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49)
4.
-헤에, 멋진 도서관이네요.
태고에 ‘기억이 고여드는 연못’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가 있었다. 인간은 이 존재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수 없다. ‘기억이 고여드는 연못’이란 인간들이 제멋대로 이름을 조립한 것에 불과했다.
실제 발음은 ■■■■■. 인간이 귀뚜라미에게 불릴 것까지 고려하여 작명하지 않듯, ■■■■■ 역시 인간에게 호명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 발음을 최대한 순화하면 ‘하무스트라’에 가까울 것이다.
-분위기도 좋고요. 장서도 훌륭한걸요.
하무스트라.
인간들은 ‘기억이 고여드는 연못’을 그렇게 불렀다.
-기꺼이 인정해드리지요. ■■■■■.
눈앞의 인간은 달랐다.
-소인이 방문해본 도서관 중에 여기가 단연 으뜸이에요.
이 인간은 자유로이 용어(龍語)를 썼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신기한 일이었다. ‘기억이 고여드는 연못’은 본래부터 궁금증이 많은 존재였다. 저 미물에게 약간의 호의와 약간의 호기심을 보낼 개연성은 충분했다.
지금까지 이 도서관에 발길을 들인 자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고로 이 인간이 최초의 방문자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너는 누구인가?
눈앞의 인간에겐 너무나도 잡스러운 냄새들이 풍겼다. 기이했다. 용의 악취가 느껴졌지만 용은 아니었다. 신의 아취가 엿보였으나 신 또한 아니었다.
‘기억이 고여드는 호수’는 눈앞의 인간 같은 존재를 본 적 없었다.
-무슨 수로 이곳에 왔지?
음색에 자연히 경계심이 서렸다.
-나는 출입을 허락한 적 없다. 여기는 나의 세계다. 목적을 밝혀라, 이방인.
-책도둑은 아니에요. 너무 경계하진 말아주세요.
인간이 키득거렸다.
-소인은 일종의 보험권유원이에요. 일일이 여러분과 같은 존재들 한분 한분을 뵈면서 설득하고 있는 중이지요.
-너의 목적을 물었다.
-집을 짓고 있어요. 아니, 별장이라고 불러야 하려나요? 소인이 건물주라면 지금 그대를 입주민으로 들이고자 설득하는 셈이네요.
인간이 또 키득거렸다.
-…….
‘기억이 고여드는 연못’은 짜증났다. 수천 년. 어쩌면 그보다 곱절의 곱절이 넘는 시간 만에 ‘짜증’을 느꼈다. 그는 책 속 등장인물이라면 악역과 선역을 가리지 않고 사랑했고, 재수 없는 인간과 재수 있는 인간을 평등히 자애했으나, 현실에선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는 법이다.
‘기억이 고여드는 연못’은 위대한 존재였다. 위대함이 무엇이냐는 정의에 따라 다르겠지만, ‘연못’이 해석하기로 진정한 위대함이란 짜증나는 것들을 쳐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짜증나는 것이로군. 꺼져라.
오늘도 ‘연못’은 위대해지기로 했다. 가볍게 권능을 발휘한 것이다.
도서관에서 ‘연못’이 가지는 힘은 절대적. 평범한 인간은 물론이고 초월자에 이르렀다는 무법자들조차 갈갈이 찢겨져 먼지가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연못’은 자신 있었다. 지금처럼 대단히 위대해지기 전, 아주 오랜 옛날엔 제법 많은 것들을 먼지로 만들어봤으니까.
-앗. 죄송해요.
눈앞의 인간은 안 그랬다.
멀쩡했다.
-소인이 그만 분위기를 타버렸네요. 그래도 좀만 더 대화해주시면 안 될까요? 여기까지 오는 데 그럭저럭 고생했거든요. 어휴, 길도 막히고 도로 사정도 안 좋고….
‘연못’은 자신의 위대함이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었다.
굉장한 쇼크였다.
너무나 굉장한 충격이었으므로, ‘연못’은 현실에서 도피했다. 방금 공격은 전력을 발휘하지 않은 것. 무효. 없었던 일로 처리돼야 마땅했다. ‘연못’은 자기정당화를 완벽히 끝마치고 인간을 공격했다.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려야겠는데. 이 도서관엔 무슨 문도 없어요? 이게 도서관이에요 무덤이에요? 창문도 좀 뚫어놓고 지내세요. 답답해라. 숨이 막힐 지경이네요.
인간은 여전히 멀쩡했다.
-소인이 대신 좀 뚫어드릴까요?
심지어 인간은 도서관 벽에 구멍을 냈다. 활짝 웃으면서.
-아. 이제 좀 환기가 되네요.
‘연못’은 정신이 멍해졌다.
-이런 미친?
수천 년에 곱절의 곱절을 더해서 처음으로 뱉은 욕이었다.
이 도서관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연못’의 육체이자 영혼이다. 고로 도서관 벽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는 건 자기 배때지에도 칼빵을 놓을 수 있음을 뜻한다. ‘연못’은 그걸 유추해낼 만큼은 유능했고, 칼빵 맞는 걸 싫어할 만큼은 똑똑했다.
-알겠소! 백기 투항하겠소. 내게서 원하는 게 무엇이오!
-당신의 모든 걸 원해요….
-차라리 죽이시오!
-아. 그럴까요? 죽여도 되나요?
-…….
‘연못’은 꽤 똑똑했다. 최소한 눈앞의 인간이 개또라이란 걸 깨달을 지능은 있었다.
-역시 죽긴 싫지요? 그럼요. 목숨은 소중한걸요. 자아, 소인도 그대를 돕고 싶어요. 부디 당신의 소중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여기 서명해주시지요.
또라이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졌다는 게 ‘연못’에겐 불운이었다.
-이건 무엇이오…?
-계약서예요.
-무슨 계약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에이, 당연하지요. 소인이 무슨 깡패도 아니고.
설령 깡패가 아닐지언정 깡패와 매우 유사한 무엇으로 여겨졌지만, 지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연못’은 똑똑했다.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을 구분할 줄 알았다.
-소인은 탑을 세우고 있어요.
탑塔.
-그대와 같은 존재들을 불러들일 거예요. 그대가 미물이라 부르는 존재들에게도 입장을 허락할 것이고요.
‘연못’은 주의 깊게 계약서를 읽었다. 읽을수록 표정이 바뀌었다.
처음엔 눈앞의 인간이 도서관을 강탈하러 온 무뢰배 또라이인 줄 알았다. 무뢰배인 건 맞았다. 또라이도 맞았다.
강탈자는 아니었다.
계약서엔 유혹적인 제안들이 넘쳤다.
-나에게 모든 세계를 관음할 자격을 주겠다고? 정말이오?
-모든 세계는 과하네요. 소인이 간섭할 수 있는 세계만요.
-……이 비밀조항들은.
-그건 반드시 지켜주셔야겠어요.
고민은 길지 않았다.
대신, 호기심이 깊어졌다.
-어째서 이런 사업을 벌이는 것이오?
궁금했다.
-무엇을 위해서? 그대에게 어떤 이익이 있다고.
-어느 존재든 자신이 원해서 태어나지 않지요.
인간은 미소를 지었다.
-누구나 한 번은 더 인생을 살 수 있어야 해요. 자신이 원한 대로 살 수는 없을지언정, 자신이 원해서 살 수는 있어야지요.
‘연못’은 인간의 미소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젠가 그대도 다시 한 번 살게 될 것이에요. 방구석 도서관장 씨.
그 말도.
5.
“…….”
도서관장은 망연하게 날 올려봤다.
내 말이 이해되지 않은 걸까. 이해는 했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괜찮다. 나는 도서관장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대들과 같이 탑을 오르자, 니.”
한참이 지나 도서관장이 웅얼거렸다.
“보, 본좌는 평범한 성좌가 아니오. 그대에게 씌인 유령이나, 그대에게 수속된 성검과 다르게, 엄연히 스테이지를 담당하는 성좌라오. 이래 봬도 제법 격이 높소이다…. 특정한 탑에 소속되라니. 그건.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모르겠소. 전혀 모르겠구려. 탑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오.”
도서관장이 어깨를 떨었다.
“어느 성좌가 전사에게 매혹되어 시종을 자처한 사례는 있소. 꽤 있지. 그대가 [백귀환생]으로 [가을비의 마왕]을 집어삼킨 것처럼, 전사가 성좌를 거둬들인 사례 역시 있다오. 하지만…, 하지만 성좌가 아예 헌터로 변했다는 얘긴 들어본 적도…….”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면 되겠네요.”
“…….”
“하무스트라. 이런 곳에서 살지 마세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들의 무덤 .
지나간 세계의 흔적들이 고여 있다. 그것뿐이다. 이곳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으며, 오직 다른 사람들이 흘린 숨결과 다른 세상에서 자아낸 이야기만이 봉인되어 있다.
‘익숙하다.’
단지 타인의 세계를 동경하거나 질시할 뿐인 장소.
‘내게 익숙한 곳이야. 여긴.’
회귀하기 전에 살았던 자취방이 떠올랐다.
내 방에도 염제의 사진과 인터뷰만 수두룩 붙어 있었다.
대도서관과 비교하면 미안해질 정도로 규모가 다르지만.
‘본질은 똑같을 거다.’
그래서 나는 말할 수 있다.
“이제 링 위로 직접 올라오세요.”
당신은 여기서 나와야 한다.
“이런 곳에서만 지내니까, 자꾸 사람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이, 이상해지다니…….”
“묵시록엔 사람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죠. 그걸 읽으면 사람을 다 알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아니에요. 하무스트라. [천마실록]에서 세계의 멸망을 뭐라고 적어뒀는지 알아요?”
묵시록은 스승님의 죽음을 이렇게 서술했었다.
「갑작스럽게 괴질이 돌아 천마가 죽었다」라고.
“그게 뭐에요.”
“…….”
“아무런 말도 못 되잖아요. 아무런 말도.”
스승님께서 마지막에 어떤 표정을 지으셨는지, 교인들이 어떤 목소리로 울부짖었는지, 강변의 아이들이 얼마나 애써서 부드러운 진흙을 파냈는지, 묵시록만 읽어선 결코 알 수 없다.
알지 못한다.
“그, 그러나!”
도서관장이 반론했다.
“본좌는 볼 수 있소. 구경할 수 있소. 관음할 수 있는 것이오!”
“그래요.”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당신은 직접 세계에 들어가서 지켜볼 수 있죠. 스승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가 슬퍼했던 것처럼 당신도 슬픔을 느꼈을 겁니다. 전 그걸 의심하지 않습니다.”
“허, 허면 별 문제가……!”
“하지만 저보다 슬프진 않았을 거예요.”
“…….”
“스승님께서 천마신공의 마지막 절식을 펼쳤을 때 당신도 숨을 삼켰겠지요. 검제가 맞받아쳐서 순간을 갈랐을 때, 당신도 경외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느낀 거. 그건 전부 ‘감상’에 불과해요.”
꾸욱.
나는 도서관장의 손을 잡아 조금 더 가까이 끌어들였다.
“당신도 라비엘을 사랑하겠지요. 좋아할 거예요. 그런데 알잖아요. 당신은 절대로, 제가 라비엘을 사랑하는 만큼 그녀를 사랑할 수 없어요.”
“…….”
“당신은 그저 맛만 보고 있는 거예요. 이 도서관의 세계에 주저앉아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인생을 무대에 올려보지 않은 채, 그냥 관객이 되어서. 마음에 드는 공연이 펼쳐지면 손뼉을 치고 아니면 하품하고. 그뿐이에요.”
“본좌는…….”
“저희와 같이 살아요.”
도서관장이 움찔거렸다.
“본좌는, 어… 엄격한 계약에 매여 있소. 어느 탑에 소속한다거나, 그런 규정 위반을 저지르면. 틀림없이 ‘탑’에서 제재를 가할 거요. 아마도 성좌의 권능을 다 잃어버릴 것이오…. 그렇게 된 본좌는 쓸모가 없어서. 그대에게 아무런 소용도.”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
“당신도 알잖아요.”
“…….”
“하무스트라.”
나는 똑바로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살천성에게 죽는 것이 당신의 꿈이었지요. 이제 그 꿈은 버리세요. 제가 당신에게 새로운 꿈을 드릴게요. 그 꿈은 언제나 즐겁진 않을 테고, 오히려 악몽일 때가 많을 겁니다. 지워버리고 싶을 때가 많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바란다면. 당신이 원한다면, 제가 그 꿈에 있어드리겠습니다.”
말했다.
“저와 삶을 살아요.”
“…….”
“당신이 저의 이야기에 등장하고, 제가 당신의 이야기에 등장하여서,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게 됩시다.”
도서관장은 입술이 우르르 떨었다. 그것보다 더 떨리는 왼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손에는 레판타 아이김 서사시보다 더 낡은 한 권의 책이 있었다.
+
■■■■■
+
제목은 읽을 수 없었다.
우리가 읽지 못하는 이계(異界)의 언어.
자신의 일생이 담긴 책을 도서관장, 아니, 하무스트라는 천천히 건네주었다.
“사왕…….”
“예.”
“본좌가 독자로서 최후의 조언을 드리겠소. 본좌는 그대의 최고 애독자요. 본좌만큼 그대를 애정하는 독자는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 그러니 필히 명심하여 들으시구려.”
“들을게요.”
“그딴 플러팅을 남발하면 듣는 사람이 오해할 수도 있으니 제발 이반시아 공작에게만 혀를 놀리시오. 안 그러면 사왕, 언젠가 이반시아 공작한테 심장이 뚫려서 죽을 것이오….”
“이미 그렇게 죽어본 적 있지만. 뭐. 유념하겠습니다.”
“사왕…….”
“예.”
“인간으로 사는 건, 즐겁소이까?”
도서관장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엿 같죠.”
나는 [■■■■■]를 잡았다.
“하지만 엿도 씹으면 맛있어요. 가끔 이빨이 부러지긴 한데, 도와드릴게요.”
“빌어먹을…….”
도서관장이 울먹였다.
“이딴 게 본좌의 묵시록의 마지막 대사라니…….”
도서관장이 책등을 잡았고, 나는 책표지를 쥐었다.
“원래 인생이 작품처럼 되기란 쉽지 않지요. 감당하십시오.”
우리는 최후의 묵시록을 펼쳤다.
도서관장은 두려움과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로, 꿋꿋하게 말했다.
“사왕. 방구석 도서관장. 이상 2인을 [■■■■■]의 등장인물로 지정하오. 이번 묵시록의 난이도는 미정(未定). 제군들이 눈을 뜨면 그곳에는 절찬리에 연재되고 있는…….”
“우리가 눈을 뜨면, 그냥 여기 이대로겠지요.”
“……그렇소.”
도서관장이 나를 올려봤다.
그 순간.
“본좌는,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하오.”
파아아아아앗!
하얀 빛이 우리를 감쌌다.
15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