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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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뭐?
물론, 성좌들만 살천성의 죽음에 반응한 건 아니었다.
-뭐야? 잠깐, 뭐……. 살천성이 죽었어? 정말로?
잿빛 하늘에 멍한 음색이 흘렀다. 방금 전까지 살천성과 결전을 벌인 마법사들의 우두머리. 이른바 마탑주(魔塔主)라 불렸던 이가 경악하였다.
그 목소리가 기점이 되었다. 황무지로 서서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살천성과 마탑의 대전을 피해 달아난 헌터들이 하나둘씩 다가온 것이다.
“말도 안돼. 살천성이 죽었다고?”
“저 녀석은 누군데?”
“검제가 누구야.”
“시발. 그 미친 또라이 새끼가 환생하다니….”
사람들은 놀라워하면서도 섣불리 다가오진 못했다. 그들의 눈빛엔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갑자기 등장해서 살천성을 사냥해버린, 생면부지의 헌터에 대한 경계심이.
‘위험해. 더 관심을 끌기 전에 사라져야겠다.’
나는 살천성과 싸우면서 달구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내 무위가 생각보다 약하다는 걸 들키면, 언제 어떻게 습격해올지 몰라.’
나는 함정을 걸어서 살천성을 사냥했다. 서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결투했다면 백전백패했을 거다. 이 사실을 아직 다른 헌터들은 몰랐고… 몰라서 참 다행이었다.
‘서두르자.’
나는 살천성의 시체를 등에 업은 뒤, 중얼거렸다.
“전송.”
머릿속으로는 장엄한 대도서관의 로비를 떠올렸다. 이제 곧 내 몸이 살천성의 시체를 업은 채 전송되겠지. 그리고 나는 모종의 계획에 따라 [ 방구석 도서관장]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
그러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전송.”
재차 중얼거렸지만, 마찬가지였다. 주변은 여전히 황량한 벌판. 살천성의 시체가 흘리는 피가 끈적지게 내 등을 적셨다. 수백 명의 헌터들은 어리둥절하게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스테이지 클리어가 아직 선언되지 않았다!’
살천성은 틀림없이 죽었다. 그런데도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왜? 뭐가 부족한 거지?’
나는 필사적으로 무엇이 부족했는지 복기했다. 혹시 살천성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살천성이 50층의 주인이 아니므로, 50층을 클리어했다고 인정받을 순 없는 것인가?
“……저 녀석 왜 저러냐. 가만히 있잖아.”
“잠깐만. 내 관찰 스킬에 저놈 레벨이 B급으로 뜨는데?”
“B급?
내가 필사적으로 생각에 잠긴 동안, 헌터들은 웅성웅성거렸다. 경악으로 굳어져 있던 공기에 조류가 파도쳤다. 경악은 서서히 경계심으로 변화했고, 경계심은 곧 의혹으로 변질했다.
“구라치지 말고.”
“뭐, 위장 스킬을 가졌나 보지. 살천성이 최소 S급 추정인데 설마 B급짜리한테 죽을 리가 없잖아.”
“야! 누가 말 좀 걸어봐!”
“이 중에 검제가 살아 있었을 때 활동한 사냥꾼 없어?”
식은땀이 흘렀다.
‘안 좋아.’
공기의 흐름이 불안하게 흘렀다. 비단 헌터들이 나에게 다가오려는 낌새가 보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저 헌터들 한명한명이 나보다 더 레벨이 높을 거고, 그래서 위험천만하다는 것 때문만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감각.사냥꾼으로서의 직감.
“…….”
나는 본능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
내 옆에서, 배후령은 히죽 웃고 있었다.
-뭘 보셔?
‘솔직히 말해요. 댁. 뭐 알고 있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먼. 난 이미 너한테 해줄 조언은 다 해줬단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배후령은 히죽거렸다. 입꼬리에 장난기가 한 됫박 걸렸다. 제기랄. 나는 마음속으로 욕을 웅얼거리면서, 서둘러 배후령의 조언을 되새겼다.
『공자야.』
『저놈을 인간으로 보지 마. 쟤는, 철저히 자기가 입력한 내용에 따라서 움직이는 병기나 다름없어.』
인간이 아닌 병기(兵器). 전투기계.
‘만일 내가 레판타 아이김이었다면? 무엇이든지 집착적으로 계산하는 남자다. 당연히,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죽었을 경우까지 상정하지 않았을까’
나의 사고가 가속되었다.
‘심지어 살천성은 배후령과 만난 적 있어.
트라우마의 꿈에서 나는 처음으로 레판타 아이김의 얼굴을 봤다. 그때 배후령도 나와 함께했다. 배후령은 곧바로 레판타 아이김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저놈 어디서 많이 본 새끼다?』
『쟤 암만봐도 살천성인데.』
『어떤 세계에서 저런 미친놈이 태어났다 싶었는데, 짜식. 아이김 출신이었군.』
나는 배후령한테 저 남자와 무슨 사이였냐고 물었다. 그러자 배후령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대답했다.
『무슨 사이긴. 제대로 한 판 싸움질 했던 사이지.』
『강하긴 강했지만 감히 나랑 맞먹을 정도는 아니었거든.』
즉.
‘배후령은 살천성과 싸워서 승리했다.’
살천성은 배후령에게 패배한 전력이 있다.
그렇다면, 너무도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등골에 흐르는 살천성의 피를 느끼며, 배후령을 보았다.
‘댁이……’
-응.
‘댁 같은 사람이, 살천성을 죽이지 않고 살려둘 리가 없어요.’
검제(劍帝).
미친 또라이지만, 검과 무에 있어서만은 숭고한 태도를 간직한 남자.
배후령은 나의 스승님을 죽였다. 정당한 비무를 통해서 참살했다. 스승님께선 아름다우셨고, 아름다우신 만큼 선하셨건만, [그건 사이한 마교의 교리다]라고 배후령은 단언하며, 베었다.
-흐.
살천성은 스승님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이(邪異)했다.
-똑똑한 새끼.
그런 살천성을 제압해놓고… 배후령이 죽이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내가 그래서 널 좋아해. 사냥꾼 노릇을 하려면 머리가 똑똑해야 하거든. 헌터의 자질은 세 가지다. 이기는 방법을 떠올리는 지능. 방법을 실행하는 용기. 실행을 성공시키는 능력. 똑똑하고, 대답하며, 유능해야지.
결론은 하나뿐이다.
배후령은 예전에 한 번 틀림없이 살천성을 죽였다.
단지, 살천성이 그걸로 끝나지 않은 것이다.
-살천성 저 새낀 사냥꾼이다. 공자야. 너랑 똑같이.
하늘이 갈라졌다.
“일격 강화.”
내가.
“—이곳에 오는 길에 문득 내려다본, 어느 흰 꽃을 버린다.”
내가 그 일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극도로 긴장한 채 주변을 경계한 덕분이었다. 오러로 시각과 청각, 오감을 최대한 강화하고 있었다. 나는 공기의 흐름을 예민하게 주시했으며, 그러기에, 모든 흐름을 찢어버리는 한 줄기 칼날을 느꼈다.
땅을 박찼다.
레판타 아이김의 시체를 버렸다. 자세를 버렸다. 오직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목표로, 꼴 사납게 뒹굴었다. 나려타곤(懷驅打策). 강호인들이 보았다면 비웃거나 적어도 피식 웃어버릴 신법을, 나는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감행했다.
그 대가로 나는 살았다.
콰아아아앙!
황무지가 박살 났다. 땅이 부서졌다. 어디선가 날아든 일격은, 나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까지 휘몰아쳤다. 나와 달리 헌터들은 사방을 경계하지 않았다. 약간의 방심으로 인하여 스무 명 이상의 헌터들이 참살당했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는 길에 화분을 가꾸는, 늙은 남자를 보았다.”
누군가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뚜벅. 비명과 신음이 자욱해진 황무지로 그 사람의 발소리가 울렸다.
“그 화분은 작았다. 아담했다. 남자의 삶은 늙어버리고 작아져서, 이제는 하나의 화분에 전부 담겨버리는 양했다. 나는 노인의 생이 담긴 화분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딘가에 담길 수만 있다면, 크기와 상관없이 삶이란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다.”
그 자는 낡아빠진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일격(一擊). 강화(强化).”
후드 아래로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노인과 화분에 대한 기억을 버린다.”
광풍이 불었다.
[‘외로운 구도자’가 환희합니다.] [‘미궁에 거하는 눈’이 새로운 정보의 출현을 주시합니다.] [‘영원한 평야의 군마’가 당신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단념합니다.]스무 명의 사망자는 단숨에 배로 늘어났다. 기민하게 반응한 헌터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일격에 휘말렸다.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에게 역으로 달려든 맹자도 있었으나, 곧 사지가 날아감으로써, 용기와 만용의 차이를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골목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엿들었다.”
자신이 일으킨 바람에 남자의 후드가 스르륵, 벗겨졌다.
“목소리라고 하기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음이라 치부하기엔 알아듣고 싶었다. 알아들을 수 없으나 알아듣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의 징표인가 싶었다. 나는 골목의 소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은발.
“걸어오면서 땅을 밟았다. 땅을 밟는 감촉이 새로웠다. 단단했다. 선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맨발로 걸어다니면 조금은 더 선해질까 생각했으며, 상상하고 나니 유리조각에 밟힐 것 같아서 아팠다. 이 세상을 맨발로 거니는 사람은 선하지만 그래서 매양 아플 것이었다.”
푸른 눈.
“나는 추론한다. 이 중에 나를 살해한 자가 있다. 그 중에서 제일 높은 가능성을 가진 사람은… 나의 시체를 업고 있던 자로군.”
낡은 수첩.
“나의 죽음은 153년 7개월 2일 만에 벌어진 사건이다. 과거에 나를 살해한 사냥꾼, 검제는 나보다 명백히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2쪽에 [나보다 강력한 상대에게 살해당했을 경우에는 도피할 것]이라는 규율을 추가했다. 이것은 검제와 세 번 싸워서 세 번 목숨을 잃은 끝에 얻은 전훈(戰訓)이다.”
은발의 남자는 푸른 눈으로 낡은 수첩을 훑었다.
“나는 판단한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펼친 두 번의 일격을 너는 피했다. 그러나 검제의 수준에 해당하는 무인이었다면, 회피한 즉시 반격했을 테지. 검제는 자신이 사용하는 무술의 경지를 우주검(旴周劍)이라 일컬었다. 너에게는 그만한 경지에 어울리는 실력이 부재한다.”
내 허리춤에 차인 성검이 부르르, 떨었다.
“너 정도 무인에게 내가 살해당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군.”
별자리를 학살하는 자.
“내가 짐작하기 어려운 방법을, 너는 고안해낼 만큼 영리하다는 뜻이다. 나보다 영리한 사냥꾼은 위험하지. 네가 지금보다 더 뛰어난 무력을 갖추게 된다면 검제에 버금가는 사냥꾼으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인간병기.
자신이 죽는 사태마저 미리 상정하고, 그리하여 여분의 신체까지 만들어둔 자. 그것이 [클론]이든 [인형]이든, 아니면 어떤 성좌의 힘을 빌려서 쓴 술법이든, 살천성, 레판타 아이김은 그곳에 서 있었다.
『저놈을 인간으로 보지 마.』
『살천성 저 새낀 사냥꾼이다. 공자야. 너랑 똑같이.』
아무리 죽어도 결코 죽지 않는 나처럼.
살천성 역시 죽음에 대해 방비해둔 인간이었다.
“가만히 방치해둘 수 없는 위험인물이라 판단. 즉시 배제한다.”
살천성이 품에서 노란 고무줄을 꺼냈다. 천천히, 그가 은발을 묶었다.
“지금부터 전투에 돌입한다.”
세상이 쪼개어졌다.
-어서 와라. 공자야.
배후령이 크게 웃었다.
좀 먹은 도포자락이 휘날렸다.
-여기가 50층 이후의 세계다!
4.
나는 전력으로 붉은 오러를 끌어올렸다.
“젠장! 인형이라니! 이래서야 진짜 기계나 다를 바가 없잖습니까?!”
“검제와의 전투에선, 성좌 하나를 제외하면 목격자가 없었다.”
살천성은 일기장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쳐다볼 뿐이면 다행이지. 그동안에도 쉼없이 일격이 날아들었다. 나는 전력을 다하여 파상 공세를 피했다.
“검제 스스로 결투를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검제는 그것을 비무(比武)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죽음에는 목격자가 지나치게 많군. 목격자를 모두 배제하기란 어렵다.”
-미친 또라이 새끼….
먼 하늘에서 멍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탑주의 목소리였다. 그것에 개의치 않고 살천성은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 논리]를 계산했다.
“따라서, 배제보다는 위협을 선택한다. 들어라. 보아라. 나를 적대하는 자들과 앞으로 적대하게 될 자들에게 고한다. 나는 인위적으로 불사성을 획득했다. 설령 너희가 나를 살해한다 해도, 나는 다시금 너희의 앞에 설 것이다.”
-…….
“그리고 나를 한 번 살해한 자는 반드시 죽이겠다. 만일 하나의 집단이 나를 살해하는 데 동참했다면 그 집단 전체를 토벌하겠다.”
쿠우우우웅!
살천성이 날린 일격을, 나는 가까스로 피했다. 비껴간 일격은 내가 아니라 [살천성의 시체]를 갈랐다. 시체는 단숨에 허리가 끊어졌다. 미친. 살천성은, 저놈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시체를 잘라버린 것이다.
“내 선언은 단순히 위협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인다.”
그런데도 놈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자기 자신의 몸뚱이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는 듯.
“일격 강화.”
살천성이 내게 달려들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버린다.”
‘아.’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한 줄기 검격이 공기를 찢고 대지를 가르며 쇄도해왔다. 나는 살천성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심했다.
순수한 광기.
자신이 결심한 신념을 실행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대가도 두려워하지 않는 눈. 그렇다. 배후령이 한 말이 맞았다. 그는, 이 남자는, 나와 똑같이 사냥꾼으로서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나다.’
한탄했다.
‘라비엘을 만나지 못한 나—‘
내게 닥쳐오는 죽음을 응시하며, 순간, 나는 방어를 포기했다. 도외시했다. 그렇다고 목숨을 함부로 버린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의 허락 없이 자결하지 마라.』
『죽음으로 쉽게 모면할 수 있는 때가 와도 죽지 마라.』
『정녕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 같더라도 마지막까지 발버둥 쳐라.』
나는 방어를 포기한 대신에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막지 못할 일격이라면, 뒈질 때 뒈지더라도 최소한 한방은 먹여줘야만 했다. 그게 나의 성질이었다. 그것이 라비엘과의 약속이었다.
촤아악!
살천성의 일격과 내 검로가 교차했다.
내 칼은 기어이 살천성의 왼손에 들린 일기장을 찢었다.
“…….”
살천성의 은빛 눈썹이 약간 움직인 것을, 나는 보았고.
“——.”
그의 일격이 나를 꿰뚫었다.
‘인정하마.’
커, 흡, 하고 피가 목구멍에서 역류했다. 눈앞이 하얘졌다. 온몸이 자글자글 끓는 와중에도 나는 마지막까지 살천성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괴물이다. 나보다 강하다. 나처럼 조심성이 많다. 하지만, 다음의 기회를 가진 사람이 너뿐만인 것은 아니야. 레판타 아이김.’
[ 방구석 도서관장이 탄식합니다.]‘죽여라. 지금은 죽어주마. 죽이고 또 죽여라. 서로 죽고 죽이자! 너의 지옥과 나의 지옥을 겨루자. 마지막에 서게 될 사람은 나다. 당신은 잘못되었다!’
[ 방구석 도서관장이 환희하며, 절망합니다.]나는 당신을 이긴다.
[당신은 죽었습니다.]기다려라.
[현재 당신의 헌터 랭크는 B급입니다.] [강화된 페널티로 인하여 스킬 발동 순서가 바뀝니다.]내가 반드시, 당신을—-.
[경고.]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구현합니다.] [구현에 필요한 자료를 당신의 기억에서 추출합니다.]하얘진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페널티 심도는 상(上).] [축생도(畜生道)입니다.]멀어진 의식.
저편의 세상, 마치 피안에서 건너오는 듯 어떤 선율이 들려왔다.
딩,
동,
댕,
동.
…….
그건 어딘지 모르게 무척 익숙한 음색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종소리였다.
‘어디서 들었는데… 어라, 어디서… 어디였지?’
나는 눈을 뜨려고 애를 썼다. 눈꺼풀이 쇳덩이를 끌어안은 것처럼 무거웠다. 온몸이 가위에 눌려서 저릿했다. 정제되지 않은 선율, 흐리멍덩한 종소리가 조금씩 들려올 뿐이었다.
딩, 동, 댕, 동….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다른 소리가 들렸다.
-교내에 남은 학생 여러분에게 방송부에서 알려드립니다.
교내?
-야간자율학습에 임할 학생을 제외하고 다른 분들은 이제 하교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방송부에서 알려드립니다.
하교.
-최근 들어 하교 시간이 지났는데도 교내에 남은 학생이 목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내에 남은 학생 여러분 중, 야간자율학습을 신청하지 않은 분께서는 하교해주시길 바랍니다.
딩, 동, 댕, 동.
다시 종소리가 울리면서 목소리가 끊어졌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나는 가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몸부림쳐도 안 되어서 최대한 의식을 일점에 집중했다. 내 몸이 들썩거리는 게 느껴졌다. 조금 더 집중해서 손가락을 까닥이려던 때, 툭, 뭔가가 머리를 쳤다.
“선배님, 일어나십시오! 하교하랍니다!”
그제야 나는 속박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움직였다. 허억, 하고 숨을 내쉬었다. 서서히 내 몸의 윤곽이 느껴졌다. 감각이 돌아왔다. 제일 먼저 돌아온 것은 청각이었고 그다음이 시각이었다.
“아핫-.”
귀에 익은 웃음소리에 이끌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책상에 엎드려서 주무시면 몸에 안 좋습니다! 허리에도 안 좋고, 무엇보다 숙면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곧 중간고사 기간이니 열심히 공부하는 건 이해합니다만 차라리 집에 가서 주무십시오!”
이단심문관이 방긋거리며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달랐다.
“……이단심문관 씨?”
이단심문관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네? 이단심문관이라뇨?”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입니까?”
“……설마, 금사매냐? 또 이단심문관한테 빙의한 거냐.”
“빙의요? 아. 혹시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아하핫. 선배님은 책을 많이 보시지요. 재미난 꿈을 꾸기라도 하신 모양이군요!”
“…….”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이라 해도, 만상의 대도서관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대도서관이 으리으리한 대저택이라면 여긴 비좁은 개집이랄까.
창문 너머를 살펴보니, 넓은 운동장이 보였다.
“…….”
마치 평범한 학교처럼.
‘검제 양반.’
나는 입이 마른 걸 느끼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큰일났습니다, 검제 양반. 이거. 아무래도 레벨이 오르면서 페널티까지 확 이상해진 모양이에요. 예전엔 분명히 제가 꿈을 꾸는 것처럼 트라우마를 엿봤는데 이건 숫제… 검제 양반?’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보십쇼?’
조용했다.
‘야. 검제.’
고요했다.
“…….”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자, 선배님. 어서 하교하십시오. 아마 오늘도 교문에서 학생회장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여자친구를 화내게 하면 안 되지요! 도서정리는 제가 하고 갈 테니, 선배님 먼저 가십시오!”
내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트라우마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1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