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04)
==========================
5.
당신과 같이 있어 행복하다.
당신을 위한 삶을 살아왔다, 고 말하는 것은 과언일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을 위해 살겠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다행이다. 이 말을 한 점의 거짓 없이 말할 수 있어서.
“또 우는가?”
나는 그런 인간일 수 있었다.
“우리, 약속 하나 정해요.”
누군가를 위하는 인간일 수가 있었다.
“말해라. 듣고 싶다.”
“상대방이 울 때는 일부러 울고 있냐고 묻지 말아요. 솔직히 공녀님 저 놀리려고 일부러 묻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으음. 내가 그대에게 가끔 놀라는 것이 있다. 바로 그대가 의외로 영리하다는 점이지. 하지만 그대가 영리할 뿐이지 내게 영리하게 굴지는 못한다는 사실 또한 뻔하다. 이만큼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도 드물군….”
“약속, 해주시면 좋겠는데요.”
“싫다.”
아. 나한테 ‘싫다’고 말하는 공녀 님은 좋구나.
정말 좋아해….
사랑해요….
-아아악! 까악! 악! 내 눈! 악! 끄아아아악! 내 누우우운!
배후령이 격하게 뒹굴었다.
-나 살려라! 귀신 살려! 왜 나는 곱게 성불하지 못해서 뒈진 다음에도 이런 불행을 누려야 하는 거냐! 왜 네가 면상 붉히는 걸 실시간으로 관람해야 하는 건데?! 씨댕아, 내 눈! 내 존재 살려내라 씨■ 주접 좀비!!
‘아아. 검제여.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합니다.’
-닥쳐어어어!
‘라비엘 이반시아, 제 심장의 주인님….’
-그, 그만둬. 그만■라니까…!
음.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배후령의 목소리가 좀 멀게 들렸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쩌렁쩌렁했던 목소리가 살짝 볼륨을 줄인 것 만 같은 느낌.
‘슬슬 반응이 오는 건가.’
반응이 오기 시작한 것은 배후령만이 아니었다.
은백합 영애와 나의 입맞춤에 무도회장은 얼었다. 그 얼어붙은 공기가 간신히 해동되기 시작했다.
“으, 은백합 공작 영애. 지금 무, 무슨 일을……?”
오. 신기하다.
라면 사리가 말도 하네?
다시 보니까 쓰레기 같다.
“소란을 일으켜 송구하나이다.”
은백합 영애는 내 어깨에 지그시, 머리를 기대었다.
“공적인 곳에서 저지를 만한 일이 아니었사옵니다. 전하.”
“어….”
“소신이 경거망동하여 작게는 소르므윈의 무도회를 망쳤고, 크게는 국본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죄가 큽니다.”
은백합 영애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원래 서늘하면서도 사람의 귀를 끌어당기는 인력(引刀)이 있었다. 이 무도회장에 참석한 자 전원이 은백합 영애를 멍하게 바라봤다.
“죄가 크니 벌해주소서. 달게 받겠나이다.”
“버, 벌이라니?”
“어떤 벌을 내리셔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우신지요? 어려우시겠지요. 허니 소신이 대신하여 벌을 자청하겠습니다. 오늘부터 감히 아카데미에 출석하여 눈총을 사지 않겠사오며, 한동안 조용히 자숙하지요. 그리고.”
은백합 영애가 품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아직 황태자는 정신을 못 차리어 망연자실하게 봉투를 건네받았다.
“이건……?”
은백합 영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퇴신청서입니다.”
“…….”
간신히 공기가 해동되려 했던 무도회장에 다시 한 번 블리자드가 몰아쳤다. 영애들과 영식들, 특히나 금발 쓰레기의 낯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퇴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아뢴 대로 근신하겠나이다. 사사로이 방문을 받지도 않으려니, 태자 전하께선 모쪼록 소신이 자청한 벌을 윤허해 주소서.”
“라, 라비……?”
“윤허해주셔서 황공하옵니다. 전하.”
은백합 영애는 여전히 내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런 자세에서, 그녀는 황태자를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잘 보면 머리를 숙인 것 보단 고개를 까닥거린 거에 가까웠다.
‘거울에 박힌 검 때문에 아직, 황태자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을 텐데….’
이래도 괜찮나?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은백합 영애는 황태자의 간자들을 잡아다가 모가지를 따게 만들었잖아? 괜찮다. 이 정도면 약과지. 무엇보다 라비엘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은백합 영애가 내 손을 잡아서 끌었다.
“가지.”
“아. 네.”
그래서 충격과 공포에 빠진 무도회장을 두고 우리가 뭘 했냐면… 떠났다.
그냥 떠났다.
왜. 뭐. 아무도 우리를 막지 못한다.
나를 막을 순 있을지 모른다. 은백합 영애를 잡아 세우는 것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우리가 떠나고 싶다면 떠나는 거다. 그런데도 막아보겠는가? X까. 회귀자 커플을 어떻게 막을 건데.
“사왕! 사왕!”
유일하게 이단심문관만은 잡으려는 시늉이라도 시도해봤다. 무도회장을 떠나는 우리를 쪼르르 따라온 것이다.
“스테이지 공략은요? 그리고 방금 뽀뽀는 무슨 의미입니까? 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단심문관은 키스를 뽀뽀라고 말하는 파였다. 놀랍군. 세상 어딘가에 그런 세력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설마 이단심문관이 그 휘하일 줄이야….
“이단심문관 씨.”
“예, 사왕! 아. 참고로 아까부터 사왕이랑 그쪽 영애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심장 부근이 자꾸만 두근거립니다. 으음, 어떤 징후일까요…?”
“심근경색이네요. 조심하세요.”
“과연. 심근경색입니까.”
“네. 그리고 스테이지 공략은 제가 별도로 진행하고 있을게요. 이단심문관 씨는 휴가를 즐긴다 생각하고 지내십시오. 필요하면 제가 따로 부를 테니까.”
“앗. 그렇군요.”
이단심문관이 해맑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자유로이 판단하며 행동하고 있겠습니다!”
그 한없는 해맑음이 불안했다.
“……이단심문관 씨.”
“예!”
“사람은 죽이면 안 됩니다.”
“앗. 알겠습니다!”
“고문도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정보를 캐낸다면서 사람을 납치하거나 감금하는 것도 안 됩니다.”
“사왕.”
이단심문관이 곤란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러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집니다?”
“됐으니까 그냥 방구석에 박혀서 동화책이나 읽고 있으세요.”
“음. 네. 알겠습니다….”
이단심문관이 시무룩해졌다. 꼭 처량하게 귀가 늘어진 웰시코기 같아서, 나는 한숨을 쉬며 이단심문관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나중에 할 일이 생기니까요. 그 때까지만 조용히 있어요.”
이단심문관이 빤히 내 얼굴을 올려봤다. 그는 고개를 세 번 기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왕. 지금 몰입률이 올랐다는 말이 들립니다만, 이건 뭘까요?”
“심근경색입니다.”
얌전히 좀 있어라. 제발.
6.
“내일부터 제국 전역이 시끌벅적해지겠군.”
아카데미를 박차고 나오면서 은백합 영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요?”
“나는 유명인사니까 말이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있었다. 은백합 영애 소유의 마차였다. ‘모처럼 막살기로 했으니 기왕이면 아카데미를 벗어나고 싶구나’라고 공녀는 말했으며, 당연하지만 내가 거기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일단 수도에 있는 사교계에서 편지가 200통 정도 쏟아질 것이다. 고향의 사교계에서도 20통은 올 테고, 그중 10통은 내 아버지가 보내겠지. 마지막으로 황제 폐하께서도 사자를 보낼지 모른다. 공자여. 해결책을 제시해보거라.”
“음….”
나는 입을 열려다가 멈췄다. 잠깐. 방금 공녀가 나를 [집사]가 아니라 [공자]라고 부르지 않았나? 내 이름으로 불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왜 그러는가?”
은백합 영애는 눈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얼굴이 빨갛군. 공자. 감기라도 걸렸느냐?”
“…….”
“봄에는 밤공기가 차다. 공자여. 설령 그대의 체온이 높다고는 해도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질문한 것에도 재빨리 대답해주지 않겠는가, 공자여.”
으.
조금이라도 반격해야만.
“자, 자퇴서는 언제 써두셨어요? 제가 없을 때 몰래 그런 걸 쓰시다니. 와. 아무리 오늘 하루를 반복할 계획이라지만 조금 귀여우시네요.”
“귀엽군, 공자. 그대한테 귀엽다는 말을 들으면 내가 당황할 것 같은가? 공자. 그런 걸 지금 나에게 반격이랍시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귀여운 일이다. 귀여움을 받고 싶더냐, 공자여?”
“…….”
“항복으로 받아들이마.”
오늘도 낙낙하게 1승을 거두시는 공녀님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잡혀 사는 미래를 예약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공녀님한테 잡혀 사는 거라면 진심으로 승리한 인생 아닌가?’인 시점에서 난 이미 끝났다.
“작군.”
은백합 영애가 문득 말했다. 그녀는 마차 창문 너머로 점점 더 작아지는 소르므윈 아카데미를 보고 있었다.
“소르므윈은 황권 강화의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설립된 기구다. 제국 각지에서 난립할 수 있는 귀족 가문들과 유력 가문들의 자재를 반 강제적으로 입학시키지. 똑같은 교육, 똑같은 언어, 똑같은 스케줄을 공유함으로써 [하나 된 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전시킨다.”
“어려운 얘기네요.”
“너무 오랫동안 저곳에만 있었지.”
은백합 영애가 중얼거렸다.
“저 작은 교문을 지나면 질투, 허영, 교만, 독점, 애욕, 모든 것이 도사리고 있다. 전통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민낯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결국에 장차 우리가 통치해야 할 것은 제국은 저곳에 있지 않다. 밖에 있다. 태자 전하께선 그걸 아시는지….”
“라비엘.”
은백합 영애가 멈칫했다.
“제국은 나중에 염려하세요. 과로예요.”
“…….”
“지금은 저만 생각해주세요.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거니까.”
마차가 덜컥거렸다.
“공자.”
“예.”
“내 심장에 흉터를 내면 죽여버리겠다.”
목이 서늘했다.
“이해했는가?”
“예, 이해했어요.”
“그대가 이해한 것을 말해.”
“절대로. 무슨 일이 생겨도. 당신의 영혼을 상처입히지 않겠습니다. 만일 정말 몰라서 상처를 입히게 된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조금 더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은백합 영애가 몸을 일으켜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꾸욱.
내 손등에 그녀가 손바닥을 올렸다. 가슴이 뛰었는데, 목덜미는 여전히 서늘했다.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은 눈동자에 불을, 목소리에 얼음을 담고 있었다.
“만일 그대가 나를 배신한다면. 공자여.”
“예.”
“네 손으로 내 목을 졸라서 죽여라.”
“오러 따위는 쓰지 마라. 오직 너의 손을 써서 죽여라. 그대와 내가 만났다는 사실이 이 세상에 지워져 없어질 때까지 죽이고 또 죽여라. 수백 일이 되었든, 수천 일이 되었든 상관없다. 나는 그대에게 내 죽음을 선고할 것이다.”
은백합 영애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 자신의 목으로 내 손을 갖다 댔다. 하얀 살결. 차가운 온도. 목 정중앙에서, 성대로 맺힌 그녀의 얼음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그대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한 채 영원히 살아라.”
“그대는 영원히 살 수 있지. 바란다면.”
침을 삼켰다.
“예.”
“나를 배신하는 순간 영원한 지옥에 유배되는 줄 알거라.”
은백합 영애는 속삭였다.
“알겠는가.”
나는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라비엘.”
“나에게 말해야 할 비밀이 있다면 지금 고백해라.”
“저한테는 백귀환생(百鬼還生)이라는 스킬이 있어요.”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고백했다.
“제 손에 죽은 사람은, 죽은 다음에도 저에 의해 소환됩니다. 소환된 이는 생전의 능력을 계승하진 못해도 제가 바라기만 하면, 외형과 기억을 계승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나도 소환할 수 있겠군.”
“라비엘은 저와 함께 9번 죽었으니, 9명의 라비엘을 소환하는 것도 가능해요.”
“금지한다.”
“예.”
원래부터 나도 은백합 영애를 소환할 생각 따윈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지만 다시 한 번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의 말로, 가능성을 차단했다.
연애는 신성한 약속이고 계약이었다.
우리는 우리 두 사람만의 법전(法典)을 만들고 있다.
“그대가 배신했을 때 해야 할 일을 하나 더 추가하마. 그 스킬을 찢어 없애라.”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말을 골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다. 세상 그 어느 누구를 대할 때보다 더 아끼고 조심해야만 한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서 미안해요.”
“한 가지 약속을 하면 용서하마.”
“들을게요.”
“나의 허락 없이 자결하지 마라.”
“…….”
“죽음으로 쉽게 모면할 수 있는 때가 와도 죽지 마라. 그대는 나의 연인이다. 함부로 목숨을 버려도 될 사람이 아니다. 정녕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 같더라도 마지막까지 발버둥 쳐라.”
나는 침묵했다.
그녀와 나눈 약속을 내 심장에 새기면서.
“예.”
“내게 바라는 것을 말해라.”
“제가 믿어달라고 할 때 저를 믿어주세요.”
“언제나 그대를 믿겠다.”
마차가 덜컥거렸다. 작은 진동을 빌미로 삼아, 은백합 영애와 나는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입술을 겹쳤다.
그날부터.
우리는 서로의 사랑이 되었다.
10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