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40)
★.
그러므로.
지금부터 나의 패배에 대해 이야기하자.
주인공의 위치.
용사의 역할만 맡아왔던 내가 처음으로 타도되어야 마땅할 악인(惡人)이 된다.
여태껏 나에겐 패배가 용납되지 않았다.
한 번 한 번의 패배가 치명적이어서.
내가 패배했다면 할렘가는 불길에 휩싸여 전소(全燒)했을 것이다. 내 패배는 제국의 멸망을 의미했다. 내 패배는 곧 강호의 종말이었다. 그리고 내 패배는, 내 패배는…….
이제 처음으로,
나의 패배는 멸망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것은 비로소 내가 패배하는 이야기.
‘나’라는 인간이 침몰해야만 엔딩에 이르는 이야기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100%입니다.]자아.
그러나 ‘나’는 강하다.
‘나’는 철저히 영악한 인간이다.
당신들은 학창시절을 어떤 식으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기뻤는가? 즐거웠는가. 어릴 적의 무지와 변명으로 치장할 만큼 교실은 작은 곳이어서, 거기서 벌어진 일들은 전부 세피아빛 파노라마로 예쁘장하게 색칠됐는가?
‘나’는 아니다.
‘나’는 당신들보다 좀 더 교묘하다. 교활하다. 어쩌면 당신들의 학교에는 나와 같은 인간이 없었을지 모른다. 혹은 단순히, 그저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여기 있다.
동급생에게 누명을 씌워본 적 있는 자.
작전을 세우고 증거를 조작하여, 누군가를 모함해본 적 있는 자.
동급생들을 협박하여 입단속을 시킨 자.
바로 그런 기억들이 있는 사람. ‘당신’이야말로 내 동료다. 그나마 ‘당신’이 나의 존재를 짐작이라도 할 것이며, 운 좋다면 이해해줄 것이다.
그래. 다른 학생들이 무방비하게, 소위 [학창 시절]로 유년의 시간을 땜질하고 있을 때, 당신과 나, ‘우리’는 저 어리석은 송사리들을 쉽게도 사냥했다.
우리의 사냥은 은밀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능숙하기에] 감추어진 사냥들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정반대로 이해해버리고 만다. 학생들은 모조리 [미숙하기에] 고도의 사냥을 벌일 만큼 똑똑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똑똑하지 못하다니? 누가? ‘우리’가? 얼마나 우스운 착각인가.
그들이야말로 코앞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기억조차 못하는데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먼저 사냥의 비법에 대해 고백하겠다.
이것은 ‘나’가 누군가에게 빙의되기 전에 벌어진 이야기다.
“학교, 이곳에서 학생들의 서열은 둘로 나뉜다. 먼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 학생들은 무엇보다 노력하기 싫어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남을 무시하고 비웃기는 쉽다.”
노력이 들지 않는다.
“비아냥에는 노력이 들지 않으므로, 모든 학생이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이 [공부]와 [비웃음]의 결정적 차이다. 무슨 차이점인가? 바로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느냐다.”
시험에서 1점의 점수를 높이려면 10분은 공부해야 한다.
반면에 한 사람을 비웃고 놀리는 데엔 10초도 안 걸린다.
“[누가 더 공부를 잘하느냐] 따위보다 [누가 더 남을 잘 비웃느냐]가 훨씬 더 재밌다. 훨씬 더 쉽다. 따라서 훨씬 더 위력적인 것이다. 공부와 달리 이 놀이엔 누구나 간단히 뛰어들 수 있다. 바로 그러기에 [비웃음]은 모든 학교에 통용되는 기준이다.”
여기서 따돌림의 역학이 만들어진다.
“먼저, 희생양은 눈에 확 띄어야 한다.”
다른 아이들보다 눈에 띄게 부자인가? 아니면 눈에 띄게 가난한가? 누가 봐도 얼굴이 이상한가. 근처에 다가가면 이상한 냄새가 나는가. 말투가 심각하게 어눌한가? 지나치게 성실한가? 다 좋다. 어떤 거든 상관없다.
[비웃음]이 위력적인 이유는 하기 쉬워서다.비웃음의 희생양은 반드시 비웃기 쉬워야만 한다.
“김율.”
김율이 사냥감으로 낙점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난하다.”
눈에 뜨게.
“그야말로 확연히 가난하다. 주변에 가면 안 좋은 냄새가 풍긴다.”
가난은 모노톤 교복으로도 안 가려진다. 겉으로 드러난다는 거, 그게 가난의 지독한 점이다. 누가 봐도 김율은 가난했다. 누가 다가가도 김율의 냄새는 안 좋았다.
누구나 비웃기 쉬웠다.
“야.”
그래서 쉽게 시작할 수 있다.
“이런 말 하면 좀 그렇긴 한데, 걔 근처에 가면….”
“아, 맞아. 조금 냄새가 나긴 나더라. 안 됐어….”
레벨 1.
처음은 가볍게.
‘당신’도 알다시피,
시작부터 속내를 드러내면 안 된다. 그건 멍청한 짓이다.
“장학금 받고 들어왔다던데?”
“나 중학교 때부터 김율 알았는데 그때도….”
잡담.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삼는 게 적당하다.
“너희 내가 비밀 하나 말해줄까? 사실….”
조금씩 잡담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늘려간다.
“거기서 살아? 와. 거긴 진짜 쓰레기장이잖아.”
“아빠가 폐지를 줍는데.”
“어, 혹시 우리집 폐지 주워가는 아저씨도 똑같은 사람인가?”
“에이. 설마….”
그렇게 서서히 주목도를 높인다.
여기서 주동자가 조심해야 할 점은, 절대로 악의를 드러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직이다! ‘당신’도 알 것이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봐라.
‘김율 걔 조금 기분 나쁘지 않냐?’
이런 말보다,
“야. 와, 진짜야. 우리집 폐기 주워가는 사람이 김율 아빠 맞아!”
이런 말이 훨씬 더 현명하다.
“뭐, 진짜?”
당연히 거짓말이다.
“어떻게 알았는데?”
“나도 처음엔 긴가민가했지. 근데 일요일에 아저씨가 폐기 주워가길래, [혹시 김율 아버지세요? 저 김율이 학교 친구입니다]하고 살짝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좀 당황하시면서 잘 부탁한다고 말하더라.”
“헐….”
“진짜야?”
거짓말은 ‘우리’의 기초 소양이다.
동급생들이 반신반의하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 시선, 그 관심이 바로 성공의 증거다. 당신은 [김율]이라는 이야기 소재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김율! 너희 아버지 혹시 직업이—-.”
“야. 야. 그런 거 왜 말해? 말하지 마.”
“아, 왜? 역시 구라지?”
“그런 게 아니야. 하여간. 미안, 김율. 아무것도 아니야.”
“…….”
레벨 2.
관찰 단계.
여기서부터 악의는 알아서 잘 굴러간다.
“풉.”
세상에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인간은 없다. 학생은 더욱더 그렇다. 이제 동급생들은 김율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게 되며, 마치 돋보기를 들이밀듯 김율의 실수들을 본다.
“푸훕….”
그리고 웃는다.
체육 시간에 배구공을 놓쳐서 좀 멀리까지 뛰어갔다든가.
4교시에 깜빡 잠이 들어서 점심시간이 되어도 졸았다든가.
선생의 질문에 말을 조금 더듬었다든가.
“푸….”
매우 사소한 실수라도 상관없다.
쉬울 것. 눈에 띌 것.
언제나 [비웃음]의 역학을 기억해라.
“야, 쟤 맨날 점심시간마다 학교 뒤로 가잖아. 그거….”
“닭들 모이 줘? 진짜?”
“창문 가서 내려봐 봐. 진짜라니까.”
누구나 쉽게 볼 수 있을 것.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을 것.
“김율- 여기 봐봐-!”
“앗, 진짜 보네.”
“혹시 닭 크면 공짜로 받아가는 거 아니야?”
“우웩.”
궁극적으로는 [누구나 참여하는 게임 ]을 만들 것.
‘당신’도 알다시피.
절대다수의 따돌림은 이 라인에서 그친다.
여기까지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길 수 있다. 뚜렷한 주범이 없어도 된다. 공범이 없어도 된다. 단지 동조자들만 있어도 [레벨2]까진 얼마든지 벌어진다.
레벨2의 따돌림은 다음과 같은 수준에 해당한다.
2주일에 1번꼴로 가벼운 폭력. 3달에 1번꼴로 집단폭행. 6달에 1번꼴로 공개적인 구타. 몸에 남아서 지워지지 않는, 작은 흉터 1개. 짧게는 1학기. 길게는 3년. 이따금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폭력을 주도하는 학생이 생길 뿐, 장기간에 걸친 주동자는 없음…….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야.”
‘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번 시험해보자.”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뭘?”
“잘 봐. 이거 내가 산 신발이거든. 새삥이야.”
만일 당신이 여기까지 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면, ‘당신’은 분명히 거짓말에 능수능란할 것이다. 이제부터 당신은 가벼운 마술을 동급생들한테 베풀어줘야 한다.
“여기 신발 밑에, 이렇게, 마커로 별을 그려두는 거야. 보여? 너희도 봤지?”
“어. 그래서?”
“우리집 앞에 폐지랑 같이 버려두려고.”
“……뭔 소리야?”
“멍청아. 김율 아빠가 우리집 폐지 모으고 다니잖아.”
거짓말이다. 당신의 집앞을 지나치는 폐지수거인은 사실, 김율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런 상관 없다. 당신은 김율의 아버지가 돌아다니는 루트를 한 군데 알고 있으니까.
“폐지에 새삥 신발이 있으면 아저씨가 김율한테 선물하겠냐? 안 하겠냐? 봐라. 만약 진짜로 김율 아빠가 폐지 수거하는 아저씨면 내일 이 신발 신고 온다.”
“어….”
“그러게?”
“내일 김율이 이 신발 신고 온다에 내기 건다.”
자.
당신은 몰래 똑같은 신발을 두 켤레 준비했다.
“자아, 봐. 나 여기 버렸다. 봤지? 절대로 안 건드린다.”
한 켤레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집가에 버렸고.
“음.”
다른 한 켤레는 이미 하루 전, 김율의 아버지가 돌아다니는 루트에 놓아뒀다.
당연하지만 두 켤레 모두 밑창에 ★이 그려져 있다.
당신은 그저 친구들에게 그럴싸한 마술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마치 실시간으로 ★을 그려 넣은 척 위장한 것이다. 당신이 좀 더 용의주도하다면, 이 날은 종일 친구들과 놀아서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을 거다.
“야, 야. 확인해 봐!”
다음날 점심시간. 교실.
“이거 보다가 걸리면 어쩌려고?”
“얼른 봐보라니까!”
“잠깐 보는 건데 뭐….”
김율이 식당으로 내려가서 없는 사이, 우리는 우르르 몰려간다. 김율의 책상. 갈고리에 실내화 주머니가 걸려 있다.
학생들은 눈을 반짝인다. [이건 그냥 장난일 뿐]이라는 걸 과시하는 둣, 시시덕거리며 김율의 실내하 주머니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깨끗해진 신 발을 꺼낸다.
“와.”
당연히.
“지, 진짠데?”
김율이 신고 온 신발 밑바닥엔 ★이 그려져 있다.
“와. 씨, 그럼 네가 버린 걸 김율이….”
“너 이거 김율이랑 짠 거 아니지?”
“아냐. 얘 어제랑 오늘 계속 우리랑 붙어다녔잖아.”
“그럼 진짜로….”
학생들이 당신을 쳐다본다. 신기한 마술을 눈앞에서 목격한 눈빛이다. 이 때,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대사는 많다. 당신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 ‘봐, 내 말이 맞지?’ 으스댈 수도 있다. ‘좀 기분 나쁘네.’ 슬슬 악의를 드러낼 수도 있다.
“와.”
하지만 나는 이런 대사를 추천한다.
“진짜네…….”
주변에 묻어가라.
“아니, 사실 그 아저씨가 거짓말한 걸 수도 있잖아. 김율 아빠라고.”
당신도 몰랐다는 듯 연기해라.
“그래서 나도 진짜라고 100퍼센트 확신은 못 했지.”
어이없다는 듯 웃어라. 신발을 다시 확인하며, 믿지 못할 광경을 봤다는 듯 연기해라. 지금까지 몰랐던 진실을 새삼 깨달았다는 듯 말투를 다듬어라.
“그런데 와, 진짜였구나…….”
그리고 한 발 빼라.
“야, 야. 난 모르겠다. 내기도 됐어. 안 받아. 너희도 그냥 모르는 척해. 이건 우리끼리만 아는 거야. 아니, 됐다. 아무튼 난 모른다.”
미숙한 주동자들은 시종일관 자기 혼자서 작품을 만들려 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런 건 어리석은 조급증이다. ‘당신’이 조작한 증거물이 조잡하고, 마술이 볼품없다는 걸 느껴서 조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완벽하게 마술을 펼쳐야 한다.
“무슨 일이야?”
때마침 점심시간.
동급생들이 한둘씩 교실로 돌아온다.
“야, 김율이 사실…….”
“응? 뭔데, 뭔데?”
물론 당신은 일부러 점심시간을 마술쇼의 시간으로 잡았다. 고작 쉬는 시간 따위로 마술을 허비해버릴 순 없지 않은가?
점심시간엔 동급생들이 차례차례, 삼삼오오 짝지어 돌아온다. 시간은 충분하다. 방금 벌어진 ‘사건’을 속삭이고 전염시키는 데 딱 좋다.
“헐.”
동급생들이 김율의 신발을 돌려본다.
“미친. 진짜였어?”
‘진짜이긴.’
당신은 뒷자리에 앉아서 자는 척 눈을 감고 있다.
신중해진 것이다.
절대로 당신이 몸소 이야기를 퍼트리지 않는다. 나대지 않는다. 당신은 사냥감을 독차지하지 않으며 무리와 나눠 가지는 사자의 미덕을 안다.
“너희끼리 뭐 얘기하고 있냐?”
“얼른 일로 와봐.”
“김율 신발이 뭐?”
소문을 퍼트리는 재미는 남들한테 줘라. 마치 그들이 직접 ‘진실’을 파헤쳐서 ‘발견’했다는 착각을 심어줘라. 핏기 줄줄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씹어대고 즐기도록 놔둬라.
“으. 설마 그럼 다른 것들도 주워서 쓰는 거 아냐?”
인간의 악의를 믿어라.
“어. 나 사실 말하지 않았는데, 김율 아빠, 폐지 수거하는 분 맞아. 같은 중학교 나왔거든. 부모님 직업 말하는 시간 있었는데….”
비웃음의 힘을 신뢰해라.
“좀 더럽다….”
★의 마술을 믿어라.
“와. 그냥 다 재활용해서 쓰는 거야?”
“재활용이네. 재활용.”
“풋.”
★.
“불쌍한데 더럽긴 하다. 진짜.”
“우왁, 발냄새 나. 이거 새 거라며?”
★.
“야, 재활용 왔다. 숨겨.”
★.
“김율. 닭들 밥 주고 왔어?”
“오늘 신발 좀 깨끗하더라!”
“쿡.”
★.
“……?”
하교 시간.
당신들은 패를 이루어서 정문까지 내려간다. 김율을 뒤쫓는 것이다. 김율은 영문을 몰라서 머리를 갸웃거리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김율이 실내화 주머니에서 신발을 꺼내어 갈아신는 순간.
“푸훕!”
★은 완성된다.
“풋, 크….”
“야, 김율! 너 그거….”
“그거 은서가 어제 집 앞에 버린 신발이야!”
“신발 밑에 봐봐!”
어린 짐승들은 김율이 몰랐던 ‘진실’을 폭로하는 쾌감에 잠긴다. 너는 사실 더러운 아이다. 아니라고 잡아떼도 소용없다. 우리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
진실이란 김율의 아버지가 새 신발을 찾아내 그것을 자신의 자식한테 가져다줬다는 것이다. 진실은 김율의 아버지가 신발을 들고, 이게 얼마나 새 거인지 이리저리 유심하게 살펴서, 이만하면 그래도 괜찮겠다 싶어 자식한테 조심스럽게 준 것이다. 진실이란, 김율이 그걸 전부 알았지만 말없이 아비의 선물을 받은 것이다. 진실은 아비의 고민이고, 말 없는 표정이며, 김율의 말 없는 눈동자다.
하지만 짐승들에겐 그걸 떠올릴 상상력이 없다.
떠올리려 하는 노력조차 없다.
“…….”
비웃음이 훨씬 더 쉬우므로.
당신이 만들어준 증거를 가지고, 짐승들은 쉽게 ★을 즐긴다.
“한가해?”
김율이 무표정하게 말한다.
“재밌어?”
담담하다.
“심심하면 너희 일이나 해. 남한테 관심 꺼.”
그리고 등을 돌려 하교한다.
“어…….”
“…….”
동급생들은 잠시 침묵한다.
만일 이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야, 재미없으니까 그만하자’라고 한마디를 뱉으면 많은 것이 사그라질지 모른다. ‘고등학생이나 되어서 또 왕따야?’ 분위기를 몰면 된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런 말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뭐야? 왜 저래?”
“그냥 장난친 거잖아…….”
어느 누구도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을 때.
“재수 없어.”
“쓰레기나 신고 다니면서.”
“저런 앤 줄은 몰랐는데….”
레벨 3.
희생양에 대한 폭력이 공인된다.
“야, 누가 실내화 사서 버려봐. 그것도 신고 오나 보게.”
당신들은 학창시절을 어떤 식으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쟤 점심시간에 가방 두고 가잖아. 그때 이 필통 넣어.”
“너 진짜 애가 나빴다.”
“즐.”
기뻤는가. 즐거웠는가.
“어? 저거 내가 어제 버린 필통인데?”
“뭐야. 김율 또 재활용했어?”
“풉.”
어릴 적의 무지와 변명으로 치장할 만큼 교실은 작은 곳이어서, 거기서 벌어진 일들은 전부 세피아빛 파노라마로 예쁘장하게 색칠됐는가?
“으. 썩은 우유 냄새….”
“얼른 쟤 책상 아래 숨겨.”
“빨리! 수업 시작한다!”
나는 아니다.
“……어디서 이상한 냄새 안 나?”
“너도?”
“맞아. 수학시간 내내 힘들었잖아.”
“잠깐. 내가 찾아볼게. 킁킁.”
“뒷줄에서 나는 거 같은데.”
나는 당신들보다 좀 더 교묘하다.
교활하다.
“율아, 걸레는 왜 빨아? 빨아도 걸레인데.”
“불쌍해. 걸레한테 동정심 느끼나 봐…….”
어쩌면 당신들의 학교에는 나와 같은 인간이 없었을지 모른다.
혹은 단순히, 그저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현재 당신의 몰입률은 100%입니다.]그러나 나는 분명히 여기 있다.
“…….”
이 도시에.
이 학교에.
이 교실에 앉아서 샤프를 들고 있다.
“반장, 뭘 봐?”
반장이 묘한 눈으로 날 본다.
“……공자야.”
“응?”
“…….”
반장은 파르르 떨었다. 작은 진동이었다. 무언가에 진절머리를 치는 것 같았고, 한탄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상한 태도는 금세 끝났다. 반장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네 이름이 안 떠올라서. 뭐였더라?”
“뭐야? 반장 벌써부터 치매야? 황은서, 황은서.”
“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하고 반장이 중얼거린다.
평소에도 우리 그룹이랑은 접점이 없는 애다.
“네 여자친구가 학생회 선거에 나간다면서.”
“어 . 왜?”
“나도 나갈 거 같거든. 잘 부탁한다고 말 좀 전해주렴.”
“뭐야. 학생회장 하려고? 반장은 공부밖에 안 하잖아.”
“서울대 가려면 추천받아야지. 학생회장 되면 쉽다는 얘기가 있더라.”
그런가? 그럴 것도 같다.
대놓고 서울대 가려고 학생회장 하겠다는 태도가 좀 웃기다. 뭐, 반장이니까. 솔직한 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한다.
“멋지네. 화이팅이야, 반장. 난 여자친구를 찍을 거긴 한데, 아무튼 힘내라.”
반장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고마워.”
나는 강하다.
나는 철저히 영악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안 그래도 많이 힘 내려고.”
지금부터 나의 패배에 대해 이야기하자.
14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