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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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허를 추수하는 소이시여….
금사매가 애달프게 기도했다.
-새로운… 새로운 가호를 저에게 허락해주세요!
인간은 궁지에 몰리면 작아진다. 그 사람의 정신. 사고의 폭이 급속도로 좁하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도피할 수도 있고, 무작정 누구한테 매달릴 수도 있다. 금사매도 다르지 않았다.
-대, 대가로… 그렇지. 그 대가로 제 존재를 바칠게요! 아니, 당신께서 바라시는 대로 이 세계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폐허! 박살! 파괴! 무티아께서 애호하시는 건, 그런 것들 아니던가요?! 저, 잘해요! 그런 거!
터벅. 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힉.
금사매는 나의 발소리를 듣고 더 다급해졌다.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뒷걸음질 치며, 당장이라도 구원이 내려올 거라는 듯 새빨간 석양을 올려봤다.
-잘하는데, 저! 무티아 님! 저 진짜 박살내는 거 하나만큼은……!
하지만 응답은 없었고.
-이건,
기도는 원망으로 빠르게 상했다.
-이건 계약 위반이야!!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내게 새로운 운명을 만들 수 있는 힘을 준다며! 그런데, 왜! 왜 내 몸에 이상한 미친년이 들어가 있는 건데! 돌려줘! 내 몸을 내놔!
“앗. 말씀이 잘못되었군요.”
이단심문관이 밝게도 말했다.
“혹시 절 말씀하시는 거라면, 죄송합니다만 제 신체적 성별은 남성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말씀이 틀렸습니다! 전 [미친년]이 아니라 [미친놈]이라 해야 맞습니다. 음. 보다 건강한 언어생활을 권장드리자면 [실성한 사람] 정도로 교정하는 것이 바람직하군요! 건강한 언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답니다, 에비나일 씨!”
-씨발 새끼!
금사매 남작 영애, 아니. 실비아 에비나일은 악을 썼다.
-잘못됐어! 그래, 잘못됐다고! 계약 위반이야… 나는 황후가 될 자격이 있어. 라비엘 이반시아보다 더 대단한 지위에 오를 거라고. 그럴 예정이야! 운명이야. 내가 만든 운명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계약 위반이고… 나는,
한 걸음 더.
-읏!
그제야 실비아 에비나일은 하늘에서 눈을 돌렸다. 이제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가까워진 탓에.
-괴물 자식!
실비아 에비나일은 망치를 휘둘렀다. 채앵! 쇠망치와 성검이 부딪혔다. 실비아 에비나일은 두서없이 망치를 내리찍었고, 나는 걸음을 밟아가며 쉽게 공격을 흘렸다. 공격이 엇나갈수록 실비아 에비나일은 점점 조급해졌다.
조급해진 마음은 부러뜨리기 쉬웠다.
-아,
나는 실비아 에비나일이 크게 망치를 휘두른 틈을 노렸다. 그녀의 손목을 갈랐다.
-아아아아아악!!
당연하지만 상처 따윈 없었다. 핏자국도. 핏물도. 고통을 증거하는 어떤 붉은색도 낭자하지 않았으나, 실비아 에비나일은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망치를 놓쳤다. 쿠우웅! 쇠망치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아, 으… 으으….
나는 실비아 에비나일과 눈을 마주쳤다. 망치가 떨어지면서 피워올린 흙먼지가 우리 두 사람의 무릎에 묻었다.
“선택해라.”
-서, 선택…?
“당신은 어차피 이 세계에서 있을 자리를 잃었어. 설령 이대로 도망친다해도, 너는 더 이상 [금사매 남작 영애]가 아니야. 성좌의 사도에 불과하지.”
-…….
“기회를 주마.”
실비아 에비나일은 손목을 잡은 채 나를 노려보았다.
“이대로 성좌의 하수인으로 남아 있겠다면, 마음대로 해. 도망쳐. 놓쳐줄게. 하지만 아직 이 세계에 미련이 있고, 여기에 남아서 더 뭔가를 하고 싶다면. 네가 두른 성좌의 가호를 포기해라.”
-왜 그런….
“그리고 내 검에 죽어라.”
나는 칼을 겨누었다.
“방금 전투를 봤겠지. 내 손에 죽은 이들을 나는 소환할 수 있어. 생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서 말이야. 실비아 에비나일. 네가 스스로 항복하면, 다시 한 번 [금사매 남작 영애]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세계에 소환시켜주마.”
-…….
“물론 예전과 똑같은 삶이 이어지진 않겠지. 나의 연인, 라비엘 이반시아에 대한 적대적인 행위는 전부 금지한다. 하지만 그것뿐이야. 나머지는 알아서 해. 황태자와 결혼하든 말든 마음대로 살아.”
-왜…..
“삶이란 건 다시 살 수 있어야 하니까.”
노을은 이제 붉은색에 보라색을 더하고 있었다. 제국에서 결혼식은 노을이 드리울 때부터 멀어질 때까지. 나는 이제 30분도 남지 않았을 시간을 어림짐작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나, 나를 소환수로 삼아버린 다음에 노예처럼 부려 먹으면? 반항할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잖아.
“생각을 해라.”
나는 실비아 에비나일을 바라보았다.
“왜 하필이면 ‘당신’과 ‘당신의 집사’가 빙의체로 선택되었을지.”
-하?
“당신은 모든 것을 성좌한테 바쳤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기억과 몸, 모든 것이 성좌한테 넘어갔어. 그래서 이 세계에서 당신이 차지하던 자리가 공백이 되어버린 거야.”
누구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 누구든 대신할 수 있는 공백.
[방구석 도서관장]이 나와 이단심문관을 빙의시킬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당신의 자리가 비어버린 건 이해할 수 있지.”
그러나.
“네 집사는 왜 공백이 되어버렸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
실비아 에비나일이 눈을 치켜떴다.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한 번 집사가 되어봤어. 집사의 인생에 완전히 몰입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이 남자가 당신에게 지고지순했다는 거야. 실비아 에비나일.”
그 점에 착안하여 나는 추론했다.
“장담하는데, 설령 네가 제국의 황후가 되었더라도 절대 행복하지 못했을 거다.”
-뭐 …?
“당신이 말했잖아. 황태자를 사랑해서 황후가 되려는 게 아니라, 라비엘보다 잘나고 싶어서 황후가 되려는 거라고. 그런 식으로 황후가 되어봤자 인생이 제대로 돌아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꽤 유능해. 하지만 라비엘보다는 아니야. 라비엘이 타고난 가문의 권력과 위엄이 너에겐 없어. 라비엘처럼 군중을 조종하고 장악하는 능력이 없다. 기껏 황후가 되어본들, 사람들은 끝없이 라비엘과 비교하면서 너를 깎아내렸을 거다.”
-……..
“평생.”
만일.
한 명의 집사가 있었다고 해보자.
그 집사는 주인이 한평생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아는 집사는, 너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칠 남자야.”
집사는 생각했을 것이다.
[금사매 아가씨께서 황후가 되지만 않았더라면 행복해지셨을 텐데.]“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집사가… 내 집사가, 회귀를 했다고?
“아니.”
집사는 회귀자가 아니다.
“너는 너 자신을 위해 소원을 빌었지. 하지만 집사는 아니야. 집사는 너를 위해서 소원을 빌었다. 자기 자신의 삶을 되돌리길 원한 게 아니라, 단지, 네가 되돌아가길 원했을 뿐이야.”
-무슨 소리야…?
“당신. 집사의 이름을 기억하나?”
-하아?
실비아 에비나일이 미간을 좁혔다.
-당연하지. 내 집사의 이름은…….
그러나.
-……어?
실비아 에비나일은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미간을 더욱 좁혔다. 잠시 뒤, 미간의 찡그림이 풀렸다. 실비아 에비나일은 당황한 듯 허공을 쳐다봤다.
-잠, 깐만. 이럴 리 없어. 아? ……아? 어어…?
나는 담담히 실비아 에비나일을 지켜보았다.
그렇다.
이 세계에서 집사는 단 한 번도 이름으로 불린 적 없다.
실비아 에비나일도 집사를 이름으로 부른 적 없다. 한 명밖에 없는 시종이자 소꿉친구일 텐데, 그녀는 다만 ‘집사’라고만 불렀다. 방에 단둘이 있어서,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는 순간조차.
『집사.』
라비엘 이반시아도 집사를 이름으로 부른 적 없다. 제국의 모든 정보를 손아귀에 쥐고 있으며, 그러기에 금사매 남작 영애의 측근을 모를 리 없는데도.
『집사여.』
내가 빙의하게 된 자.
남작 영애의 하인은, 이 세계에서 이름이 삭제된 것이다.
정말로 모든 것을 성좌에게 바쳤기 때문에.
나 역시.
집사에게 완전히 몰입했던 나조차도 그의 이름을 모른다.
기억해낼 수 없었고, 떠올릴 수 없었다.
-…….
실비아 에비나일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그럼, 뭐야…?
견고하게 쌓아올린 탑이 꼭대기부터 무너지듯.
-집사는, 아예 사라졌다는 거야?
“그래.”
아마도.
이 세계는 3번 회귀했다.
맨먼저, 실비아 에비나일이 성좌에게 회귀를 소원했다.
소원을 들어준 성좌는 [폐허를 추수하는 소].
파괴와 재창조를 관장한다는 이 성좌는, 실비아 에비나일에게 한 번의 삶을 더 허락해주었다.
실비아 에비나일은 라비엘을 제치고 황후가 되었다.
그다음, ‘집사’가 또 다른 성좌에게 회귀를 소원했다.
소원을 들어준 성좌는… 불명.
집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금사매를 위했고, 그 결과, 이 세계는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 금사매 남작 영애가 황태자와 결혼하기 이전의 시간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과거로.
마지막으로, 라비엘이 회귀를 일으켰다.
소원을 들어준 성좌는 [수호의 여신]의 파편.
이 회귀의 결과로 세계는 영원히 반복되는 열흘에 갇혔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다.
“우리는 집사의 이름을 알 수 없어. 영원히.”
-…….
“집사가 어떤 마음으로 네 인생을 옆에서 보필했을지. 어떤 생각으로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면서 회귀를 기도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사라졌으니까.”
다만.
“집사는 네가 다른 삶을 살아주기를 원했을 거고.”
그러하므로.
“나는 집사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
-…….
“실비아 에비나일. 당신이 모르는 곳에서, 당신이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오직 당신만을 위해서 희생했다.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 했던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것이 어느 이름 없는 집사가 사랑했던 방법.
“다시 살아라.”
아직 늦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이 바란 대로, 다시 살아.”
실비아 에비나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떨었다. 입을 뻐끔거렸다.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곳에서 하나의 삶이 경련하고 있었다. 저주받은 인생. 그럼에도 당신이 살아주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가혹한가.
-…….
실비아 에비나일이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정면을 바라볼 힘이 더는 없었다.
천천히, 그녀의 온몸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성좌의 가호가 풀리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연민검을 해제하고, 다시금 우상검을 불러들였다.
붉게 작열하는 노을.
내 검의 그림자는 땅에 길게 드리웠다.
그림자가 검을 휘둘렀다.
[‘폐허를 추수하는 소’의 사도가 소멸합니다.]노을이 졌다.
이계의 사도들은 모두 토벌당했다.
이 세계를 위협하던 존재들은 사라진 것이다.
[스테이지 클리어.]그것을 알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마도 이곳에서는 이단심문관과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
[금일.] [25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탑의 목소리였다.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알립니다.] [금일, 25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공략 인원 측정 중.] [측정 완료.] [공략자 3명을 공지합니다.]사람들이 부스스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귀. 교인들. 하객들. 사도의 노래에 휘말려 꿈을 꾸게 되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으으….”
“대체 무슨 일이…?”
그런 사람들 위로 문자가 떠올랐다.
+
[공략 기여도 순위]1위. 사왕(死王)
2위. 이단심문관(異端審問官)
3위. 없음
+
“…….”
나는 말없이 그 문자를 바라보았다.
이번 스테이지에 투입된 인원은 2명.
[방구석 도서관장]이 보낸 헌터는 이단심문관과 내가 전부였다.그러나 탑은 공략자를 3명으로 표시했다.
‘없음.’
있을 리 없는 세 번째 공략자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음.”
라비엘은 그런 내 곁으로 다가와서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는 어깨를 기대었다. 그리고 라비엘은 천천히 하객들을 둘러보았다.
“나의 남편이며 이반시아공작가의 부인이다.”
막 꿈에서 깨어난 하객들이 멍하게 라비엘과 나를 쳐다봤다.
“이 결혼에 반대인 자, 있는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불만을 품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반대할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과거지사가 되어버렸다.
이계의 존재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경천동지할 일. 심지어 하객들은 내가 이계의 존재를 물리치는 광경까지 목격했으니까.
하객들은 입 다물어 침묵함으로써 라비엘의 말에 동의했다.
“좋다.”
바로 그것을 노리고 오늘을 결혼일로 잡은 장본인.
라비엘, 나의 신부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이 남자와 나의 결혼이 무사히 성사되었음을 선언한다.”
11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