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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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맨스 판타지 규범999
『사랑에 규범 따위는 필요 없다.』
2.
살다보면 우연하게 선물을 받을 때가 가끔 있다.
“금사매 아가씨.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헤에. 집사가 절 [아가씨]가 아니라 [금사매 아가씨]라고 부르는 건 오랜만이네요. 그 때마다 꼭 불길한 일이 벌어졌지요. 이번엔 또 무슨 사건인지 제가 한 번 추론해보죠.”
금사매 남작 영애는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그야말로 우아한 자태 .
“저에게 숨겨진 이복자매가 있나요?”
“아닙니다.”
“과연. 사실은 저의 어머니가 사실은 전대 황제 폐하께서 낳으신 사생아였고, 그래서 제게도 황실의 핏줄이 얼마간 이어져 있나요? 그래서 황태자 전하와 저는 이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든가?”
“아닙니다.”
“아니면 제게는 숨겨진 이복자매도 있고 숨겨진 혈통도 있어서 개쩌는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발탁될 재능이 충만한가요?”
“아닙니다.”
“그럼 뭔가요, 이 씨방새야?”
“저 곧 결혼합니다.”
“오호라. 결혼이라. 결혼이군요. 결혼—.”
푸우웁!
금사매 영애는 마시던 찻물을 분사했다. 주로 내 얼굴에.
우아한 기품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결혼?!”
“예.”
“결호오오오온?!”
“그렇습니다.”
“농담이라면 너무 저열한 농담이군요, 집사! 오랜만에 저한테 처맞을래요?!”
“농담이 아닙니다.”
나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쓱쓱 닦았다.
“이런 거로 아가씨한테 농담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정말로 결혼할 겁니다. 말리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혼삿날도 한 달 뒤로 잡았습니다.”
“사, 상대는요?”
“은백합 공작 영애입니다.”
“아, 뭐야. 역시 구라였잖아요.”
금사매 영애가 어휴, 한숨을 쉬었다.
안심한 얼굴. 설령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라비엘과 내가 결혼할가능성은 없다고 여기는 표정이었다. 하긴 뭐,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긴 하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그냥 구라도 아니고 개구라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를 속이려고 한다면 조금 더 그럴듯한 구라를 창작해주세요. 창의력 부문에서 낙제점을 드리지요.”
“만약 진짜라면 제 결혼을 허락해주시렵니까?”
“아하하. 예에, 예에. 얼마든지 허락해드리죠. 집사. 만약 진짜라면 말이에요. 오히려 제국에서 제일 고귀한 가문과 제 시종이 혼약을 맺게 된다니, 저 개인적으로도 엄청 이득이고? 저희 집안의 격이 단번에 여섯 계단은 뛰어버리고?”
“부디 여기에 도장을.”
“응?”
나는 미리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뭔가요, 집사?”
“제가 라비엘 이반시아 님과 혼인하게 될 시, 원래 주인으로서 이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서류입니다. 저는 금사매 아가씨의 그늘에서 벗어나 이반시아 가문의 부인이 됩니다.”
“풉!”
금사매 영애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 이반시아 가문의 부인… 푸쿠흡! 뭔가요, 그거. 농담? 개그? 우리 집사가 뭐 [이반시아 공작 부인님]으로 불리기라도 한다는 건가요? 상상만 해도 존나 꿀잼이네요. 제가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게 차라리 더 개연성 있겠어요.”
그렇게 웃던 금사매 영애는 싱긋, 결이 다른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이번에는 그렇게 될 거지만 말이에요.”
음.
나는 이 묵시록에 들어오기 전에 읽었던 요약문을 떠올렸다.
‘2회차 여주.’
지금에 이르러선 대충 짐작이 되는 금사매 영애의 정체, 아직 그녀에게 빙의하지 않은 이단심문관 등등 많은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잠시간 묻어두고 말했다.
“도장을 찍어주시겠습니까?”
금사매 영애는 다시 배를 잡고 웃었다.
“오, 기꺼이. 이걸로 집사의 흑역사가 추가되는 셈인걸요. 너그러운 주인으로서 이런 꿀잼을 외면할 순 없죠.”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부군이 될 분을 부르겠습니다.”
“예에. 네에. 이반시아 공작부인님. 제국에서 두 번째로 밝은 달이시여. 아무쪼록 망상 속의 부군이랑 즐겁게 뛰놀아주세요.”
다음날.
나는 라비엘과 함께 금사매 영애의 앞에 섰다.
“불러왔습니다. 아가씨.”
“…….”
금사매 남작 영애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이미 알고 있겠다만 재차 인사하마.”
라비엘은 부채를 지피며 말했다.
“이반시아 공작가의 적녀이자 후계자, 라비엘 이반시아다. 황제 폐하께 은백합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어? 아. 네에, 당연히 알고 있지요. 공녀님……?”
“이번에 경사스럽게도 본인이 그대의 집사와 혼약을 맺게 되었다. 집사는 그대에게 신원이 묶인 몸. 그대가 허락하지 않으면 혼인도 난해해질 터이거늘, 흔쾌히 허락해주었군. 고맙다.”
“네에……?”
“이건 청첩장이다.”
라비엘이 편지를 툭, 날렸다. 테두리는 은실로 치장했다. 편지 정중앙엔 빨간 왁스 실링이 공작가의 인장으로 찍혀 있었다. 금사매 영애가 벙찐 얼굴로 편지를 받아들었다.
“기뻐해라. 청첩장을 받은 사람은 그대가 최초이니. 굉장한 영광으로 여겨주면 좋겠군. 음, 지금까지 집사를 보살펴준 그대에게 조촐하게나마 선물하는 것이다.”
“지, 집사……? 지금 이거 농담이죠……?”
“무례하군. 오늘부로 이 남자는 그대의 집사가 아니라 내 약혼자다. 설마 이반시아 가문의 격이 그대의 남작가보다 낮다고 생각하진 않으리라 믿네. 이제부터는 예의를 갖추어서 내 약혼자를 대하도록.”
“고, 고, 공작…… 부이인……?”
금사매 영애는 세상 잃어버린 낯짝으로 날 쳐다봤다. 시선이 절절했다. 지금 자기가 입에 담은 호칭을 제발 부정해달라는 눈빛.
나는 예의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를 모시어서 참 영광이었습니다.”
“…….”
“하지만 이제부턴 부인님이라고 부르십쇼. 정중히.”
“………….”
“그럼 갈까요? 라비엘.”
“허어. 남들이 보는 앞에선 부군이라 부르라고 말하였다.”
“아아, 죄송합니다. 부군. 아직 호칭이 입에 안 익어서….”
“내 부인은 참으로 잔망스럽군.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애정한다만.”
“사랑해요.”
“사랑한다.”
우리는 나란히 자리를 떴다.
잠시 후. 등 뒤에서 아련히 비명이 들렸다.
“이게 뭔가요오오오-?!”
목련이 지던 봄.
결혼이 다가오고 있었다.
3.
나의 연인, 라비엘 이반시아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라비엘이 1달 안에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말하면 진짜로 1달 안에 결혼식이 열린다.
“아버지를 별장에 유폐시켰다.”
라비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히 말했다.
“아직 아버지를 따르는 무리가 가문에 있으나 소수에 불과하지. 무시해도 될 수준이다. 황상과 교섭하여 정식으로 후계 계승을 인정 받았으니, 이미 나는 이반시아 공작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은백합 영애가 아니라 은백합 공작이라 불리겠군.”
“어어….”
졸지에 장인어른이 유폐 당했다.
‘이거 이래도 되나?’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장인어르신께 싱숭맹숭한 배덕감을 느끼고 있자니, 라비엘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대는 명실상부 이반시아 공작의 약혼자다. 황실 다음으로 신분이 높은 가문의 안주인이 된 것이다.”
“…….”
“황제 폐하와 황후, 태자를 제외하면 그대가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하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이 제국에는 없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제국민은 그대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황실이 거하지 않는 곳에서, 그대는 마땅히 제일 존귀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라비엘은 진지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대단히 큰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여태껏 나는 다만 라비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결혼식을 대했다. 그 사랑은 달콤했다.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라비엘에게 결혼이란 낭만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나는 그 무언가의 거대한 실체를 예감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는 평민에 불과한데….”
“물론 사교계의 잡것들은 수군거리겠지. 공자여. 그대에게 출신이란 불편한 드레스의 치맛자락과 같아서, 어디를 가도 그대를 따라갈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의 조치는 끝마쳤다.”
조치.
“무슨 조치인가요?”
“그대는 먼저 황실 시종장의 양자로 입적할 것이다.”
라비엘은 서류 한 장을 내게 건네주었다.
“작금의 시종장은 오래토록 황실을 보필한 중진이다. 귀족위를 받기도 했으며, 사생활이 깨끗하여 명예가 드높다. 무엇보다 자식이 없지. 그대는 이 늙은 시종장의 양자가 되어 신분을 한 차례 높인다.”
세상에.
아니, 진짜로 세상에.
“그, 그래도 돼요?”
“그래도 된다. 내가 바란다면.”
지금도 라비엘은 산더미 같은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스스슥! 라비엘의 깃펜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저 서류들이 무엇인지, 도대체 어떤 정치적 파장을 일으킬지, 나로선 도저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귀찮은 절차는 모두 생략했다. 그 서류에 서명만 해라. 그러면 그대는 황실 시종장의 양자로 인정받는다.”
“…….”
그렇다.
결혼은 현실이었다.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장인어른이 유폐되었다. 역시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누군가의 양자가 되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었다.
입양 서류에 사인하면서,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이반시아 공작의 남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그것은 며칠 뒤에 직면하게 된 광경에서 적나라하게 증명됐다.
“제국에서 두 번째로 밝은 달이 되실 분께 인사를 올립니다.”
잠깐 아카데미를 거닐기만 해도, 나를 알아본 영애와 영식들이 무릎을 굽혔다. 더없이 정중했다. 어느새 아카데미에도 소문이 퍼져버린 것이다.
“이반시아의 안주인께 경의를 표하옵니다.”
“아. 그래….”
“혼약을 경하드립니다. 이반시아에 영원한 영광이 있기를.”
“고, 고맙다.”
내가 근처를 걸어가기만 해도 영애와 영식들은 잡담을 멈췄다. 하던 일을 중지했다. 그리고 내가 지나갈 때까지 예의를 차려 침묵했다. 아카데미의 경비병, 기사들도 나를 보면 공손히 경례했다.
예외는 없었다.
아카데미의 교사들마저 당연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
탑에서 랭킹 3위에 올랐을 때. 일약 인기 스타가 되어 인파에 둘러싸였을 때조차… 지금 같은 기분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이것이, 계급.’
인기 스타가 아니다. 연예인이 아니다. 저들은 나를 둘러싸지 않았고, 내 얼굴을 찍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단지 무릎을 꿇을 뿐.
‘……굉장하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 앞에서만 저럴 것이다.
당장 내가 사라지고 나면, 나의 일천한 출신에 대하여, 석연치 않게 파탄나버린 황태자와 라비엘의 약혼에 대하여, 온갖 추잡한 소문과 추레한 험담이 오갈 것이다.
그러나 감히 내 앞에서 수군거리는 인간은 없었다.
“힉!”
쨍그랑!
하루는 아카데미 소속의 하인이 물병을 옮기다가 깨트렸다. 마침 내가 근처를 지나치던 참이었다. 나는 무심코 [괜찮습니까?]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 순간, 주변에 있던 6명의 하인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소, 송구하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어리석은 것이 저지른 잘못이니 부디 용서를…!”
나는 말문이 막혔다.
다른 이유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게 아니었다.
저들이 당연하다는 듯 내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 저들을 [용서할 권리]가 내게 있다는 사실이 내 사고를 마비시켰다.
달리 말하면, 저들을 용서하지 않고 처벌하는 것도 나의 자유였다.
“…….”
미쳤다.
이건 미친 일이었다.
-왜 그래? 이러는 게 당연하지.
배후령이 공중에서 둥실둥실 수영하며 말했다.
-명목상으로나마 신분이랑 계급이 없는 너희 탑이 신기한 거다. 몰랐지? 50층 올라가 보면 알게 될 텐데, 대부분의 탑은 계급사회거든.
50층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세계의 탑과 경쟁하게 된다고 했던가.
배후령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더니 후, 불었다.
-네 부군 되시는 분이 속해있는 이반시안가 뭔가 하는 가문은 여기서 황실 다음으로 끗발이 강하다매. 그럼 좀비 넌 왕후가 된 거나 다름없어.
왕후.
-신데렐라가 된 거 축하한다. 짜식.
하인들은 복도에 엎드린 채 어깨를 벌벌 떨고 있었다.
문득 라비엘이 한 말이 떠올랐다.
『모든 제국민은 그대를 축복해야 한다.』
『나의 세계와 나의 국가라면 마땅히 나의 결혼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런 뜻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나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랐다.
권력의 정점에 올라버린 것이다.
‘이것이… 라비엘의 세계구나.’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처신해야 좋을까?’
단순한 [김공자]로서가 아니라.
이명을 가진 헌터 [사왕]으로서가 아니고.
이 나라에서 제일 고귀한 귀족의 [배우자]로서.
“…….”
나는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깨진 물병의 파편을 주웠다.
실수를 저지른 하인의 손바닥에, 조용히 파편을 올렸다.
“그 조각을 목걸이로 만들어서 걸고 다니거라.”
나는 입을 열었다.
“목걸이는 심장에 제일 가까운 장신구다. 너의 실수를 너의 심장에 가장 가까운 곳에 두어,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쳐라.”
“…….”
“내가 그대를 용서하는 것을 기다리지 마라. 네가 스스로 생각하여 충분하다 느꼈을 때, 너 스스로 용서하거라. 알겠는가.”
“예, 예에……!”
나는 등을 돌려서 걸어갔다.
이 일이 벌어진 날의 저녁에, 라비엘이 말했다.
“부인이 사려 깊은 대응을 보여주었군.”
나는 나이프와 포크로 고기를 썰었다. 저녁을 먹을 겸 테이블 매너를 배우고 있었다. 내가 충분히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라비엘은 맞은편에서 일부러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어. 음. 제가 잘한 거 맞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만약 그 때 부인이 쉽게 용서했다면, [역시 출신이 비천해서 그런지 아랫것들에게 엄하지 못하다. 저런 태도로 어찌 공작가를 이끌겠는가] 같은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만일 엄히 다그쳤다면, [하루아침에 출세한 놈답게 벌써부터 기고만장하다]라는 풍문이 돌았겠지.”
어느 쪽이든 아웃이다.
“용서해도 혼내도 사람들은 부인을 욕볼 터. 이럴 때 사건의 본질은 중요하지 않다. 포장이 중요하다. 부인은 미담(美談)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번 사건을 슬기롭게 포장했다.”
라비엘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이미 제국의 사교계에 다 퍼졌다. 순전히 호기심을 가진 사람은 부인의 심성에 감탄할 것이고, 머리가 굵은 사람은 부인의 현명함을 인정할 것이다. 정치에는 문외한인 줄 알았다만. 나의 연인은 무슨 마법을 부렸는가?”
“……그저 라비엘을 생각했습니다.”
내 나이프가 달걀노른자를 갈랐다.
어린 병아리의 색깔이 허물어졌다.
“제가 보지 못하는 곳. 제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라비엘이 엄청나게 뛰어다니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음.”
“당신이 저를 생각해서 얼마나 열심일까 생각했더니, 자연스럽게, 저도 당신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단지 라비엘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처신해야 내 아내에게 제일 좋을까.』
“하인을 용서하면 저는 너그러운 공작부인으로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하인을 혼내면 엄격한 공작부인이 되었을 거고요. 그렇지만, [현명한 부인]이라는 인식이야말로 라비엘에게 가장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인가?”
“제가 너그럽게 처신한다고 해서 라비엘이 너그러워지는 건 아닙니다. 제가 엄격하게 군다고 해서 라비엘이 엄격해지는 것도 아니에요.”
테이블 위의 촛불이 사위었다.
“하지만 제가 현명하면 라비엘도 덩달아서 현명해집니다. 왜냐하면 [현명한 배우자]를 골랐다는 건, 그것 자체로 라비엘이 현명하다는 걸 뜻하니까요.”
“…….”
라비엘은 하얀 냅킨으로 입술을 훔쳤다.
“나를 생각했군.”
“예.”
“공자여. 그대는 이미 나를 도와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몰라주겠으나, 그대는 이 세계를 멸망의 위기로부터 구했다. 앞으로도 구할 것이다. 조금은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지 않은가?”
“아니요.”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라비엘과 평생을 함께할 거예요. 평생입니다. [ 내가 라비엘한테 무엇을 해주었는지 ]에 집착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지금까지 해준 것보다 더 많은 걸, 더 귀한 걸 라비엘한테 주고 싶습니다.”
“…….”
“저와 만난 것이 라비엘의 삶에서 제일 큰 행운이면 좋겠어요. 저와 함께하는 것이 라비엘에게 가장 큰 행복이길 바랍니다. 오직 저만이, 라비엘에게 가장 큰 의미가 되길 원합니다.”
“……행운이나 행복 따위가 아니다.”
라비엘이 식탁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그대는 나에게 하나의 기적이다.”
우리는 입술을 겹쳤다.
* * *
물론 모든 사람이 이반시아의 이름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저는! 이 결혼에! 반대하겠어요!”
금사매 남작 영애가 매일같이 내게 찾아와서 하소연한 것이다. 태자가 황제한테 불려나간 지금, 금사매는 차마 라비엘한테 직접 대들 순 없었는지 나한테만 항의했다.
“이미 서류에 도장을 찍으시지 않았습니까?”
“무효예요, 무효! 농담이라고 생각해서 찍은 거라구요!”
“아가씨의 생각과 상관없이 서류는 법적으로 완벽합니다.”
“으… 으으으!”
금사매 영애는 손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상하다. 이상해요. 이런 일은 저번에 없었는데… 저로 인한 나비효과? 아니야, 그렇다고 보기에는 도무지… 아아, 폐허를 추수하는 소 님, 대체 이건 무슨 일이…?”
폐허를 추수하는 소.
그 키워드를, 나는 일부러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금사매 남작 영애는 이를 꽉 물었다.
“됐어요. 보나마나 이것도 은백합 영애가 꾸민 일이겠지요!”
“은백합 공작 영애님입니다. 곧 공작이 되실 분이고요. 예의를 지키십시오.”
“읏. 집사, 정말로 미워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금사매는 나를 노려보고 방에서 나갔다. 쾅! 거칠게 문이 닫혀서 경첩이 삐걱거렸다. 대놓고 이번 결혼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아마도 금사매 남작 영애야말로 이번 결혼식의 최대 방해물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결혼식이 열흘 앞으로 다가온 날.
“사왕!”
금사매 영애의 복장을 한 누군가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저, 아무래도 이 묵시록의 여주인공이 되어버린 모양입니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미소를 지었다.
“이단심문관 씨.”
“예! 사왕!”
“열흘 뒤에 이계의 성좌들이 침략해올 겁니다.”
최대의 방해물에서 최고의 조력자가 된 동료를 향해 말했다.
“성전을 준비해주세요 SSS급 종교인님.”
11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