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51)
사람 인연이란 참 묘하다.
누구랑 친구를 먹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 동네 슈퍼마켓 하시던 할아버지의 손자였더라, 같은 소소한 인연부터.
10년 동안 덕질한 헌터가 알고보니 정신 나간 싸이코패스였고, 내가 걔한테 죽었는데 그다음엔 내가 걔를 죽여서 이제는 동거동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같은 인연까지…….
아니. 그만두자. 너무 특이한 사례군.
아무튼 내 말의 요지는 단순하다. 사람 인연, 그거 참 알 수 없다는 거. 지금까지 나는 온갖 기묘하고도 오묘한 인간군상을 다 만나봤지만 여전히 인연의 신비함에 감탄한다.
-야아. 김공자. 오랜만에 보니까 신수가 훤하네!
구체적으로는 지금 나랑 영상통화를 하고 있는 인간한테 감탄하고 있다.
-어째 어릴 때보다 더 잘생진 거 같아, 얼굴이 아주 그냥 쫙 폈네. 폈어. 부럽다 야! 거 참, 나도 그냥 보육원 나올 때 너 따라서 탑 들어갈 걸 그랬나 봐. 여긴 말이야. 김공자. 공기도 나쁘고 인심도 나쁘고 살 곳이 못 돼.
내 또래 남자가 쉴 새 없이 지껄거렸다.
단정한 정장차림.
머리는 9:1 가르마로 넘긴 이 남자의 이름을, 나는 읊조렸다.
“김한비자야…….”
-노노. 이젠 김한비. 오케이? 나 개명했어.
“국회의원 뱃지 달았다는 얘기는 원장님한테 들었다. 축하한다, 친구야.”
아마 보육원 동기생 중에 이놈이 제일 출세했을 거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라던가.
원장님께선 지나가는 말로 ‘줄을 잘 타고 시운을 잘 만났을 뿐이란다’라고 혹평하셨지만, 우리처럼 젊은 나이엔 줄 잘 타는 것도 쉽지 않다.
-에이. 공자 너에 비하면 난 그냥 뱀꼬리 수준이지. 인터넷 안 봐? 너 인기 엄청나. 우리나라 국격을 올리는 데 아주 공헌했어.
“미안. 나 요즘 인터넷 끊어서 잘 몰라.”
-어, 그래? 의외네. 아무튼 친구야. 나 부탁 좀 들어주라.
김한비자가 서글서글 웃었다.
-나 다음 총선에선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할 거거든. 근데 내가 젊고 신선하다는 거 말고는 사람들한테 어필할 게 없잖냐. 그래서 말인데. 내가 김공자 너랑 보육원 절친이었다는 거 쫌만 홍보해도 괜찮겠냐?
“예, 안 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건승하십쇼. 의원님. 좋은 정치 해주시고요.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정치. 청렴하고 깨끗한 정치 부탁드립니다.”
-어? 아. 야! 야!
한비자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공자야! 제발 부탁한다! 나 좀 도와줘라! 지금까지 연락 안 해서 미안! 설마 네가 탑에서 그렇게 출세할 줄 알았겠냐! 사, 사진 한 장! 포스터 한 장만 쓸게! 나 국회의원 뱃지 한 번만 더 달게 제발 도와…….
뚝.
나는 미련없이 통화를 끊었다. 마지막 화면에 비친 것은 울며불며 애원하는 소꿉친구 얼굴. 그걸 보자 새삼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탑에서 성공하긴 성공했구나.’
생전 연락 안 한 소꿉친구가 전화를 걸고. 심지어 국회의원한테 시시한 부탁까지 받다니. 4000번의 회귀를 하기 전엔 꿈도 못 꾸던 일이다.
부르르르-
전화를 끊자마자 스마트폰이 또 울렸다. 한비자였다. 나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받았다.
“여보십쇼.”
-공자님, 죄송합니다. 제가 어릴 때 같이 좀 놀았다고 깝쳤습니다.
이 자식….
정치인 하더니 굉장해졌잖아?
저 뻔뻔함엔 배울 점이 있다.
-정말 바쁘시겠지만 저희 얘기를 잠깐만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야기 정도야 들어보지 못할 것도 없죠.”
-공자님. 탑에서 국적이 무의미하단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같은 한국 사람 아닙니까. 이것도 인맥입니다. 지금 우리 국회, 저희 당, 공자님께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호의에 기뻐하다가 호구 되긴 싫은데요.”
-우리한테 바라는 걸 말해라…….
“어. 깨끗한 정치? 인류평화를 위해서 일해줘.”
-불가능한 거 말고, 미친놈아!
과연. 불가능한 일이었나….
불가능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나….
“아.”
그 순간 아이디어 하나가 뇌리에 스쳤다.
“부탁할 게 있긴 있다.”
-역시! 사람이 사는 데 오고갈 부탁이 없을 리 없지. 뭔데? 아무거나 말해봐. 당 차원에서 아주 확실하게 밀어줄 테니까. 내가 백지수표 받고 너한테 전화 건 거야.
“믿음직스럽군.”
나는 미소를 지었다.
“혹시 황은서라는 사람 알고 있냐?”
공자 왈. 사람 인연이 참 묘하도다.
가끔은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복수하기도 하는 것이다.
2.
“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일세.”
내 이야기를 듣고 검성(劍星)이 대꾸했다.
“본인도 랭킹 1위에 올랐을 적에 수많은 청탁을 받았지. 같은 가문 사람들은 물론이고, 정치인과 기업인이 수백수천 번 연락을 해왔네.”
“헤에. 스웨덴 사람들도 그래요?”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지 않겠는가.”
챠아아앙!
검성과 나의 칼이 교차했다. 우리는 입으로 여유로이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손발은 바쁘게 움직였다. 우리 둘은 서로 실력을 기르기 위해 대련에 임하고 있었다.
겸사겸사 세상살이에 대한 조언도 듣고 말이지.
“자네도 이제 엄연히 권력자야. 그것도 특별한 권력자지. 권력을 정략(政略)으로 따낸 게 아니라 순전히 실력과 업적으로 얻어내지 않았는가? 바깥세상 사람들은 자네를 좋아하네 . 탑의 헌터들은 자네를 동경하고.”
“제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하시는데요. 어르신.”
“그럴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일세. 청년.”
검성이 칼을 휘둘렀다. 휘이익! 날카로운 검격이 내 손목을 노렸다. 나는 반짝이를 비스듬히 세워서 검성의 일격을 흘렸다.
예전에는 눈으로 따라가지도 못한 공격.
“저 나름대로 조심하면서 사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잡담을 주고받으며 맞받아쳤다. 맞받아칠 수 있게 되었다. 후우욱! 나는 반짝이에 오러를 흘려내어서 검성의 검을 꽉 잡았다.
“음.”
검성이 눈썹을 찡그렸다.
“오러의 활용이 대단하군.”
“저는 검술보다 오러에 재능이 있다나 봐요.”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네만 정확하군. 오러는 정신적이지. 얼마나 마음에 심상(心像)을 강렬하게 그려내냐에 따라, 오러의 위력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네. 방금은 무엇을 떠올렸는가?”
불길에 타오르는 저택.
그곳에서 어린아이들은 손발이 묶였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풀리지 않은 구속구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파….』
『용서해주세요….』
나는 아이들의 손발을 떠올리며 오러를 움직였다. 수갑과 쇠사슬. 몸부림과 발버둥. 그렇게 그려낸 오러로 검성의 칼을 억세게 붙잡은 것이다.
“글쎄요.”
나는 미소 지었다.
“영업기밀이라서요. 공짜로 알려드릴 순 없겠습니다.”
“…….”
검성의 푸른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본인이 깊이 후회하는 게 있다네. [천마실록]에 가는 것을 천무문주한테 양보한 것. [천마실록]에 다녀오기 전의 자네와 다녀온 후의 자네는 아예 다른 무인일세. 억지를 부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도 따라가야 했다.”
“지나간 일에 후회하시는 성격이에요? 되게 피곤하실 텐데.”
“건방지긴!”
검성이 웃었다.
“랭킹 1위를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검성의 칼에서 푸른 오러가 폭발했다. 콰아아앙! 압축된 공기가 한꺼번에 터진 듯한 압력. 나는 재빨리 오러로 막을 쳐서 폭발을 끊어냈다.
“하하!”
노인의 입에서 젊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좋군!”
검성은 폭발에서 그치지 않았다. 화악! 화아아악! 마치 풍압을 거느린 하나의 태풍처럼, 검성은 계속해서 푸르른 오러를 쏟아냈다. 나는 신중하게 뒤로 물러서며, 그의 검격을 하나씩 끊어 쳤다.
“라이벌의 존재란 이토록 기쁜 것인가!”
검성은 순전히 기뻐하고 있었다.
“함께 아이김 제국을 질주할 때만 해도 이리 성장할 줄은 몰랐건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이야. 자네 같은 젊은이가 나타나주어서 본인은 한없이 고맙네!”
검풍(劍風)이 몰아쳤다. 칼날이 1초를 가르고 또 가르며 들이닥쳤다. 챠아앙! 나는 어떻게든 검과 오러를 병용하여 받아쳤다. 하지만 움직임이 살짝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즐기시는 거, 아닙니까?”
“즐겁다 마다! 천무문주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며, 자네는 무서운 속도로 실력이 올라오고 있다. 세상 사는 보람이 느껴지는군!”
노인의 웃음소리가 벌판에 흘렀다.
탑 1층, 등천도시(登天都市) 바빌론의 외곽 공터. 우리의 대련을 보기 위해 몰려든 헌터가 많았다. 헌터들은 두 눈 부릅뜨고 우리의 공방을 지켜봤고, 녹화했으며, 심지어 수첩에 메모까지 해가며 감탄했다.
“굉장하잖아….”
“오러를 터득하면 저런 싸움이 가능해지는 건가.”
“그럴 리가 있냐! 저 두 사람이니까 오러를….”
“역시 아직은 검성이 사왕보다 한 수 위군.”
음.
‘그런 의견이 대세다, 이거지?’
호승심이 심장에서 끓었다.
‘좋아. 보여주지.’
나 스스로도 아직은 검성보다 하수라고 여긴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아주 다르다.
“검성 어르신.”
“무엇인가!”
“전 개인적으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식’을 선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련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서요.”
나는 검성의 칼을 끊어친 다음, 탓!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우리 둘 사이에 거리가 벌어졌다.
“하지만 어르신과 제가 그냥 평범한 대련 상대는 아니잖습니까.”
“호오?”
검성은 나를 추격해서 몰아붙이는 대신 검끝을 내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잘 모르겠군. 사왕. 우리가 어떤 특별한 인연이라도 되는가?”
“그럼요.”
나는 씩 웃었다.
“저희, 명색이 같은 사문(師門)에 든 문하생들 아닙니까?”
“……”
노신사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말한 사문이란 마교가 아니다. 배후령. 다름 아니라 검제를 말한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검성에게도 똑같은 배후령이 붙어 있으니까.
‘[천마실록]에서 검제는 스승님을 상대로 절식을 펼쳤다.’
배후령과 스승님이 논검비무를 행하는 모습은 탑에 중계되었다. 방영되었다. 원한다면 모든 헌터가 구경할 수 있었으며, 그중엔 당연히 검성도 끼어 있었다.
‘못 알아봤을 리 없다.’
그날 펼쳐진 논검을 대부분의 헌터가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검성에게 씌인 배후령만은 알았을 것이다.
‘당연해.’
자기 자신이 만든 무공이다.
어떻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우리 두 사람은 같은 배후령을 두고 있어.’
이제 그 사실을 [나의 배후령]과 [검성의 배후령] 둘 다 안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런데도 검성 어르신이 내게 뭘 물어보지 않았다는 건…. 내가 먼저 말하길 기다린 거겠지. 배려해준 거다.’
하지만 설마 이런 타이밍에 얘기를 꺼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어디 조용한 장소에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듯 고백할 줄 알았을걸.
그 증거로, 검성은 굉장히 당황하여 주변 눈치를 살피고 있다.
“아니, 청년. 사왕. 그런 말을 여기서 하면……!”
“당황하셨어요?”
나는 활짝 웃었다.
“잘 됐네요! 어르신! 더 당황해주십시오!”
“뭐, 뭣……?”
“아직 완성하지 못한 초식입니다! 받아주십쇼!”
나는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렇다.
나는 오직 검성을 당황시킬 목적으로 배후령 얘기를 꺼냈다!
-와. 치사한 새끼. 아무리 싸움판엔 반상도 없다지만 이건 좀….
인성 더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배후령이 감탄했다. 나에 대한 칭찬을 뒤로 한 채, 성검을 번쩍 올려들어서 내리찍었다.
‘심상에 그리는 것은 어느 저택의 불꽃.’
그곳에서 타오르던 불길.
‘숨 막히는 연기.’
나의 몸에서 오러가 폭발했다. 붉디붉은 촉수가 사방을 뒤덮었다. 오러는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벌판을 휘감았으며,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의 숨구멍을 질식시켰다.
공터는 삽시간에 불지옥이 되었다.
“……!”
그제야 검성이 반응했다. 서둘러 푸른 오러를 끌어올려 대항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아직 나의 초식은 끝나지 않았다.
『죽기 싫어.』
원망.
『배가고파.』
욕망.
『살고 싶어….』
소망.
모든 망념(望念)을 오러에 실었다.
피어오른 오러 한 가닥 한 가닥이 전부, 저마다 다른 아이의 목소리를 담았다. 그리하여 각기 다른 경로와 각기 다른 강도로 타올랐다.
불길은, 살아 움직이는 군체가 되어 검성을 덮쳤다.
“흐음?!”
검성은 서둘러 불길을 막았다. 앞, 뒤, 좌, 우,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불길의 파도를 일일이 끊어야만 했다.
자연히 검성의 자세에는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빈틈으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마천신공·개魔天神功·改.
제일식第一式.
염상유검炎上幼劍.
내가 만들기로 결심한, 나만의 마천신공.
그 초식을 목견한 노인은 눈을 부릅 떴고.
“죄송합니다. 사형(師兄). 이 싸움은 제가 먹겠습니다!”
나는 검성의 머리를 향해 칼날을 내리쳤다.
15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