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70)
1.
전쟁에서 인간들이 목숨을 잃는 광경을 ‘화려히 꽃이 진다’고 비유하는 자가 있다. 단언하건대 그 사람은 직접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져본 적 없을 거다.
-우오오오!
-성문을 밀어라! 밀어젖혀!
-크르릉, 크륵!
코앞에서 모가지가 날아가나 싶더니, 콰직! 바로 옆에선 거대한 도끼가 병사를 갑옷째로 짓뭉갰다.
살점이 뜯어지는 소음. 쇠가 부서지는 굉음. 병사들이 흘리는 신음. 전쟁터에서 목숨은 뜨겁게 가열된 늪에서 피어오른 거품들처럼 부글거렸다.
“-잠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흑룡주가 당황하며 말했다. 전투의 참상에 당황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전장 한복판으로 전이된 것에 당혹스러워했다.
“공녀 씨, 이건 어떻게 된 일…. 없네. 혹시 퀘스트창이 뜬 사람 있어?”
“없다.”
“없어!”
“불친절하네.”
흑룡주가 혀를 찼다.
“우리보고 알아서 상황을 파악하라는 걸까. 성격이 좀 이상하긴 했어도 [도서관장]은 친절한 성좌였는데…. 하아. 다들, 날아오른 다음 공중에서 전황을 확인하자. 그럼 한결 나을 거야.”
탓, 하고 흑룡주가 땅바닥을 내디뎠다.
“응?”
하지만 그녀의 몸은 날아오르지 않았다.
흑룡주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비행이 안 되잖아?”
그녀의 말대로였다.
31층과 32층까지 우리는 자유로이 비행할 수 있었다. 지평선 너머를 관측하는 일도 가능했다. 마치 초월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라 할까?
‘이제부터 실전이라는 거군.’
나는 이변에 숨겨진 뜻을 이해했다.
‘오히려 잘 됐다. 스킬이든 권능이든 거기에 편안해지면 헌터로서의 감이 무더져. 만에 하나의 사고가 발생해도, 최악의 경우라도 내가 시간을 되돌리면 돼.’
나는 주변을 살폈다.
현재 우리는 투명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 허공에 솟아오른 머리통도, 팍팍 터지는 핏물도 우리의 몸을 자유로이 통과했다. 누군가의 오장육부가 내 몸을 휙 지나치는 건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만-.
“전투에 참여한 종족이 한둘이 아니라 여럿이에요.”
정신만 집중하면 주위 상황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순인종, 요정족, 귀인족…. 다종족 연합군입니다.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얘네는 같은 편이에요. 종족이 하나씩 병종을 맡고 있네요. 순인종은 방패벽을 이루면서 보병 역할을 담당하고, 요정족은 궁병대…. 귀인족은 기병대군요.”
나는 눈을 좁혔다.
“공중에서는 흡혈종이 날아다니고요. 음. 새기족의 모습은 안 보이지만, 아마도 이거, 슬라임폴리스에서 노예로 지내던 종족들이 모두 연합군을 이룬 거 같습니다.”
“그러면 적군은….”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십중팔구 산와족이죠.”
우오오오오!
연합군이 함성을 지르더니 조금씩 대열을 앞으로 당겼다. 병사들이 우리 주변을 뒤덮고 있어서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전황이 바뀌고 있다는 것만은 느껴졌다.
“안 되겠어. 여기에 가만히 있으면 시체들이랑 친구를 먹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야.”
흑룡주가 나의 손을 잡았다.
“사왕이랑 같이 정찰 좀 하고 올게. 흩어지면 다시 모이기 곤란하니까, 당신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사왕. 괜찮겠니?”
나는 흑룡주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아챘다. 공간전이술. 흑룡주는 자신의 전용 스킬을 이용해서 정찰을 감행하려는 것이다. 이 스킬은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함께 전이시킬 수 있지만, [상대방이 스킬 사용에 동의해야 한다]는 제한을 가졌다.
“예.”
“좋아.”
흑룡주의 몸에서 검은 오러가 새어나와 내 팔목을 붙잡았다.
“전이!”
다음 순간, 우리는 공중에 있었다. 지상을 내려다보면 수천 명의 병사들이 곤충 떼거리처럼 바글거렸다. 우리 두 사람이 중력에 이끌려서 낙하하려 하자, 흑룡주가 다시 한 번 스킬을 썼다.
“전이!”
그러자 잠시 동안 추락이 멈추었다.
“…설마 떨어지려고 할 때마다 전이를 써서 제자리에 머무르시게요?”
“비행이 안 되는데 그럼 어쩌니. 전이. 내가 오랜 헌터 경력 끝에 깨달은 건, 전이. 스킬이란 꼼수같이 쓸수록 편리해진다는 거란다. 전이.”
“우와, 진짜 폼이 안 사네요….”
“폼이 밥 먹여주니? 전이. 난 스킬 쓰느라 바쁘니까 당신이 좀 지상을 살펴봐.”
“옙.”
우리는 꼼수로 허공답보(虛空路步)의 경지를 이룩하며 찬찬히 전황을 파악했다.
“어라.”
나는 곧바로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여기 지리가 익숙한데….”
“그러게. 나도 왠지 모르게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어.”
“회전(會戰)이 아니라 공성전이네요.”
우리가 예상한 대로 연합군과 맞서싸우는 종족은 산와족이었다. 산와족들은 거대한 동굴 입구에 진을 차렸는데, 그곳이 유일한 성벽이자 성문인 듯싶었다.
“……저거 슬라임폴리스 아니에요?”
노예들이 대탈출한 역사가 서린 도시.
그곳을, 이제는 노예가 아니게 된 종족들이 공격하고 있었다.
2.
“성지(聖地)가 되었다고 하는군.”
검성이 말했다.
우리는 각자 정보를 수집해와서 공유했다.
“순인종 부대의 막사에서 병사들이 이리저리 떠드는 대화를 들었다. 이번 원정에선 틀림없이 성지를 탈환할 것이라던가. [이번] 원정이라고 한 걸 보면, 슬라임폴리스를 공격한 것은 처음이 아닌 듯싶네.”
“아아. 그건 내가 듣고 왔어. 이번이 6차 원정이랜다.”
독사가 손을 들었다.
“수백 년 동안 몇 번이나 연합군이 결성되어서 슬라임 제국을 압박했다나 봐. 이미 제국은 거의 다 멸망해버렸고, 저기 슬라임폴리스만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은 거점이라던데.”
“성지…. 또 골치 아픈 단어네.”
흑룡주가 이마를 짚었다. 엄청 질색한 얼굴이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단어를 세 개 뽑으라면 테러, 성지, 이단을 뽑겠어. 아아. 탑 초창기에 [이곳이야말로 성지다! 신께서 새로이 허락해주신 바벨탑이다! ]라며 온갖 이단들이 몰려들었지….”
“[네오 바빌로니아 교(敎)]라는 곳이었지.”
성기사가 팔짱을 꼈다.
“사실을 지적하자면 걔네는 그나마 약과였다. [이곳이 바로 르뤼에!]라고 소리치면서 난리친 이단들이 기억나는군.”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르뤼에? 그게 뭐에요?”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도시라는데, 심해에 가라앉아 있다는군.”
“탑이 심해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탑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바깥세상에서 바라보는 탑은 ‘신기루’에 가깝다.
어느 곳에 서서 바라봐도 지평선 저편에 탑의 그림자가 보인다. 서울에서 바라보든 부산에서 바라보든, 한국에서 바라보든 칠레에서 바라보든, 언제 어디서나 탑은 보인다.
마치 여기로 도망쳐 오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소설을 진짜로 받아들이는 이단들이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기대하지 마라. 참고로 그 이단들 중 일부가 아직도 만신전 길드의 휘하에서 활동하고 있다.”
“에. 그래도 괜찮아요? 정신병자들이잖아요.”
“왜 우리가 이단심문관한테 만신전을 계속 맡기고 있는지 이해해라. 사왕. 미친놈들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그들보다 더욱 미친놈 밖에 없다.”
“과연….”
만신전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마경이군.
흑룡주가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문제는 이단심문관한테 맡기는 편이 제일 빠른데…. 하필 탈락했네. 정말, 쓸모가 있다가도 정작 필요할 때는 없구나.”
전투는 잠시 휴전.
낮동안 치열했던 전쟁터도, 마치 초여름의 공기가 밤이 되면 천천히 식어버리듯, 하늘에 노을이 진 지금은 고요했다. 다종족 연합군의 병사들은 저녁밥을 짓고 있었다.
“하필이면 성지라니…….”
“슬라임폴리스가 성지로 여겨지는 건 당연하긴 해요.”
내가 말했다.
“일곱 종족이 모시는 수호신이 전부 강림한 땅이잖아요. 저길 성스러운 곳으로 여기지 말라는 게 도리어 말도 안 되죠. 산와족부터 순인종, 흡혈종, 새기족, 귀인족, 요정족까지, 모든 종족에게 성지일 겁니다.”
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와족은 여길 지키려 들고, 다른 종족들은 탈환하려 드는 게로군.”
“더군다나 제국에 마지막 남은 도시…. 어느 쪽이든 물러서기 힘들겠죠.”
다종족 연합군에겐 산와족한테 노예로 억압받았다는 역사가 있다. 신앙, 원한, 정치가 뒤섞인 것이다. 쉽게 풀릴 일이 아니다.
“으으.”
흑룡주가 신음했다.
“이상하네. 이럴 줄 알고, 난 지난번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전에 흡혈종 아이들한테 단단히 말해뒀단 말이야. 이 세상에 신 따위는 없고, 설령 신이 있다 해도 그게 나는 아니라고. 설마 내 가르침이 유실되어버린 걸까…?”
“어. 저도 그거랑 비슷한 조치를 해뒀는데.”
나는 흑룡주의 말에 솔깃했다.
“흑룡주는 포인트 어디에 털고 오셨어요?”
“[종족 진화].”
어라.
흑룡주는 포인트 같은 건 아끼고 모아두는, 저축형 햄스터 성격이라고 봤는데.
“굉장히 크게 투자하셨네요. 의외입니다.”
“…….”
흑룡주는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흘렸다.
“……당신이 무슨 아이템 고르는지 몰래 엿들었거든.”
“네?”
“당신 선택을 참고했다고. 모르긴 몰라도, 당신이 고른 거잖아. 어련히 좋은 아이템이겠거니 생각해서 나도 똑같이 선택했어.”
“엑. 저 너무 따라하신 거 아니에요?”
“시끄러워. 잘 나가는 사람 참고하는 게 뭐가 나빠.”
“우와, 완전 뻔뻔…. 흡혈종은 지성이 있는 박쥐들이죠. 진화하면 어떻게 변할지 좀 궁금하긴 하네요.”
“몰라. 아마도 뱀파이어가 되지 않을까?”
“쉿.”
성기사가 손을 들어 군영(軍營)의 한쪽을 가리켰다.
“소란스러워졌다.”
우리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성기사의 말대로 연합군 진지에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있던 병사들이 허겁지겁 난 (naan) 빵을 집어삼킨 다음, 어디론가 집합했다.
“저희도 가보죠.”
우리는 흑룡주에게 다닥다닥 달라붙어서 전이했다. “꼭 엄마 돼지가 된 거 같아서 기분 나빠…” 하고 흑룡주가 투덜거렸지만, 이 방법이 제일 빨랐다.
군영 입구.
그곳엔 수백 명의 전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새기족도, 흡혈종도, 순인종도, 귀인족도, 요정족도 아닌 종족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을 향해서 순인종 지휘관이 말했다.
-젖은 땅의 전사들이여. 이곳에는 웬일인가? 우리는 오래된 원한을 갚기 위해 성스러운 맹약을 나눈 동맹군이다. 칼과 창을 들고 이곳에 침범하지 마라.
-우고르.
전사들의 우두머리가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나는 화하평의회(火河評議會) 서열 73위의 대전사이자 이번 원정군에서 선봉대장을 맡은 게르케사다. 내 먼 선조는 슬라임폴리스에서 돌소금을 캤다. 우리의 칼은 아직 그대들에게 향하지 않았으니 안심하라.
바로 지정족.
내가 인도하는 종족이 사자에 올라탄 채 연합군 진영을 오시하고 있었다.
-원정군? 젖은 땅의 백성들은 이번 전쟁에 불참하기로 선언하지 않았는가.
-그대들의 원정에 종군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지정족 전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평의회에선 이번 전쟁에 뒤늦게나마 참전하기로 결의했다.
-뭣이? 참전?
-우고르. 나는 평의회를 대리하는 귀족 중 한 명으로서, 이 같은 결정사항을 그대들한테 통보하고자 찾아왔다. 우리에겐 결코 그대들을 기습하거나 배신할 뜻이 없음을 알린다.
헤에.
과연, 600년이나 흘렀다는 게 실감되었다.
‘얘네 말투가 엄청 고풍스러워졌네요.’
지난번 스테이지까진 지정족 특유의 발음이 짙게 남아 있었다. 말끝마다 ‘고륵’ 하고 발음이 튄다거나. 그런데 지금 전사가 하는 말에는 그런 흔적이 거의 안 남았다. 발음도 좀 더 둥글어져서 ‘고르’가 ‘우고으’에 가까워졌다.
-아니… 지금 말투가 문제가 아니지 않냐…?
배후령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덩치가 엄청 커졌잖아. 이놈들!
그렇다.
난쟁이 수준에 머무르던 지정족은 덩치가 2배 가까이 불어났다. 순인종과 비등하거나 그보다 더 커다란 수준이었다.
‘[종족 진화]가 제대로 이루어진 거죠.’
인간보다는 크지만 오크보다는 작은 정도.
-크르르.
심지어 자기 몸집만큼 큼직한 사자 위에 올라타 있었다. 사자는 코를 킁킁거리며 순인종 지휘관을 노려봤다. 순인종이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물지 않는다.
지정족이 사자의 갈기를 툭툭 두들겼다.
-이 아이는 착한 친구다. 걱정하지 마라.
-아니…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 원정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전쟁에 끼어든다는 것은, 산와족의 편을 들겠다는 것 아닌가? 분명하게 밝혀라. 그대는 선전포고를 전달하러 온 사자인가!
-케케륵케르와 고르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아니다.
케케륵케르는 그렇다 쳐도 고르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꼬마 녀석. 결국은 출세했구나.
-우리는 다만 신의 이름으로 죄악이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 출전했을 뿐이다.
-죄악…? 죄악이라고?
-그렇다. 너희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수호신들은 결코 우리가 산와족을 멸망시키는 걸 바라지 않는다. 대탈출의 시대에, 우리가 산와족에게 보복을 하려 들었을 때 수호신들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 뜻은 분명하고도 선명하다.
지정족 전사가 어금니를 드러냈다.
-이 이상의 전쟁은 명예롭지 못하며, 신성하지도 못하다. 산와족이 우리에게 채찍질을 가한 것이 참혹했듯이, 산와족의 마지막 안식처를 빼앗는 것 또한 가혹하다.
-무슨….
-복수는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얘기다. 같은 사슬에 매였던 자들이여.
지정족 대전사가 말했다.
-싸움을 멈추어라. 우리는 이 오래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왔다.
17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