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59)
독사, 흑룡주 등의 사람들도 하나 둘 허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에게도 임무가 주어진 것이리라.
그 내용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맡은 종족들을 탈출시키라는 것이겠지.’
그때쯤 이단심문관이 미소를 지었다.
“호오?”
아마 그에게도 [퀘스트]가 하달되었을 것이다.
그 내용을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임무가 떴군요. 아핫! 여러분의 탈출을 막아 제국을 굳건하게 수호하라는 퀘스트입니다!”
우리와 정반대.
제국을 사수한다.
“아마도 여러분에겐 슬라임 제국에서 종족을 구출하자는 임무가 내려졌겠군요. 흐음, 흥미롭습니다. 서로의 퀘스트 목표가 충돌하게 되다니.”
“…….”
우리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우우우… 우! 지하도시 콜로세움에서 들려오는 함성이 우리의 정적을 좀먹었다.
이단심문관은 턱을 쓰다듬었다.
“이해했습니다. 여러분. 저에게 항복하십시오.”
“……뭐?”
흑룡주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단심문관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싱긋, 웃으면서 지극히 논리적인 얘기를 나열하듯 말했다.
“지금 여러분이 감정적으로 많이 혼란한 상태라는 건 압니다! 비록 보름 남짓한 시간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여러분은 각자의 종족에 애정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종족이 노예로 전락하다니, 납득하지 못해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게 제일 빠릅니다!”
빠르다.
“만일 제가 간섭하지 않았다면 이곳 세계의 인류들은 수천 년 동안 헤맸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시기적절한 개입으로 인해, 인류는 불과 200년 만에 고대로 진입했습니다. 빠르지요!”
“이단심문관. 설령 당신 말이 맞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종교와 노예를 이용하는 건…….”
“제 방법이 완벽하다는 게 아닙니다. 흑룡주! 수천 년의 역사에서 희생되었을지도 모르는 인명을 상상해보십시오. 설혹 제 문명이 수십만 명의 노예를 혹사시킨다 해도 ‘겨우’ 몇 백년입니다!”
“…….”
“저는 역사를 더욱더 가속시킬 것입니다.”
이단심문관이 말했다. 지하세계에는 여기저기 횃불이 타올랐다. 이단심문관의 뒤편으로, 거대한 강아지 조각상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세로. 근세에서 근대로. 마침내 근대에서 현대로! 인류가 거칠 수밖에 없는 모든 실수와 오해, 학살을 최대한 빨리 끝낼 것입니다!”
이단심문관의 목소리엔 확신이 흘렀다.
그는 서글서글한 눈매로 뜻을 전하고 있었다.
‘저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여러분. 저에게 항복해주십시오! 제가 이 세계에 남아서 이들을 인도하겠습니다. 400년. 아니, 360년 안에 이들을 저희 문명이 도달한 수준까지 끌어올리겠습니다!”
“여기서 360년을 더 버티겠다고…?”
“예!”
한 문명의 역사가 적힌 기둥 아래에서 이단심문관은 활짝 웃었다.
“저를 믿고 모두 떠나주십시오!”
4.
우리는 회의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단심문관에게 스테이지를 맡기자는 동료도 있었고,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두 시간이 넘도록 중론이 안 모였다.
“우선 종족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둘러보고 옵시다. 다들 머리에 피가 오르기 시작했어요.”
내가 말했다.
“이대로는 감정 싸움으로 번질 뿐입니다. …아이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한 번 직접 봐보도록 해요. 그럼 저희도 저절로 결심하게 될 겁니다. 자. 내일 여기에 다시 모이기로 하죠. 오케이?”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신음을 흘리거나 한숨을 참으며, 각자의 종족이 머무르는 구역을 찾아 흩어졌다.
나는 물론 고블린들이 지내는 곳으로.
대부분의 고블린은 소금 광산에서 살고 있었다.
-오늘 주간 작업은 끝이다! 라임! 모두 숙소로 돌아가!
-혈장(穴長)을 제외한 곰팡이들은 절대로 바깥에 돌아다닐 수 없다!
-일렬로! 질서 정연하게!
산와족 달팽이들이 촉수를 휘둘렀다. 움찔. 고블린들은 어깨를 떨면서, 소금 광산 바로 옆에 패인 구덩이들로 들어갔다.
그 ‘구덩이’가 바로 지정족에게 주어진 숙소였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말문이 막혔고, 막힌 입술 틈새에서 신음과 같은 뭔가가 흘러나왔다.
“말도 안 돼…. 구덩이라니. 이 아이들이 얼마나 진흙을 좋아하는데. 짠내밖에 없는 여기서 살다니요. 하다못해 축축한 물기가 있는 곳에서 지내야 한다고요.”
-그러게.
배후령이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쟤들도 물 찾는다. 야.
수백 개의 구덩이에서 고블린이 한두 명씩 기어나왔다. 고블린들은 목에 빨간색 줄을 둘렀으며, 허리엔 물항아리를 껴안고 있었다.
혈장(穴長).
구덩이마다 뽑힌 반장들이 직접 물을 길러오려는 것이다.
-케르르.
혈장들은 대체로 어미였다.
나는 왜 어미들이 혈장으로 뽑혔는지 바로 이해했다.
-왜 너희 숙소에선 두 마리나 나오냐!
-케륵, 제가 없어지면 아이가 계속 웁니다. 봐주십쇼, 케르….
-쯧!
산와족 감독관들은 [혈장을 제외한 고블린은 바깥에 돌아다니지 마라]고 명령했다. 그렇지만 어미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모정까지 막진 않았다. 어미가 혈장으로 뽑히면 아이를 합쳐서 2명까지 외출할 수 있었으며, 물항아리도 2통씩 채워올 수 있었다.
-고르륵!
-물! 케, 물!
동굴 샘물에 어린 고블린들이 뛰어들었다. 첨벙! 첨벙. 아이들이 헤엄치는 동안 어미들은 물을 길렀다.
유악도 안 발라진 초벌구이 항아리. 떨어트리면 쉽게 깨지는 도자기였다. 광노(鑛奴)로 살아가는 고블린들에겐 그나마도 귀중한 재산이라서, 어미들은 항아리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
나는 말수가 점점 줄었다.
샘물을 긷는 시간은 지정족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시간이었다. 보석 같은 휴식 동안, 어미 고블린들은 모래에 물을 짓이겨서 어떻게든 진흙의 촉감을 흉내 냈다. 그 까끌까끌한 유사 진흙으로 아이들 살갗에 천천히 문신을 그렸다.
-고르르!
-고륵, 고륵!
아이들은 멋모르고 좋아라 했다.
어떤 아이는 쭈꾸미 다리 같은 손을 꼬물거려서 어미의 몸에 흙을 묻혔다. 문신이 아니라 낙서에 가까웠다.
어미는 아이의 낙서를 지우지 않았다.
-야간 작업 시간이다! 라임!
하루 노동은 계속됐다.
-꾸물꾸물대지 마라, 곰팡이들!
달팽이 관리관이 재촉했다. 산와족은 고블린을 [곰팡이]라고 불렀다. 멸칭이었다. 산와족의 발음에서 곰팡이는 [오르그]인데, 고블린들이 항상 고륵고륵 운다고 해서 그리 별명을 붙여버린 것이다.
-어서 숙소에서 나와!
-미적대지 마라! 게으른 오르그들 같으니.
단순히 ‘발음이 재밌다’는 이유로 한 종족을 싸잡아 부르는 잔인함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고블린들만 멸칭으로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귀인족은 [쥐뿔이]였다. 흡혈종은 [피빨이]. 새기족에 이르러선 그냥 [생선]이었다. 산와족의 지배 아래에서, 종족들이 지닌 특색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작업 시작!
-야간 작업을 시작해라!
까앙!
고블린들이 돌망치를 들고 암염을 두들겼다. 소금 광산에서 캐온 암염은 무척 딱딱하고 큼직했다. 암염이 먹기 좋은 크기까지 작아지도록 쪼개는 것이 고블린들의 야간 작업이었다.
-케르르….
-케르륵. 케르르.
돌소금은 깨지면서 악취를 풍겼다. 달걀 노른자가 썩은 냄새였다. 깡! 까앙! 깡! 고블린들은 긴 코끝에 짠내를 묻혀가며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돌소금을 깨트렸다.
-케르르르….
멀리서 보면 고블린들은 빨래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고블린들의 손톱이 다 닳아 있었다.
소금이 깨지면서 손톱도 깨졌다.
쭈글쭈글한 손가락으로 피가 흘렀고, 흐른 피로 소금의 짠내가 파고들었다. 고블린들은 이따금 신음을 흘렸지만 익숙한 듯 작업을 이어갔다.
-라임.
달팽이 관리관이 위를 올려봤다.
지하세계의 한복판. 동굴 천장에는 딱 한 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작은 구멍에서 낮이면 햇빛이 쏟아졌고 밤이면 달빛이 내려앉았다. 지금은 밤하늘의 별이 엿보였다.
-작업 종료!
-오늘 야간 작업을 종료한다, 라임!
-광노들은 전원 숙소로! 망치는 전부 제자리에 놓는다. 망치를 가지고 돌아가는 곰팡이는 매질 50대다! 라이므! 잊지 마라! 망치를 가지고 돌아가는 곰팡이는 매질 50대다!
고블린들은 고개를 떨군 채 구덩이로 돌아갔다.
-케르르… 고르.
구덩이로 돌아간 지정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2통의 물항아리. 그리고 관리관들이 돌아다니면서 던져준, 잉어 같은 생선 몇 마리.
이 또한 새기족 어노(魚奴)들이 잡아온 물고기였다.
물에서 사는 노예들이 생선을 잡아다가 물에서 사는 노예들을 먹였다.
“…….”
구덩이마다 물고기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수백….
다 구워지지 않은 생선에 어린 고블린들이 자꾸만 손을 뻗었다. 하루 내내 돌소금을 캐느라 지쳐버린 어미가, 마치 파리를 내쫓듯 힘 없는 손길로 아이의 손등을 쳤다.
그래도 아이들은 호시탐탐 먹이를 노렸다. 결국 제일 먼저 구워진 생선은 아이들에게 주어졌다. 아이들은 허겁지겁 물고기를 뜯어먹었다.
-쟤들은 꼭 뭘 쳐먹어도 불에 태워서 먹는다, 라임.
야간 감독을 맡은 달팽이들이 낄낄 웃었다.
-우리보다 소화 기관이 덜 발달해서 그런다.
-진짜 야만족이다. 어떻게 음식을 불에 태우냐?
-그나저나 다음 콜로세움에 내보낼 후보가….
밤이 되었다.
고블린들은 잠에 들었다. 감독관들은 망루 위에서 공기 놀이를 하거나 꾸벅꾸벅 졸았다. 멀리서 취객들이 소란을 피울 뿐, 지하세계는 고요한 정적에 가라앉았다.
“음.”
이 시점에서 이미 나는 결심이 섰다.
“아무래도 라비엘에게 사과해야할 거 같아요.”
내가 말했다.
배후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회귀하려고?
“예. 돌아가서, 이단심문관과 얘기를 하면 좀 더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안 통하면?
“그럼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죠. 아무튼 200년 정도는 시간이 있다 이거잖아요.”
배후령이 코를 씰룩거렸다.
-난 반대야.
“왜요? 이단심문관이 한 말에 내심 동감했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씁.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이 새끼가 말귀를 알아먹는담?
배후령이 머리를 긁적였다.
-야. 가령 내가 니 아이라고 해보자.
“네에?”
-가령이라고. 가령! 미쳤냐는 얼굴로 쳐다보지 말고. 아무튼 그렇게 내가 니 아이인데, 그런 내가 학당에 가서 좀 쳐맞고 돌아왔어. 그럼 너 하루 전으로 회귀한 다음, 내가 쳐맞았다는 사실을 없애버릴 거냐?
“……무슨 소리예요?”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배후령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만일 내가 뭐 사고를 당했다. 운이 나빠서 죽었다. 그럼 네가 회귀하는 것 또한 당연지사. 아니, 그때는 두말 말고 회귀해라. 너 한 번 죽어서 나 무조건 살려라. 알았냐?
“아니 지금 뭔 소리를…….”
-근데 좀 처맞았다고 하루 되돌아가서 그게 다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면 말야. 내가 좀 많이 좆같을 것 같지 않냐? 처맞은 건 난데 왜 니가 회귀하고 지랄이야, 나한테는 기회도 안 줄 거냐 이런 생각 백퍼 들 거거든.
“무슨 기회요?”
-그 새끼들 내가 족쳐버릴 기회. 이건 사실 너도 아는 얘기야. 바로 몇달 전에 너 길러준 사람한테서도 한 번 거하게 털렸잖아.
오자서 이야기.
“하지만….”
-좀 믿어봐라.
“누구를요?”
-너.
배후령이 담담히 즉답했다.
-그리고 네 주변에 있는 애들.
나는 숙고했다.
동굴에서 사는 쥐들이 찍찍거렸다.
한참 시간이 흘렀을 때.
-엉?
배후령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야, 좀비야. 저거 좀 봐라.
“예?”
-쟤들. 고블린들.
나는 배후령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쟤네 잠 안 자고 뭐 꾸물꾸물거리는데?
정말이었다.
구덩이에서 고블린들이 몰래 기어나왔다. 구덩이마다 한두 명 정도일까. 망루에서 감독관들이 꾸벅꾸벅 조는 걸 확인한 다음, 고블린들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어디론가 향했다.
-어라. 동굴로 간다?
고블린들은 소금 광산에 들어갔다.
광산 내부는 개미굴처럼 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소금에 비교적 취약한 산와족 감독관들은, 주로 광산 바깥에서 노예들을 지휘할 뿐.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진 않았다.
-케르르….
-케륵, 케르.
고블린들이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걸어갔다. 더 깊이 들어갈수록 광산 통로는 더 좁아졌고, 천장은 더 낮아졌다. 마치 미로와 같았다. 그러나 고블린들은 벌써 몇 번이나 이 길을 밟아본 듯 능숙하게 길을 찾았다.
-허어?
배후령이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들 봐라?
“…….”
-등잔밑이 어둡다더니. 아예 상전들 발밑에다 비밀통로를 만들어놨구만?
지하 2층. 지하 3층. 지하 4층.
까마득하게 깊은 곳까지 고블린들은 내려갔다. 지나쳐온 갈림길만 수백이었다. 길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가 섣불리 발길을 들였다가는 아마 평생토록 빠져 나오기 힘들겠지.
마침내 한 시간이 넘도록 내려가서야.
-케르.
넓게 트인 공동이 펼쳐졌다.
-케르륵, 케르.
-케르르르….
어두운 공동에선 횃불이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불빛이 희미하게 비출 때마다 고블린들의 윤곽이 흔들렸다.
이곳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하나가 아니었다. 몇 개나 되었다. 내가 뒤쫓아온 고블린뿐만 아니라, 다른 어디선가 몰려온 무리들까지 있었다.
-카아.
배후령이 감탄했다.
-봐라. 내 말이 맞지? 얘들도 다 사람이야. 가만히 누가 도와주기만 기다리고 있진 않거든!
배후령의 말에 반응한 것일까.
탑이 내게 속삭였다.
[지정족들이 비밀집회를 시작합니다.]16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