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187)
4.
지정족에겐 ‘만물의 단어’가 있다.
대략 1000년 전. 그야말로 희노애락을 망라하는 단어, 인생의 여린 행복부터 고뇐 상처까지 삼라만상을 아우르고 보살피는 언어가 탄생했다. 땅의 요정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치 않고 딱 한 마디짜리 낱말을 읊조리게 되었다.
-시발!
오늘은 여러 사람에게 시발한 날이었다.
-한창 좋았는데! 진짜 완전 좋은 참이었는데! 니미럴 시비럴 강아지 똥 같은 놈들!
외눈의 아리카가 걸쭉하게 욕설을 뽑아냈다.
다른 배우들도 격하게 성토했다.
-맞다. 어떻게 방해해도 꼭 절정부에서 방해할 수 있어!?
-손님들한테 환불해준다고 다가 아니야. 우리도 환불받아야 한다. 오늘 공연을 위해서 얼마나 쳐맞았냐. 덕분에 모든 노력이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선배들이 씩씩거렸다.
공연이 도중에 끊긴 것에 대한 짜증, 무엇보다 [몰입]이 끊어져버린 것에 대한 분노가 크겠지.
-아니. 거 우리도 신고를 받으면 움직여야 하는 처지라서….
홉고블린 치안대원이 땀을 뻘뻘 흘렸다.
치안대원 입장에서도 억울할 거다. 상상이나 했겠는가? 세상에 별에별 미친 신고가 즐비한다 해도 설마 [연극을 실제로 착각해서] 신고가 들어오다니.
-하, 한두 명이 아니다. 자그마치 다섯 명이 동시에 똑같은 신고를 해왔다.
심지어 신빙성까지 높은 신고였단다.
-방화에 무차별 살인 신고가 다섯 건이나 동시 접수됐는데 어떻게 출동을 안 하겠냐….
-우거? 그럼 우리가 잘못했다는 말이냐?
-여, 여러분이 좀만 덜 실감나게 연기를 했으면….
-그게 말이야 개소리야?
극단 이름이 개소리인 놈들한테 개소리라는 욕을 듣자 치안대원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음. 치안대 여러분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우리는 현재 치안소에 조사를 받으러 왔다.
무혐의가 밝혀졌으나 형식상으로나마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나.
치안소 건물 한 켠에 [사전의 차단은 사후의 심판보다 이롭다]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치안대 전용의 구호인 걸까?
“그래도 환불은 받겠습니다. 본전은 뽑아야죠. 저희도 뭐 흙만 먹으면서 장사할 순 없고. 치안대 여러분은 몰랐겠지만 저희 극단 사정이 참 안 좋아서, 어휴. 이번 공연까지 망하면 정말 간판 내리게 생겼습니다.”
-우거….
치안대원들이 울상을 지었다.
그들은 이미 나에 관해 조사를 끝냈다.
[정말로 불꽃을 닮은 오러를 피어낼 수 있는가]부터 시작해서 [오러로 극장을 전부 뒤엎을 만한 실력자인가], [오러를 이용해서 자유자재로 음악을 연주한다는 게 사실인가]까지.당연하지만 모든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치안소에서 직접 오러를 시연했거든.
나를 바라보는 대원들 눈빛엔 ‘어디서 이런 괴물이 뚝 떨어졌냐?’ 하는 경악이 섞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빙긋 웃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치안대 여러분 입장도 이해가 가요. 그러니까, 만일 저희 조건 하나만 들어주시면 아주 조금만 사과비를 받겠습니다.”
-조건…?
“여러분께 특별좌석표를 공짜로 드릴게요. 다음번 공연에 와주시죠.”
배우들이 머리를 휙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막내님! 그게 웬 개소리냐!
-다 뜯어먹어도 모자랄 판에 특별석을 공짜로 주다니!
-나도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막내님.
아이고.
이 선배들이 참 장사할 줄 몰라.
나는 방실방실 웃었다.
“어허.”
-…….
뚝.
불평불만을 쏟아내던 배우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슬금슬금 내 눈치를 봤다. 지난 일주일. 지옥의 특훈을 거치면서 선배들은 들이댈 타이밍과 사려야 될 타이밍을 터득한 것이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특별석 초대.”
치안대원들이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 자란 홉고블린들이 여리여리한 엘프한테 막내님! 막내님! 하고 부르는 모습이란 뭐랄까. 마피아 도련님과 똘마니들 같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평범한 광경은 절대 아니었다.
“저희 극단에선 치안대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정식으로요. 워낙 바쁘신 분들인 걸 알지만, 적어도 네다섯 분 정도는 시간을 내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사과비도 정말 최소한만 받을게요.”
-어째서….
치안대원은 좀 당황했다.
-아니, 내 말은. 우리야 그거로 괜찮다면 아주 좋다만. 왜 우리를 정식으로 초대하겠단 거냐?
나는 살짝 눈썹을 내렸다.
되도록 처량하게 보이도록.
“그게… 아까 극장에서 여러분이 손님들한테 욕 먹는 모습을 보니까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우거? 가슴이 아파?
“예. 여러분은 치안대의 의무를 다한 것뿐인데. 평소에도 시민들한테 여기저기서 욕을 먹고 계실 거란 생각이 드니까, 뭐라도 해드리고 싶어서…. 저희는 배우잖아요? 공연을 보고 위로를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라비엘한테 [비 맞은 강아지의 눈동자처럼 사뭇 마음의 가장자리를 간지럽히는구나…]라고 호평을 받은 필살기 표정이다. 머리쓰다듬기를 무려 네 번이나 받았다고.
과연 효과가 있어서, 홉고블린들은 감격했다.
-이럴 수가.
-이 요정족은 뭔가? 설마 천사인가?
-이런 젊은이가 연기하는 걸 막았다니. 우리 잘못이 크다!
너희 너무 사람을 쉽게 믿는다.
이 애비가 걱정이 많아지네.
험한 세상을 저런 성격으로 어찌 살아갈꼬.
-좀비야… 너 인마….
‘네? 왜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너한테 뭔 말을 하겠냐.
배후령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저 양반이 왜 저러지? 귀신도 노망이 드나?
아무튼 치안대원들은 기쁘게 초대를 승낙했다. 스케줄 때문에 많은 인원이 올 수는 없을지라도 꼭 성의에 보답하겠다며.
치안소를 나와 극장으로 되돌아가는 길.
-몰랐다. 막내님이 그런 기특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외팔의 유마르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연기하던 도중에 끌려나왔다. 그래서 옷차림도 연극용 그대로였다. 허리에 헝겊만 두르고 온몸에 새까만 문신을 한 채 걸어가자, 길거리에서 행인들이 신기한 듯 우리를 힐긋거렸다.
-맞다. 조금 의외였다.
-여지껏 나는 막내님이 케케륵케르의 위장에서 나온 악마인 줄 알았지 뭐냐.
-우린 공연이 중단돼서 화만 났는데…. 막내님을 보고 부끄러워졌다.
쯔쯧.
나는 혀를 찼다.
“정말 모르시겠어요? 선배님들. 우린 엄청난 보상을 받아왔어요.”
– 우고르?
“까짓거 돈이야 공연 몇 번 더해서 벌면 그만이죠. 바로 내일이라도 공연 한 번 더 돌리면 되니까요. 하지만, 방금 저희는 [떡밥]을 만들어온 겁니다.”
세 명의 선배가 나란히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냐? 막내님?
뭐야. 얘네. 귀엽잖아.
역시 지정족은 우주에서 최강 귀여운 종족이란 걸 되새기며, 나는 담담히 설명했다.
“저희는 실력이 있어요. 공연할 작품도 있고요. 이제 우리 극단에 필요한 건 세간의 관심뿐이죠. 그리고 아마 내일이 되면, 오늘 벌어졌던 일을 도시 사람들 전부가 떠들어댈 겁니다.”
「치안대가 불이 났단 신고를 받고 허겁지겁 출동했다더라.」
「그런데 알고 보니 연극에 불과했다더라.」
「오러가 너무 생생해서 관객들이 진짜 불이 난 줄 알고 신고한 것이다.」
“이게 바로 떡밥이에요.”
말하자면 이야깃거리.
“지정족 사람들은 전부 잠재적인 고객층입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혈화극을 보니까요. [오러가 지나치게 생생해서 불이 난 줄 착각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아무래도 흥미가 동하지 않겠어요?”
나는 여기에 마지막 떡밥을 얹혔다.
“심지어 피해를 입은 우리 극단이 치안대원을 특별좌석에 초대했다는 소문까지 돌면 어떻게 될까요?”
-우고르….
-과연.
배우들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관객들이 더 몰려온다는 얘기인가?
“당연하죠.”
그뿐만이 아니다.
“게다가 전 요정족이잖아요. 선배님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만, 만일 제가 이 기세로 쭉 성공가도를 달리면 내심 질투하는 지정족들이 생길 거예요. 분명히.”
혈화극은 지정족 고유의 문화다.
그런데 생뚱맞은 엘프 신인이 나타나서 인기를 차지해버린다?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긴 어려울 거다.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서 수작을 부릴 텐데 미리 치안대한테 잘 보여둬야죠. 우리도 연기를 팔아먹는 장사꾼이에요. 장사꾼이 치안대원들이랑 사이가 좋아서 해로울 게 없습니다.”
-…….
“혹시 알아요? 나중에 사고 터졌을 때 은근히 저희 편 들어줄지. 최소한 말도 안 되는 신고는 이제부터 상큼히 무시해주겠죠.”
-굉장하다….
선배들이 감탄했다.
-가끔 보면 막내님이 요정족처럼 안 보일 때가 있지만. 저런 잔머리를 보면 확실히 요정족이 맞다.
-막내님은 지정족의 심장과 요정족의 머리를 갖춘 인재다.
-여기서 근육만 좀 있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너희들 근육은 줘도 안 받는단다.
라비엘이 갑자기 짐승남에 취향을 눈뜨면 모를까.
‘공자여.’ 라비엘이 귓가에 속삭여주는 거다. ‘살이 좀 더 오르면 좋겠구나.’ 살며시. ‘조금만 더.’ 소곤거리면서. ‘그대의 팔뚝이 지금보다 두꺼워진 모습을 보고 싶다.’
음.
당장 탑 1층에서 제일 잘 나가는 트레이너한테 억금을 줘서라도 특훈을 받아야지. 뭐? 내장형 근육? 개소리군. 갖다 버려라.
-막내님이 헤벌쭉하고 있다….
-가끔 아무런 말도 없이 헤벌레 웃더라.
-뭔 생각을 할 때 저러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께름칙하다….
-무섭다… . 기분 나빠….
시끄럽구나.
너희들이 사랑을 알겠니?
사랑을 알더라도 라비엘은 모를 테니 사실상 사랑도 모르는 거란다. 아가들아.
-저기 있다!
그때였다.
-아!
-배우들 돌아왔어!
극장 앞에 꽤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관중 한 명이 손가락을 치켜들어 우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대문가에서 서성거리던 홉고블린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쿵! 쿵!
언덕만한 덩치의 홉고블린 수십 명이 동시에 몰렸다.
-뭐, 뭐냐?
선배들이 쫄았다.
-무슨 난리 …….
-다음 공연은 언제인가!
홉고블린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우리는 돈 주고 표를 샀다! 부당하게 관람을 방해받은 피해자다!
-그렇다!
-다음 공연에서 우선적으로 좌석에 앉을 권리가 있다!
-표! 표를 줘라!
가히 아귀 떼와 같은 성화.
선배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우거, 잠깐…!
관중의 틈바구니에서 누군가가 낑낑거리며 나왔다. 극단주였다. 우리가 돌아오기 전까지 손님들한테 시달렸는지 그 사이 주름이 더 깊어졌다.
-헉. 이분들이, 환불을 요청하면 그, 허억. 다음에 꼭 돌려드리겠다고 하는데도….
-환불 따윈 필요없다!
홉고블린들이 소리쳤다.
-그래! 환불 같은 걸 받으려는 게 아니다!
-다음 공연 표만 주면 된다! 있을 거 아니냐! 공연!
-특별좌석은 일반석의 여섯 배 가격이라고 들었다. 지금 좌석을 더 좋게 올리는 것도 가능하냐? 당연히 그만큼 돈을 더 내겠다.
-남은 특별석이 몇 석인지만 알려줘라!
극단주는 진땀을 뺐다.
-아, 아직 일정도 안 잡혔다고 말을 하는데도 막무가내다. 나로선 도저히….
현재 극단의 실권은 내 손에 있다.
무턱대고 다음 공연을 약속하지 않고 지금까지 손님들을 상대한 것만으로도, 극단주는 정말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이다.
“여러분.”
나는 환히 웃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극단 개소리의 공연을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밌게 보셨습니까?”
-재미가 문제가 아니다! 우고르!
-그런 오러는 처음 봤다. 하지만 오러만 대단했던 게 아니라….
-아무튼 굉장했다! 불처럼 격렬했다! 뭔가 있었다!
관객들이 흥분했다.
나는 감사하다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지만, 선배님들 반응은 달랐다.
좀 더 극적이었다.
-우리 연기가….
-…….
그렇다.
외눈의 아리카도, 외팔의 유마르도, 외귀의 사쿰도, 아마 이렇게 좋은 관심을 받아본 적은 처음일 거다.
마치 처음으로 산타의 선물을 눈앞에 둔 어린애처럼 다들 어쩔 줄 몰라했다.
“다음 연극은 아직 일정을 잡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화검난무를 또 공연할 계획은 없었습니다.”
-말도 안 된다!
-이건 치안대의 폭거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칭찬을 들으니, 설령 계획이 없었다 하더라도 꼭 보답을 드리고 싶어지는군요.”
나는 영업용 미소(흑룡주 作)를 지었다.
“다음주 토요일에 화검난무를 다시 한 번 공연하겠습니다!”
-오오!
“어디 그뿐인가! 극단 개소리는 언제나 관객 여러분을 위합니다! 일반 손님에게 개방하지 않고, 오늘 관람했던 분들에게만 입장권을 드리지요! 오직 여러분만을 위한 특별공연! 비밀공연입니다!”
클라이맥스에서 혈화극을 놓쳐버린 관객들이 열광했다.
“열화와 같은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자, 문신을 원하는 여러분은 차례대로 와주십시오. 저희가 직접 발라드리겠습니다.”
지정족에게도 사인 문화가 있다.
다만 종이에 사인하는 게 아니라 맨살에 문양을 새긴다.
배우들이 각자의 시그니쳐 무늬를, 부드러운 진흙으로 그려주는 것.
그래서 인기 배우가 출연하는 극장엔 똑같은 문양을 새긴 팬들이 몰려 있곤 한다.
“단!”
나는 헤실방실 웃었다.
“저희한테 무늬를 받으려면 조건이 하나 필요합니다.”
-그게 뭔가?
“무늬를 받기 전에 염제 개새끼를 외쳐주십쇼.”
관객들이 웃었다.
아마도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난 진심이다.
-염제 개새끼. 이러면 되냐?
“예, 감사합니다.”
-염제 개새끼!
“감사합니다.”
-염제 시발놈!
“아이고. 뭐 그런 말씀까지야. 손님 참 멋지시네요.”
관객들은 배우인 나와 농담을 주고받는단 생각에 실실 웃었다. 그리고 모두 만족한 얼굴로 어깨나 가슴, 등짝에 무늬를 받고 돌아갔다.
참고로 내가 그려준 무늬는 개.
극단 개소리를 홍보하는 김에 염제가 개새끼란 사실까지 각인시킨, 참으로 일타쌍피의 문양이 아닐 수 없다.
-좀비야… 너 인마….
‘네? 왜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미친놈한테 뭔 말을 하겠냐.
배후령이 또 한숨을 쉬었다.
이 귀신이 노망이 들었네. 확실하네. 불쌍하네.
[지정족 사이에서 이단 종파의 세력이 약해집니다!]머릿속에서 탑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정족 사이에서 ‘고대로의 회귀’가 인기를 얻기 시작합니다.] [지정족들에게 르네상스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퀘스트 ‘연극 전국시대: 고전의 위기’가 진척됩니다.] [현재 이단침식율은 86%입니다.]자아.
탑에서도 내 움직임을 응원해주려는 모양이다.
나는 극단주와 선배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 대박 극단이 될 준비는 되셨어요?”
안 됐으면 지금이라도 하렴.
이 애비가 뭘 시작하면 끝까지 달리는 사람이거든.
189화.