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75)
4.
멋진 전사는 계속 승리한다.
더 멋진 전사는 어쩌다 졌을 때, 패배에 깔끔히 승복한다.
-내가 졌다.
근육돼지는 꽤 멋진 전사였다.
-오러의 총량에서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만, 오러를 다루는 묘리(妙理)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군. 우고르. 여지껏 내가 너무 단순하게 오러를 다룬 거 같다.
“자책하지 마렴.”
나는 우부르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혼자서 깨우친 게 아니라 스승님들한테 무공을 전수받은 거야. 아무리 개인의 재능이 출중하다 해도, 문파의 역사를 압도하기란 어렵지. 내 뒤엔 마교천하 천 년의 역사가 버티고 있단다.”
-케케륵케르여.
“음.”
-아빠여.
“아버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하다못해 아비라고 불러주지 않겠니? 너처럼 큼직한 덩치한테 아빠라고 불리니까 내 정체성이 흔들린다.”
-알겠다, 애비.
“어…. 자획이 하나 추가됐을 뿐인데 어감이 몹시 거시기하구나. 아니, 네가 꼭 그리 불러야겠다면 원하는 대로 부르렴….”
-애비여. 질문이 있다. 어째서 아까부터 내 머리 위에 올라타 있는가?
“네가 거대하기 때문이란다. 우부르카야. 너 같은 거인을 보면 누구라도 올라가고 싶어할 거다. 사람에겐 이른바 등반충동이라는 욕구가 선천적으로 있거든. 나로선 이 충동에 저항하기 매우 어렵구나.”
-과연. 그런 충동이 존재하였는가.
우부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 흔들. 이 아이의 머리에 올라타 있던 나는 자연스럽게 무중력 바이킹 놀이기구를 체험했다.
이거 좀 재밌는데.
“나한테 졌으니 이제 얌전히 내 조언을 들어라. 물론, 들은 다음에 내 말대로 시행할지 말지는 네가 결정하고. 더 좋은 생각 있으면 말해.”
-우고르.
“평화 협상을 강제해봤자 천하의 혼란은 끝나지 않을 거다.”
나는 우부르카의 머리를 긁었다.
“당사자들이 납득할 만한 협상안을 제시해줘야 돼. 산와족뿐만 아니라 나머지 다섯 종족도 어느 정도는 이득을 챙겨야 한다.”
-우리가 저들에게 무슨 이득을 줄 수 있겠나?
“간단해. 일단 너희 입장에서 생각하는 걸 뒤로 물려. 각 종족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라. 그럼 답이 나온다.”
내가 말했다.
“산와족은 평화 협상을 반길 거야.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슬라임폴리스를 파괴함으로써 갈등의 근원을 없앤다]는 해결책은 받아들이기 어려워. 왜일 거 같냐?”
-성지라서?
“쯔쯧. 슬라임폴리스가 파괴되면 자기들이 살 도시가 하나도 없잖아.”
나는 우부르카의 정수리를 콩 때렸다.
“멸망의 위기를 넘기는 건 좋지만,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건 불안해. 달리 말해서 이 불안만 어떻게든 해소해주면 산와족은 평화 협상에 오케이를 때리겠지.”
-새로운 도시. 새로운 거주지인가.
“오냐. 성지가 파괴되는 건 아프겠다만, 뭐. 네 말마따마 [아무도 가질 수 없게] 초토화시키는 거니까. 심정적으로 납득할 구석이 있어.”
-이해했다.
우부르카가 머리통 바이킹을 끄덕였다.
-새로운 거주지를 만들어서 정착하면 우리가 산와족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한다. 다섯 종족과 가까운 곳에다 거주지를 장만하면 불안할 테니,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인도해줘야겠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산와족들이 기술이 좋잖아? 기술들 몇 개 넘겨받는 걸 조건으로 걸어. 그럼 네가 이끄는 지정족 전사들도 불만이 조금 줄어들 거야.
-그런가?
“구체적으로는 씨발이 시발 정도로 줄어들 거다.”
-자획이 사라졌을 뿐인데 어감이 제법 달라지는군….
완전히 불만이 없어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지정족 내부에선 강자존의 법도가 굳건하다. 평의회 대빵이자 서열 1위인 우부르카의 의사에 따를 거다. ‘불만이 있으면 덤벼라’ 같은 마법의 한 마디가 있으니까.
“우부르카야. 한 종족의 멸망을 막겠다는 의기는 좋아. 하지만 무식하게 살고 싶으면 무식해선 안 된다. 머리를 존나 빡세게 굴려도 이룰까 말까 한 게 선(善)이다.”
-음. 애비여. 다른 종족들에겐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방금 말했잖아.”
나는 씨익 웃었다.
“걔네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니까?”
5.
-너희들이 멸망할 것 같을 때도 한 번 도와주마!
보름달 뜬 밤.
결국 연합군과 산와족은 회담에 나왔다. 다들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그냥 ‘나왔다’보다는 억지로 ‘끌려나왔다’에 좀 더 가까웠으니 말이다. 안타깝지만 근육돼지의 빨간 광선빔을 견딜 수 있는 군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각 종족의 대표자가 모인 천막 아래서, 우부르카 의장이 패기롭게 선언했다.
-봐라. 원시림이 불탄 이후로 최고의 영화를 자랑하던 산와족의 제국도 무너졌다. 영원한 번영이란 없다. 지금은 연합군이 기세가 좋지만, 너희 중 어느 한 곳도 언젠가는 쇠퇴할 거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다.
-…….
-패배한 종족은 승리한 종족의 노예로 전락할 거다. 노예 된 종족은 육백 년 전의 굴욕을 반복할 것이고, 주인 된 종족은 지난 육백 년 산와족이 겪은 과오를 반복할 것이다. 안타깝다! 어느 쪽이든 시발할 것이며, 결국 천하는 시발 소리로 가득찰 거다!
우부르카는 정말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달리 말해 입을 벌렸고, 송곳니를 드러냈으며, 미간을 빡세게 찌푸렸고, 코끝을 꿈틀거렸다.
사상최강의 홉고블린이 그런 표정을 지었을 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란 그리 많지 않았다.
-음. 으음….
흡혈귀가 조심스러운 자세로 말했다.
-즉, 그대들이 지금 산와족을 돕듯이 나중에 우리를 도와줄 거란 말이오?
-그렇다. 너희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말이다. 나 우부르카는 화하평의회 의장의 이름으로 약속한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라.
-실례하오만. 그 약속이 대대손손 이어지리라는 보장이 있소?
-없다.
-그러면 미안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부르카가 도끼자루를 쥐었다. 움찔. 대표자들이 겁 먹은 사슴처럼 움츠러들었다.
-없으니, 지금 만들면 되겠군.
-뭐?
-여기서 기다려라.
우부르카 의장은 천천히 지정족 전사들에게 다가갔다. 회담이 열린 천막 주변으로 전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화하평의회 의원들은 들어라! 이제부터 본인은 평의회의 이름으로 평화 협상을 체결할 거다. 여기 모인 종족 가운데 어느 한 곳이라도 멸망할 위기에 처하면, 우린 그놈들을 돕는다.
전사들이 멀뚱멀뚱 서로 쳐다봤다.
그 중 짬밥이 좀 쎄보이는 애가 입을 열었다.
-의장 마음대로 해라.
-이 약속은 내가 뒈진 다음에도 유효하다.
-우거?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왜냐면 너희가 이제부터 [내 손자들은 결코 내가 맺은 약속을 어기지 않을 거다]고 맹세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나와 한 약속을 너희 후손이 어기면, 그 후손은 패륜아 새끼가 되는 거다.
-맹세하기 싫다면?
-나를 이겨라.
-시발.
짬밥 먹은 전사가 시발거리면서 창을 들었다.
-난 그 의제(議題)에 반대한다! 내 이름은 무르크. 케케륵케르와 뛰논 대전사 고르기르의 자손이고, 화하평의회의 서열 49위 전사이며, 이번 전쟁에서 결투에 임했다가 명예롭게 뒈진 무르무의 친형이다!
우부르카 의장은 도끼를 어깨에 툭, 짊어맸다.
-멋진 근육이군.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곱게 패주마.
짬밥 먹은 전사가 곱게 쳐맞았다.
-구우웨엑!
우부르카의 주먹질이 복부에 정통으로 들어갔고, 전사는 오늘 먹은 짬밥을 이 세상에 적나라하게 전시했다.
전시 작품의 이름은 [생선 두 마리 & 지네닭고기 조금]. 묽은 위액과 두툼한 건더기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관람하게 된 동료 지정족들은 감동에 몸을 떨었다.
-여, 여전히 무식하게 강하다….
-저 의장은 평소에 뭘 처먹길래 저리 무지막지하냐!
-두 자릿수 서열이 한 방에 날아가다니. 말도 안 된다.
-출전하기 전보다 더 강해진 거 같은데…?
-나는 이번 의제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의장! 의장은 우리 종족의 홍복이고 영광이다! 의장 만세!
-방금 누구냐?
-더러운 간신 새끼.
-간신은 쳐내라!
이후로도 여러 전사가 의제 결투에 나섰다. 서열 100위 권도 있었고, 서열 6위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전사든 우부르카에게서 도끼질을 끌어내진 못했다. 전부 주먹질 한 번에 나가떨어진 것이다.
곱게 처맞은 전사의 숫자가 33명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지정족은 위아래로 단합되어 한 목소리 한 음절로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시발…
-시벌….
우부르카가 도끼를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약하다. 뭐 이렇게 약하냐? 너무 약해서 때리기도 미안해진다. 미안한 존재들아. 내가 더 미안해지기 전에 얌전히 이번 의제에 찬성해라.
멋진 전사는 계속 승리한다. 더 멋진 전사는 어쩌다 졌을 때 패배에 깔끔히 승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정족들은 멋진 전사였다.
-찬성한다.
-찬성이다, 우거.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라고 소리를 질러라.
고요했다.
군영 이곳저곳에서 모닥불이 조용히 타닥거릴 뿐. 화하평의회에 속한 의원들, 전쟁터에 나선 전사들 전원이 찬성을 표했다.
우부르카는 주위를 오시하고 턱을 끄덕였다.
-좋다. [여섯 종족 가운데 하나가 멸망의 위기에 처할 경우 그 종족을 도와준다]는 의제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음을, 불과 강의 의장으로서 선포한다. 찬성을 소리지른 자들, 반대에 침묵한 자들,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은 이 의제에 거역치 못한다. 전원. 성스러운 대지에 대고 맹세하라.
우부르카가 도끼자루로 땅을 세 번 쳤다.
쿵! 쿵! 쿵!
지정족 전사들 또한 말없이 자신의 무기를 들어 땅바닥을 세 번 내리찍었다.
-음.
우부르카가 천막 아래의 회담장으로 돌아와 앉았다.
여섯 종족의 대표자들이 멍하게 우부르카를 보고 있었다.
우부르카는 팔짱을 낀 채 대표자들을 마주보았다.
-우리의 약속이 대대손손 이어질 거라는 보장을 만들었다.
-…….
-또 궁금한 점 있냐?
-…….
흡혈귀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충분하구려. 나는 이제 질문할 게 없소.
한 명은 고개를 숙였고, 한 명은 머리를 치켜들었다. 귀인족(鬼人族) 대표였다. 이마에 외뿔이 달린 도깨비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험악한 면상을 지었다.
-야. 곰팡이. 네가 그렇게 쎄냐!
-네 아비보다는 쎄다.
-이런 개자식이?
-틀렸군. 우리는 개자식이 아니다. 케케륵케르는 사자의 몸을 빌려서 강림했지. 고로 우리는 사자 자식이며, 개자식은 저기 산와족에게나 어울릴 거다. 이런 기초적인 종족 상식도 모르다니 실망이군. 어서 사자 자식이라고 정정해라.
-어? 어? 씨, 아무튼!
귀인족이 검을 빼들었다.
-우린 말이야. 백성들이 뼈빠지게 일해서 올린 곡식을 쏟아부으면서 여기까지 원정군을 끌고 왔다! 이제 와서 [나중에 위기 한 번 막아줄 테니 물러나라]는 소리를 들어도, 어? 안 된다고! 이미 허공에 날려버린 나락이랑 낟알들은 어쩔 건데!
-어쩌고 싶냐?
-보상해라!
-우리도 별로 풍요로운 종족은 아니다. 그날 벌어서 그날 먹는 걸 덕목으로 여긴다. 보상해주고 싶어도 못해준다.
-그럼 나도 협상 못해!
-우고르. 그게 아니겠지.
우부르카 의장이 턱을 쓰다듬었다.
-너희가 정말로 염려하는 건 따로 있을 거다.
-뭐?
-막대한 예산을 소모했으면서도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간다는 게 문제다. 너희에게 삥을 뜯긴 영주들과 지주들이 불만을 표시할 거고, 표시하는 걸 넘어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 결과로 너는 권력을 잃는다. 운이 안 좋으면 모가지를 잃을 테고. 그게 걱정되는 거 아니냐?
내가 꿈속에서 일러준 말을 우부르카는 그럴싸하게 읊조렸다.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 이어지자 귀인족 대표는 어, 어, 당황했다. -아니. 그게 ….
-딱 한 번. 너희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내가 몸소 가주마.
-…….
-이건 의제에 상정하지 않겠다. 나 홀몸으로 거행하는 일이다. 반란군 따위, 이 몸 하나와 도끼 한 자루, 열두 자루의 창만 있어도 너끈하다. 어떤가. 이만하면 성지를 파괴하는 데 동참하겠는가.
우부르카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래도 여전히 변명거리가 필요하다면 덤벼라. 결투에서 패배했다고 말하면 너희 귀인족들한테도 변명이 되겠지.
-이, 이 자식이.
귀인족 대표가 얼굴을 붉히며 칼을 들었다.
-오냐! 결투다! 그런다고 내가 봐준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런다고 내가 봐주지 않을 거라고 여긴다면 그거야말로 오산이다. 적당히 봐주마.
귀인족 대표가 적당하게 얻어터졌다. 외뿔이 구부러져서 적당한 각도를 뽐냈고, 코가 부러져서 적당한 각선미를 개화했다. 이빨이 몇 개 떨어지자 외모 또한 적당해졌다. 적당함 그 자체가 되어버린 귀인족 대표는 땅구멍에 거꾸로 꽂힌 채(이 또한 적당한 각도였다) 신음했다.
-개… 시발놈….
우부르카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좀 전사답군!
땅구멍에 거꾸로 꽂힌 사람을 눈앞에 두면 할 말이 적어지기 마련이다.
그날 밤, 일곱 종족의 대표자가 평화협상에 서명했다.
17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