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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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탁을 듣고 동료들은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이 지나온 반생을 돌이켜보는 걸지도 몰랐다. 숙청으로 얼룩진 나날들을.
“……정말로, 어려운 길을 부탁하는구나.”
한참이 지나서야 흑룡주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탄에 가까웠다.
“사람은 노력하면 유능해질 수 있어. 노력하면,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지. 노력해서 권력자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만 유능하고 도덕적인 권력자 같은 건 불가능에 가깝단다. 단순히, 너무 어려워. ……어려운 길이야.”
“누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나는 길드장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천국으로 향하는 길은 무수한 악의로 덮여 있겠지요.”
우리를 질투하는 자가 무수할 것이다. 재미 삼아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도 많을 거다. 권력을 탐하여 사람들끼리 싸움을 붙이거나, 거주민을 선동하는 인물마저 등장하리라.
그런 사람들이 있다.
많다.
악의는 평범하기에 독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포기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바깥세상을 포기하고 이곳으로 도망쳐온 사람들한테,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보여주도록 해요.”
나는 손을 내밀었다. 상대방과 악수하기 위해 내민 손짓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손을 모으기 위한 포즈.
마치 스포츠의 팀원들이 경기를 앞두고 화이팅을 외치듯, 나는 길드장들을 향해 가만히 오른손을 뻗었다.
“…….”
“아핫.”
흑룡주가 머뭇거리는 사이, 제일 먼저 이단심문관이 손을 얹혔다. 살짝. 나의 손등과 이단심문관의 손바닥이 포개어졌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정권의 도덕적 정당성은 강력한 호소력을 가집니다. 그리고 사왕은 저희들을 도덕으로 도금(鑛金)시켜줄 유일한 인물입니다. 이런 기회를 놓치긴 아깝군요!”
“크흠.”
독사가 손을 얹혔다.
“이젠 나도 정파(正派)의 후계자라 이거지. 늙은이가 나보고 맨날 정파의 마음가짐을 되새기라느니 어쩌라느니 잔소리하더라. 뭐, 뒷방 스승한테 효도 좀 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하마.”
“음.”
성기사가 손을 얹혔다.
“나는 대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스킬을 발동하고 있었다.”
거짓말 탐지기.
“여기 모인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삿된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무엇보다 김공자. 나는 네가 [천마실록]과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 에서도 오직 올곧은 마음으로 달렸다는 사실을 안다.”
“…….”
“나는 너의 진실된 태도를 믿고, 진실한 사랑을 믿으며, 무엇보다 너의 됨됨이를 믿는다. 모든 혁명은 실패하지.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의 혁명이 제일 아름다운 실패로 기억되도록, 내 인생과 영혼을 바치겠다.”
“으음.”
백작이 손을 얹혔다.
“낭만주의자들의 이야기는 못 따라가겠구먼. 됐네. 본인은 대세에 따를 뿐이야. 내가 몰빵한 주식이 파탄 나지 않기만을 바라지. 부디 건투해주게나, 제군들.”
“…….”
마지막으로.
흑룡주가 주저하면서 손을 얹혔다.
“……나는 많은 걸 약속해줄 수 없어. 당신들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해. 내가 지금까지 써온 수단들을 버리지도 못할 거야. 하지만, 그래.”
검은색 눈동자가 우리를 훑었다.
“만약 우리가 실패한다면. 이 중에서 누군가가 반드시 죽어야만 할 때가 온다면… 내가 제일 먼저 죽겠어. 그거 하나만은 꼭 약속할 게.”
“그러면 저도 약속드릴게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어디서든. 언제라도.”
“터무니없는 공수표를 남발하는구나. 당신….”
흑룡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 만 그녀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우리 6인.
전원의 손이 모였다.
“음. 좋소!”
도서관장은 허공을 유영하며 웃었다.
“사왕. 흑룡주. 이단심문관. 백작. 독사. 성기사. 이상 6인을 [나와 우리들의 희생양]의 등장인물로 지정하오! 제군들이 눈을 뜨면, 그곳은 묵시록이 절찬리에 연재중단을 겪고 있는 세계일 것이오. 주의하시구려. 지금까지 그대들이 맞닥뜨린 묵시록과는 퍽 다르다오!”
도서관장이 책을 펼쳤다. 파아앗! 묵시록의 페이지에서 빛이 흘러나와, 우리들의 겹쳐진 손으로 떨어졌다.
“이번 묵시록의 난이도는 A급!”
빛이 우리를 감쌌다.
“지난번과 다르게 본좌는 그대들에게 많은 가호를 내릴 수 없소. 이 묵시록에는 성좌가 살아 있소. 살아서 군림하고 있소이다. 그대들은 일종의 침략군이 되어 묵시록에 돌입하게 될 것이오. 응당, 성좌는 그대들을 적대하겠지.”
도서관장은 살풋 웃었다.
“사왕. 성좌는 특히 그대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을 것이오!”
‘원수!’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우리의 시야는 완전히 빛에 뒤덮였다. 사실 도서관장의 말을 이해하려고 굳이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이 하얘지고, 우리가 미처 눈을 떠서 새로운 세계를 영접하기도 전에—.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가 침입을 감지합니다.]날카로운 목소리가 우리의 뇌내에 스쳤다.
다급하게 울리는 사이렌처럼 목소리는 연달아서 솟구쳤다.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는 당신들에게 경고합니다.]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는 침입자들을 박멸하고자 합니다.]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가 당신들에게 전쟁을 선포합니다!]나와 우리들의 희생양.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가 ‘당신’을 증오합니다.]이 동화책은, 라비엘의 세계를 침략한 성좌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3.
용사와 마왕의 이야기에서 마왕은 항상 방심한다.
마왕은 결코 처음부터 전력을 드러내지 않는다. 약해빠진 조무래기들부터 용사에게 파견하는 거다. 이야기가 시작할 땐 허약했던 용사는, 점점 더 강한 적들을 물리치며 성장한다.
마침내 마왕에 맞서 대적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니라.
이 동화책의 성좌는 달랐다.
-감히 나의 주인을 적대하는 자여!
성좌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독니를 드러냈다.
우리 일행 중에서 가장 먼저 위기를 감지한 것은, 다름 아니라 나의 성검이었다.
[반짝이가 자매검의 기척을 감지합니다!]허리춤에서 칼자루가 우우웅, 떨었다. 마치 위기를 알리려는 것처럼. 아직 시야가 다 개지도 않았을 때 반짝이는 급히 소리쳤다.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가 지닌 성질과 ‘희생검(樣姓劍)’이 지닌 성질이 일치한 것을 확인!]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는 레판타 아이김이 남긴 네 번째 자매검, ‘희생’입니다!]반짝이의 경고가 끝나자마자 시야가 펼쳐졌다.
푸른 상공.
우리 일행은 하늘에서 낙하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 소환된 직후엔 잠깐 둥실, 하고 떠 있어서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몸은 순식간에 중력에 이끌렸다.
화아아아악!
이마에 스치는 바람. 머리에 쓸리는 피. 우리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음!”
그 때, 이단심문관이 내 팔뚝을 잡았다. 바람에 떠밀려 일행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지만, 한 순간 앞서서 나를 붙잡은 것이다. 이단심문관은 재주도 좋게 양다리로 내 허리를 꽉 옭아맸다. 그리고 수인을 맺었다.
“사왕, 제 오른발을 잡으십시오! 절대 절 놓치지 마십시오! 신성 술식, 송신!”
나는 이단심문관이 지시한 대로 오른발에 달라붙었다. 다음 순간, 이단심문관은 흑룡주의 곁으로 이동했다.
“흑룡주!”
“그래! 다리 내놔!”
흑룡주는 당연하다는 듯 이단심문관의 왼발을 낚아챘다. “아핫,” 이단심문관의 웃음이 바람에 흘러들어 섞였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우리 모두를 짓누르는 중력이 일순 가벼워졌다고 생각했다.
“신성 술식, 송신(送神)!”
이단심문관은 차례대로 백작, 성기사, 독사를 끌어모았다. 우리는 꼭 어미돼지에게 들러붙은 아기돼지들마냥 이단심문관한테 주렁주렁 매달렸다. 이 상황이 독사는 굉장히 민망했는지 꽥 소리를 질렀다.
“야! 왜 내가 마지막이냐?!”
“이 중에서 제일 무쓸모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천무문주! 당신을 잃어버려도 저희의 전력에는 별다른 손해가 없습니다!”
“이 개같은 종교쟁이가?”
다섯 명이 한꺼번에 달라붙자 과연 이단심문관도 수인을 맺지 못했다. 여유 공간 자체가 없었다. 여유 시간도 없었다. 이러는 순간에도 시시각각 지상이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잘했어, 꼬맹아!”
그러나 우리가 다 모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흑룡주가 소리를 높여 외쳤다.
“다들 내 스킬에 동의한다고 말해! 빨리! 빨리!”
“예!” “동의합니다!” “알겠구먼!” “동의한다.” “씨발, 콜!”
“전이!”
여섯 명이 일제히 이동했다. 순간전이. 수인을 맺어야만 하는 이단심문관과 다르게, 그저 신체가 접촉해 있기만 해도 발동되는 흑룡주의 스킬.
[가을비의 마왕]을 상대할 때 신세를 진 바로 그 기술이다.그리하여 우리는 안전하게 지상에 착지했지만.
-놓치지 않는다!
정작 지상이 전혀 안전하지 못했다.
-노래하여라, 나의 사도들이여!
수만. 혹은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지평선 너머까지 ‘어린아이’의 모습을 갖춘 것들이 서 있었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라비엘의 세계를 침략한 사도와 정체가 똑같았다.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어린아이들은 겹겹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라.
그리고 그것들이 노래하였다.
-라, 라.
-루. 라라.
-라.
백만의 아카펠라가 일제히 선율을 이루었다. 십만의 저음과 십만의 고음, 십만의 휘슬링이 겹쳐졌다. 아이들은 즐거운 듯 원무(圓舞)를 추었다. 그것들이 한 발자국 내딜 때마다, 쿠웅, 지상이 가볍게 진동했다.
쿠웅. 쿵. 쿠웅.
-라.
이것이 난이도 A급으로 측정된 묵시록.
세계가 우리를 [적대]하고, 방심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서 없애려 드는 곳.
“크윽!”
일행들이 허겁지겁 오러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묵시록에 전이되고 1분도 안 되어서 우리는 총공격을 받은 것이다. 일신의 오러로는 감히 감당하기 어려운, 행복한 꿈결의 파도가 우리를 사납게 덮쳤다.
“백작!”
이단심문관이 소리쳤다.
“돈 주십시오!”
“빌어먹을, 통장까지 다 깨질 것 같네만…!”
“네! 머리통이 깨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이자 15퍼센트! 복리로!”
“공짜가 아니면 안 받습니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릴….”
“니샤!”
성기사가 악을 썼다. 처음에 나는 ‘니샤’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몰랐다. 하지만 성기사의 눈길이 백작에게 향한 것을 보고 깨달았다. 니사가 백작의 본명임을.
“닥치고 지갑이나 꺼내라! 죽여버릴 거다!”
“윽. 젠장! 인출, 무한대!”
백작이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달팽이 무늬가 새겨진 주머니. 그녀는 주머니 입구에 조여진 금실을 풀어 젖혔다. 촤르르르! 무수한 금화가 바닥에 쏟아졌다.
“사용자 변경! 이단심문관!”
“아하핫, 감사합니다!”
이단심문관이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신성 술식, 헌신(獻神)!”
손안에서 빛이 터졌다. 하얀빛이 금화더미를 감쌌으며, 금화는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대신 우리를 감싼 오러가 말도 안 되게 강화되었다.
“신성 이적, 오러 강화 및 정신공격 면역! 강화 대상, 백작, 이단심문관, 사왕, 흑룡주, 성기사, 독사. 강화 유지 시간, 미정. 황금이 우리의 손을 사로잡을 것이나니. 술식 완료!”
“히이이오오아아앗! 히악! 내 돈!”
백작이 비명을 질렀다. 주머니에선 끊임없이 금화가 쏟아졌고, 쏟아지는 즉시 빛이 되어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백작의 머리카락 위로 고양이 귀가 펄쩍, 튀어나왔다.
“내 돈! 냐! 피 같은 돈! 피보다 소중한 내 돈이!”
“아핫. 헌혈해드릴까요?”
“필요 없네! 내가 파산하면 그 날로 탑도 파산이야! 알겠나! 내일 아침부터 개죽 먹기 싫으면 얼른 공략이나 하게!”
하늘에서 추락. 백만의 노래. 쉴 틈도 없이 닥쳐온 위기에서 우리는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그제야 우리는 일행을 공격한 주범을 살펴볼 수 있었다.
-칫. 우상과 연민, 기원을 집어삼킬 정도의 실력은 되는가. 기껏 기척을 숨기고 기습을 꾀했거늘…!
성좌는 공중에 떠 있었다.
그것은 기원검과 마찬가지로 온몸이 붉었다. 다만 기원검보다 조금 더 검었다. 검붉은 피를 두른 어린아이가 허공에서 치를 떨었다.
-그러나 소용없다! 배신자들의 우두머리여! 레판타 아이김을 향한 나의 충정은 절대 허물어지지 않는다. 너희를 죽여 없애, 나의 주인 께서 걸으시는 패도(顯道)에 방해되지 않게 만들겠다!
과연.
나는 칼자루를 잡아 성검을 꺼내었다.
‘라비엘은 [수호의 여신]의 파편으로 심장을 찔러서 성좌가 되었다.’
파편에 불과하더라도 성좌로 거듭날 만한 잠재력을 가졌다는 뜻.
그렇다면 파편 스스로 [새로운 성좌]가 되어버리는 일도 가능하겠지.
희생검은, [수호의 여신]의 파편에서 벗어나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로 진화한 것이다.
-사도들이여! 저것들을 없애버려라!
그리고 희생검은 여전히 레판타 아이김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내게 흡수당한 다른 자매들과 달리, 희생검은 전력을 모았다. 내가 올 것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기습했다. 그것이 작금에 벌어진 사태의 전말이었다.
“…….”
나는 성검을 꼬나쥔 채 정면을 노려보았다.
사방에서 말 그대로 수십만 대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도들은 함성을 지르는 대신 노래를 불렀고, 창을 찌르는 대신 춤을 추었다. 하지만 그 어느 함성보다 위협적이었고 어떤 창칼보다 치명적이었다.
아군은 육인大人.
적군은 무수無數.
“백작님.”
“뭔가!”
“아직 지갑에 여유 많으시죠?”
내가 활약하기엔 최고의 순간이다.
“뭐?”
“이번 스테이지에서 한번 거하게 쏴주십시오.”
백작이 눈을 깜빡거린 순간,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백귀환생(百鬼還生).”
12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