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80)
“무슨 소리예요? 제 아이들은 순수하고, 귀엽고, 다부지고, 성실하고… 아무튼 세상에 좋은 것들은 전부 듬뿍 받고 태어난 애들이에요. 댁이 우리 블린이들에 대해 뭘 아는데요.”
-그래. 팔불출아. 내생에는 꼭 고블린으로 태어나거라.
배후령이 혀를 쯧쯧 찼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34층 퀘스트가 주어집니다.]스테이지의 정황이 대략이나마 드러났다고 판단한 걸까? 탑에서 퀘스트를 하달했다. 눈앞으로 글자들이 스르륵 물감처럼 번져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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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전국시대: 고전의 위기]+
퀘스트 이름부터 심상찮았다.
나는 좌절 자세로 무릎을 꿇은 채 퀘스트창을 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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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전국시대: 고전의 위기]난이도: B+
임무 목표: 당신은 지정족에 신화(神話)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정족은 태어나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당신의 행적을 보며, 당신의 신념을 배웁니다. 하지만 흥분도 잠시. 수백 년 넘게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해서 들은 탓에, 신세대 지정족들은 평범한 ‘고전’에 질렸습니다!
얼마 전부터 지정족 사회에선 고전의 2차 창작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선풍적인 인기를 뛰어넘어 가히 광풍(狂風)에 가까워진 이 흐름은, 바야흐로 원래 신화의 자리마저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고르. 나는 착한 케케륵케르보다 흑막 케케륵케르가 더 좋다.’
‘금사매와 은백합이 이어지는 게 전통이 맞다.’
‘살천성과 검제도 좋다.’
‘뭘 모르는 소리다. 검제는 천마와 맺어져야 클래식한 거다.’
큰일입니다!
지정족들이 진짜 신화를 두고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지정족들이 공통의 신화를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공통의 신화가 붕괴되면 지정족들은 오러 진법(陳法)을 펼칠 수 없습니다!
고귀한 백사자여. 지정족들에겐 극장에서 상연되는 것이 곧 신화이며, 제일 격렬한 환호를 얻어내는 연극이 곧 정사(正史)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신화이고 진실된 역사인지 당신이 결정하십시오! 신화를 통일하여, 오러 진법을 확립시키십시오!
※단, 인도에 실패할 경우 당신의 종족은 특성 ‘마교’를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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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몇 번이나 퀘스트창을 읽었다.
“어…. 요컨대 제 이야기들이 너무 비틀어져서 이젠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었다 이 말이죠? 이걸 이대로 내버려두면 제가 구상한 오러 진법도 나가리 되는 거고.”
-그런 거 같은데?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걸 어쩔까.
순간적으로 여러 생각이 뇌리에 교차했다. 하지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딱히 고칠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이대로 두어도 괜찮겠다 싶다는 마음이었다.
“저라도 맨날 똑같은 이야기만 들으면 질리겠어요. 애들이 좀 새로운 연극이 고파서 이거저거 시도해보겠다는데, 제가 거기에 재를 뿌릴 이유가 없잖아요.”
-엉? 그럼 네가 야심만만하게 준비한 오러 진법은?
“그거야 제 욕심이고요. 우부르카도 재밌을 거 같다고 동의해줘서 시작한 일이죠. 지금 시대 애들이 그거 재미없는 거 같다고 거부하면, 뭐 아이들 마음이지. 저 아이들이 놀고 즐기는 거까지 간섭할 생각 없습니다.”
-호오.
배후령이 손뼉을 쳤다.
-처음으로 네가 어른스러운 부모처럼 보인다.
“전 언제나 어른스러운 부모였습니다.”
-개소리가 찬란하구나. 세상에서 제일 애 같은 부모를 가려뽑는 대회가 열리면 거기서 네가 압도적으로 우승을 거둘 거란다. 좀비야.
“오. 저 연극 재밌어 보이네요.”
내가 길거리 저편의 극장을 가리켰다.
이 도시엔 극장이 정말 많았다. 삼거리에 들어선 원형 극장들이 덩치 큰 대기업이라면, 저건 골목 상권을 노리고 자리 잡은 소규모 극단. 하지만 광고 솜씨만은 갈고 닦았는지 연극 포스터가 예쁘장했다.
-케케륵케르 서사시! 케케륵케르의 혈화극 [화검난무]를 관람하십시오!
엘프 매표원이 소리쳤다.
-[마왕 에스델]도, [천마실록]도, [라비엘과 케케륵케르]도,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해서 여기서 끝난다! 신화 속 여정을 언제나 함께 하는 두 사람! 그와 그의 이야기!
포스터엔 검은색 문신을 덧칠한, 왠지 모르게 좀 여리여리한 홉고블린이 한 명. 그리고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홉고블린이 한 명 있었다.
서로 등을 맞댄 채 정면을 노려보는 투샷.
“딱 봐도 저랑 댁이네요. 그렇죠?”
-그러게. 저건 우리 둘 이야기인가 보다.
배후령도 흥미가 동했다.
우리는 기대를 품고 소규모 극장으로 들어갔다. 표면을 깨끗하게 박박 긁은 통나무가 몇 통씩 놓였고, 그 위로 지정족 관람객들이 앉았다. 만석. 입석 자리까지 꽉꽉 찼다.
“오오.”
생각보다 제대로 된 시설에 기대감이 더 올랐다.
“크기가 작긴 한데 깔끔하네요. 완전 소수 정예라는 느낌이에요.”
-근데 우부르카한테 들려준 것 중에 너랑 내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게 있었나?
글쎄 ?
[천마실록]을 빼면 딱히 없었는데.“뭐, 이것도 2차 창작인가 보죠. 아. 시작하나 봅니다. 조용히 관람… 할 필요가 없구나.”
-우리끼리 떠들어도 딴 놈들한텐 안 들리니까 은근히 꿀이네.
“얘들은 극장에서 팝콘 안 파나? 수박 맥주? 수박껍질 튀김? 이게 뭐야. 얘들 왜 이렇게 수박을 좋아해?”
우리는 시시덕거리면서 연극 [화검난무]를 구경했다. 잔뜩 오른 기대감에 두근거린 것도 잠시. 나와 배후령의 얼굴은, 아니 면상은, 연극이 진행됨에 따라 실시간으로 썩어갔다.
“뭐 이런.”
-씨발?
우리 두 사람은 연극이 상연되는 도중에 뛰쳐나왔다.
-이 새끼들이 돌았나?
“미친.”
-포스터에 그려진 게 내가 아니라 염제였어!?
“미친.”
-왜 천마랑 논검하는 장면도 갑툭튀한 염제가 집어먹는 건데!?
“미친.”
내 입에서 쉴 새 없이 미친이 흘러나왔다. 쓰리 미친. 트리플 에바. 삼진 아웃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진짜 신화가 뭔지 좀 정해줘야 할 거 같습니다. 아이들의 재미?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염제는 아니지요. 염제는 아니라고요. 미친. 이 애들이 선을 넘네.”
-네 말이 맞다! 다 뜯어고쳐!
배후령과 나는 하나 된 마음으로 반드시 퀘스트를 완수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일단 이 상황을 어떻게 풀지 각 좀 봅시다.”
나는 밤이 될 때까지 도시를 돌아다녔다.
결과, 작금의 시대가 예상 외로 중대한 문제를 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건 지정족들이 새롭게 얻은 특성과도 관련이 있었다.
+
[마교(魔敎)]분류: 종교, 군사, 정치.
기원: [악우 교리]
설명: 마침내 백사자 신앙이 [구루 교의]와 [악우 교리]를 거쳐, 하나의 종교로 정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최초의 선지자 고르케에 의해 백사자는 지정족의 친우이자 아비로 인정받았습니다. 두 번째 선지자 우부르카에 의해 지정족은 백사자의 신화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마교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백사자의 신화들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온갖 종파(宗派)가 난립하고 있습니다. 종파들은 서로 이단이라 비난하며, 자기야말로 진정한 백사자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서로 다른 신화를 믿는 지정족들은 서로 다른 심상을 품게 됩니다. 어떤 심상을 기본으로 삼느냐에 따라 오러의 모습과 효능은 천차만별입니다! 교리 해석의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단, 역사의 전개에 따라 이 특성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위험! 교리를 두고 16개의 종파가 분쟁을 겪고 있습니다. 분쟁이 심화되면 종교의 분리가 일어날 수 있으며, 때로는 종족의 분열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
“아이고.”
대충 지난 300년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 흘렀는지 알겠다.
“이거. 아마도 우부르카가 죽으면서 생긴 문제예요. 그 아이가 살아 있을 땐 일단 줘패서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과연. 그동안 찍 소리도 못하고 깔려 있던 애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구만.
“그렇겠죠.”
우부르카는 강했다. 강해도 너무 강했다. 절대 강자가 사라지자, 지정족들 사이에서 이견이 발생해도 누구 한 사람 뜻대로만 일이 흘러가지 못했다.
아주 당연한 갈등.
누구나 사춘기를 겪듯이 지정족도 성장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모두 어서 오십시오! 내가 가지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전부 파괴해버린다! 색다른 매력의 에스델을 구경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전통 혈화극! 다른 사이비 연극들은 가라!
-누구 보고 사이비래! 이단들아!
-염제는 사실 선인이었다!? 이것은 케케륵케르의 마수에 희생된 한 남자의 이야기……
……그 진통이 영 이상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지만.
지정족에겐 예술과 종교가 분리되지 않는다. 혈화를 시연하는 자가 제사장이고, 연극 무대는 바로 신전이다. 어느 연극을 보러 다니냐느는 어떤 종파를 믿느냐와 일치한다.
‘마음에 품은 이미지가 뭐냐에 따라 오러도 확 달라지지.’
예술. 종교. 군사.
중요 분야들이 한데로 묶여 있다.
절대로, 결코, 단순히 염제 숭배 문제가 아닌 거다.
그렇게 결심을 다지던 차였다.
-악! 이러는 법이 어디 있냐!
외진 할렘가.
가난한 지정족들이 땅구덩이를 파고 사는 이곳에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작고 허름한 극장 앞에서 말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사에선 분명히 내가 일등을 먹었다! 내 연기 솜씨가 압도적이었다!
말싸움의 주인공은 엘프였다. 쪼끄마한 요정족이 소리를 꽥꽥 질렀다. 그런 엘프 앞에서 큼직한 홉고블린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가 아니라 다른 지정족이 배역을 맡게 되는 거냐! 뇌물이냐! 인맥이냐! 순전히 실력만 따져서 무대에 올라야지, 이럴 순 없다!
-우린 뇌물 안 받는다. 우거. 인맥으로도 안 뽑는다. 가난하지만 이래 봬도 130년 전통의 극단이다. 우습게 보지 마라.
-그럼 왜 내가 주역은커녕 조역에도 못 뽑혔냐! 내가 요정족 출신이라서 그런 거냐! 웃기지 마라! 종족차별이다! 화하평의회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다!
-네가 요정족이라서 안 뽑은 것도 아니다. 우린 케케륵케르의 조언에 따라 평등을 추구한다. 다만.
홉고블린 극단주가 엄숙하게 말했다.
-너는… 너무 약해 빠졌다.
-뭐, 뭐?
-몸이 그게 뭐냐.
극단주의 눈이 찬찬히 엘프를 훑었다.
-허리가 굽었다. 어깨는 얇다. 근육은 비실비실하다. 팔다리는 거미 다리처럼 흐물거리는 게 툭 치면 뽀각날 거 같다. 허벅지는… 그게 허벅지냐? 어떻게 몸뚱어리를 지탱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극단주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연기 솜씨가 좋으면 뭐하냐? 요즘 관객들은 근육을 많이 따진다. 너같이 비실한 몸으로는 코흘리개 어린애도 홀리지 못한다. 자격 미달이다.
-배, 배우가 연기만 잘하면 됐지!
엘프는 발끈했다. 하지만 자기도 내심 신경 쓰고 있었는지 양손으로 몸을 가렸다.
극단주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두툼한 근육을 드러냈다.
-아니다. 배우는 사람들에게 케케륵케르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사제이고, 전쟁이 벌어지면 앞장서서 나가 싸우는 전사이며, 평의회가 소집되면 달려가 결투에 임하는 투사다.
얘네들 아직도 의회에서 결투로 의제 정해? 이런 깜찍한 또라이들 같으니.
-바로 그러기에 관객들은 기꺼이 배우한테 손뼉을 친다. 그들이 보여주는 환상에 진실미가 있음을 승인해준다. 무대 위에서만 떠드는 전사한테 누가 홀려주겠는가?
-으으. 으으으….
-너의 근육은 약하다. 먼저 가슴근육을 네 배는 더 키우고 와라. 그다음에 얘기를 들어주지.
-시, 신화에 따르면 케케륵케르도 내장형 근육이랬어! 나도 내장형이야! 겉보기보다 단단하다고!
-우고르.
극단주가 피식 웃었다.
-그럼 배우 말고 케케륵케르를 해라. 사자로 변신해서 종족을 도와라. 적어도 우리 극단에선 내장형 근육 따윈 안 믿는다.
-자, 잠깐만요. 극단주님. 한 번만요!
급기야 요정족이 무릎을 꿇고 극단주의 발끝에 매달렸다.
-한 번만 더 심사 보게 해주세요! 저번보다 훨씬 더 연기 잘할 자신 있어요. 네? 제 연기 보고 나면 다른 근육돼지들 따윈 눈에도 안 들어올걸요? 저는 연기 천재입니다! 절 주역으로 뽑아주시면, 아니, 하다못해 [천마실록]의 사마군(四魔君) 자리라도 주세요! 그럼 구루 연극계에 혁명이 일어날 거예요!
-배우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극단주가 일축했다.
-운동해라. 근육을 키워라. 내가 할 말은 그거밖에 없다.
-아! 씨! 요정족은 너희랑 달라서 근육 자체가 안 큰다고, 이 무식한 돼지들아! 넌 뇌까지 근육이 붙었냐!
-더는 나눌 말이 없다.
홉고블린이 가뿐히 엘프를 뿌리쳤다. 악! 엘프가 비명을 지르면서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아이고, 나 죽어! 아이고! 곰팡이가 종족 차별 한다! 엘프로 태어나서 서럽다! 나도 고블린으로 태어났으면 진즉 무대에 데뷔했을 텐데 괜히 귀 큰 놈으로 태어나 이런 푸대접을 받냐! 늬들이 이러는 거 케케륵케르가 알고 있겠냐!
-한심하군…. 가서 돈이나 벌어라.
-난 돈보다 연기가 좋단 말이야!
극단주가 혀를 차면서 극장 대문을 닫았다.
배우 지망생으로 보이는 엘프는 엉엉 울었다.
-위대한 고양이시여! 케케륵케르여! 제발 저한테 배우의 재능을 주세요!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무대에 올라가게 해주세요! 제 영혼을 가져가도 좋습니다! 아니, 악마라도 좋으니까 내 영혼을 가져가! 가져가고 날 데뷔시켜줘! 제발!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요.”
-응? 뭐?
“우리, 탑스타 배우 한 명 만들어보죠.”
거짓된 이야기를 신봉하는 지정족들에게 참된 연극을 보여주마.
18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