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57)
1.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직후.
강제로 전송된 32층에서 날 기다린 것은, 동료 헌터들과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였다. 그 중에서 공녀(公女)는 뭔가 특이하게 생긴 베개를 껴안고 있었다.
“아니. 그건…?”
잘 보니까 베개가 아니라 달팽이 인형이었다.
이럴 수가.
고블린 인형이라면 모를까 달팽이 인형이라니….
“고블린 인형도 있기는 해.”
“네?”
“여기.”
공녀는 얍, 품에서 고블린 인형을 꺼내 들었다. 길쭉한 귀와 코, 광대뼈까지 굉장한 재현도를 가진 인형이었다.
“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만들었어.”
“한 번 보여주실 수….”
내가 더 고블린 갓으로서 정당하고도 적법한 요청을 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당신들 뭐하는 거니?”
흑룡주가 어이없다는 듯 이쪽을 쳐다봤다.
“성좌랑 놀 시간이 있으면 어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자꾸나. 31층을 공략하는 데만 24일이 걸렸어 . ……아니, 내 감각이 이상해진 거려나? 10층을 깨는 데 수년이 걸렸는데. 나 참….”
“그러는 흑룡주 당신도 품에 뭔가 안고 있잖아요….”
“이, 이건 자료 조사를 위해서야.”
흑룡주는 박쥐 인형을 뒤로 숨겼다.
백작과 성기사도 각각 엘프 인형과 인어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상품 확인을 위해서라네. 성좌가 만든 아이템이라니 레어하지 않은가?”
“아이템 설명도 충실하더군.”
이 인간들….
“사왕. 여기.”
“아, 감사합니다.”
나는 고블린 인형을 받아 들어 품에 꼬옥 끌어안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 세상. 아무런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흰색 도화지가 끝없이 무한하게 펼쳐진 것 같았다. 그 도화지의 한복판에 우리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음.
“……여기가 32층입니까?”
나는 내심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물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공녀가 달팽이 인형을 껴안은 채 고개를 도리질쳤다.
“여긴 일종의 대기실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32층을 구현하려면 일단 너희 전원이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해야 하거든. 아. 저기 독사 같은 경우는 너희들 기다리느라 보름 동안 여기서 지냈어.”
“좀 쑤셔서 뒈지는 줄 알았다!”
독사가 하얀 바닥에 앉은 채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이리들 늦었어? 애들 챙겨주고 후딱 나올 것이지. 여기선 너희가 뭘 하는지 관찰할 수도 없어서 꼬박 명상이나 했다고.”
“도깨비 인형과 함께 말이지.”
“명상에 도움이 되거든. 그렇게 나는 철저하게 실리적이고도 실용적인 관점에서 공략에 접근하고 있는데 너흰 진짜 뭐하다가 이제 온 거냐? 하여간 과몰입들이 심해서 원….”
“아니. 네가 너무 무신경한 거다.”
성기사는 한숨을 쉬었다.
“31층에 돌입할 때 공녀가 말하지 않았는가. [31층부터 40층까지는 종족대전이다]라고. 말인즉슨, 31층에서 40층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스테이지일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31층에서 고른 종족을 연속하여 다스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
“단순히 31층만 깨는 거라면, 천무문주. 네가 말한 대로 대충 챙겨줘도 된다. 하지만 40층까지 다스린다면 얘기가 다르지. 설사 [내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종족이 알아서 발전하도록, 미리 준비해둬야 한다.”
독사가 외눈을 껌뻑였다.
“기, 기다려. 그런 얘기가 있었냐?”
“누가 봐도 알아차릴 만했다.”
성기사의 한숨이 더 무거워졌다.
“좀, 이 정도는 알아서 생각해라. 랴오판. 너는 무예와 관련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선 너무 대충대충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지, 진짜냐? 그래서 다들 31층에서 보름씩이나 미적거렸던 거야?”
독사는 다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간절한 눈빛. 마치 우리 중 누군가가 ‘아니야’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듯했다.
안타깝지만 독사의 소망에 응답해줄 만큼 뇌세포가 덜떨어지는 헌터는 이곳에 없었다.
“문주님. 괜찮아요.”
나는 친절하게 웃으며 독사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사, 사왕아……. 아니지? 성기사가 잘못 짚은 거지? 나 혼자 등신처럼 뒤처진 건 아니지…?”
“문주님 종족이 멸망해도 아직 여섯 종족이나 남았습니다.”
“젠장!”
독사가 얼굴을 감쌌다.
그런 우리의 촌극을 감상하며 공녀는 후후, 장난스런 웃음을 흘렸다.
“너무 걱정하진 마. 서열 1위부터 서열 7위까지, 일단은 ‘다음 시대’까지… 32층 스테이지까지 생존했어. 너희가 다들 애써준 덕분에 선사시대는 금방 끝났어. 이제부턴 고대야.”
고대(古代).
31층과 32층 사이에는 시대적 간극이 놓인 것이다.
‘적어도 수천 년은 흐른 다음이겠지.’
무려 수천 년. 이 기나긴 시간 동안 고블린들이 잘 지냈을지 걱정됐지만, 공녀가 생존을 공언해주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공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을 흘렸다.
“자! 모일 사람은 다 모였으니까 다음 스테이지를 개방해줄게.”
공녀가 달팽이 인형을 공중에 띄우더니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마치 말에 탄 기병처럼 오-! 소리를 내면서 한 쪽 팔을 들어올렸다.
“32층은 31층에서 200년이 흐른 뒤의 세상이야!”
“…….”
동료들 사이에서 정적이 흘렀다. 나 또한 반응이 비슷했다.
“네?”
방금 공녀는 2000년도 아니고 200년이라고 말했다.
‘고작’ 200년 만에 선사시대가 종결되어 고대가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백 년이요? 공녀님, 이천 년을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된다.
과거, 염제가 포인트를 몰빵해서 엘프들을 키웠을 때도 31층과 32층 사이의 간극은 천 년 이상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최소 오백 년은 넘었을 거다.
그런데 200년이라고?
우리가 그 정도로 애들을 잘 키웠다는 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공녀가 싱글벙글 웃었다.
“나도 놀랐어. 너희가 빠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거든. 아니, 이번 경우엔 [빠르다]보단 [느리다]고 말해야 할지도…. 응.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야말로 지름길인 법이지.”
“무슨 말씀입니까?”
“32층에 가보면 알게 될 거야. 읏차.”
공녀는 하얀 바닥에 고블린 인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럼 32층을 개방하겠어!”
“잠깐 기다려줘.”
흑룡주가 말했다. 그녀 역시 200년이라는 숫자에 당황하고 있었다.
“아직 우리들 전원이 모이지 않았어. 이단심문관이 없잖니.”
흑룡주의 말이 옳았다. 지금 대기실에 집합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여섯 명. 우리의 멤버 중 하나인 이단심문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아이가 클리어를 선언한 다음에 32층으로 가야…….”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아.”
공녀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까 말했지. [모일 사람은 다 모였다]고. 이단심문관이 너희들 서열 4위를 말하는 거라면, 걔, 제일 일찍 32층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
“……뭐?”
“말했다시피.”
공녀가 미소를 지었다.
“가보면 알 거야.”
파아아앗!
하얀 빛이 우리를 휘감았다.
2.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창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발 아래에 세상이 펼쳐졌다.
지난번 세상에는 광활한 대해림(大海林)이 우거져 있었다. 이번엔 달랐다. 숲이 없었고, 시냇물이 없었으며, 나뭇잎 사이사이를 비추던 햇빛이 없었다.
하늘조차 없었다.
“맙소사.”
흑룡주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저게 뭐야……?”
발 아래에 이루어진 세상.
흑룡주가 ‘저것’이라고 표현한 풍경은 바로 ‘지하도시’였다. 그곳엔, 지금까지 내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도시가 만들어져 있었다.
-퇴근길이 너무 멀어서 고생이다, 라임.
어디선가 유창한 말소리들이 들려왔다.
-대공동(大空洞) 근처에 선술집이 새로 생겼다던데….
-올해 봉공일을 좀 미루고 싶다, 라임.
무언가가 우글우글 도시를 기어다녔다. 그렇다. 걸어다니는 게 아니라 기어다녔다.
달팽이들이었다.
반투명한 생물체들이 꼬물꼬물 돌아다녔다. 등에는 커다란 달팽이집을 짊어진 채로.
“미친…?”
지하도시, 아니. 지하세계는 우리가 사는 곳과 완전히 달랐다. 일단 길이 없었다. 달팽이들은 길을 걷는 대신 벽에 찰싹 달라붙어서 이동했다.
-우리 벽길에 함부로 들러붙지 마라, 라이므!
-웃기고 있네. 폴리스의 모든 벽길은 공공재다, 라임! 내가 어디에 도착해야 하는지는 신께서 정해주시지만 어떻게 기어갈지는 내가 정한다, 라임.
달팽이들은 좌우로 자유롭게 지나다녔고, 위아래로도 편하게 돌아다녔다.
거대한 지하세계.
척 보기에도 20층이 넘는 석조 건축물들이 마구잡이로 세워져 있었지만, 어디서도 계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달팽이들은 그저 벽을 기어올라 자기 집 창문으로 쏙 들어갔다.
-요즘 월세가 너무 올랐다, 라임….
-올해 겨울은 안타깝지만 ‘옛된 집’에서 지낼 수밖에 ….
심지어 노숙자들까지 있었다.
노숙자들은 작은 동굴에 옹기종기 모여서 달팽이집 안에 파고들었다. 새파랗게 빛이 나는 광물을 노숙자들은 주거니 받거니 했다. 달팽이가 파란 돌멩이를 입으로 집어 삼키자, 반투명한 몸이 푸르스름하게 빛을 냈다. 달팽이의 몸 자체가 파란색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라임… 이 한 입을 위해 오늘을 견딘다, 라이무….
-빛이 영롱한 걸 보니 애새끼들이 좀 좋은 걸 구해준 모양이다, 라임.
-운이 좋았다. 정말 요즘 업자들은 상도덕이 없다, 라임. 물건에 장난을 쳐도 어떻게 돌담배에 장난을 치냐?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라임.
-나도 한 입만… .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얼른 짐을 옮겨라, 라임!
달팽이가 촉수를 휘둘렀다. 철써억! 질퍽한 소리가 울렸다. 촉수에 맞은 종족은 신음을 흘리며, 무거운 돌덩어리들을 마차에 옮겨 실었다.
귀인족(鬼人族).
일찍이 독사가 다스리던 도깨비들이 낑낑거리며 일하고 있었다.
-진짜, 귀인족들은 다 게으르다! 라임!
관리자로 보이는 달팽이가 툴툴거렸다.
-더럽게 비싼 주제에 조금만 한 눈을 팔면 딴짓을 한다. 라이무.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살려주는데 도대체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
-맞다. 하여간 노예들은 약간만 잘해줘도 박박 기어오른다, 라임. 껍질도 없는 하등종족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뻗대는지.
-야, 노예. 너 한번 ‘라임’이라고 말해봐라, 라임. 제대로 발음할 줄 알면 봐주겠다.
달팽이는 귀인족보다 훨씬 작았다. 귀인족들은 오크처럼 몸이 커다랬고, 이마 한가운데엔 외뿔이 돋아나 있었다. 하지만 귀인족은 자기 허리에도 못 미치는 달팽이한테 쩔쩔맸다.
-라, 라이미.
-저거 봐라! 노예들은 라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 태생부터 천해서 신성한 말조차 입에 담지 못한다, 라임. 천박한 것들! 얼른 돌이나 옮겨라!
-으으으…
세상에.
설마 저 달팽이들. 귀인족을 노예로 부리는 거야?
“아니……. 뭐야, 저거…….”
독사가 입을 떡 벌렸다.
졸지에 자기 종족이 노예로 전락해버린 거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말이 돼? 나, 나는 나 나름대로 이것저것 챙겨주고 31층을 떠났다고! 애들한테 칼도 만들어줬고, 창도 만들어줬고, 싸우는 방법도 알려줬는데……. 뭐야, 저거! 노예? 설마 내 종족이 노예가 된 거냐?!”
“어라.”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운 얼굴들이 보이는군요!”
이단심문관이었다.
“아하핫. 과연, 이제 드디어 새로운 시대에 진입했다고 인정받은 것입니까. 흐음. 느리다면 느리고 빠르다면 빠르군요. 아니.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그래도 빠른 편이라고 인정받은 것이라고 생각해야겠습니다!”
이단심문관은 평소와 똑같았다. 평소처럼 검은색 사제복을 입고 있었으며, 평소처럼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그래서 독사는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이단심문관한테 달려들었다.
“야! 이 싸이코패스 새끼야!”
“앗, 네.”
“저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내 종족이 네 종족 시다바리가 되어 있어?!”
독사는 이단심문관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이단심문관은 탈탈 흔들리면서도, 입가에서 방긋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건 간단히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현재 제가 이룩한 [달팽이 문명]은 고도로 집약된 노동력을 필요로 합니다. 노예제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데 꽤나 쓸 만한 제도입니다! 마침 112년 전에 귀인족이 대규모로 침략해와서, 격퇴한 다음, 전부 사로잡았습니다!”
“뭐, 뭐어……?”
“아핫.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존심이 무척 드센 종족이라서 길들이기 힘들었고, 지금도 힘듭니다만, 어느 정도 기세를 죽여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마 앞으로 3세대만 더 지나면 종족의 본성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
독사가 입을 뻐끔거렸다. 이단심문관의 말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반면에 다른 동료 헌터들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말없이 서로 쳐다보았다.
“……이단심문관 씨.”
내가 대표로 나서서 말문을 열었다.
“뭣 좀 여쭙고 싶은데요.”
“아앗, 사왕! 예! 뭐든지 질문하십시오.”
이단심문관이 미소 지었다. 만약 이단심문관한테 강아지 꼬리가 달렸다면 지금쯤 열렬하게 파닥파닥거리고 있겠지. 그런 상상이 들 정도로 미소에 활기가 차 있었다.
“저희, 31층 클리어를 선언하고 나서 대기실로 이동했거든요. 거기에 당신은 없었습니다. 공녀는 당신이 제일 먼저 32층에 도착했다고 말했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음? 아아. 과연. 아하.”
이단심문관이 서너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표현이군요. 저는 32층에 먼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지금까지 쭉 31층에만 머물러 있었을 뿐입니다!”
“…….”
정적.
“……네?”
“방금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사왕! 여러분이 차례차례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탑이 알려줬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생각했습니다! 만일 31층이 다음 층과 이어지는 것이라면, 굳이 클리어를 선언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
“저는 인류의 역사가 전개된 방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이 지식은 [달팽이 문명]의 발전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게 확실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스테이지 클리어를 선언하지 않겠다고 탑에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 저는 계속해서 산와족(山禍族) 곁을 맴돌면서 이들을 돌봤습니다!”
이단심문관이 활짝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아핫. 200년 하고도 6개월 21일 만이군요! 오래간만에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이런 미친.
15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