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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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서요, 어서!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신서중고 역사에 한획을 그어버린 로맨스의 주연께서 연인을 기다리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이단심문관에게 쫓겨나다시피 도서관을 나왔다. 머릿속이 멍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잠깐 어버버거린 사이에, 쿵, 도서관 문이 닫혔다.
“어……”
교내가 조용했다.
잿빛 화강석이 깔린 복도 바닥은 미끌미끌했다. 노을이 비치면 붉게 윤이 나서 반들거렸다. 복도에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패스! 패스!” 멀리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축구공 차는 소리만 들려왔다.
“진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나는 몽유병에 걸린 듯 걸어갔다.
『아마 오늘도 교문에서 학생회장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여자친구를 화내게 하면 안 되지요!』
고등학교에 다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중학교는 2년쯤 다녔다. 학교라는 시설 자체는 꽤 익숙했다.
‘일단 교문으로 나가보자.’
복도의 기둥과 벽은 하앴다. 연녹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연녹색이라 해도 예쁜 게 아니라 그냥 뭐 색깔이 되다만 쭉정이 색이다. 그 촌스럽고 인공적인 색감마저 낯익었다.
‘계단. 계단이 근처에 있을 텐데. 아. 찾았다…?’
그때였다. 계단 층계에 접어들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을 쫓아서 고개를 올려보니,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
철문 바로 앞에 학생 하나가 서 있었다.
“……?”
몸집이 자그마한 아이였다. 열리지 않는 철문을 그 학생은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마도 문고리에 얽힌 쇠사슬과 자물쇠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와 똑같이 학생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시선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얼굴.
“…….”
학생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없이 계단을 내려와서 나를 지나쳤다.
지나칠 적에 나는 그 아이의 교복 와이셔츠 카라를 봤다. 하얀 깃엔 묵은 때가 물들어 있었다. 그 땟국물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가난의 냄새였다. 물론 아주 잠깐 엿본 광경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학생은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태도는 바르게♪] [생활은 즐겁게♪] [마음은 행복하게♪]학생이 떠나고 난 빈자리에는 알록달록한 표어가 층계에 걸려 있었다. 하나 마나 한 말이었고, 그래서 하지 않는 것만 못하는 말이었다. 말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실패해버린 사물이리라.
흉물(凶物).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물이란 걸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듯, 표어의 글씨체는 귀여웠고 색채는 깜찍했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 나도 가야지.”
교문에 도착했다.
교문 앞엔 검은색 리무진이 세워져 있었다.
“…….”
잠깐만.
지금 내가 본 것을 설명하겠다. 나는 평범하게 계단을 내려와서 평범한 모래 운동장을 지나쳐, 마땅히 평범해야 할 교문에 도달했다.
그러나 어째서인가? 교문 앞에 검은색 리무진, 그것도 영화에서나 볼 법한 초고급 리무진이 주차되었다.
“음. 오늘은 조금 늦었군.”
그리고 내 심장에 제일 가까운 사람이 리무진 곁에 서 있었다.
“라, 라비엘…?”
“멋진 저녁이다. 공자.”
나의 사랑께서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너의 얼굴을 보게 되어서 한결 더 노을이 곱구나. 노을이 붉어지는 까닭은 네 뺨이 붉어지는 걸 가려주기 위해서인 듯하다.”
운동장엔 아직 하교하지 않은 학생들이 있었다. 농구코트에서 노는 학생들, 야자실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산책하는 학생들, 축구장에서 공 차는 학생들. 그 아이들이 죄다 하던 짓을 멈추고 이 쪽을 바라봤다.
“저기 봐. 저 남자 선배…….”
“아, 재벌집 따님이랑 사권다는 그….”
“존나 부럽다….”
“축제 때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고백….”
미친.
“왜 그러는가? 공자. 얼빵한 표정이 너의 매력 포인트이긴 하지만 지금은 좀 심하게 어리버리하구나. 새로운 매력을 개척하려고 결심했나?”
“라비엘… 라비엘이, 재벌집 아가씨였어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 미친 트라우마는 대체 나한테 뭘 보여주려는 것인가. 라비엘이 교복을 입은 모습을 내게 선물하기 위함인가? 사진으로 찍어야 하나? 영구보존해야 하나? 트라우마에서 찍은 사진을 현실로 가지고 갈 방법이 개발되었는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나의 남친은. 나는 태어날 때부터 재벌 가문에서 태어났고, 물론, 지금도 재벌 가문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미친.
라비엘이 나를 남친이라고 불렀다.
남친이라고 불러주셨어!
어쩌지? 녹화해야 하나? 녹음해야 하나? 촬영해야 하나? 트라우마에서 녹화한 촬영본을 현실로 전송할 과학기술이 현대시대엔 개발 되었는가? 과학자들은 뭐 하는가? 태만이고 태업 아닌가?
“라, 라비엘. 미안하지만 지금 몇 살이에요?”
“……신서고에 재학 중인 2학년이다만.”
“저는요?”
“집사. 바로 정신과 의원을 예약하도록. 내 남친이 가벼운 기억상실증을 앓은 모양이다. 그리고 질문에 대답하자면, 물론 나의 남친은 나와 똑같은 2학년이다.”
“아아, 라비엘과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날 수 있다니…. 라비엘과 학창시절을 나눌 수 있다니, 뭐에요. 이거. 너무 큰 축복이잖아요…? 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놈입니다….”
“집사. 예약을 취소해라. 평소의 남친이다.”
우리는 잠시 교문 앞에서 애정행각을 가졌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운동장에서 꺄악, 비명이 터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단심문관이 한 말로 추측해보면 우리 두 사람은 교내 공식커플이니까.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 해도 사랑해요, 라비엘….”
“전생부터 내생까지 사랑한다. 내게 사랑의 이름은 언제나 김공자, 세 글자로 대신될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현생을 살아야겠지. 차에 타라. 집까지 데려다주마.”
집.
나에게 집이란 보육원을 의미했다. 혹시 보육원에 데려다준다는 것일까? 아니, 하지만 이 [트라우마의 세계]는 분명하게 [현실의 바깥세상]과 달랐다. 나는 고등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다. 신서고란 장소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여기서 내 집은 어떤 곳일까?
“어제 남친의 집에서 큰일이 벌어졌더군.”
리무진에 타자 라비엘이 말했다. 리무진 내부는 공간이 탁 트여서 편했다. 하지만 구태여 우리 둘은 딱 달라붙어서 나란히 앉았다.
“네? 큰일이요?”
“호오. 그 정도 사건은 큰일도 아니라는 것인가? 하긴, 남친은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는 걸 평소부터 싫어했지. 물론 나도 싫어한다만….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다. 내가 알아서 처리했으니, 남친의 어머니와 아버지께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다오. 아니. 내가 직접 전해드리는 편이 좋겠군.”
“…….”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어떤 사건이 벌어졌고 그걸 라비엘이 무마해준 모양이다. 그렇지만 내 머리를 흔들어놓은 단어는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나의 부모님.’
어린 시절 보육원장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있다. 봉사하러 와준 어느 누나를 엄마, 라고 부른 적도 있다. 하지만 모두 어린아이의 무지와 장난에서 생긴 일.
라비엘이 말하는 부모란… 그런 게 아니겠지.
‘이 세계엔 내게 집이 있고, 부모님이 있다.’
그건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결혼식 때 라비엘이 내게 하루 양아버지를 마련해주긴 했었지만….’
그때는 기뻤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먹으면 사라질 무언가를 선물해주었다는 기쁨에 가까웠다.
그것이 아니라 존재해왔으며 존재해갈 부모님이라니.
‘어떤 느낌이 들지조차 감이 안 오는데….’
리무진이 멈추었다. 창문 너머를 보니, 작고 허름한 단독주택이 있었다. 오래된 동네에 오래 묵은 집.
“오.”
그리고 집앞에서 웬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빗자루를 쓸고 있었다.
“왔냐?”
장발의 남자가 씩 웃었다.
“캬아. 여친이 리무진도 태워주고. 우리 아들놈은 팔자도 좋아. 이게 다 내가 외모를 물려준 덕분이다. 언제나 항상 잘 생기게 낳아준 아버지를 공경해라!”
검제였다.
“…………..”
대략 정신이 아찔해졌다.
“평안하셨습니까? 아버님.”
“아이고, 고개 숙이지 마십쇼. 아가씨. 저 같은 놈한테 귀하신 분께서 머리를 숙이면 안 돼죠. 그보다 우리 아들내미가 실례되는 일을 저지르진 않았습니까? 이놈이 천성은 착한데 좀 또라이 기질이 넘쳐서….”
“괜찮습니다. 저는 공자의 모든 면을 귀히 여깁니다.”
“크흐. 아가씨께서는 어쩜 하는 말마다 고우실까. 야! 야! 김공자, 이 새끼! 얼른 엎드려서 절해라. 만약에 네놈이 아가씨한테 못된 짓이라도 하면 그날로 바로 연을 끊어주마. 알겠냐? 콱 그냥. 족보에서 지워지는 줄 알아!”
라비엘과 배후령이 정답게 대화했다.
대화하는 광경이, 그곳에 실존했다.
나는 그만 기절해버렸다.
“음.”
라비엘이 가볍게 내 몸을 받아주었다.
“오늘따라 공자가 이상하긴 이상합니다, 아버님. 아까도 제게 연령을 묻더군요.”
“저놈이 원래 이상한 놈입니다. 글쎄 쟤가 다섯 살에 뭔 일이 있었냐면…. 아. 저녁 드시고 가렵니까? 제가 오늘 꼬막을 무쳤는데 이게 또 끝내주거든요.”
“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아가씨는 참 사람이 좋으셔! 공자야, 뭐 하냐? 아직도 안 꿇었냐? 내가 무릎을 굽혀주라?”
집에 들어갔다.
“어서 오거라. 공자야.”
스승님이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오늘 학교는 괜찮았는고, 우리 아들?”
“…………..”
나는 실신했다.
“어허? 연인까지 집으로 들였구나. 어서 오게, 반시아 양.”
“라비엘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어머님. 외국 이름이 더 편합니다.”
“그런가? 흐음, 알겠네. 요즘 아해들의 관습이란 건 난해하지.”
어머님.
어머님.
어,
머,
님.
“야. 이거 자기가 뭘 모르네. 공자 이놈이 뭔 담력이 있다고 아가씨를 집으로 초대하겠어? 내가 초대했지. 꼬막무침으로 유혹했다고.”
“아하, 과연. 여보의 말이 옳다. 우리 아들한테 그런 면을 기대해서야 몹쓸 노릇이지. 마침 된장국도 다 끓었으니 같이….”
자기.
여보.
자, 기.
여, 보.
자기이이이!?
여보오오오오오?!
-계속해서 인기가수 유수하에 관한 보도를 알려드립니다.
거실에 틀어진 텔레비전에선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제 많은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 가수 유수하의 폭행사건이라고 알려진 영상입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해당 영상이 조작 되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놀랍게도 폭력 영상을 신고한 제보자의 자백이었습니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봤다. 화면엔 장발의 포니테일 미남이 증명사진마냥 떠올라 있었다.
-제보자는 ‘장난삼아 신고한 건데 일이 이렇게 커질지 몰랐다, 나로 인해서 충격과 상심을 받은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고……
화면에 아귀와 금사매의 사진도 떠올랐다. 그러니까 염제와 아귀, 금사매의 사진 석 장이 나란히 이어진 것이다.
-아울러 같은 그룹 맴버인 에스델과 실비아는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영상 자료로 가수들이 춤추는 장면이 흘렀다. 아귀와 염제가 춤을 추었고, 금사매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10일 뒤에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는 전격 취소되는 등, 한동안 그룹 활동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미친.
미친 거 아니야?
미쳤어?
미쳤냐고!
“으음.”
스승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신문을 내려놓았다. 스승님은 진지한 눈으로 라비엘을 바라보았다.
“저녁 식탁에서 나눌 이야기가 많겠다. 공자야. 방에서 형을 부르거라. 오늘은 오랜만에 식구가 모두 모여서 밥을 먹자꾸나. 괜찮겠나, 라비엘 양?”
“물론입니다.”
형? 아버지랑 어머니만 아니라 나한테 형도 있어?
“형… 이 어디에 있는데요?”
“네 방에 있단다.”
스승님이 눈짓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아버지는 배후령. 어머니는 스승님. 그렇다면 이제 누가 친형으로 등장한단 말인가?
끼이익.
조심히,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응?”
침대에는 한 남자가 누워서 감자칩을 바삭바삭 먹고 있었다. 다른 한손으로 대여점 만화책을 읽으면서. 남자는 내 얼굴을 보더니 감자칩 묻은 손으로 대충 휘휘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씨이발, 야. 너도 뉴스 봤지? 어? 이 형님이 어제 좆됐지 뭐냐. 하. 진짜. 계속 스토킹하길래 짜증 나서 한 대 쳤는데 그게 또 찍혀서, 쌍. 하마터면 가수 인생 종칠 뻔했네.”
염제였다.
“………….”
나는 졸도했다.
“오늘 아침에 씨발놈이 꼬리 말고 도망쳐서 다행이지. 어휴, 엄마한테 졸라게 혼났다… 어? 야? 괜찮냐? 안색이 시퍼런데. 김공자? 야, 동생. 정신줄 놨어? 갑자기 왜 비틀거리고 지랄….”
“죽어!”
나는 침대에 달려들었다.
“죽어! 죽어! 죽으라고, 이 미친놈아!”
“이, 이 새끼가 돌았나? 야, 진정해!”
“네가 지금 스승님을 엄마라고 불렀는데 진정하겠냐, 개자식아! 죽어라! 죽어서 스승님한테 사죄해라!”
“뭔 개소리를… 아니, 헉, 이런 씨발? 너, 너 새끼 언제부터 이렇게 힘이 쎄져… 힉, 읍, 커억!”
나는 유수하의 목을 졸랐다. 진심으로. 배후령이 아버지로 등장한 것은 그렇다 쳐주자. 도저히 그렇다 쳐줄 수 없지만, 아무튼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놈이 친형이라니? 이놈이, 이 싸이코패스가 친형이라니?
“죽어어어!!”
“어, 엄마!”
유수하가 컥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공자가 저 때려요! 엄마!”
환장하겠네.
13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