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61)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듣고 싶군요.”
이단심문관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제게 항복해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사왕을 따라서 저와 대적하시렵니까? 아핫. 저는 어느 쪽이라도 좋습니다.”
“……이건 배신 행위 아니니?”
흑룡주가 이마를 감쌌다. 두통이 지끈거리는 걸까. 그녀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싸이코패스를 지그시 흘겨봤다.
“우리는 서로 적대하지 않기로 맹세했잖아. 그날 밤에 한 번. 사왕과 함께 28층을 깰 때 한 번. 나는 똑같은 맹세가 두 번 겹쳐지면 더 무거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괜찮습니다! 제가 이기든 여러분이 이기든 스테이지는 클리어되겠지요. 어느 쪽이든 우리는 승리합니다. 승리의 방법에 이견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아…….”
“본인은 사왕의 뒤에 서겠네.”
검성이 말했다.
“빠른 결과를 쫓기만 하는 인생에 지쳐서 탑으로 들어온 몸일세. 여기까지 와서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군. 만신전주(萬神殿主). 정중히 항복을 권유해주었다만, 나 역시 정중히 거절하겠다.”
동료들이 한 명씩 발을 옮겼다. 뚜벅, 뚜벅. 이단심문관은 미소를 지은 채 발걸음의 행방을 지켜보았다.
“아하.”
내 뒤에는 다섯 명이 섰다.
“과연! 저는 절망적으로 신용이 없군요!”
이단심문관의 뒤에는 아무도 서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몇 명은 이단심문관한테 동조했다. 백작이 그랬다. 하지만 하루 동안 각자의 종족이 처한 상황을 살펴보고 온 지금, 이단심문관을 편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너는 신용이 없는 게 아니다.”
성기사가 말했다.
“우리 모두 네가 훌륭한 길드장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네가 [최악의 부모]가 될 거라는 사실도 알지.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 너한테 아이들을 다 맡기고 떠나라니…. 차라리 독사한테 맡기는 편이 안심된다.”
“앙? 가만히 있는 난 또 왜 건드려?”
“칭찬이다. 너는 이단심문관보단 좋은 부모가 될 거다.”
“어이어이… 굉장한 칭찬이잖아. 차라리 히틀러보다 좋은 지도자가 될 거라고 말하라고.”
6대1.
압도적인 열세에 처했는데도 이단심문관은 싱글벙글거렸다 .
“이제부터 어쩌실 계획입니까? 사왕. 제가 세운 도시는 강합니다. 노예들은 이미 과거의 야성을 잊어버리고 산와족의 통치에 순종했습니다!”
이단심문관은 자신이 있어 보였다.
“지정족의 비밀집회를 엿보신 것 같습니다만. 거기서도 산와족을 규탄하거나 비방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겠지요! 단순히 제사를 지내기만 했을 겁니다. 그만큼 산와족의 지배는 견고합니다!”
‘역시.’
고블린들의 집회는 알면서도 내버려둔 것이군.
나와 마찬가지로 이단심문관도 투명인간이 되어 돌아다닐 수 있다. 이곳을 200년이나 통치했는데 비밀집회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상관없다. 어차피 큰 위협은 안 된다.]이단심문관은 그렇게 판단해서 비밀집회를 방치했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여러분의 종족은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저 지나간 과거를 애도하고 추모할 뿐입니다. 저의 200년이 그걸 가능케 했습니다. 사왕! 무릎 꿇은 자들을 일으켜세울 방법이 당신에겐 있습니까.”
“…….”
나는 조용히 지하세계를 둘러보았다.
어느덧 새벽이 밝았다.
지하도시의 천정에서 한 줄기 푸른 빛이 흘렀다. 고블린들은 두꺼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구덩이에서 기어나왔다. 옛된 세상에서는 제일 늦게 잠드는 족속이 노예였고, 제일 일찍 깨어나는 족속도 노예였다.
“제가 일으켜세우는 게 아닙니다.”
나는 [문명 상점]을 열었다.
상점에 올라온 아이템들이 표시되었다.
+
[신탁 메세지] – 20p [동물에 빙의] – 40p [꿈에 등장] – 100p [사냥감 탐색] -5p [황동급 정착지 탐색] -80p [부족급 장군(뽑기)] – 100P [황동급 기술 발명(뽑기)] – 1.000Pㆍ
ㆍ
ㆍ
+
나는 그중 한 개의 아이템을 손으로 짚었다.
“아이들이 일어설 수 있게, 작은 계기가 될 뿐이지요.”
곧이어 탑의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신탁 메세지’를 구입합니다.] [2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995입니다.]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탁 메세지’를 구입합니 다.] [2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975입니다.]내가 보유하고 있는 포인트를 거의 전부 쏟아부었다.
[‘신탁 메세지’를 구입합니다.] [‘신탁 메세지’를 구입합니다.] [‘신탁 메세지’를 구입합니다.]나는 내가 오롯하게 버텨야만 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4000일의 회귀. 오직 혼자서 사천 번의 죽음을 감당하려고 했을 때, 나를 도와 주었던 건 다름 아니라 목소리였다.
‘당신은 죽었습니다’라는 탑의 목소리.
내가 죽을 때마다 탑에선 나의 죽음을 고지해주었다. 설령 회귀하더라도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탑은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누군가가 나를 지켜본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정말로 힘들 때, 그 사실이 내게 위안이 되었다.
[‘신탁 메세지’를 구입합니다.]이제는 내가 누군가의 위안이 되어줄 차례였다.
[2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215입니다.]나는 신탁 메세지를 40개 구매했다.
여전히 이단심문관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아이템을 구입했는지 알 수는 없겠지.
그동안 나는 고블린 제사장을 비롯하여, 각 구덩이를 담당하는 혈장(穴長), 검투사 숙소에서 쉬고 있는 검노(劍奴), 총 40명을 신탁의 대상으로 지정했다.
‘……무슨 말을 전해줘야 할까.’
나는 고민했다.
‘산와족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반기를 드는 것도 순종을 하는 것도, 전부 고블린들이 알아서 선택할 몫이지. 내가 아이들에게 선물해야 하는 건 선택 그 자체가 아니야. 아이들이 스스로 뭔가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거다.’
메세지로 보낼 수 있는 말은 단 한 문장.
고심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말들 가운데 신탁을 골랐다.
[백사자는 당신들의 곁에 있습니다.]멈칫.
아이의 얼굴에 물을 발라주던 어미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백사자는 당신들의 곁에 있습니다.]구덩이를 막 벗어나서 돌도끼를 집어든 혈장이 흠칫했다.
[백사자는 당신들의 곁에 있습니다.]비좁은 숙소에서 검투사가 깜짝 놀랐다.
그는 자신의 단검을 갈다가 그만 숫돌을 떨어트렸다.
[백사자는 당신들의 곁에 있습니다.]너희가 신으로 모시는 이 사람은 무력하다.
땅을 뒤엎는 권능이 없고 하늘을 뒤흔드는 기적이 없다.
내게 가능한 일이란 기껏해야 한 마디 목소리를 내는 것뿐.
[백사자는 당신들의 곁에 있습니다.]그것이 내가 최초로 내린 신탁이었다.
-…….
동굴 바닥에 누워 있던 늙은 고블린이 뒤척였다. 제사장은 타다 남은 장작을 지팡이 삼아 일어섰다. 바스슥. 지팡이가 체중을 견디지 못해 부서졌지만, 이미 제사장은 몸을 일으킨 뒤였다.
-고르르….
노인은 힘겹게 지하동굴의 미로를 걸었다. 걸을수록 발걸음이 빨라졌다. 늙은 고블린은 발뿐만 아니라 손까지 써가며 지하에서 위로, 위쪽으로 기어올랐다.
-백사자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제사장은 앞손으로 바위를 잡았고, 뒷발로 동굴 바닥을 디뎠다. 그의 늙은 살에서 붉은색 오러가 흘렀다. 불꽃을 닮은 오러가 목소리를 실은 채 동굴에 울렸다.
-백사자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메아리가 쳤다.
-백사자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고블린들의 지하동굴은 수십 갈래로 길이 나 있었다. 제사장이 오러를 토해내 울부짖은 목소리 역시, 수십 갈래의 길을 따라 메아리쳤다. 오래 전 암염이 바닥나서 폐쇄된 구멍에. 새벽 작업을 시작한 소금광산에.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백사자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메아리친 목소리가 마침내 광산 입구에 다다랐다. 그곳엔 고블린의 혈(穴)들이 있었다. 항아리에 담긴 새벽 물을 마시던 고블린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백사자께서 우리에게…….
그리고 노인은 힘이 다하여 쓰러졌다.
생명을 쥐어짜 마지막 한 방울의 오러까지 쏟아부은 것이다.
-말씀하셨다…….
늙은 제사장은 다시 일어설 힘을 남겨두지 않고 땅에 누웠다. 자신이 토해낸 외침이 아직 그치지도 않았을 때였다.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는 것을 들으며, 제사장은 눈을 감았다.
-케르.
-케케르케륵…?
고블린들이 술렁거렸다. 그들은 구덩이에서 고개를 내밀어, 모두 광산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입구멍에선 여전히 메아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케륵.
한 명의 혈장이 아이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내게 신탁을 받은 40인 중 한 명이었다.
-백사자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노인의 마지막 메아리가 사라지기 전에 혈장이 외쳤다. 한 명이 아니었다. 신탁을 내림받은 수십 명의 지정족이 차례차례 머리를 치켜들었다.
-드디어 백사자께서 돌아오셨다!
-내가 들었다! 케륵, 나도 들었다!
-우리의 곁에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뿐이었다. 신탁을 내림받은 아이들은, 어서 이것을 동족에게 알려야만 한다는 듯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것만으로도 산와족 감독관들은 당황했다.
-뭐냐, 라임. 이것들이 갑자기 단체로….
-조용! 모두 조용히 해라!
-지금부터 큰소리를 치는 곰팡이는 채찍으로 다스리겠다!
달팽이들이 망루를 기어나와 촉수를 휘둘렀다. 찰싹! 채찍 소리가 들리자 여러 고블린이 움츠러들었다. 그럼에도 외침을 멈추지 않는 지정족도 있었지만, 산와족은 예외를 두지 않고 주동자를 때렸다.
“…….”
이단심문관이 흐음, 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과연. 신탁 메세지를 발동한 것입니까?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군요. 하지만 사왕. 당신의 포인트는 제한되어 있을 테지요. 일만 명은커녕 수천 명에게도 신탁을 내리지 못합니다! 이 정도 분란은 산와족 선에서 정리—.”
나는 이단심문관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곧바로 다음 아이템을 구입했다.
[‘사냥감 탐색’을 구입합니다.] [5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210입니다.]이미 한 번 구매해본 아이템이다.
나는 재빨리 아이템을 사용했다.
‘여기서 제일 근처에 있는 사자를 탐색해주십시오.’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졌다.
그곳은 콜로세움이었다. 검투장의 바로 옆에 동물 우리가 있었으며, 다섯 마리나 되는 사자가 철창에 갇혀 있었다. 사자는 태평하게 소뼈를 갉아먹었다.
‘오케이.’
나는 상점에서 마지막 세 번째 아이템을 구매했다.
‘동물 빙의를 구입하겠습니다.’
탑에서 응답했다.
[‘동물 빙의’를 구입합니다.] [4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170입니다.]이단심문관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콜로세움의 사자에 빙의했다. 화아악! 시야가 뒤틀렸다. 마치 퓨즈가 내려간 것처럼 머릿속이 어두워졌다.
그것도 잠시.
다음 순간에 나는 사자의 몸을 차지하고 있었다.
“크르르…”
지난번 스테이지와 달리 이 사자는 하얀색 털을 지니지 않았다. 갈기도 평범하게 갈색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크르릉. 그르.”
털이 무슨 색깔이든 간에 사자의 목소리는 사자의 목소리니까.
온몸에서 오러를 끌어올렸다. 붉은 향을 품은 오러가 심장에서 요동쳤다. 두근! 나는 내 심장의 박동을 고스란히 담아내어 목소리로 터트렸다.
“크르르륵!”
맞은편 우리에 갇힌 짐승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크르르르르!”
내 외침은 철창을 뛰어넘어 동물 우리를 빠져나갔다. 콜로세움이 세워진 광장에 울렸다. 광장이 펼쳐진 길거리로, 산와족들이 드나드는 벽길로, 지하도시의 천장으로, 이윽고 고블린들이 파놓은 구덩이로 퍼졌다.
‘나는 여기에 있다.’
사자의 눈에는 안 보여도 알 수 있다.
지금, 고블린들은 틀림없이 내 외침에 귀를 기울인다.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크르르…….”
나는 한 차례 숨을 골랐고.
“구루-!”
사자후를 터트렸다.
지정족의 고향이 되어버린 곳의 이름. 내가 붙여준 이름. 우리들이 최초로 나눈 이름이자 글자이며 마침내 믿음이 된 그 울음을 울부짖었다.
“구루!”
대답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구루…….
대공동 저편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함성은 오러를 담아낸 내 목소리보다 한없이 작았다. 하지만 나의 귀는 고블린들이 외친 소리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구루!”
그리고.
저들도 놓치지 않았다.
[슬라임폴리스에서 반란이 발생합니다!] [지정족이 산와족에 대항하여 봉기합니다!]16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