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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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얀 새벽.
나는 일어나서 세수했다. 이제는 퍽 익숙해진 검은색 집사복을 차려입은 다음, 천천히, 거울 앞에 섰다.
그곳에는 아직 [나]가 비추었다.
“음.”
언젠가 흑룡주가 말하길 [조금 얍삽한 인상].
거울에 비친 남자가 서서히 입술을 열었다.
“라비엘.”
두근.
“라비엘 이반시아.”
[인물에 대한 몰입이 심화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62%입니다.]단순히 내가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조곤거렸을 뿐. 그런데도 나의 심장은 뛰었고, 숨이 가빠졌으며, 거울에 비친 남자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나 자신이 봐도 표정을 읽기 쉬웠다.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신기해라.
나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 놀라면서, 나는 다음으로 할 일을 했다.
“능력창.”
눈앞에 스멀스멀 글자가 피어올랐다.
+
이름: 사왕(死王)
랭크: D급
스킬 (6/6)
1. 너처럼 되고 싶다(S+)
2. 회귀자의 태엽시계(EX)
3. 검의 성좌(A+)
4. 고블린 상류사회(F)
5. 백귀환생(SSS)
6. 마천신공(A+)
※미신(美神)의 가호가 적용 중입니다.
※사신(能神)의 가호가 적용 중입니다.
+
그곳에는 내가 지나쳐온, 지나쳐버린 삶의 경로가 그려져 있다.
나의 질투. 나의 비밀. 나의 기연. 나의 해학. 나의 의지. 나의 행복까지.
인간 [김공자]의 인생이란 이다지도 담박하게 표현된다.
“…….”
나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인물창.”
그러자,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문자들이 눈앞에 새겨졌다.
+
이름: 김공자
호감도: 90
선호 장르: [무협], [로맨스], [추리], [모험]
불호 장르: 없음
선호 캐릭터: [스승], [고결한영웅], [희생자], [노력가], [어린아이], [선인], [스스로 의심할 줄 아는자], [타인에게 너그러운자], [나를 알아주는 자]
불호 캐릭터: [싸이코패스]
선호 플롯: [사필귀정], [우정], [사랑]
불호 플롯: [자기혐오], [포기], [도피], [망각], [불신], [독식]
심리 상태: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알고 싶다.’
+
꿀꺽.
침을 삼켰다.
“오케이.”
아직 나는 김공자에 머물러 있다. 이단심문관처럼 배역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내가 세운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반드시.
“검제 씨.”
-엉?
거울에 비치지 않는 귀신이 대답했다.
“만일 제가 집사라는 배역에 파묻히게 되면 말이에요. 꼭 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뭔데?
“아마도 몰입률이 100%에 달하면 댁이 말하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될 가능성이 커요. 스킬을 가지고는 있되, 사용하는 방법을 전부 까먹겠죠. 무슨 일이 있어도 몰입률이 100%를 찍는 것만은 막아야 해요.”
나는 허리춤에 숨긴 단검의 칼자루를 매만졌다.
“99%. 그게 마지노선입니다. 절대로 99%보다 몰입도가 더 올라가면 안 돼요. 알았지요? 만에 하나라도 제가 99%를 넘어설 것 같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를 말려주세요.”
-허.
배후령이 피식 웃었다.
-별 걱정을 다 하네. 너처럼 자존심이랑 에고가 강한 놈이 설마 99%까지 올라가겠냐?
“예. 올라가요.”
나는 마지막으로 옷 마무새를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완벽한 집사의 모습이 거울에 담겼다.
“왜냐하면 제가 일부러 거기까지 올릴 생각이거든요.”
-뭐?
배후령이 깜짝 놀랐다.
-왜? 스테이지 실패하고 넌 이 세계에 갇히게 될 건데?
“이유는 지금 말씀드릴 수 없어요. 아니, 저 말고 아무도 알면 안 돼요. 저는 탑의 시스템이 가진 허점을 파고들어서 이번 스테이지를 공략할 거라서요.”
탑은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만일 내가 떠올린 공략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탑은 서둘러 허점을 보완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면 안 된다.
아직 탑이 시스템적인 오류, 미처 생각하지 못한 빈틈을 가지고 있을 때. 이 때가 기회다. 서둘러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를 클리어해야만 한다.
“제가 위험에 빠지면 도와주세요.”
“믿고 있을게요. 제 스승이 되어주겠다던 고금제일인 씨.”
그리고 나는 흑룡주의 말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거울에 비친 남자는 악동처럼 얍삽하게 웃고 있었다.
“그럼 전 제 연인을 도와주러 가겠습니다.”
2.
은백합 영애와 나는 사귀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야외 데이트를 즐길 순 없었다. 영애가 침대에 드러눕게 된 것이다.
은백합 영애는 원래 몸이 야위었다. 햇볕에도 약했다. [집사]의 기억을 되짚어 봐도, 은백합 영애는 아카데미에 출석하는 날보다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도 지난 며칠 동안 밤을 지새우고 과로했으니, 쓰러질 수밖에.
“걱정하지 마라. 1회차 때부터 이랬다.”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은백합 영애가 말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태어날 때부터 이러했지. 바깥에서 뛰어놀 수도 없어서 거의 언제나 저택에만 머물렀다. 거울에 칼을 박아서 심장이 사라진 다음부터는 더 심해지더군.”
“…….”
“황제 폐하께서 나 말고 금사매한테도 이명을 내리신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래서야 내가 황후가 되더라도 얼마 안 가서 죽을 것이다. 후계자를 낳기도 어렵다. 나는 황후로서 적합하지 않은….”
쿨럭. 은백합 영애가 기침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메마르게 된 소리였다.
“뜨거운 차예요. 드세요.”
나는 미리 준비해온 차를 건네었다. 은백합 영애는 “고맙다,” 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눈썹을 위로 올렸다. 조금 놀랍다는 얼굴이었다.
“……꿀을 진하게 넣었군. 내 입맛에 딱 맞다. 어찌 알았느냐?”
내가 미소를 지었다.
“공녀께서 예전에 말씀해주셨잖아요.”
은백합 영애가 내게 연애수업을 할 때 말했었다. 6회차 때 어느 사도가 공략집을 가지고 자신을 함락시키려 했다고. 그 공략집에 적혀 있었다.
+
1. 은백합 영애는 햇빛에 약하다.
2. 은백합 영애는 미각이 무뎌서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한다.
+
나는 그걸 까먹지 않고 활용했을 뿐이다.
“음. 그러면 그대도 공략집을 이용한 셈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공녀께서 먼저 스스로 알려주신 거니까 공략집이라 보기 어렵죠. 참고서를 이용했다 정도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보니까 그대도 꽤 얄미운 구석이 있군.”
은백합 영애가 잔을 기울였다.
찻물이 홀짝이는 소리가 조용히 침실에 울렸다.
“그래서 그대가 떠올린 계책이란 무엇인가? 지금 이렇게 그대와 포근한 시간을 공유하는 것도 잠깐의 유희에 불과하다. 우리 두 사람 중의 한 명은 반드시 상대와 보낸 시간을 잊게 된다. 해결책이 있을 리 없다만.”
“공녀께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한테 인생을 맡겨본 적 없으시겠지요.”
“음?”
“저를 믿어주세요.”
“…….”
“설령 가짜 연애라고는 해도, 당신이 사귀기로 한 사람. 절대로 무능한 남자가 아닙니다.”
은백합 영애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지금 공녀님이 딱 그래요.”
나도 아이김 제국을 구할 때 검성과 흑룡주의 도움을 받았다. 천마실록을 돌파할 때는 약제사와 독사, 약왕에게 도움을 받았다. 절대 입으로 얘기는 안 할 거지만, 언제나 배후령한테도 신세를 지고 있다.
나는 내가 혼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
눈앞의 연인과 다르게.
“여태까지 공녀께선 혼자서 너무 많은 걸 책임져 왔어요.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제국은 굳건해야 한다], [황태자를 바로 잡아줘야 한다], [피의 악마도 처리해야 한다]. 140일 내내 그러셨을 거 아니에요?”
“내가 지쳤다고 생각하는가?”
“예.”
“…….”
“조금만 쉬어주세요.”
나는 새벽에 따온 봄꽃을 화병에 꽂아서, 침대 곁에 놓았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혼자서 모든 걸 책임지려 하면 싫을 거 같아요. 아니, 싫습니다. 제가 지쳤을 때는 상대방이 책임을 져주고, 상대방이 지쳤을 때는 제가 책임져주면 좋겠어요.”
“우리는 가짜 연애를 즐기는 것에 불과하다.”
“제가 진심이니까 상관없습니다.”
“……모욕당했다는 생각은 안 드는가?”
“아하. 공녀께선 아직 절 모르시네요.”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일까. 나는 작게 웃어버렸다.
“전 긍정적인 놈이에요. 공녀께서 가짜로 저랑 사귀어주신다고 해서, 제가 침울해하거나 자격지심에 시달릴 거 같아요? 천만에요. 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공녀께선 저를 사랑하시게 될 거예요.”
“세상에. 도대체 그 자신감의 근원은 무엇인가?”
“오로지 저만이 영애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될 테니까요. 공녀께서 저에게 [지쳤다]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 전 공녀를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당신의 버팀목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은백합 영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차를 마셨다.
날이 갈수록, 나의 연인은 야위어졌다.
매일 밤, 자정 12시에 출현하는 [악마]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강해졌다.
처음에 악마들은 기껏해야 [혓바닥]과 [입술]의 모양밖에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날, 또 다음날이 되자 달라졌다. [팔]이 생기고 [다리 ]가 생겼다.
-꺄르르.
사지가 생겼을 쯤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악마들은 은백합 영애를 닮았다. 은백합 영애를 조금 단순화시켜서 작게 졸여놓으면 꼭 저럴 것 같았다.
-우리를 죽일 거야?
-나를 죽일 거야?
나는 밤마다 묵묵히 악마들을 처리했다. 은백합 영애가 “나도 돕겠다”라고 말했지만 단호히 거부했다. 지금 그녀에겐 무엇보다 혼자만의 시간, 조용한 휴식이 필요했다.
은백합 영애의 결재가 필요한 서류 작업? 전부 스톱시켰다.
어차피 이 세계가 멸망하기까지 며칠 안 남았다. 겨우 며칠 동안 공작 영애가 돌봐주지 않는다고 해서 멸망할 제국이라면, 차라리 그냥 멸망해버리라지.
휴식.
혼자만의 휴가.
그것이 내가 은백합 영애한테 가장 먼저 건네준 선물이다.
“……이런 날들은 또 처음이군.”
은백합 영애는 약간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괜찮겠는가?”
지금 우리는 벚나무 그늘에 앉아서 한가로이 호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은백합 영애를 안아서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뿐이다.
복잡한 서류도 없었고, 피의 악마도 없었으며, 은백합 영애를 구경거리 삼아서 수군덕거리는 학생들도 없었다.
“괜찮아요.”
“허나……”
“괜찮다니까요. 공녀.”
은백합 영애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신한테 찾아온 이 평화로운 시간이 못내 견디기 어려운 것 같았다.
“제가 괜찮게 해드릴게요.”
“나는 그대한테 의지하기 싫다.”
“제가 언제 영원히 공녀님을 도와주기만 한다고 말했나요? 제가 도움이 필요해지면 공녀께서 도와주세요. 서로 도우면 되잖아요? 돕고 살아요.”
“…….”
그저 조용히 하루가 흘렀다.
그날은 은백합 영애가 말한 ‘열흘째’였다.
“목마르시지요? 오늘은 밀크티에 꿀을 살짝 넣어봤어요. 아마 입맛에 맞으실 거예요.”
“조금 더 햇빛이 연해지면 나룻배를 타고 놀지요. 제가 노를 저을게요.”
그날 하루, 은백합 영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는 내가 깨워서 세수를 시켰다. 간소한 식사를 갖다 주었다. 오전엔, 은백합 영애가 좋아한다는 시집을 옆에서 읽어주었다. 오후엔, 간식을 싸서 아카데미에 있는 호수로 산책을 왔다.
휘이이익-
봄날이 휘파람을 불어서 목련잎과 벚꽃잎을 흘렸다. 하늘에 흩어지는 하얀색들을, 은백합 영애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올려보았다. 호수의 수면엔 벚꽃이 떨어져서 물결에 넘실거렸다.
“…….”
한 시간 동안, 그녀는 아무런 말도 안 했다.
내가 은백합 영애를 안아서 나룻배에 태웠을 때도 그녀는 조용했다. 조용히, 흘러가는 꽃잎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찰랑. 철렁. 나의 노젓기에 호수는 얌전히 물길을 내주었다.
“봄이 하얗구나.”
은백합 영애가 중얼거렸다.
“제국에선 이 무렵을 [흰 봄]이라고 부른다. 목련이 지기 전에 벚꽃이 피는 시기가 있지. 내가 좋아하는 옛 시인이 말하길 [하양 속에 하양이 꽃피우니, 봄이 봄 속에서 만개하는구나. 겨울이 다 뿌리지 못한 하얀색이 마지막 숨을 놓는다].”
그녀가 말하는 속도는 벚꽃이 하늘에 날리는 속도를 닮았다.
“예쁜 계절이네요.”
“그래.”
노을이 졌다.
“이런 계절을 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온화한 봄이 흘렀다.
“…….”
“…….”
우리 두 사람은 계절에 취해 있었다. 기분 좋은 멍함. 몽근몽근거리는 봄 공기가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은으로 도금된 심장의 존재가 한층 더 뚜렷해집니다.]그래서 이번 세상이 멸망할 시간이 다가왔을 때도, 우리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별다른 말조차 안 나누었다.
[은으로 도금된 심장이 현현합니다.]붉어진 노을이 더 붉어졌다.
아카데미 저편에선 학생들이 지르는 비명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아마도 거울에서 흘러넘쳤을 핏물이, 순식간에 아카데미를 덮쳤다. 그리고 호수의 가장자리로 흘러들어서 물의 색깔을 붉게 물들였다.
“집사여.”
“예.”
“그대와 같이 있으면 편안하다.”
우리는 호수 정중앙에 나룻배를 세우고 있었다.
가장자리부터 잠식해 오는 빨간 핏물은, 아직 우리의 성역을 잡아먹지 못했다.
“정말로 그대를 믿어도 좋겠는가?”
나는 노를 손에서 놓았다.
“공녀께서 말씀하셨지요. 우리는 평행선과 다름없는 존재라서, 앞서 죽는 사람이 무조건 먼저 회귀하게 된다고. 그러니 우리 둘은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고.”
“음.”
“이제부터.”
나는 은백합 영애의 손을 잡았다.
“제 오러가 공녀의 몸을 감쌀 거예요. 몸뿐만이 아니라 공녀의 머릿속까지. 그리고 저의 몸과 제 머릿속도 똑같이 오러로 둘러쌀 겁니다.”
그리고.
“정확히 똑같은 시간에 공녀의 머리와 저의 머리를 터트릴 겁니다.”
“…….”
은백합 영애의 숨이 잠시 멈추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작아진 만큼 눈동자가 커졌다.
“그건……”
“먼저 죽는 사람이 먼저 회귀하게 된다는 건 사실이에요. 회귀하지 못하게 되는 사람이 상대방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면, 저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정확히 동시에 같은 순간에 죽는 거지요.”
나는 조금 더 강하게 은백합 영애의 손을 잡았다.
“라비엘 이반시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저와 같이 죽어주세요.”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했다.
10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