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30)
================
1.
“실례되는 일인 줄 압니다만, 아주버님에 관한 사건은 제가 갈무리했습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우리는 식탁에 모였다. 염제는 눈탱이가 밤탱이로. 나는 머리통에 혹이 볼쏙 튀어나왔다. 스승님한테 혼나면서 한 대 맞았다….
“이런 사건은 아주 조기에 진압하거나 아예 시간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보통 후자의 방법이 선호되나, 이번 건은 시기가 안 좋았습니다. 정치계가 조용한데다 10일 뒤에 아주버님의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라비엘은 젓가락으로 솜씨 좋게 꼬막무침을 골라 먹었다. 스윽, 슥. 젓가락을 쓰는 라비엘이 그곳에 있었다.
존재한 것이다.
‘예쁘다.’
아, 나는 젓가락이 개발된 것에 감사했다. 젓가락도 아마 라비엘이 자기를 써주는 것에 황송해할 것이다. 틀림없다. 하필이면 염제 같은 개자식이 [아주버님]이라 불린다는 거에 배알이 뒤틀리고 속알이 비틀리지만.
“……남친.”
“예?”
“뜨겁게 쳐다보지 마라.”
라비엘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눈을 돌려라. 아니면 고개를 숙여라. 난 지금 남친의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고 있다. 어머님과 아버님 앞에서 남사스러운 짓을 보여드리고 싶진 않군.”
“네….”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밥이나 먹었는데… 뭐야, 이 꼬막무침. 존나 맛있잖아? 이걸 배후령이 무쳤어? 배후령이 사실은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거냐. 세계관이 흔들리는군….
“아. 근데 아주버님이라는 호칭은 좀 쓰지 말아주세요. 저놈은 라비엘한테 그렇게 불릴 자격이 없어요. 그냥 개놈이라 말해주십쇼.”
“이, 이 새끼. 못 본 사이에 싸가지가 많이 까먹혔다, 너?”
“흐음.”
스승님이 천천히 반주를 기울였다.
“기실 조금 당황스럽긴 하네. 라비엘 양. 자네가 공자를 위한다면야 납득하겠지만, 알다시피 수하는 공자와 사이가 안 좋지. 가문의 힘을 써가면서까지 수하를 도울 필요가 있었는가?”
“없습니다.”
라비엘이 담담히 말했다.
“그저 어머님과 아버님께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보여준다? 무엇을 말인가.”
“두 분께서는 아마도 저희의 사랑을 과소평가하고 계십니다. 재벌가 아가씨가 한때 즐기는 유희. 학창시절의 좋은 추억. 인생의 경험.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 정도로 보고 계실 것입니다.”
식탁에 라비엘의 목소리가 흘렀다.
“하지만 저는 진지합니다. 진지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새로운 가족으로 모실 생각입니다. 가문에서도 제 교제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만, 그런 반발은 전부 짓누르겠습니다. 이번 사건을 처리한 건 저의 능력과 각오를 두 분께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
“저희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주시지요. 어머님. 아버님.”
스승님이 쓴웃음을 지었다.
“……참 과분한 아이가 내 아들에게 다가왔구나. 고맙다. 아들이 사랑을 받는 모습이란 건, 묘하군. 그래도 헛되게 키우지 않았어.”
스승님.
“와 씨. 그럼 이제 우리도 재벌가 사윗집이냐? 캬아, 가수 생활 끝났네. 끝났어. 저기요, 제수씨! 요즘 중국에 진출하는 가수들 있는데 저희 그룹도 좀….”
“수하야. 다시 한 번 사고를 치면 족보에서 지워버리마. 부모자식 간의 연을 끊을 줄 알거라.”
“엑?”
“아니. 이거로는 부족하겠구나. 너한테 폭행을 당한 분을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려라. 무릎을 꿇어 사죄를 받아라. 사죄를 받을 때까지 너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어, 엄마!?”
나는 가만히 식탁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
집.
부모님.
내게 없었던 무엇.
라비엘은 정식으로 결혼을 허락받은 뒤 돌아갔다. 상견례 날짜까지 잡혔다. 배후령은 “크하하! 아들한테 양복 한 벌 맞춰 줘야겠구만! 생각한 거보다 빠른걸!” 하고 웃었다.
“…….”
스승님과 배후령의 직업은 작가였다. 라비엘이 돌아가고 나자 집안은 조용해졌고, 조용해진 거실에 두 사람의 작업 소리가 은은하게 퍼졌다.
스승님은 연필로 글을 썼다. 한 잔의 커피를 옆에 두고, 스승님은 이따금 원고지에 몇 글자를 적었으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긴 스승님의 옆얼굴은 고요했다.
배후령은 타자기로 글을 썼다. 타닥, 타닥. 타자 소리가 리듬을 타고 나직하게 울렸다. 글을 쓰는 동안 배후령은 빡친 해달처럼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때때로 주방으로 가서 자기가 직접 칵테일을 만들어 가져왔다.
“…….”
조용한세계.
‘왜?’
다음날 아침이 되어 등교하면서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왜 살천성의 트라우마지?’
등굣길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지나쳤다. 전부 어디선가 본 얼굴이거나,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님!”
그 중엔 나를 보자마자 깍뜻하게 고개를 숙이는 학생들까지 있었다. 헐렁하게 풀린 앞단추. 과하게 쫄여버린 바지. 줄인 치마. 어딜 어떻게 봐도 좀 논다 싶은 학생들이 내게 허리를 숙였다.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사마군(四魔君)?”
다름 아니라 마교의 교인들이었다.
월영마군을 쏙 빼닮은 중학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마군이라뇨? 저희는 신서중고 사천왕입니다. 선배님.”
“미친……”
설마 이 세계에서 사마군은 일진이냐? 나는 그 일진들 두목이고? 그럼 고삐리 일짱이랑 재벌집 학생회장이 사권다는 거잖아.
환장하겠네.
“저기요. 당신들…… 왜 양아치짓 하고 다녀요? 그만둬요. 공부나 하십쇼. 아니, 공부는 됐고. 제발 일진이든 뭐든 해체하십시오.”
“저희 요즘 착하게 지냅니다! 선배님이 퀸카랑 사귀면서 되도록 자숙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자숙하고 있습니다! 선배님 때문에 요즘은 빵셔틀도 함부로 못 시킵니다!”
“그게 아니라…… 됐습니다. 사천왕이라고요? 게다가 당신들, 라비엘을 퀸카라고 불러요? 미치겠네.”
“조, 존댓말 쓰지 마십시오. 선배님! 무섭습니다!”
나를 환장시키는 일은 교실에 들어가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흑룡주가 우리반 반장이었다. 단정한 옷차림. 분위기만 봐도 딱 모범생이구나 싶었다.
“오냐아. 반장, 애들 휴대폰 거둬라.”
“네!”
“몰래 숨기는 놈들. 나한테 들키면 죽는다. 엄? 알아들었냐?”
그리고 독사가 우리반 담임이었다. 이게 선생인지 깡패인지 구분이 안 되는 용모로, 독사는 단상 위에서 건들건들거렸다. 한손에 회초리를 든 채 말이다.
‘돌아버리겠군.’
흑룡주가 수납함을 들고 교실을 돌아다녔다.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아니면 못마땅해하면서 휴대폰을 내놓았다. 스마트폰이 아니라 폴더폰. 내지는 슬라이드폰.
“…….”
그리고 흑룡주는 내 자리에 이르러서 그냥 지나쳤다.
아무런 말도 않고 조용히.
‘응?’
주위를 둘러보니, 흑룡주가 말없이 지나친 학생은 나밖에 없었다. 백작(※동급생이었다!)도 성기사(※역시 동급생이었다!)도 순순히 휴대폰을 내놓았다.
“어. 저기…, 반장?”
익숙치 않은 호칭. 내 목소리를 듣고 흑룡주가 등을 돌렸다. 잠잠히 가라앉은 검은색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뭐니?”
“내 핸드폰을 안 거둬서. 여기.”
나는 일어서서 수납함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흑룡주한테 반말을 쓰니 마음이 퍽 불편했다. 나만 불편한 게 아니었는지, 흑룡주도 되게 의외라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그래. 평강공주가 바보온달을 고치는구나.”
“어?”
“응, 아무것도 아니야. 잊어주렴.”
흑룡주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앞줄로 걸어갔다.
단상에선 독사 선생이 실실 웃고 있었다.
“야아. 천하의 김공자가 핸드폰을 내놓는 날이 다 오는구먼. 얘들아, 잘 봐라! 사람을 고치는 데 잔소리도 회초리도 필요없어. 사랑만 있으면 인간은 알아서 다 바뀐다. 너희도 대학 가면 열심히 님을 찾아라.”
성기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김공자가 서울대 간답니다. 저한테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어라, 이상하네? 나한테는 옥스포드 간다던데.”
백작이 히죽 웃었다.
“학생회장이 해외로 유학 갈 거라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간다더라.”
“음. 하향지원이 서울대고 상향지원은 옥스포드라는 얘기군. 과연 김공자.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눈높이를 가진 남자다….”
학생들이 낄낄거렸다. 이 반에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성기사와 백작 같았고, 그 중에서 백작이 씩 웃었다.
“반장, 조심해. 반 1등 자리를 놓치겠어.”
“……괜한 참견이야.”
흑룡주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교복을 입었지만 전부 내가 아는 얼굴이어서 기분이 미묘했다.
아니.
“…….”
맨 뒷줄. 창가 자리.
그곳엔 어제, 옥상 계단에서 마주친 학생이 앉아 있었다. 학생은 공책을 펴두고 얌전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같은 반 학생이구나.’
창문에서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너울거렸다.
커튼에 다 가려질 만큼 그 아이의 몸집은 작았다. 그래서 학생은 커튼 사이로 엿보였다가 감추어지기를 반복했다. 얇은 커튼은 꼭 장막과 같아, 그 아이를 교실로부터 몇 걸음 떨어트려 놓았다.
“아, 안녕하세요. 여러분…?”
그때 교실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1교시는 수학인데… 저기, 그렇지요?”
“네, 선생님.”
“그, 그럼 수업 시작할게요오….”
약제사였다.
‘이젠 놀랍지도 않아.’
그래. 사마군이 사천왕으로 등극하고 염제가 친형이 되어버린 마당에 뭘 더 놀라겠는가?
심지어 아귀와 금사매는 아이돌 그룹을 결성해서 염제랑 같이 노래를 부른다. 약제사가 수학선생님인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암, 그렇고 말고….
순식간에 일과가 흘렀다.
“공자형이다!”
“공자형! 같이 놀자!”
점심 시간에 식당을 나서자, 중학생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10층. [불지옥 저택의 숨바꼭질]에서 본 아이들.
“…….”
“요즘 너무 공부만 해! 우리랑도 놀아줘!”
“축구하자, 축구!”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고문을 당해 죽어버린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어서, 환히 웃고 있었다.
조금 숨이 막혔다.
“……그래. 같이 놀자.”
고등학교와 중학교가 나란히 세워진 교정에서, 나는 아이들과 뛰놀았다.
나이 든 경비원이 교문 입구에 서 있었다. 무림맹주 남궁운이었다.
오후에 체육 수업을 받는데, 교문 너머로 초등학생들이 하교했다. [불멸하는 행복 전도사]의 사도들이었다. 초등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혹은 짝궁과 손을 맞잡은 채, 은행나무 길을 지나쳤다.
“…….”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마지막 수업이 끝났지만 난 하교하지 않았다. 교정의 벤치에 앉아서 멍하게, 학생들이 하교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살아있다.’
이 세계에서 배후령은 귀신이 아니다. 살아 있다. 무슨 소설을 쓰는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지만…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간다.
스승님께서, 살아 계신다.
저택의 아이들이 살아 있다.
인성이 썩어빠진 건 변함이 없지만 염제도. 자신의 부모한테 칭얼거리고 혼쭐이 나는 인간으로서 살아 있다. 아귀도. 금사매조차.
아까 하교하는 학생들에는 낯 익은 얼굴이 섞여 있었다. 도서관장에게 덤볐다가 본보기로 촉수괴물에 잡아먹힌 헌터들. 이름 모를 헌터들까지 살아서, 하굣길을 스쳐 지나갔다.
‘이게 레판타 아이김의 트라우마야?’
온화한 일상 아닌가.
행복한 가설이지 않은가.
이 세계의 어느 부분이 지옥을 닮았는가.
“여기 있었나. 남친.”
고개를 돌렸다.
라비엘이 미소를 지은 채, 내 뒤에 다가서 있었다.
“라비엘….”
“고민에 빠진 얼굴이군. 휴대폰으로 연락해도 받지를 않길래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걱정했다. 연인을 공연히 걱정시키는 건 좋지 않다.”
“아.”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방과후에 휴대폰을 돌려받고도 다시 키는 걸 잊었다.
“미안해요. 그. 조금 심란해서….”
“무엇이 내 남친의 마음을 흔들었을까. 되도록, 나를 제외하면 세상의 어느 무엇도 그대 마음에 잔물결을 일으키지 못했으면 한다만.”
나는 고개를 뒤로 조금 젖혔다. 라비엘은 고개를 숙였다. 벤치 등받이를 사이에 두고, 우리 두 사람은 잠시 숨결을 나누었다.
“라비엘.”
“음.”
“저희 부모님의 성함, 혹시 알고 있어요?”
라비엘이 눈을 깜빡였다.
“물론이다.”
“지금 말해줄 수 있을까요?”
“어머님은 소 씨에 백 자 향 자를 쓰시고,”
그리고.
“아버님은 ■ 씨에 ■ 자, ■ 자를 쓰시지 않는가.”
“…….”
묵음(默音).
라비엘이 배후령의 이름을 입에 담은 때, 노이즈가 낀 것처럼 소음이 덮어 씌워졌다.
‘아아.’
당연했다.
나는 배후령의 본명을 알지 못했으니까.
만일 이것이 꿈이면… 내가 모르는 사실까지 적시될 리 없었다.
‘역시.’
오늘. 쉬는 시간.
나는 교실 단상에 놓인 출석부를 들추어보았다.
그곳에 흑룡주나 성기사의 이름이 적혀 있을까 확인하려고.
하지만.
+
출석번호 1번. 김공자
출석번호 2번. ■■■
출석번호 3번. ■■
출석번호 4번. ■■■
출석번호 5번. ■■■
+
대부분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이름을 알아내려 해도 알아볼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낙서로 까맣게 칠해버린 듯이.
“……라비엘. 이상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전 불안합니다. 라비엘은 재벌집 아가씨예요.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학교에서, 저 같은 사람이랑 학창생활을 보낼 리 없잖아요.”
“나는 그대의 말이 불안하구나. 무슨 얘기인가?”
“어쩌면요. 어쩌면 이게 전부……”
부르르르.
핸드폰이 떨렸다.
+
문자: 1통
발송인: ■■
+
불길한 감각이 엄습했다.
“미안해요. 라비엘, 잠시만요.”
나는 핸드폰을 열었다.
잠시 뒤, 화면으로 글자들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에 비하면 작다 못해서 비좁은 화면.
+
나는 네가 살인한 거야.
잊지 마.
네가 나를 죽였어.
+
온몸이 굳었다.
공기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꺄아아아아악!”
학교 운동장에서 비명이 찢어졌다.
13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