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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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뻔뻔한 놈이……!”
어둠 너머.
누구인지 모를 자가 이빨을 빠득 갈았다.
이전과 달리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전부 [번역]되었다.
“진정하렴, 아가야. 파다크 시절의 파편이 드러나고 있잖아.”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목소리는 불투명했다. 노이즈가 낀 노래 음원처럼, 목소리가 제멋대로 멀어지나 싶더니 돌연 귀 근처에서 들려왔다.
“분노와 질투는 우리가 회의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단다.”
“죽여버리겠다!”
“사왕이라고 했지? 한 사람 때문에 회의가 두 번이나 소집된 건 오랜만이네. 살천성(殺天星) 이후 이게 얼마만일까.”
“더구나 두 사람 사이에 인연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이것도 우연이려나.”
그 때였다.
“—곤란하네요.”
조잘거리던 목소리가 뚝 멈추었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잡담과 환담이 흐르던 공간에 오로지, 무감정한 목소리 한 줄기만이 가라앉았다.
“몰입도가 완전히 100%였다면 집사의 시점에서 하루를 회귀시키면 되겠지요. 몰입도가 90% 이하였다면, 사왕의 시점에서 하루를 되돌리면 그만이에요. 허나, 하필이면 99%라.”
나는 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애매해요. 이건 어디의 편을 들어주어야 할까요?”
탑의 주인.
나는 침을 삼켰다.
“저는 집사의 시점에서 하루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득해 보세요.”
“우선 숫자만 봐도 그렇습니다. 몰입률이 99%라는 것은, 집사가 99%이고 저는 1% 밖에 안 남았다는 얘기입니다. 집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니, 집사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야 옳습니다.”
“예. 하지만 [회귀자의 태엽시계]는 당신이 얻은 스킬이지요. 사왕. 그대가 소유한 스킬이에요. 스킬을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해당 스킬을 가진 사람뿐.”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시선이 내 얼굴을 훑었다.
“그대가 회귀해야 옳지 않을까요?”
“…….”
“긴장하지 마세요. 그저 궁금한 것을 여쭐 뿐이니까요.”
긴장하지 마라, 고 목소리는 친절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배려였다. 목소리가 한 마디 한 소절 이어질 때마다 마치 긴 뱀이 목덜미를 오르는 것 같았다.
“……그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진 생각입니다.”
“으흠?”
“집사의 입장에서 생각해주십시오. 집사와 저는 누가 몸을 차지할 것인지 두고, 스테이지 공략 내내 싸웠어요. 제가 집사에게 잡아먹힌 것이기도 하지만, 집사가 저를 잡아먹은 것이기도 합니다.”
즉.
“집사는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저를 이겼고, 그 대가로 저의 스킬을 빼앗아간 것입니다. [회귀자의 태엽시계]는 이제 집사의 스킬이기도 합니다.”
“호오.”
뱀의 목소리가 기이하게 흔들렸다.
그것이 웃음이라는 사실을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일리 있네요. 그래요. 마치 사왕, 그대가 염제의 스킬을 복사하여 가지게 된 것처럼요.”
“…….”
“회귀자와 회귀자가 맞붙어 싸우게 되면 누가 승리하게 될까 싶었는데. 설마, 스킬을 가지기 전의 시점으로 돌아가다니. 그 발상에 소인도 감탄했어요. 아니, 저희 모두가 놀랐지요.”
소인小人.
탑의 절대자는 자기 자신을 낮잡아 지칭했다. 존댓말을 썼다.
마치 누구에게나 공손하게 굴 것처럼.
그것이 내게는 더욱 불길했다.
“대단했어요. 당신은 단순히 염제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왜일까요?”
탑주(塔主)의 질문에 침묵하고 있던 자들이 입을 열었다.
“복수심 때문이지. 저 새끼는 자기가 당한걸 죽어도 안 잊은 거야. 그러니까 끝까지 쫓아가서 자기를 불태워버린 작자를 족친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4050번을 죽어? 지독한 놈.”
[맹목을 관조하는 달이 당신을 저주합니다.]“정의심 때문이야. 염제는 많은 사람을 죽였고, 더 많은 사람을 죽였을 거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이래선 안 된다’라는 생각과 감정이 사왕을 움직였어. 그래. 그는 정의로운 인간이야.”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당신을 축복합니다.]뱀의 목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럴 것이에요. 어느 때는 복수심으로 자기 목을 찔렀을 것이고, 또 어느 때는 정의심에서 자결했겠지요. 하지만 복수심도 정의심도 흔한 것. 소인이 감탄한 부분은 오직 한 군데예요.”
탑의 주인의 말을 누군가가 받았다.
“바로 염제를 100% 이길 방법은 오직 그것밖에 없었다는 것.”
[시초를 입법한 자가 조용히 선언합니다.]“예.”
탑의 주인이 웃었다.
“사왕. 그대의 심장은 날것처럼 뜨겁지만 머리는 교활해요. 언제나 항상 100% 이길 방법을 모색하지요. 그래서 소인은 기대하고 있어요. 저희를 100% 설득할 논리를, 당신은 마련하고 온 것인가요?”
지금이 승부처다.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
“예.”
“말씀해 보세요.”
“저는… 저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뱀의 목소리가 똬리를 튼 방향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이건 전적으로 탑이 저지른 실수이고 오류입니다. [집사의 시점]으로 하루를 돌릴지 [저의 시점]으로 하루를 돌릴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 자체가 문제예요. 만일 탑이 완벽했다면 이런 오류 자체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합니다.”
“예. 인정할게요. 그래서?”
“저희는 오류의 피해자이니 보상해주십시오.”
“…….”
나는 애써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오류를 발견한 공로자입니다. 저희가 아니었으면 오류가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셨을 거 아닙니까? 포상해주십시오.”
정적.
잠시 뒤.
“무례하네.”
[공허에서 춤추는 신이 당신을 노려봅니다.]“저 쌍것이 말하는 본새 좀 봐라? 존재째로 다져지고 싶냐?”
목소리들이 자글자글 끓어올랐다.
“그만.”
하지만 뱀의 목소리가 입술을 열자, 다시금 모두가 침묵했다.
“흥미롭네요.”
“…….”
“어떤 부분이 흥미로운가 하면, 예. 소인이 제대로 [보상]해주고 [포상]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부분이 흥미로워요. 왜요? 소인이 왜 그래야 하나요? 입을 닦고 외면할 수도 있는걸요.”
“왜냐하면….”
나는 똑바로 말했다.
“왜냐하면, 언제나 항상 저희한테 행운을 빌어주셨으니까요.”
탑.
스테이지가 클리어될 때마다 우리 헌터들에겐 목소리가 들렸다.
『탑에 오르는 자들이여.』
『그대들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단지 그뿐.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응원’이었다.
“당신은 절대자면서 우리를 조롱하지 않아요.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방향을 향해서 다그치지도 않아요. 1층에 머무르고 싶은 헌터는 영원히 머무를 수 있어요. 더 높은 층을 올라가는 헌터에게, 당신은 행운을 빌어주며 다만 주의할 것을 요구합니다.”
쉬고 싶은 자에게 안식처를.
승부에 나서는 자에게 건투를.
“그것만이 아니에요.”
불지옥 저택의 아이들.
붉은 빗방울을 흘리는 마왕.
설원에서 영원히 고독한 모란.
끝나지 않는 열흘을 반복하는 심장.
“당신이 탑에 층을 허락한 사람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다 고독하고 슬픈 자들이에요. 비극으로 끝날 사람들만 모아서, 당신은 탑을 꾸렸어요.”
나는 생각한다.
“당신은 선(善)합니다.”
눈앞의 탑주는 선한 절대자라고.
“저희끼리 싸우고 죽이는 일에 당신은 절대 간섭하지 않지요. 저희의 자유를 존중하니까. 하지만, 탑의 오류로 인해 생겨난 피해에는 반드시 보상할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아니라 탑의 책임이므로.
“탑을 세워주셔서 감사해요.”
“쭉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저번에는, 그럴 경황이 없었어요. 항상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탑이 없었으면 저, 어차피 바깥 세상에서 쓰레기처럼 살았을 거예요. 아. 아니, 탑에 들어와서도 쓰레기처럼 살았지만요….”
잘못 살았었다.
잘못 살았는데, 삶을 다시 물릴 수 있었다.
“만일 당신이 없었으면… 저 혼자서는 4000일 넘게 되돌아가지 못했을 거예요. 절대로. 여러분은 복수심과 정의심이라고 말씀했지만… 저를 지켜봐 준 사람이 어디엔가 있어서 겨우 버텼어요. 그것뿐이에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허리를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긴 침묵이 있었다.
“응.”
누군가가 소곤거렸다.
“나는 역시 마음에 들어.”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당신에게 호감을 표시합니다.]“나도. 여기에 와서 감사를 표시하는 인간은 너무 오랜만이라서 기억도 안 나는걸. 어라, 있기는 있었나? 어쩌면 처음일지도 몰라.”
[태고의 지팡이가 당신에게 호감을 표시합니다.]“……요즘 아이들은 왠지 몰라도 일단 우리 같은 존재들한테 적의를 품지. 세상이 워낙에 험악해서 그래. 탓하고 비난할 사람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
[공허에서 춤추는 신이 당신에게 호감을 표시합니다.]“하. 단순히 자기보다 높은 존재를 인정하기 싫을 뿐이야.”
[맹목을 관조하는 달이 당신을 못마땅하게 쳐다봅니다.]그리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게요.”
탑의 주인이 흘린 웃음이었다.
“확실히. 조금 귀여운 면이 있네요.”
“…….”
“저는 그저 거울에 불과해요. 사왕. 만일 제가 선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당신이 선하기 때문이겠지요.”
뱀의 목소리가 미소 지었다.
“바라는 보상을 말하세요.”
“집사의 시점에서 24시간 전으로 회귀하기를 바랍니다.”
“바라는 포상은?”
“은백합 영애님의……”
나는 긴장감에 심장이 뛰었다.
“제 연인의 기억을 지켜주세요.”
“과연.”
뱀의 목소리가 키득 웃었다.
“굉장한 스킬을 보상으로 요구할 수도 있어요? 아무튼 탑의 오류를 발견해낸 공로인걸요. 후하게 포상해드려야지요. [회귀자의 태엽 시계]를 강화해드릴까요?”
유혹.
“하루가 아니라 당신 마음대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요. 아니면 [백귀환생]을 강화하는 건 어떤가요? 기억뿐만 아니라 생전의 능력까지 계승할 수 있도록 하지요.”
“필요없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부탁드립니다.”
공손히, 목소리가 거하는 방향으로 이마를 내렸다.
“제가 사랑하는 분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
그리고.
어떤 손길이 나의 숙인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척이나 천천히.
“사왕.”
[회의를 종결합니다.]“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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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률을 재조정합니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99%입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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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느껴진 건, 창문에서 불어오는 봄꽃의 향.
머리가 멍했다.
꼭, 오랜 꿈을 꾼 거 같았다.
“아.”
낯선 것 같은, 낯익은 것 같은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이제야 일어났군요. 집사. 낮잠이 조금 길었답니다.”
금사매 남작 영애.
나의 주인.
“……아가씨?”
“예. 당신의 하나뿐인 아가씨네요.”
금사매 아가씨가 쿡쿡 웃었다. 내 반응이 재밌는 것일까? 가느다랗게 실눈을 뜬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 누가봐도 수도에 적응해버린 영애의 자태여서, 고향에 머무를 적 말광량이로 유명했던 아가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물론 겉모습이 세련되었을 뿐이지 속마음은 예전의 아가씨 그대로지만.
…….
뭐지?
“태자 전하와 저녁을 함께하고 왔더니만 글쎄, 집사가 의자에 앉아서 콜콜 자고 있지 뭔가요. 주인을 버려두고 멋대로 자버린 게 좀 괘씸했지만. 자는 얼굴이 귀여워서 봐드리기로 했답니다.”
“아가씨……”
“어라. 울 것 같은 얼굴. 악몽이라도 꿈꾸었나요?”
악몽? 그런가? 악몽을 꾼 것일까.
설명되지 않는 답답함이 가슴을 꾹 메우고 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걸 방금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 떠올리려 할수록 멀어져서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감각.
“태자 전하와……”
그 감각을 떨쳐내기 위해서, 일부러 말문을 돌렸다.
“전하와 함께 하신 저녁은 즐거우셨습니까?”
“네. 제법. 들어봐요, 집사. 오늘 전하께서 제게 푸른 산호의 반지를 선물해주셨어요!”
금사매 아가씨가 활짝 웃었다. 푸른 산호는 보석의 이름이다. 값어치는 대단할것 없지만, 제국 남부 지방에선 연인한테 청혼할 때 자주 쓰인다.
“그것도 학생 식당이라서 다른 영애와 영식들도 다 보고 있는 앞에서요! 정말, 황태자 전하는 바보지만 그래도 사람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아는 바보라니까요. 이 소식을 들으면 이반시아 소공작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요!”
문득, 숨이 막혔다.
“이반시아 소공작……”
“아. 집사도 궁금해지지요?”
“…….”
무엇일까.
정말로 무엇인가.
가슴의 요동이 목구멍에서 진동이 되어 울렸다.
“라비엘…….”
금사매 아가씨는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집사? 아무리 그래도 소공작을 대놓고 이름으로 부르는 건 조금…. 여기에 우리 둘밖에 없다곤 해도 너무 무례한 짓이잖아요. 예의를 갖추세요, 예의. 가끔 보면 집사는 저보다도 수도의 예절에 무지해요.”
그 순간.
-■■■, ■■ ■ ■■■. ■■ ■■■ ■ ■■ ■■■■!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
[■■■■ ■■■■ ■■■■.]나는 고통스러워서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가씨… 뭔가, 소리가 들리시지 않습니까?”
“소리요?”
금사매 아가씨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를 말씀하는 건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꼭 누군가가 외치는 것 같은데….”
“어어, 집사. 처음엔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저도 슬슬 불안해지네요. 어디 아파요? 머리가 뜨거운가요? 보건실 갈까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자꾸 이상한 말씀을 드려서.”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조금, 두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감기 기운은 아니고… 잠시만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가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아가씨?”
“아. 네, 그러도록 해요.”
금사매 아가씨는 걱정스러운 눈길이었다.
“제가 같이 가드릴까요?”
“아닙니다. 정말로 괜찮……”
-■공■ ■ 개■■!! ■■ ■■! ■ ■■ ■!!
“……습니다. 아마 조금만 걸으면 나아질 겁니다.”
“알았어요. 그럼 다녀오세요. 너무 늦지는 말고요.”
“예. 감사합니다.”
나는 아가씨의 숙실을 나오고 기숙사를 나섰다.
목련이 희게 피어서 달처럼 맺힌 밤.
하지만 정원으로 나온 뒤에도, 내 가슴의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직 내가 회귀자가 아니었던 시절이다.』
걸었다.
『태자 전하께선 금사매 영애와 맺어지게 되었지.』
무작정 걸었다.
꿈속에서 걷는 몽유병 환자같이.
『나는 분하고도 분하여서, 가문에 전해지는 검에 기대어 소원을 빌었다.』
『제 사랑이 영원히 이어지게 해주세요.』
『그랬더니, 내 삶이 영원해지더군.』
정처 없이 걸어간 길의 끝에는, 어이없게도, 이반시아 소공작의 거대한 숙소가 있었다. 지금까지 스쳐서 지나간 적은 있되 단 한 번도 내가 자청하여 걸어온 적은 없는 장소.
나와는 인연이 없는 곳.
『나의 심장은 그날 이후로 고정되어버린 것이다.』
없을 터인데.
“…….”
왜 이런 곳에 온 거지?
‘돌아가자.’
나의 주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야 해.’
그런데 어째서인지, 발걸음은 뒤로 돌아서지 않았다.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발걸음은 앞으로 나아갔다. 내 손이 대문의 쇠창살을 밀었다.
끼이이익-
문이 가볍게 열렸다.
공작가의 경비병들은 서 있지 않았다.
“…….”
정말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 꿈속에 갇힌 걸지도.
그렇다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내가 이유 없이 대문을 건너서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도.
정원에 꽃 피운 벚나무와 목련에 까닭 없이 가슴이 저린 것도.
한 번도 초대된 적 없는 공작 영애의 숙소인데, 왠지 모르게 지리를 꿰뚫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이어지는 것도.
“왔는가.”
저 복도 끝에서 공작 영애가 서 있는 것도.
『나는 그대를 기다리고 있으마.』
그녀가 나를 바라보면서 작게 미소를 짓는 것도.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10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