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81)
3.
-나쁜 놈들…. 근육밖에 모르는 무식쟁이들….
배우지망생 엘프는 한참 훌쩍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삶이 뭐 그리 억울한지 귀가하는 내내 울었더란다.
-어딜 쏘다니다 이제 들어왔어?
집에서도 구박을 받긴 마찬가지.
-설마 또 극장가에서 싸돌아다녔어?
-얘는 나이를 먹을 대로 먹었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애야. 혈화극이니 뭐니 그거 전부 지정족들 세뇌시키는 연극이야. 결국 케케륵케르를 모시고 숭배하라는 건데. 그게 뭐 좋다고 헤벌레 침을 흘리니?
지정족과 달리 엘프들은 으리으리한 저택을 지어놓고 사치를 누렸다. 배우지망생의 집안도 부유했다. 상인으로 태어나 상인으로 사는 것이 당연한 요정족들에게 배우지망생 엘프는 별종이었다.
-아니거든….
식탁에서 저녁을 깨작거리며 지망생 엘프가 중얼거렸다.
-케케륵케르를 숭배하라는 혈화극은 하나도 없거든…. 오히려 혈화극들은 케케륵케르가 숭배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거든….
-얘 뭐래니?
-몰라. 목소리가 작아서 안 들려.
-너도 이제 성인이야. 여태껏 입혀주고 먹여준 것들 다 돈으로 환산해서 장부로 만들어놨어. 물가 감안 안 하고, 무이자로 쳐줄 테니까, 얼른 갚으렴. 갚지 않을 거면 집부터 나가.
-우리 가족은 어떻게 돈밖에 모르냐?
배우지망생 엘프가 발끈했다.
-아니, 왜 우리 종족은 돈 버는 거에만 미쳤냐?
-돈 버는 게 재밌잖아.
-난 하나도 재미 없다! 무식한 지정족들 등쳐먹는 게 뭐 즐겁다고!
-원래 호구를 낚아먹는 게 제일 즐거운 법이란다. 아무튼 양육비 갚을 거니, 말 거니?
-이 종족은 미쳤다.
지망생 엘프가 분연히 일어섰다.
-성인이 될 때까지 쓰인 돈을 전부 부모한테 갚는 게 전통이고 의무라니. 심지어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다니…!
-너 때문에 나간 돈인데 당연하지.
-아이가 태어난 날에 산파한테 신세진 비용부터 시작해서 그 날 먹은 거랑 입은 거까지 전부 장부에 적어놓잖냐! 병이냐? 이 종족은 장부를 안 쓰면 죽는 병에라도 걸렸냐? 됐다. 지긋지긋한 집구석! 그냥 내가 가출해버리고 말겠다.
지망생 엘프는 성큼성큼 집을 나섰다. 대문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가족이 불렀다.
-얘! 쏘니아!
-뭐냐.
-갈 때 가더라도 빚문서는 챙겨 가야지! 여기!
가족이 달구지를 끌고 왔다.
달구지엔 두루마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몽땅 빚문서였다.
-가출하면 이제 가족이 아니니 물가랑 이자 계산 들어갈게. 너무 힘들어하진 마. 제일 싼 이율만 받을 거니까. 아무 상단에 취직해서 12년만 일하면 갚을 수 있단다. 열심히 돈을 벌렴.
-시발, 이런 개같은….
-이제부터 욕 한 마디 더할 때마다 이율을 1% 올릴 거야.
-…….
-아. 달구지 값도 더해놨어. 왠지 너 언젠가 가출할 거 같더라. 미리 준비해뒀지. 튼튼하면서도 싼 걸로 골랐으니 고맙게 여겨. 뭐해? 쏘니아. 어서 집 나가렴.
지망생 엘프는 울상을 지은 채 달구지를 끌었다.
달그락. 달그락.
바퀴가 굴러가면서 구슬프게 울었다.
어느 젊은 엘프의 슬픈 풍경화를 나와 배후령은 지켜보고 있었다.
“설마 이 세계에 정상적인 종족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겠죠…?”
-그러게. 너희 탑이 유별나게 또라이가 많다는 건 익히 알았다만, 이거 나까지 슬슬 불안해진다….
엘프는 돈이 없어 허름한 여관방도 잡지 못했다. 그저 극장 옆에 쪼그려 앉아서, 달구지를 바람막이로 삼아 잠들 뿐이었다. 훌쩍. 달빛 고이 머무는 길거리에 청승맞은 울음소리가 스몄다.
[‘꿈에 등장’을 구입합니다.] [10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8702입니다.]그리고 이제 내가 나타나줄 차례였다.
“쏘니아야.”
나는 지망생 엘프의 꿈속에 들어가 말을 걸었다.
고르케나 우부르카와 달리 엘프의 꿈속 풍경은… 뭐랄까, 제법 저속했다. 화려한 파티장. 근육이 울끈불끈거리는 홉고블린 하인들이 지망생 엘프를 어화둥둥 떠받들고 있었다.
-미안하다, 쏘니아 대배우님. 저희가 여태까지 미처 천재 배우의 진면모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하하핫! 근육만 있지 연기는 잼병인 것들! 어서 술이나 따라!
-우고르. 쏘니아 대배우님의 술잔을 채울 수 있게 되어서 영광이다….
굉장하군.
누가 제일 굉장하냐면 요정족의 무의식을 여기까지 타락시킨 백작이 제일 굉장하다. 말 그대로 요정(妖精). 요사스러운 정령이 되고 말았다.
“쏘니아야. 쏘니아야. 정신 차리려므나.”
-응? 뭐냐. 웬 비실비실한 순인종이 있냐?
“나는 지정족을 인도하는 자. 너희가 케케륵케르라고 부르는 이란다. 너희 요정족이 지정족의 깃발 아래 합류했으니 마땅히 너도 나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하아?
“네가 오늘 낮에 울부짖지 않았더냐. 케케륵케르여도 좋고, 위대한 고양이라도 상관없으며, 악마라도 좋으니까 제발 너를 데뷔시켜 달라고 말이다. 기뻐하렴. 내 너의 비참한 울음소리를 듣고 이리 강림하였다.”
-뭔 개소리…….
잠깐 주먹으로 우애를 다지는 시간이 있었다.
-몰라 뵈서 죄송합니다! 케케륵케르 님!
“용서하마. 고르케도 처음엔 날 악마라고 의심했지. 결국엔 나의 진심을 깨닫고 칭송했지만 말이야.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의심하는 법을 잊으면 안 된단다.”
-예!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케케륵케르 님!
“앞으로 나를 부를 때는 [자비로우시며 상냥하신 케케륵케르 님]이라고 부르거라.”
-네?
쏘니아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날 슬쩍 올려봤다. 눈빛이 띠꺼운 것이 꼭 ‘뭐지, 이 신종 등신은?’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주먹을 들었다.
“왜? 불만 있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비로우시며 상냥하신 케케륵케르 님!
“이제 좀 얘기를 나눌 준비가 되었구나.”
나는 비단 쿠션이 깔린 의자에 앉아 수박 맥주를 마셨다. 뭐야. 오이를 갈아서 섞은 맛이잖아. 게다가 묘하게 단맛 나고…. 왜 내 아이들은 이런 야리꾸리한 음료에 꽂힌 거람?
“쏘니아야. 나를 무섭게 여기지 마라. 나는 단지 너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을 뿐이란다.”
-예, 예에에 ….
“그래. 배우가 되고 싶다고? 내가 너를 배우로 만들어주마.”
-저, 정말인가요!?
“그럼. 정말이지. 이 케케륵케르는 너희한테 구라를 깐 적이 없어요. 하지만 너에게 힘을 빌려주기 전에 잠깐 사상검증부터 해야겠다.”
쏘니아가 눈을 껌뻑거렸다.
-사상검증이요…?
“근래에 거짓된 이야기가 범람하여 뭇 아이들을 현혹하더구나. 케케륵케르는 비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너에게 과연 세 번째 선지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묻노라니, 답하거라.”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염제는 어떤 인물인고?”
-어….
쏘니아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야… 개새끼죠? 가장 고전적인 혈화극에 따르면…. 케케륵케르께선 평범히 사시던 와중에 어느 날, 천하의 몹쓸놈을 만나 대오각성하게 되셨는데, 그놈 이름이 염제라. 요즘 염제를 좋은 쪽, 이른바 [사실은 착한 녀석이었다]의 기조에 써먹는 경우가 늘었는데, 전 별로 좋게 보지 않습니다. 세상엔 개새끼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고쳐 쓸 수 있을지 몰라도 개새끼는 고쳐 쓸 수가 없지요….
“쏘니아야.”
턱.
배우지망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 진짜 장래가 유망한 놈이구나!”
-네, 네에?
나는 활짝 웃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어허. 이 아이는 거목도 보통 거목이 아니라 세계수를 씹어먹을 인재일세!”
-아… 네….
“너희 요정족처럼 돈밖에 모르는 짠돌이들 중에 어찌 너같이 선한 아이가 났을꼬. 진흙탕에 핀 연꽃이요, 조개에 맺힌 흑진주라. 이야말로 아름다운 기연이다!”
-그, 그런가요? 헤헤. 그렇게 맞는 말만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쏘니아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었다. 우리 둘 사이에 종족과 시대를 뛰어넘어 훈훈한 우정이 피어났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이온지….
“간단하다. 잠깐 너의 몸뚱어리를 빌리마.”
내가 문명 상점에서 미리 봐둔 아이템이 한 개 있다.
+
[인물 빙의]랭크: A-
효과: 당신이 선택한 인물에게 빙의합니다. 빙의된 몸의 원래 주인은 정신체가 되어 당신 곁에 머무릅니다. 인물이 죽거나, 혹은 당신이 빙의 종료를 선언할 시, 정신체는 원래 몸으로 돌아갑니다!
비용: 2,000 종족 포인트
※단, 해당 인물이 빙의에 동의해야만 아이템을 쓸 수 있습니다.
+
동물 빙의 아이템의 상위호환이다.
-저, 저의 몸뚱어리를 빌리다니…. 헉. 설마?
“이놈아. 무슨 기분 나쁜 상상을 했는지 모르겠다만 난 라비엘 일편단심이야.”
-아…. 그랬지요. 참.
“그냥 단순히 너의 몸에 빙의하겠다는 말이다. 많이 머물지도 않으마. 딱 너를 정상급 배우로 만들어줄 때까지만 있을 거다. 그 전이라도 네가 나가라면 나갈 거고.”
쏘니아가 눈을 굴렸다.
-혹시 대가로 영혼을 바치거나 해야 합니까…?
“어이구, 네 영혼을 가져다가 어디 쓰겠냐. 내가 빙의한 이후에도 네 정신은 쭉 한구석에서 유지되고 있을 거다.”
-…….
“싫으면 말거라. 내가 빙의하겠다면 좋아해줄 지정족 많아.”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쏘니아는 허겁지겁 말했다.
-꼭 빙의해주십시오! 자비로우시고 상냥하신 케케륵케르 님! 무대에 올라 데뷔할 수만 있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래. 바로 그 정신이다! 사람이 원하는 게 있으면 우주 끝까지 쫓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뤄야지.”
나는 바로 아이템을 구매했다.
[‘인물 빙의’를 구입합니다.] [2000 종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당신이 가진 종족 포인트는 6702입니다.]“후회 없지?”
-예!
“불만 없지?”
-없습니다!
“좋아. 그럼 동의한 거로 간주하고 네 몸에 빙의한다.”
-드, 들어오십시오!
쏴아아악!
변기통 물 빠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눈을 질끈 감고, 떴다. 그러자 어느덧 이른 새벽이 되어버린 도시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헤에.”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곱상한 손.
태어나서 한 번도 검을 잡아본 적 없는지 손바닥이 하앴다.
“좀 어색하긴 한데…. 뭐, 처음 사자에 빙의했을 때보단 낫네. 금방 익숙해지겠다.”
-맙소사. 위대한 고양이시여.
머릿속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쏘니아의 목소리였다.
-진짜로 빙의됐잖아…?
“내가 말을 했냐 안 했냐. 너희한테 구라 깐 적 없다고.”
-죄, 죄송합니다. 솔직히 반쯤은 악마의 사기가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요새 악마한테 정신이 잡아먹혔다, 괴상하게 생긴 괴물을 보았다, 같은 유언비어가 하도 많아서….
나는 혈도로 오러를 돌려봤다. 원래 요정족이 오러에 민감한 걸까. 아니면 쏘니아가 의외로 재능이 있었던 걸까. 네다섯 번 오러를 운용하니 금세 손바닥 위로 불길이 피어올랐다.
-세, 세상에.
놀라는 걸 보니까 재능은 별로 없었나 보다.
-말도 안돼! 영혼의 불이 이렇게 쉽게….
-새벽부터 누가 서성거리냐?
끼이익, 하고 극장 문이 열렸다. 어제 쏘니아를 매몰차게 내쫓은 극단주가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아예 여기서 살고 있는지 자다 깨어난 얼굴이었다.
-우거? 뭐냐. 또 너인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극단주는 지긋지긋하단 표정을 지었다.
-심사는 끝났다. 다음 혈화극 배역도 다 정해졌다. 너한테 줄 역할은 없으니 제발 그만 좀 엉겨붙어라. 어차피 넌 요정족이니까 딱히 배우를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 거 아닌가.
“극단주님.”
나는 공손히 두 무릎을 꿇었다.
“저, 가출했습니다.”
-뭐?
“여기 달구지를 보십시오. 저희 가족이 그동안 먹여주고 입혀준 값이라며 청구한 빚문서입니다. 제가 죽어도 배우를 하고 죽겠다니까 아예 빚문서를 뒤집어 씌워서 내쫓았습니다. 이자까지 붙일 테니 갚으랍니다.”
-…….
“전 이제 정말로 뒤가 없습니다!”
나는 분연하게 외쳤다.
“쫄따구 역할이라도 좋습니다. 단역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제발 무대에만 올려주십시오! 저의 근육이 아니라 저의 연기를 봐주십시오! 케케륵케르와 고르케, 우부르카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단주님의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우거, 어쩌다 이런 요정족이 태어나서는…….
홉고블린 극단주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알겠다. 정말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하지만, 배역을 달라고 해서 줄 순 없다. 너의 빈약한 근육으로도 관객들을 홀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해라.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여기 이 자리에서 즉석으로 연기해봐라.
극단주는 땅바닥에 앉고 팔짱을 꼈다.
-특별히 심사의 기회를 한 번 더 허락해주는 거다. 이 이상의 특권은 없다.
오케이.
“무슨 연기를 할까요?”
-모든 배우에게는 등용문이라고 할 만한 역할이 있지. 이 연기를 얼마나 잘 하느냐가 바로 그 배우의 품격을 결정한다. 오래된 연기이긴 하지만, 매우 난이도가 높으며, 그만큼 배우의 자질을 잘 가려낸다.
“난이도가 높은 연기라면….”
극단주가 엄숙하게 말했다.
-[라비엘과 케케륵케르]. 케케륵케르가 라비엘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을 분해봐라.
어라.
-너무 어려운 걸 요구한다고 탓하지 마라. 말했다시피, 이미 너는 굉장한 특혜를 받고 있는 거다. 오직 지정족에게만 배우의 자격을 허락하는 극단주도 은근히 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거로 되겠습니까?”
-역시 초짜 티를 내는군.
극단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케케륵케르가 라비엘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원숙한 배우들도 소화해내기 어렵다. 케케륵케르에게 라비엘은 여신이며, 모든 언어를 총동원하여 이 여신의 아름다움을 찬양해야만 한다. 그것도 오직 진심으로. 지금 당장 사랑하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애절함으로! 결코 쉬운 연기가 아니다!
“음….”
-실력 없는 배우들은 울음과 눈물로 이 장면을 퉁치려 하지. 갈! 그런 게 아니다. 케케륵케르는 사랑을 애원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에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순수하게 여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라비엘의 영광을 더하고 싶을 뿐이다.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상대방에게 넘기는 것. 이건, 경험해보지 못한 자는 해낼 수가 없다.
그래…?
난 360시간 내내 쉬지 않고 우리 연인님 찬미할 자신이 있는데.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 아닌가.
“아무튼 라비엘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연기해보라 이 말이지요?”
-그렇다. 물론 너 같은 짠돌이 요정족이 사랑을 이해할 거 같진 않다만.
“알겠습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눈앞에 라비엘이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막 겨울잠에 들려는 은색 여우를 닮은 머리카락. 약간 잠을 덜 잤는지 가느다란 눈. 붉은 눈동자. ‘졸립구나.’ 속삭이는 숨결. ‘어디 한 번 내 잠을 깨워보거라, 공자여.’
당신이 존재함으로 인해 나는 세상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
“라비엘. 저의 영혼. 저의 영원한 붉음. 저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붉음이라는 색을 몰랐습니다. 알았다고 착각했지요. 그러나 당신의 눈, 그 눈. 당신의 눈을 옆에서 바라볼 때—.”
나는 입을 열었고.
정확히 2분 뒤, 극단주의 표정이 바뀌었다.
-말도 안 된다!
극단주가 벌떡 일어나서 경악했다.
-이, 이 혓바닥 놀림…. 이 말도 안 되는 사랑 고백…. 이, 필사적으로 애교를 떠는 지네닭과 같은 자태…. 모, 모든 것이 완벽하다! 마치, 케케륵케르 그 자체인 듯하지 않은가!?
맞아. 애야.
아빠 왔다.
18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