걸 가르쳤습니다. 평가도 어느 때보다 꼼꼼하게 했지요.”
“…솔직히 믿을 수가 없군요.”
“이해합니다. 직접 본 저희도 믿기지 않았으니까요.”
주지 스님은 잠시 망설이다 사실대로 말했다.
“…실은 그분께서 배우는 방식이 워낙 해괴하여 처음엔 저희 소림을 깔보는 줄 알았습니다.”
“예?”
“그래서 저희도 소림의 명예를 지키고자 전력을 다했지요.”
주지 스님은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 * *
“…그러니까, 소림 무술의 모든 동작을 보여 달라고요?”
“예. 시범을 보여 주시면 제가 따라 하겠습니다.”
이수현에게 무술을 가르치러 온 사찰의 수도승들이 당황했다.
그의 요구가 황당했기 때문이다.
수도승 대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수현 헌터님, 무술은 동작만 따라 한다고 대번에 익혀지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요?”
“각각의 초식과 자세에 녹아든 무의 원리와 정수를 체득하는 것이 바로 무술입니다.”
무술의 초식과 동작을 하나하나 숙달하도록 가르치는 게 소림사의 기본 방침인데.
이수현은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 달라고만 했다.
“그리고 소림의 전통 무술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저희도 10년이 넘도록 익혔지만, 무술의 정수를 체득하지 못했습니다.”
무술의 동작은 결국 교본 같은 것이다. 누구든 기본기로 참고할 순 있지만 그게 완벽한 건 아니다.
사람마다 성향과 체질이 다른 것처럼, 똑같은 무술이라도 연마하다 보면 개인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니 저희의 것을 그대로 따라한들…….”
“치수가 다른 옷을 입는 것처럼 불편하거나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예, 바로 그겁니다. 그러니 이수현 헌터님께서 한 동작씩 익히며 자신에게 맞도록 재탄생 시켜야 합니다. 느리고 힘들겠지만 그게 무를 갈고닦는다는 것이죠.”
이수현이 하루 만에 소림 무술을 다 익히겠다고 말했을 때, 소림의 수도승들은 그가 무술이 뭔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혈기와 의욕만 너무 앞서는 헌터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배우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제가 좀 바빠서요. 여러분들이 시범만 쭉 보여 주세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의 막무가내식 요구에 수도승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 싫었지만 거절할 순 없었다.
주지 스님께서 자신들에게 엄명을 내렸으니까.
이수현이 어떤 요구를 하든 무조건 들어주라고.
그는 천마를 죽이고 중원에 평화를 되찾아준 영웅 아닌가?
‘소림사뿐만 아니라 무술 자체를 낮잡아 보고 있는 건가?’
다만 이들은 수도승 이전에 무술가다.
무술을 얕잡아 보는 사람에겐 반감이 들 수밖에.
물론 이수현의 자신만만한 태도도 이해는 간다.
천하제일의 무술가, 천마마저 그의 적수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처우를 납득할 순 없었다.
“잘 들어라. 이대로 소림의 무술이 무시당하도록 둘 순 없다.”
“대형, 어쩌시려고요?”
“지금까지 익혀 온 소림의 무술을 전력으로 펼친다. 그를 배려한답시고 속도를 늦추지 마라.”
“예? 그랬다간…….”
수도승들은 대형의 말에 곤혹을 표했다.
초보자 배려도 없이 무술을 펼치라니. 그랬다간 교육은커녕 힘자랑밖에 더 되겠는가.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도 직접 보면 이해하겠지. 무술이 얼마나 오묘하면서도 어려운 것인지를.”
시범을 보여 주고자 수도승들이 이수현 앞에 섰다.
그들은 우렁찬 기합과 함께 소림의 비기를 펼쳤다. 이수현은 말없이 쳐다봤다.
수도승들의 대표는 그의 반응에 속으로 만족했다.
‘당황해서 말도 안 나오는 모양이군.’
72가지 무술 중 하나가 끝났다.
하나의 무술에도 수십 가지의 형과 초식이 있기에 쉽지 않을 터.
아니, 한 번 봐선 동작 하나를 따라 하는 것도 어려울 터였다.
‘그게 되면 인간이 아니라 무술의 신이지.’
“어떠십니까?”
“음. 잘 봤습니다. 그런데 72가지 무술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런가 전부 하나의 무술이었던 것 같은데…….”
“역시 눈썰미가 대단하시군요. 맞습니다. 일단은 맛보기로 백보신권 하나만 펼쳤습니다.”
백보신권은 소림의 유명한 무술 중 하나였다.
높은 경지에 이르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적이라도 타격할 수 있다.
이수현은 멀리 있는 걸 때릴 수 있다는 말에 흥미를 보였다.
“보여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직 제 실력이 부족해, 단단한 물체를 깨트리진 못합니다만. 움직이는 것 정도라면…….”
대형은 이수현의 반응에 우쭐해졌다. 그가 무술의 대단함을 인정해 준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는 조금 떨어진 바위를 향해 백보신권의 비기를 펼쳤다.
드르륵.
그러자 신기하게도 조그만 바위가 움직였다.
대형이 땀을 닦으며 어떻냐고 물어봤다.
“오! 신기하네요. 마치 마법 같아요.”
“하하, 만류귀종이라고 하죠. 모든 흐름은 극에 이르면 하나로 통일됩니다. 무술도 마법도 마찬가지겠죠.”
“저도 해 볼게요.”
이수현은 몸을 풀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수도승들이 눈을 끔뻑였다. 자기가 해 보겠다니.
방금 보여 준 백보신권의 비기를?
대형은 아직도 그가 무술의 위대함을 인정 안 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무술과 자신의 노력까지 싸잡아서 무시당한 것 같아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 쉽게 되는 게…….”
“햐압!”
드르르륵! 쿠웅!
이수현은 백보신권의 비기를 완벽하게 내질렀다. 주먹질 한 방에 바위가 날아갔다.
대형이 펼친 비기는 몇 걸음 정도 바위를 움직이게 만든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수현이 펼친 건 무려 수십 걸음 밖으로 밀어냈다.
“이, 이럴 수가…….”
“백보신권의 비기를 한 번 보고 따라 해?”
심지어 그는 내력도 쌓지 않은 헌터이지 않은가. 마력만으로 저런 게 가능하다고?
경악한 수도승과 달리 이수현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실패했네. 확실히 무술의 비기는 어렵네요.”
“시, 실패라뇨?”
“원래는 바위 한가운데에 구멍만 내려 했는데, 도중에 힘이 분산됐어요.”
“…….”
이수현이 말한 건 중국의 전설 속 무인들이나 이룩한 경지였다.
대형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자신은 십 년 넘게 노력해서 겨우 몇 년 전에야 이 비기를 익혔는데.
이수현은 한 번 보고 따라 했다. 벽을 느꼈다. 재능의 차이라는 게 이렇게 심했단 말인가.
“다음 무술도 빨리 보여 줘요. 이거 재밌네.”
이수현은 남은 무술도 보여 달라고 말했다.
결국, 그날 이수현의 교육은 이른 새벽부터 시작해, 점심을 먹을 때쯤에 끝나버렸다.
대형은 너무 서러워서 방에 숨은 채 눈물을 흘렸다.
* * *
소림의 72가지 무술을 한나절 만에 익혀 버린 괴물은 사찰 안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소림사로부터 무술증까지 받아 각각의 무술을 스킬로 정립했다.
그러자 부족했던 요소들이 머릿속에 마구 떠올랐다.
그게 너무 괴로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주지 스님 말로는 심마(心魔).
즉, 주화입마에 걸린 것이라고 했다.
‘어우, 이제 좀 살겠네.’
이수현이 걸린 주화입마는 사실 별것 아니었다.
스킬로 정립된 무술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들이 머릿속을 계속 맴돈다.
쉽게 비유하면 잠을 자려는데 과거의 흑역사가 마구 샘솟는 것이다.
그럼 잠이 오겠는가? 잠자리를 한참이나 설치게 되겠지.
“……?”
이수현은 오랜 명상을 끝내고서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이상하리만치 활력이 솟았다.
마력과는 별개의 기운이 그의 등골을 타고 머릿속에 올라온다.
“뭐야, 이거…….”
“놀랍습니다. 별도의 심법 없이 명상만으로 내력을 쌓으셨군요.”
‘내력? 이게 천마가 사용하던 그 기운인가?’
사찰 구석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이수현도 무아지경에서 깨어났다. 고갤 돌리자 처음 보는 사람이 그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 대협. 저는 중국 협회 소속의 ‘리천’이라고 합니다.”
“리천?”
“예, 류이창을 대신해 임시 협회장이 된…….”
“아, 나한테 눈도장이라도 찍으러 온 거야?”
이수현은 그가 썩 달갑지 않았다.
뭔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말을 걸어서 방해한 것이 주요했다.
그리고 류이창의 후임이라는 것도 영 거슬렸다.
자신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러 온 걸지 모르니까.
“절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무림맹을 대표해, 이 대협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무림맹?”
천마에 이어 이번에는 무림맹인가.
그보다 아까는 중국 협회 소속이라더니.
“천마, 그 끔찍한 악마를 막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림맹은 오래전 마교와의 전쟁에서 패해 뿔뿔이 흩어졌죠. 저는 그들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협회 소속이고?”
“예, 오늘부로 중국 협회는 무림맹의 의지를 이어받아 정과 협을 추구하는 새로운 조직으로 탈바꿈할 것입니다.”
“그럴 능력은 있고?”
“사실 그것 때문에 직접 찾아왔습니다.”
리천은 청명한 기운을 뿜었다.
천마보다는 못 미쳐도 상당한 내력이었다.
‘오. 루이 녀석이랑 비슷해 보이는데. 협회에서 정상급 헌터를 숨기고 있었구나.’
“제가 협회장에 걸맞은지 아닌지 이 대협께서 직접 판단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난 널 오늘 처음 봤는데.”
“이 대협께 정식으로 비무를 신청합니다.”
당연히 리천은 이수현에게 상대가 안 될 것이다. 그건 리천 본인이 더 잘 알았다.
하지만 무인으로서의 뜨거운 호승심이 그를 부추겼다. 저 남자와 겨뤄 보라고.
“좋아. 그럼 나는 마력을 아예 안 쓰고 싸워 줄게.”
“네? 그게 무슨…….”
“방금 얻은 내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거든.”
“저, 이 대협. 실례지만 하루도 안 되는 명상으로 얻은 내력만으로는 저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이수현의 전신에서 황금색 기운이 흘러나왔다. 내력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양의.
리천은 그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십 년 이상 쉬지 않고 내력만 쌓아야 도달 가능한 양이었다.
‘어, 어떻게 저럴 수가……!’
“내가 몸에 좋은 걸 좀 많이 먹었거든. 그래서 뻥튀기가 됐나 봐.”
“여, 영약 말씀이십니까?”
“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체 얼마나 처먹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